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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내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 (14/92)


#14. 아내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
2022.05.19.


이제 대충 주변 정리도 되었다. 떠나는 데 아무것도 걸릴 게 없는데도 자꾸만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잡는 듯했다.

현서는 현관문을 닫기 전 깨끗하게 정돈된 집안 풍경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이제 이 집과도 이별을 고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이 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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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둘러보니 촉촉한 감상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다 켜켜이 쌓인 추억이었다. 오로지 따스함과 행복만이 있던 곳인데.

그래서 원래는 이곳에서 아이와 행복을 쌓아 가려 했었다.

엄마가 누렸던 행복을 내 아이도 같이 누리기를 바랐다.

그랬는데…….

현서는 애련하게 잠긴 목소리로 아기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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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엄마는 여기 살면서 참 행복했었어.”

그때는 도하가 놀러 왔다 돌아가고 나면 그의 손길이 하나하나 묻어 있는 곳은 전부 기억하고 보존하려고 애를 썼는데.

엄마가 대문을 스테인리스로 바꾼다고 할 때 그의 체취가 묻어서 바꾸면 안 된다고 울며불며 떼를 쓴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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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에서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도 얼마나 좋았었는지…….”

현서는 아이에게 말을 하면 할수록 과거에 젖어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심란한 마음을 막아내듯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겼었지만, 이제는 나중을 위해 모든 미련과 추억을 땅에 묻어 버려야만 한다.

다짐 끝에 눈을 뜬 현서는 문을 굳게 닫아 그 모든 추억을 차단했다.

그러고는 커다란 캐리어를 밀며 힘차게 집을 나섰다.

***

처음 얼마간은 무던하게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평소처럼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직원들이 얼핏 보기에는 여느 때의 채도하와 다를 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간혹 아주 잠깐 의식이 딴 곳에 가 있는 듯 집중이 흐트러진 순간이 없지는 않았어도 남들이 알아챌 만한 채도하의 변화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그들이 알던 채도하 상무였다.

여전히 번듯하고 여전히 일 잘하는, 진성의 차기 총수에 걸맞은 황태자였다.

비록 그런 그가 아무도 없는 서초의 집으로 퇴근한 후에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남들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고 하는데 도하에겐 하루가 지난했다.

사실 그 시간은 아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혼 후 하나의 바뀐 계절이 무르익고 있을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아마도 혹한의 시기가 찾아왔을 무렵.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틴 시간. 몇 년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한 계절의 시간만이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추운 겨울, 도하는 깨달았다.

사실 자신은 참을 수 없이 초조했고 불안했고 정신이 나가 있었다는 것을. 그간 버티기에 급급했던 자신에게도 한계가 찾아왔다는 것을.

실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생각하지 않으려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대신 아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많이. 함께 살던 시절보다 훨씬 더 많이.

그게 자신에게 얼마나 독이 되는 줄 알면서도 그는 아내만 생각했다.

아내가 행복해하던 모습. 아내의 미소.

아내가 절망하던 모습. 아내의 눈물.

아내가 안겨 오던 감촉. 다정하게 속삭이던 목소리. 따듯했던 눈빛.

그의 아파트는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씻고 자는 것 외엔 다른 용도란 없는 아파트였다.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화병에 꽃을 꽂아둔 적도 있었지만 치우시라고 했다.

무미건조한 거실에 놓인 소파 테이블 위에는 액자 하나만이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본가에서 유일하게 집어온 사진이었다. 현서와의 결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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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서. 네가 바라는 대로야.”

도하는 사진 속의 현서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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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원대로 나는 고통스러워. 만족해?”

사진 속 현서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채도하와 결혼하는 게 세상의 전부였다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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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놈이 그렇게 좋았어?’

저 미소를 사라지게 한 건 자신이었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저 미소를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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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숙은 하루를 지내는 게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왠지 하루하루가 심심하고 밋밋하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큰아들 도하는 서초동으로 짐을 옮기더니 전화 한 통이 없고, 채 회장은 이제는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다.

그나마 주혁이 가끔 전화해서 엄마의 안부를 물어주니 그것만이 지금의 낙이다.

모임은 예전에 입고 갔던 옷 사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웬일인지 그 여우 같은 현 여사도 연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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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잠이 더 안 와.”

예전에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이라도 잘 잤다. 그런데 지금은 잠조차 들기가 힘들어 수면제라도 처방을 받아먹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11시를 막 넘었을 즈음 겨우겨우 잠이 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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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엔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한밤중에 누군가가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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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친 인간이 노래를! 겨우 잠들었는데……. 짜증 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깨어나 보니 본인의 핸드폰 벨 소리다.

아, 이 노래로 바꿔놨지, 라고 중얼거리며 화면을 보니 주혁이다.

깜짝 놀란 영숙이 벌떡 일어나며 핸드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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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주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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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전화를 이제 받아.

주혁의 퉁명스러운 소리가 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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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받느라고 그러지. 이 밤에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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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지금 편히 잠이나 자고 있고, 나만 고생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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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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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혜미가 요즘 임자수탕이 먹고 싶다는데, 호텔에서도 여름에만 팔고 지금 파는 곳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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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난 또 뭐라고.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나도 어디서 파는지 몰라.”

허탈해진 영숙은 도로 침대에 몸을 털썩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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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엄마한테 물어보려고 전화했대? 엄마가 지금 와서 좀 만들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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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얘가 오밤중에 전화해서 뭐라니. 아줌마한테 만들어 달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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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지금 집에 없어. 애가 갑자기 열이 나서 아까 자기 집에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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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러면 걔 친정에 연락하라고 해. 야, 걔는 무슨 이 밤에 다른 것도 아니고 임자수탕을 찾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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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미 오늘 하루 종일 굶다가 지금에야 겨우 먹고 싶은 게 떠올랐는데 그거래. 그리고 형수가 한 게 먹고 싶다는데 형수는 엄마가 쫓아내서 이제 없고, 형수 음식은 엄마가 제일 많이 먹어봤으니까 엄마가 맛도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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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쫓아내긴 누가 쫓……. 아무튼 지금 재료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김 기사도 곤히 잠들었을 텐데…….”

당황한 영숙은 움직이기가 싫어 이것저것 핑계를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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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는 아줌마가 준비해 놨고, 김 기사는 엄마 필요할 땐 야밤에도 잘만 깨우시면서 그래. 정 뭣하면 대리 불러서 오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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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얘들이 오밤중에 무슨! 내가 그걸 어떻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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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혜미 요즘 도로 입덧하는 것마냥 잘 못 먹는단 말이야. 며칠 동안 먹는 둥 마는 둥인데, 이러다 우리 와이프 굶어 죽겠어.

엄살떠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영숙은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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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그동안 잘만 먹더니 막달에 뭔 입덧이야. 그리고, 야! 엄마는 너 임신했을 때 열 달 내내 입덧했어도 안 굶어 죽고 잘만 낳았다! 임신이 무슨 벼슬이라고.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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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진짜 나한테 이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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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들도 아니었으면서 거짓말로 버킨이나 뜯어갔으면 됐지, 바라는 게 끝이 없어.”

주혁의 성화로 결국 버킨도 되찾지 못한 영숙은 다시 생각해도 아까워서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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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만약 안 오면 나 다시는 엄마 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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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야!”

영숙은 철부지 둘째 아들을 핀잔하면서도 곤란했다.

주혁은 이런 협박을 하지 않으면 엄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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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내 팔자야. 알았어, 준비하고 갈게.”

영숙은 정말 움직이기 싫었지만 가끔은 찾아와 곰살맞게 굴어주는 주혁이 삐져서 안 올까 봐 겁이 났다.

이놈은 삐져도 한 달은 넘게 삐지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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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 엄마 최고! 빨리 와, 내가 대리 불러줄게.

 

***

쿵쿵. 탕탕.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연신 주방에서 들리더니 끝내는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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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새벽에 무슨 고생이람. 누군 예전에 애 안 가져 본 사람 있나. 아들도 아니고 딸 가진 주제에 시어미를 부려 먹고 있어. 으이구, 주혁이만 아니면 저걸 그냥!”

영숙은 신경질이 나서 그릇을 툭툭 던지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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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지금 그릇 깬 거야?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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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려서 그런다! 유난은……. 암튼 이제 다 만들었어!”

영숙은 만든 음식을 담은 쟁반을 주혁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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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가서 먹여. 내가 아주 상전을 모셔요.”

주혁은 받아 든 음식을 빤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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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거 임자수탕 맞아?”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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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게 임자수탕이지, 너는 보고도 모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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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가 만든 거랑 모양이 다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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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이 다르긴 그래도 맛은 똑같을 거야. 얼른 가져가.”

솔직히 영숙 본인이 보기에도 모양이 형편없었다. 현서가 만들었던 예쁜 임자수탕의 모습이 아니라 깻국에 이것저것 섞어놓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만큼 만들기 위해서도 지겨운 과정을 거쳤다. 이게 이리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나.

임자수탕은 현서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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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참 맛있긴 했지. 쩝…….’

생각하자 영숙은 저도 모르게 혼자서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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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혜미야! 나와서 먹어봐!”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방에 처박혀 있던 혜미가 살그머니 주방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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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니? 얼른 먹어라.”

영숙은 식탁에 앉는 혜미를 향해 임자수탕 그릇을 쭉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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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만드느라고 힘들어 죽을뻔했다.”

왜인지 선뜻 숟가락을 들지 않는 혜미에게 숟가락까지 쥐여 주며 영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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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네…….”

혜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숟가락을 임자수탕에 담갔다.

얼른 먹고 싶어서 나왔는데 눈앞에 놓인 임자수탕은 생긴 거부터가 이상했다.

어쨌든 영숙이 임자수탕이라고 만들어 놓은 음식의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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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욱!”

갑자기 혜미가 구역질을 했고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영숙은 찌릿하고 놀랐다.

주혁은 아내의 구역질에 걱정어린 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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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속이 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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