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높아진 담장
(19/92)
19. 높아진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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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높아진 담장
2022.06.06.
“어제 저희 친정엄마도 그 얘기 하시더라고요.”
“응? 사부인도 알아? 혹시 거기 회원이시라니? 그럼 나도 좀 끼워달라고 해봐라!”
영숙은 금세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혜미에게 물었다.
“아니요. 가입하고 싶어도 조건이 아주 까다롭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은 인원이 다 차서 티오가 생기기 전에는 안 받는다는 소리도 있어요.”
“뭐어? 무슨 호랑이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고 있어. 거기는 장사하는 데 아니래?”
“그래도 서비스가 다른가 봐요,”
“장사꾼이 손님을 받아야지, 무슨. 인원이 다 차, 차기는. 그렇다고 손님을 안 받으면 망하는 거지. 다 상술이야.”
김이 새버린 영숙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정계, 재계 등 알려진 사모님들 상당수가 회원일걸요. 거기 회원들끼리 사교모임도 자주 갖는다나 봐요.”
“하긴 지 여사가 거기서 삼중 그룹 큰 사모님을 사귀었다고 자랑하더라고. 진짠가 보네.”
“거기 들어가서 인맥 쌓으면 따끈따끈한 고급 정보들도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거 같아요.”
영숙은 그 말에 눈을 빛내며 군침을 삼켰다. 들을수록 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 근데 너네 친정에는 줄이 없단 말이지?”
“아……. 네.”
“네 엄마 발 넓다고 자랑하더니.”
‘볼수록 별 볼 일 없네. 순 잘난 척만 한 거네.’
사돈 덕 좀 보나 했다가 김이 새버렸지만 한편으로는 항상 고상한 척,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던 사돈이 못 들어갔다니까 어쩐지 고소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 엄마 가입하시게 되면 어머니 이야기도 해보시라고 할게요.”
“아유,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데 혜미가 잠시 머뭇대다 영숙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어머니, 들어가시게 되면 저도 같이 가요.”
내 코가 석 잔데? 그러나 못 한다고 하자니 체면이 구겨지니 영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만 믿어.”
“우와, 어머니, 감사해요. 꼭 어머니만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혜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간절히 부탁하듯 영숙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영숙은 눈을 빛내는 혜미를 보며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입가를 애써 올려 웃었다.
***
오늘은 모처럼 이른 퇴근을 하게 되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서초의 아파트에 가도 홀로 좋을 게 없는 시간이라 이른 퇴근도 반가울 게 전혀 없었다.
차라리 정신없이 일에 파묻히는 게 나았다.
해도 길어진 계절이라 밖도 밝았다. 도하는 충동적으로 차를 몰아 마음 닿는 대로 흘러갔다.
몇 달 만에 와본 아내의 친정 동네였다. 가끔씩 마음이 답답할 때면 이렇게 퇴근길에 차를 몰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곤 하였다.
아무도 없는 집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에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에 때때로 절로 이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어쩌질 못했다.
비록 휑하니 빈 집 밖의 정취를 보면 쓸쓸할 기분만 더해질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발길을 끊지 못했다.
익숙한 골목에 들어서는데 오늘따라 벅찬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익숙했던 자리에 다가갈수록 위화감이 들었다.
도하는 왼쪽 눈썹을 흘끗 올렸다. 집이 달라져 있었다.
그사이 집이 수리되어 있었다. 대문도 바뀌었고 담장도 높아져 있었다.
아기자기한 꽃이 핀 마당이 내려다보이던 낮은 담벼락은 키가 커져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현서가 돌아온 건가?’
도하는 차를 앞에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그러나 높은 담장 안에서는 아이와 젊은 남자의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있었다.
‘현서가 아닌 건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이사를 온 건가 보다. 남에게 집을 팔아버린 건가.
이현서가 이 집을 넘겼다면 매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들리는 목소리엔 현서가 없었다.
마당 안에서는 젊은 남자와 어린아이가 깔깔거리며 행복하게 웃는 소리가 연신 들리고 있었다.
“도현아, 아빠 좋지?”
“응, 조아! 아빠 조아!”
“하하.”
젊은 남자가 아이에게 아빠가 좋냐고 물으며 웃는 소리가 묘하게 가슴을 울렸다.
현서의 자취가 남아 있는 집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현서가 곁에 있었으면 언제가 저에게도 저런 풍경이 찾아와주었을까.
부러움이 가슴에 가득 차 누구인지도 모르는 저 남자에게 괜히 시샘이 났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항상 옆에 있어 익숙함에 귀한 줄 모르다 이제 와서 찾아 헤매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행복한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온 동네로 널리 퍼지고 있었다.
한동안 고요했던 집은 다시금 행복을 찾은 것처럼 따뜻해 보였다.
역시 이곳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곳이었나 보다. 새로 이사를 온 사람조차 저렇게 행복하게 웃는 걸 보니.
“이제 나는 올 필요도 없겠네…….”
낮은 울타리를 없애고 높은 담장을 쌓아 안을 보호하는 듯한 느낌을 준 집이 왠지 도하를 거부하는 듯했다.
남의 사는 소리나 듣는 스스로가 문득 우스워졌다. 뭐하고 있는 거지.
그는 다시 차장을 닫고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 정말 갈 곳을 잃어버렸구나.
마음이 한없이 황량해진 그는 꼭 고향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
영숙은 안달이 났다. 요즘 들어 머리숱도 점점 줄어만 가고 얼굴 주름살도 깊어만 간다.
아무리 여기저기 다녀 봐도 나이를 먹는 건 막을 수가 없나 보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예쁘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었는데, 세월이 참 야속하다.
지화자 여사가 다니는 무슨 궁인지 뭔지 하는 데는 한방, 양방 의사들도 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건강과 미용을 함께 챙겨준다고 하는데 도저히 가입할 방법이 없었다.
요즘 거기서 관리를 받고 지 여사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몸까지 건강해지니 기운이 넘치는지 남편과도 신혼을 맞은 것 같단다.
그런데 거기가 좋다고 자랑만 하지, 데리고 가지를 않는다.
또 삼중 그룹하면 우리나라 손가락에 꼽히는 기업인데 그 그룹 큰 사모님, 강옥희하고도 거기서 만나 차를 같이 마신 적이 있단다.
강옥희랑 친해지기까지 했다며 자랑질을 해대니 영숙은 안달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집에 놀러 온 지 여사를 만나면서는 작정하고 덤볐다.
“지 여사, 내가 자기 정말 좋아하는 거 알지?”
치사한 표정을 감춘 영숙은 지 여사에게 아부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알지. 그런데 웬일로 우리 한 여사가 그런 달콤한 말을 할까?”
“아니, 오늘따라 우리 지 여사가 너무 예뻐 보여서. 피부가 어쩜 다시 아기로 돌아가나 봐. 한 10년은 젊어 보이네.”
이건 아부가 아니다. 정말 피부도 좋아졌고 젊어 보였다. 무엇보다 고질적으로 아팠던 어깨가 안 아프다면서 항상 찡그리던 표정이 환하게 피었다.
요즘 우리 나이에는 누워도 아파서 오래 못 누워 있는 처지인데, 잘한다는 데는 다 다녀도 못 고쳤던 고질병을 고쳤으니 입만 열면 자랑하는 게 이해가 됐다.
예뻐져, 건강해져, 누구라도 자랑할 텐데 문제는 안 데리고 간다는 거였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 10년 젊어진 거야. 거기만 가면 갈 때마다 1년씩 젊어져 오는 기분이야. 호호호.”
“아이구, 지 여사. 그러니까 자랑만 하지 말고 나도 좀 데리고 가줘, 내가 크게 한턱 쏠게.”
“나도 그러고 싶은데. 거기가 아무나 안 받아서…….”
“지 여사.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내가 선물해줄게. 아, 그리고 오늘 저녁 먹고 갈 거지? 내가 특별한 데 알게 되었는데, 거기 가자. 좋은 밥 살게.”
“아니, 디톡스 해야 된다고 밖에서 식사하지 말고 가능하면 정해준 방식으로 식사하라고 했어. 한 여사나 많이 먹어.”
잘난 척하는 말투로 야멸차게 거절하는 지 여사가 얄밉지만, 영숙은 참아야 했다.
‘한 번만 소개받으면 내가 너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할 텐데.’
삼중그룹 큰 사모님도 사귀고 건강해지고 예뻐지고. 영숙은 상상만 해도 좋았다.
“지 여사. 한 번만 소개해줘, 응? 부탁할게!”
영숙은 지 여사에게 통 사정을 했다.
“아이구, 참. 그러면 말이지…….”
난색을 표하던 지 여사는 끝내 태도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
168센티의 늘씬한 키에 자그마한 얼굴을 가진 여성이 보기에도 호화로운 매 센터 라운지에 들어섰다.
호리호리한 몸에 세련되게 감기는 정장을 입고 있던 그녀는 동그란 눈을 반쯤 접어 웃으며 다가왔다.
“사모님, 안녕하셨어요?”
그녀는 고운 자태로 허리를 숙이며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현서야.”
라운지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느른하게 차를 즐기고 있던 강옥희 여사가 반갑게 그 인사를 받았다. 그는 국내 3대 기업 중 하나인 삼중그룹의 안주인이었다.
“아니지, 여기선 이 원장이라고 불러줘야 하지, 참.”
“편하게 불러주세요. 편히 이름 불러주시면 저야 기쁘죠.”
“아유, 성격도 좋아. 오랜만에 온 거라 가기 전에 얼굴이나 보려고 불렀어.”
“저도 뵙고 싶었는데 시간 내서 불러주시니까 너무 좋아요.”
현서는 예의 바르면서도 특유의 다정한 어조로 강 여사를 대했다. 강옥희는 평소 불같은 성정으로 유명했지만 현서에게는 매우 인자했다.
“그 할망구는 잘 지내지? 지금은 어디에 있어?”
“박 회장님 지금은 뉴욕에 계세요.”
“일 좀 줄이라고 해. 건강 망치지 말고. 어른이 경험해서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으라고 전해.”
“아직도 50대처럼 정정하게 일하고 계셔요.”
“내가 연락해서 또 잔소리 좀 해놔야지. 나도 바빠서 그레이스랑 연락한 지도 좀 됐네.”
“특히 더 반가워하실 거예요. 요즘 루카스도 한국에 와 있어서 외로우시대요.”
“그래. 생각난 김에 오늘 뉴욕 시간에 맞춰 전화나 해봐야겠다.”
잠잠한 미소와 함께 현서를 바라보던 강옥희 여사는 따뜻한 손으로 현서의 손을 잡고 손등을 두드렸다.
“그나저나 우리 이 원장은 요즘 점점 더 예뻐지네.”
“저 역시 송화궁의 프로그램 덕분이죠.”
“그래, 송화궁 서비스가 참 좋긴 해. 근데 요즘 죽 센터가 시끄러운 거 같아. 진상들이 좀 들어온 모양이지?”
현서는 부정하지 않고 씩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실은, 여러모로 죽 센터 회원님들이 매 센터 회원님들만큼이나 어렵네요.”
“하여간 보면 꼭 저렴한 돈 내는 것들 중에 더 진상이 많다니까. 전에도 보니 누가 약속도 없이 무작정 이 원장 만나게 해 달라고 큰 소리로 고집부리던데.”
“아아, 영우 물산 사모님이실 거예요.”
현서가 알 만하다는 듯이 웃자 강옥희 여사가 고개를 기울이며 곱씹었다.
“영우 물산? 어디지? 하여간 아무나 들이지 마. 여기 못 들어 와서 환장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내가 또 소개시켜줘?”
강 여사의 말에 현서는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시다시피 사모님께서 좋게 입소문 나게 힘 써주신 덕분에 정원이 다 찼어요. 다음에 또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