22. 도현의 비행기
(22/92)
22. 도현의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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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현의 비행기
2022.06.16.
“어, 어디 가? 누군데 그래? 나도 같이 가!”
영숙의 시선 끝에서 지화자는 앞에 있는 전각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치장한, 나이 든 여자가 한의원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수행기사인 듯 보이는 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저게 누구더라?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연예인은 아니고.’
영숙은 눈을 크게 뜨고 지화자를 따라 다가갈수록 그게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어머어머, 삼중 그룹 회장 부인, 강옥희잖아?’
이내 지화자가 강옥희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뒤에서 다가오던 영숙은 삐쭉 비소를 머금었다.
‘뭐야, 지화자. 처음 뵙는다고? 강옥희랑 차도 같이 마시는 사이라더니, 순 뻥이었구만,’
과연 강 여사는 지화자를 전혀 모르는 사람 대하듯 물었다.
“누구?”
“저는 지화자라고 해요. 여사님 알아 뵙고 인사드리고 싶어서 달려왔어요. 저희 남편은 영우 물산이라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강옥희는 일순 현서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죽 센터의 막무가내 회원이로구나.
강 여사는 모른 척 물었다.
“어디? 누구네 계열이야?”
“저희는 영우라고, 계열은 아니고 하나만 있는 조그만 물산입니다.”
“영우? 뭐 취급하는 구멍가게야?”
지화자는 순간 주춤거렸지만 차마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고 성의껏 대답했다.
“하하,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 그래도 올해는 좀 더 확장하고 있는 중이에요.”
“어머나, 세상에!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그때 순식간에 다가온 영숙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화자가 눈치껏 얼른 소개를 했다.
“아, 이쪽은 진성 채현우 회장님 안주인이세요. 한영숙 여사님.”
강옥희는 그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숙을 바라보았다.
‘진성 한영숙? 현서 전 시어미 아니야? 그 미친 여편네…….’
강옥희 여사는 시선을 영숙을 향해 빤히 던지더니 천연덕스레 입을 뗐다.
“아, 진성? 진성은 알지.”
영숙은 강옥희 여사가 영우는 모르는 것 같았어도 역시나 진성은 알아보자 의기양양해져선 어깨를 폈다.
“호호, 알아봐 주셔서 영광이에요.”
“진성 소문은 많이 들었지. 그 집 회장님 부인 소문 많이 들었는데, 이쪽이셨구만.”
영숙은 지인들에게 듣기로 항간에선 자신의 미모가 유명하다는 소문이 돌았다기에 그걸 아시는 건가 문득 궁금했다. 강 여사가 알아봐 주니 괜히 뿌듯해져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제가 한영숙입니다.”
“채 회장 전처 죽고 나서 들어왔다는 그 주책 바가……. 아하하. 아무튼 여러 가지로 유명하던데 반가워.”
그러나 강 여사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실수인 척 흘려 말했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 별로 좋은 소문은 아니었지만.”
영숙의 미소가 썩어갔다.
‘뭐야? 저 할망구가 누구를 함부로 지껄이고 있어.’
영숙의 속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지화자의 말로는 이 양반이 이 송화궁의 끗발이라니까 참아야만 될 것 같아 억지웃음을 지었다.
“다 헛소문이에요. 제가 억울한 게 많지만 참을 수밖에요.”
영숙은 변명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근데 자네들, 나 누군지는 알고 인사하는 거야?”
강 여사가 문득 눈앞의 여자들에게 물었다.
“그럼요. 삼중 강 여사님을 모르면 정재계에선 간첩이죠.”
눈치 빠르게 지 여사가 선수 치며 대답했다. 영숙도 지지 않으려는 듯 치고 들어갔다.
“제가 평소에도 강옥희 여사님을 멘토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렇게 만나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래? 내 어떤 점을 멘토로 생각하나?”
강여사는 영숙의 아부성 거짓말에 코웃음이 나왔지만 태연하게 물었다.
“제가 전에 강 여사님 인터뷰 보고 감명받았었잖아요. 사모님의 삶의 가치관이나 패션이 인상적이어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답니다!”
“그래? 흠, 그런데 지금 자네 패션은 대체 왜 이런가?”
“예?”
영숙은 당황하여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내 스타일이랑은 딴판인데? 흐음……. 내 패션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 거야?”
강 여사는 휘황찬란한 영숙의 패션을 영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하하, 제가 아직 배울 부분이 많네요.”
“그래? 그럼 언제 한번 내가 패션에 대해 제대로 알려줄게. 지금은 시간이 없고, 나중에. 뭐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 연락처나 주고받자고.”
당황했던 영숙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어머, 저희야 너어무 감사하죠!”
속으로 횡재했다고 생각한 영숙은 강 여사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아부를 건넸다.
‘와, 봉 잡은 거네! 이 노인네랑 친해져야 하는 거지. 그럼 여기 가입은 문제도 안 되겠는걸?’
강 여사의 전화기를 건네받으며 연락처를 주고받던 영숙과 지화자는 연신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강 여사가 떠난 뒤 영숙은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허드렛일을 하며 뒷골목을 전전하던 그 시절의 자신의 과거가 새삼 아련히 떠올랐다.
‘나한테 어찌 이런 날이 왔지? 이젠 삼중 사모님 개인 연락처까지.’
간밤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용꿈을 꾼 게 확실했다.
송화궁에 회원이 되어 삼중그룹 큰 사모님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고개가 절로 꼿꼿하게 쳐들어 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송화궁 따위는 시작일 뿐. 이렇게 내 격을 올리는 거지.’
김칫국을 한 사발 마시던 영숙은 상상 속에선 강옥희 여사와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있었다.
***
비록 송화궁의 고급화 전략이 인기가 있고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그럴수록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정말 섬세하고 정밀한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만큼 하나하나 일일이 신경을 써야만 하는 일이었다.
루카스는 우리만의 특별한 화장품이 아닌 대중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제품 라인을 출시하여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렇기에 송화궁에 대해서는 온전히 현서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현서가 잠시 짬을 내어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는데, 전화가 울렸다.
“강 여사님, 안녕하셨어요?”
-그래, 현서야. 밥은 먹었니?
“이제 먹으려고요.”
-시간이 몇 시인데 이제 먹어. 건강 챙기며 해야지.
“하하, 그러게요.”
현서는 어색한 웃음을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다른 게 아니고, 나 요전에 너의 전 시어머니 만났어.
“정말요? 어떻게요?”
현서의 얼굴에 웃음이 싹 지워졌다. 한영숙이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존재였다.
-송화궁에 들렀더라. 그 영우물산인지 거기 여편네하고 같이.
“음, 회원이 아닌데 지 여사님 초대로 왔나 보네요.”
-그래? 회원이 아니었어? 여편네들이 와서 인사하는데 진성 안주인이라고 하는 거 보고 알아봤다. 내가 전화번호도 받아 놨어.
“저희 시모가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분명 여사님께 달라붙으려고 할 텐데, 피해를 드릴까 걱정이네요.”
현서는 영숙의 주책없는 성품을 잘 알기에 걱정이 되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지가 나한테 와서 멱살을 잡을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야. 제까짓 게.
“저……. 그럼 여사님. 혹시라도 한영숙 씨가 송화궁에 들어오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도와준다고 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도 괜찮겠니? 그 여편네 보니까 괘씸해서.
“네. 괜찮아요. 이제 예전이랑은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까요.”
-그래, 알았다. 내 조만간 들르마.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
“예, 제가 한번 모실게요. 들어가세요.”
강 여사와 통화를 끝낸 현서는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벌써 방문을 했다 이 말이지? 역시 소문이란 게 참 빠르네.’
부잣집 사모님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다 보면 언제고 그 귀에 들어갈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사업을 위해 소문이 퍼지길 바라면서 동시에 내심 이때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여기서 마주치는 상상 또한 많이 해보았지만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다가와 있었다.
“역시 유난스러운 데는 일가견이 있는 양반이라니까…….”
막상 영숙이 여기 발을 들였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리지만, 가까이 두고 구경해보기로 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라고 안 새겠는가.
***
도현이를 봐주는 시터가 전화를 걸었다. 도현이는 아직 어린이집에 있을 시간인데.
-도현이 엄마…….
왜인지 시터의 목소리가 쥐어짜는 듯 신음처럼 들렸다.
“네네.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지금 응급실이야. 위경련이 일어나서…….
“세상에! 어떡해요!”
놀라서 입이 벌어진 현서의 귓가에 시터의 힘겨운 목소리가 사정 설명을 했다.
-너무 미안한데…… 내가 도현이 끝나는 시간에 못 맞출 것 같아서 어린이집에서 좀 더 기다리게 해도 될지 물어보려고……. 수액 다 맞는 대로 얼른 택시 타고 가볼게.
“아이쿠, 이모님. 오늘은 제가 도현이 데리러 갈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병원에서 천천히 치료받으시고 오늘은 쉬세요.”
-미안해서 어째…….
“걱정 마세요. 많이 아프신 거 같은데 어서 쉬세요!”
시터가 미안해하며 전화를 끊었고 현서는 바로 다른 곳에 전화를 돌렸다.
-응, 현서.
“유 대표님, 어쩌지요. 아무래도 오늘 5시 일정은 같이 못 할 거 같아. SH 코스메틱 미팅 건 말이야.”
현서는 도현의 상황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직 어린 도현이 어린이집에 혼자만 늦게까지 있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 현서는 루카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래? 알았어. 어차피 오늘 미팅은 나랑 연구팀장이 진행하는 거니까. 그 관련해선 현서 안목도 워낙 뛰어나니까 같이 만나곤 싶었지만 할 수 없지, 뭐. 다음 미팅 때 함께하자.
“고마워, 루카스.”
.
.
.
그러나 4시 30분 정도 되었을 무렵, 루카스는 입구에서 현서를 발견했다.
“어? 왜 다시 왔어?”
현서의 품에는 도현이 안겨 있었다. 현서는 겸연쩍은 웃음을 보이며 대꾸해주었다.
“일할 게 많아서 집에서 좀 하려는데 아까 정신없어서 노트북을 깜빡했어. 금방 가지고 다시 나갈 거야.”
“그래, 그럼 가지고 와. 도현이는 잠깐 여기서 놀고 있자.”
도현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루카스는 현서의 품에서 도현을 빼앗아 안았다.
“유 대표님 곧 미팅 있잖아.”
“아직 시간 좀 남았어.”
“그럼 도현이 루카스 삼촌이랑 놀고 있을래? 엄마 금방 다녀올게.”
“응! 쪼아!”
“그럼 부탁해.”
현서가 원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루카스는 도현을 안고 넓은 후원의 중정으로 걸어왔다.
“우리 도현이 오늘 재밌게 놀았어?”
“웅! 나 선생임이랑 비행기 만들어쪄.”
도현은 손에 쥐었던 노란 종이비행기를 들어 루카스에게 보여주었다.
“와아, 예쁘게 잘 만들었네. 여기서 날려볼까?”
“응, 삼촌 아빠가 날려 봐.”
“그럴까?”
루카스는 도현이 건네주는 종이비행기를 자연스레 받으며 넌지시 주문을 넣었다.
“근데 도현아. 엄마 없을 때는 그냥 아빠라고 불러주면 안 돼?”
엄마는 삼촌이라 부르라 하고 루카스는 아빠라고 부르라 하니 도현은 삼촌 아빠라는 중립적이고도 이상한 호칭을 하고 있었다.
“알아쪄, 아빠.”
도현은 무구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루카스의 바람대로 불러주었다. 루카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져갔다.
“요 귀여운 녀석.”
도현의 얇고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일어선 루카스는 노란색 종이비행기를 중정 가운데를 향해 날렸다.
“슈융!”
도현은 신이 나서 비행기를 따라 뛰었다.
저만치 떨어진 작은 비행기를 주워든 도현은 다시 루카스에게 쪼르르 돌아왔다.
“이제 도현이가 날려볼까?”
“응.”
그런데 막 비행기를 날리려다 말고 도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나 목말라.”
“어, 그래. 바로 저기에 물 있네. 가져올게. 우리 도현이 잠깐만 비행기 날리고 있어.”
루카는 마침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비치된 정수기로 걸어갔고 도현은 너른 중정에서 비행기를 날렸다.
“슈웅! 날아라!”
비행기는 꼬불꼬불 날아갔다. 그러다 누군가의 다리에 톡 부딪힌 뒤 바닥에 떨어졌다.
그 다리가 멈추어 섰고, 노란 비행기를 눈으로 쫓으며 달리던 도현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시선을 드는 도현의 고개가 까마득한 위를 보느라 꺾일 듯 젖혀졌다.
키가 큰 남자가 도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