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후회
(16/92)
16.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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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후회
2022.05.26.
도하는 덧없는 눈동자를 움직여 현서가 떠난 빈 집을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주옥같았다.
유년 시절 엄마를 따라 정착한 이후 숱하게 지나던 골목길. 그 길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열세 살이 된 소년에게 집보다 더 집 같았던 곳이었다. 돌아보면 거기서 있었던 모든 일이 찬란했다.
채도하가 아닌 한도하를 보듬어 주던 혜수 이모와, 그리고 눈웃음이 예뻤던 열 살배기 여자아이가 사는 집.
어느 순간부터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일부러 걸음을 더디 했던 것 같다.
그 집 대문은 종종 활짝 열려 있었다. 열세 살 소년에게 기꺼이 활짝 열려 있던 주인의 마음처럼.
“도하야!”
문밖으로 책가방을 멘 소년이 보일 때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던 따스한 분이었다.
눈에 보이면 언제나 창밖으로 이름을 불러주셨다.
“우리 도하 이제 오니?”
“안녕하세요.”
처음엔 이런 친절이 어색해서 잘 웃지도 못하고 정중하게만 대꾸했었다.
“늦었네. 해가 다 져 가는데. 밥은 먹었어?”
“들어가서 먹으려고요.”
“엄마는 집에 있어?”
“아니요. 며칠 비우신다고 했어요.”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했는데, 가기 전에 통화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또 어떤 아저씨랑 둘이서 다녀오는 것 같았다.
혜수는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도하를 내려다보며 끄덕였다. 그녀는 도하의 엄마 영숙도 살뜰히 챙겨주었으므로 영숙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숙은 집을 비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도하는 자연스레 혼자서 밥을 챙겨 먹고 제 빨래를 해서 널곤 했었다.
“그래, 밥은 있고?”
“그냥 라면 끓여 먹으려고요.”
“또 라면? 한창 자라는데 부실하게……. 들어와! 우리도 금방 준비해서 먹을 참이야.”
식사 때에 집 안에 들어가면 종종 생선 굽는 냄새와 찌개 끓는 냄새가 났다.
밥때가 아닐 때에는 깨끗한 세제 냄새와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그 집 유연제 냄새는 처음 맡아보는 거였는데 향긋하고 좋아서 지금도 기억이 난다.
친근하지도 않던 옆집 남자애가 뭐가 그리 반가웠던 건지 이현서는 그가 올 때마다 만사를 다 제쳐두고 방에서 뛰어나왔다.
“어? 도하 오빠네!”
늘 햇살같이 곱게 휘어지는 눈웃음을 가득 담아 그를 반겨주었다.
어린 소녀의 그 풍성했던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소녀는 그 미소를 그대로 간직한 채 자라나 주었다.
한도하가 채도하가 된 후에도 그녀는 여전했다.
여전히 눈웃음이 아름답던 그녀는 고맙게도 여전히 그를 좋아해 주는 마음 역시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가까지 기쁘게 그를 따라와 주었다.
돌이켜보면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가. 하지만 고맙다는 말도 한 번도 해주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진성에 들어와 얼마나 험난한 일들을 겪었는가.
모두 채도하의 아내가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던 영숙은 벨 소리에 실눈을 겨우 떴다.
요샌 잘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있으니 잠만 퍼질러 자는 게 일상이었다.
아들의 이혼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당분간 외출을 자중하라는 채 회장의 말에 따라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탓이었다.
“여보세요.”
잠에 취한 영숙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지금 집에 계시는 거예요?
“나? 응, 집이지. 근데 왜, 무슨 일인데 전화를 해서 단잠을 깨우니?”
영숙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지난 번 임자수탕 사건 이후 삐쳐 있던 영숙은 혜미에게 먼저 연락을 안 하고 있었다.
혜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아직 미쳐 빠져나오지 않은 잠에 다시 들어가고 싶었다.
-어머니! 대박 사건이에요!
“대박 사건? 무슨 일인데?”
영숙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가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잠이 확 달아났다.
-아, 그래서 지금 제가 어머니한테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거의 다 왔어요!
.
.
.
잠시 뒤 혜미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만삭의 무거운 몸임에도 날듯이 잽싸게 거실로 들어왔을 때 영숙은 이미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니? 그냥 전화로 말하지, 사람 궁금하게.”
혜미는 전화로 설명하는 것보다 집에서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영숙의 얼굴을 보며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게요, 어머니! 형님이 위자료를 받았대요!”
영숙의 손에 들린 본차이나 찻잔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어?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뭐를 받아?”
혜미는 주변을 한 번 쓱 둘러보더니 영숙을 향해 몸을 더 기울이며 속삭였다.
“10억이나 받았다는데요?”
덜그럭-
영숙은 본차이나 잔을 던지듯 놓았다.
“10억?”
고개를 끄덕이는 혜미를 보며 영숙이 눈을 치뜨며 물었다.
“누가?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데?”
“제가 방금 마사지 샵에서 들은 이야기예요.”
그런데 혜미의 대답에 왜 그러는지 영숙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사지 샵? 너 오늘 친정 갔다며. 주혁이가 너 급하게 친정에 일 있다면서 오늘 너네 오기로 한 거 취소했잖아.”
“아앗! 어, 어머니, 그건 그렇게 되었어요. 친정, 가려고 하긴 했는데…….”
혜미는 오전만 해도 영숙을 보러 오기 귀찮아서 거짓말했던 게 들통나 얼버무렸다.
전에는 현서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 먹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별로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점차 발길이 뜸해졌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편히 마사지나 받고 있다가 이 흥미로운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었다.
“흠, 뭐 그건 그렇고. 샵에서 누가 그랬는데?”
“진성 직원 부인이 출처 같았어요.”
“뭐라고들 떠들든?”
“위자료 적게 줬다고 흉보고 있던데요. 명색이 진성 큰며느리한테 겨우 10억이 뭐냐고.”
“미친! 그게 우리 집에 시집와서 한 게 뭐가 있다고. 적기는, 뭐가 적다고!”
영숙이 분개하자 혜미는 거기다 대고 더 기름을 들이부었다.
“근데 어머니, 형님이 위자료 안 받는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다고 했었는데 고게 도하에게 살랑거려서 챙겼겠지. 여우 같은 년.”
“그럼 그냥 놔두실 거예요?”
“그냥 놔두기는, 미쳤어? 가서 찾아와야지.”
영숙은 부랴부랴 전화기 화면을 열었다.
“아, 참. 이게 나 차단했지.”
“네? 차단이요?”
“고년이 내 전화 안 받아. 혜미 네가 전화하면 되겠네. 얼른 해봐.”
“해서 뭐라고 해요?”
“뭐라 하기는. 돈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아! 그러면, 어머니!”
갑자기 혜미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형님한테 돈 찾아서 아주버님 드리지 말고 어머니 비상금 하면 어때요?”
“그래? 오오, 어차피 도하는 모르게 하면 되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다. 당장 현서 만나러 쳐들어가야겠네. 내가 만나자고 하면 안 만날지 모르니까 네가 만나자고 해 봐.”
“그럼 제가 전화 한번 해볼게요.”
혜미는 부리나케 가방을 뒤져서 전화를 꺼내 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 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어? 뭐지?”
“왜 그래?”
의아해하는 영숙의 얼굴 앞에서 혜미가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흘러나오는 멘트의 내용은 똑같았다.
“어머니, 없는 번호라고 나오는데요.”
“뭐어? 아이고! 이 X이 돈 받고 나서 전화번호를 바꿨나 보다.”
“그럼 어떻게 해요? 연락도 안 되고, 돈 들고 어디로 날랐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기는. 도하 사무실로 가야지. 당장 도하에게 알려야겠다!”
***
주변을 모두 뒤졌다. 그래도 찾을 수가 없자 전국을 샅샅이 살폈지만 현서는 보이지 않았다.
본인의 명의로 된 핸드폰도 없고 그 흔한 신용카드 한 장 쓰지 않고 잠적을 해 버린 것이다.
도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참담해지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비서가 최 실장의 방문을 알려왔다. 진작 와 있었는데 도하의 회의가 길어져 이제 보고를 하게 되었단다.
도하는 얼른 들여보내라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어서 와요.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요?”
최 실장이 들어와 인사도 하기 전에 도하는 현서 소식부터 물었다.
“예, 혹시나 해서 해외 출국 여부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작은 사모님께서 얼마 전에 대만으로 출국하신 게 확인이 되었습니다.”
“대만으로?”
도하는 눈썹을 추켜 떴다. 대만이라니.
얼마 전까지 부부였던 아내가 대만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최 실장의 말을 듣는 순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 일단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다는 게 확인되었으니.
그런데 왜 대만으로 갔을까?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 수는 없을까요?”
“안 그래도 상무님, 저희가 더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출국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꼭 어디서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처럼 정보를 주지 않네요. 혹시 그냥 여행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좀 더 알아볼 수 있으면 더 조사해 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나가보세요.”
그러나 도하는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현서는 대만에 놀러 간 게 아니라는 것을.
대만에 무엇 때문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느낌상 현서는 한국을 아주 떠나버린 것 같다.
‘나를 버리기 위해 가버린 건가.’
해외에서 작정하고 숨는다면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붙잡아 이어가려던 그녀와의 인연의 끈은 생각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이 깨져버린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그의 세상엔 오직 현서만이 온기 어린 빛이었는데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동안 현서에게 받은 사랑이 오랜 세월 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벌컥-
그때 갑자기 집무실 문이 열렸다. 비서를 거치지도 않고.
“야, 도하야, 도하야!”
귀를 찢을 듯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어머니 한영숙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혜미가 딸려 들어오고 있었다.
“두 분,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돌연 들이닥쳐서는 부랴부랴 다가오는 영숙을 보며 도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집무실에서 미팅 중일 때도 종종 있는데 이런 식으로 문을 막 여시면 곤란해요.”
“얘,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현서한테 위자료 줬니?”
당황한 비서가 그 말을 듣고 누가 들을세라 얼른 문을 닫았다. 도하는 일순 굳은 얼굴로 어머니를 보았다.
“지금 그거 따지려고 찾아오신 거예요?”
“너, 진짜 줬어?”
“이제 그만 좀 하세요!”
“고X, 흠, 아니 고것이 분명 안 받는다고 나한텐 큰소리 뻥뻥 치고 나가더니, 결국 뜯어낸 거야? 걔 지금 어디 있어! 당장 쫓아가서 그냥!”
영숙은 더욱 길길이 뛰었다. 차분한 아들의 얼굴을 보니 진짜다.
“현서, 이제 여기 없어요.”
“여기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데 아들이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했다.
“한국에 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