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끊어진 부부의 연
(13/92)
13. 끊어진 부부의 연
(13/92)
#13. 끊어진 부부의 연
2022.05.16.
현서의 대답에 영숙은 당황하여 잠시 말문이 막혔다.
“참, 나. 흐음, 그건 그렇고, 야! 너, 네가 나 때문에 쫓겨났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면서?”
-소문은 제가 낸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남들 눈에는 사모님이 쫓아낸 거로 보였나 보죠.
“뭐야?”
-솔직히 저도 그렇게 좋아서 나간 게 아니니까 그런 기분이 전혀 안 드는 건 아니에요. 사모님이 아니었다면 저도 나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나갈 수밖에 없게끔 원인을 제공하셨으니 전혀 없는 말도 아닌 거 같네요.
“이게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어!”
길길이 뛰는 영숙에게 전 며느리는 막힘이 없었다. 이제 정말 남이라서 어찌해볼 수도 없었다.
-그러게, 평소에 잘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러셨다면 그런 말씀도 안 들으셨을 텐데.
“뭐? 야!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못했다고 그래! 쥐뿔도 없는 거 며느리로 받아줬다고 내 친구들은 나더러 보살이라는데!
-아, 네. 참 좋은 친구분들이셨죠. 아무튼, 그 소문은 저랑 상관이 없는 일이니 그 사모님들에게 확인해보셔요. 이런 식으로 전화하시면 김 기사님 전화도 차단할 거니까 전화하시지 마세요. 그럼 사모님, 안녕히 계세요.
“야!”
현서는 제 할 말만을 끝내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게 진짜!”
영숙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열이 뻗쳤다.
“진짜 이게 내 전화를 차단했다는 거잖아!”
화가 난 영숙이 펄펄 뛰며 전화를 다시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는 안내 음성만 들려왔다.
***
결국엔 이렇게 될 것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던 날엔 그저 설레기만 했던 신부였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그렇게 사랑했던 남자와 이렇게 법원에서 헤어지게 될 줄 말이다.
그것도 자신이 먼저 이 남자와 끝내게 될 줄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부부의 연이 끊어졌다. 법원 앞에 마주 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맞추었다.
현서가 먼저 입을 뗐다.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네요. 이만 가볼게요.”
도하는 아무 감정 없이 담담하게 말을 건네는 현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법원 앞에서 만난 현서는 평소의 옷차림과는 다르게 전혀 곡선이 없는 일자형 원피스를 입고 굽이 없는 단화를 신고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목소리는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밝았다.
몸과 마음이 편했는지 아내는 얼굴에 아주 예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고마워요.”
현서는 아까 자신과는 다르게 핼쑥해진 도하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잘 지냈냐는 인사말조차 하지 못했었다.
“…….”
“…….”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의미 때문일까.
둘 사이에 흐르는 이 낯선 분위기가 너무나 어색했다.
얼마 전까지 살을 맞대고 잠들던 부부였는데, 왜 이렇게 불편할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도하는 무슨 말이라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 서초동으로 옮겼어.”
“......”
현서는 깜짝 놀란 얼굴로 도하의 얼굴을 쳐다봤다.
“왠지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옮겼어, 출퇴근하기도 가깝고.”
현서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도하는 본가를 나온 것이었다.
딸아이 서하가 떠난 뒤부터 부쩍 본가에 들어가기가 싫었었는데, 아내마저 떠나니 그 집에는 아무런 의미도 남아 있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 영숙의 얼굴은 더욱 마주하기 싫었다.
“불편한 건 없고요?”
“없어.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두 번씩 오셔. 내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지내.”
“저, 잘 지내고 있어요.”
“어디 취업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당장은 취업할 생각 없어요.”
아내는 자신과 결혼 후 몸과 마음 모두 고생을 많이 했었다.
이제는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말을 하게 된다.
“너 배우고 싶어 했던 거 많잖아. 그런 거 배우면서 편하게 지내.”
헤어지게 된 마당에 도하는 현서의 하나하나가 괜스레 마음이 쓰여 평소 같지 않게 자꾸만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나 그의 마음 같지 않게 이제 현서는 냉랭할 뿐이었다.
“근데 통장에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넣었어요.”
“그동안 나랑 결혼해서 고생 많이 했잖아. 그거에 비하면 많은 것도 아니지.”
사실 도하는 더 많은 금액의 돈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위자료도 거절했던 현서였기에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나름 적당한 금액을 입금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거마저 많다고 한다.
“난 한 푼도 필요 없어요.”
“아니야. 그건 그냥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어. 그리고 다달이 생활비도 따로 보내줄게.”
도하는 현서가 앞으로 지금보다 여유로운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싶지 않았다.
“벌써 다시 돌려줬어요.”
“뭐?”
“몰랐어요? 돈 다시 보냈어요.”
“하……. 현서야.”
“오빠 어머니한테 약속했잖아요. 한 푼도 안 받는다고.”
“이렇게까지 야박하게 굴어야겠어?”
이제는 아무도 보살펴 줄 사람 없이 혼자 있는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장모님이라도 계셨으면 잘 돌봐 주셨을 텐데.
“다시 보낼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내가 그렇게라도 해줘야 마음이 편해. 나도 장모님한테 약속했었어. 너도 알잖아.”
“못 보낼 거예요. 그 통장 자체를 아예 없애 버렸거든요.”
“…….”
도하는 일순 놀라서 주춤했다.
“너 정말 그렇게까지…….”
“오빠. 나 오빠랑 살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행복했어요. 내가 선택해서 한 결혼이고, 난 그 결정에 후회 없어요.”
“…….”
도하는 탄식처럼 한숨을 길게 내쉬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나는 고맙지.”
그런 일들을 겪고도 후회가 없다는 말을 해줄 줄은 몰랐다. 그녀의 말에 크나큰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은 부부가 아니게 되었지만 그녀가 과거의 감정을 전부 부정하는 건 아닌 것이다.
그녀에게도 희미하게나마 미련이 남아 있다고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앞으로 다시 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도하 자신만의 몹쓸 희망이었다는 건 현서의 다음 말에서 느끼고 말았다.
“그러니까 오빠도 미안한 마음 가지지 말고 앞으로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도하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 그 말 좀 안 하면 안 돼?”
“…….”
현서는 화내는 도하의 모습이 의외여서 조금 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인지 그는 엄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못을 박았다.
“좋은 사람이고 뭐고, 다른 사람 만날 생각 없다고.”
그 모습이 하도 단호해서 현서는 어쩔 수 없이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음대로 해요.”
안 그래도 무겁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더욱 식어버렸다.
“그게 정말 네 진심이야?”
도하가 아직 속이 답답한 듯 내뱉었다.
“내가 좋은 사람, 그러니까, 다른 여자를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네가 정말 바라는 거야?”
현서는 이제는 전남편이 되어버린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이 남자가 딴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행복해지는 모습을.
“아니요.”
아니. 물론 아니었다.
그럴 리가.
“솔직히 말하면, 오빠가 오래오래 날 그리워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떠나고 눈물 흘렸으면 좋겠어요. 나 없이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도하는 그 말에 꽤나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오빠가 그럴 리는 없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그냥 하는 말이에요. 행복하라고.”
몇 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도달한 체념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전남편은 넋 나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참 만에 말을 뗐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나 잘 지내.”
“그래요. 그마저도 내 오지랖이 넓은 거겠죠. 이제 신경 쓰지 않을게요.”
도하는 이마를 불끈 찌푸렸다.
그런 뜻이 아닌데.
아내와 대화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현서는 말문이 막힌 전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끝내 조금 표정을 가다듬곤 초연한 어조로 말했다.
“갈게요, 그럼.”
하지만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도하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었으므로.
“가끔…… 연락할게.”
인사에 대한 대답 대신 도하는 그렇게 말했다.
“연락하면 받았으면 좋겠어.”
왜인지 모르게 불안함이 그를 잠식했다.
왜일까. 왜 이게 정말 끝인 것만 같지.
잠시 놓아줬다가 다시금 다가가려 하는데. 그마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아니……. 안 받을래요.”
도하의 눈꺼풀이 들려 올라갔다.
“우리 이제 남이에요. 이제 정말 서류상으로도 상관없는 사이가 되었어요.”
설핏 웃기까지 하는 전부인의 말간 얼굴이 멀고 멀었다.
“그러니까 이제 각자의 인생을 살아요. 오빠는 오빠 인생, 나는 내 인생. 서로 상관없이 따로.”
“…….”
현서는 울지 않으려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 너무도 사랑스러울 아기에게 아빠를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남자는 그녀를 허탈한 얼굴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는데 입술만 달싹이다 마는 듯했다.
그래서 마지막 말은 현서가 뱉어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연락도 하지 말고 찾아오지도 마세요.”
얼음처럼 굳어 있는 전남편을 두고 현서는 몸을 돌렸다.
이윽고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혼자서 속말을 중얼댔다.
‘오빠 안녕. 이제는 영원히 안녕이야.’
현서는 눈물이 흐를까 봐 하늘을 쳐다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도하는 자신이 현서 앞에서 얼마나 용기가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현서를 잡고 싶어 허공에 손을 뻗어보았다.
시야에서 작아져 가는 그녀의 모습이 신기루 같았다.
***
현관문을 열자 산뜻한 공기가 얼굴에 부딪혀왔다. 바뀐 계절이 실감 나는 날씨였다.
늦가을의 찬 공기를 맞으며 남편과 이별을 했고, 매섭고 혹독한 겨울을 남편도 없이 아가와 지났다.
그리고 어느새 마른 나무들에는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갑자기 태동이 느껴지자 현서는 습관적으로 배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이제는 배도 꽤 많이 불러 있었다.
“우리 아가, 오늘 잘 노네. 엄마랑 먼 곳으로 떠나는 날이라 우리 아가가 신이 났나?”
배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음을 머금던 현서는 결심한 듯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 크지 않은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몸도 무겁고 사실 그리 많은 짐도 필요치 않았다.
“가자, 아가야.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