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알 수 없는 패배감
(12/92)
12. 알 수 없는 패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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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알 수 없는 패배감
2022.05.12.
“뭐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남편 곁에 서 있던 혜미는 시모의 언성이 높아지자 어깨를 움찔거렸다.
영숙은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으로 혜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얘! 너 아들이라고, 네 입으로 분명히 아들이라고 그랬잖아! 날 속인 거야?”
“아니에요, 어머님. 그땐……. 의사가 분명 아들이라고 말했어요.”
혜미가 개미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뭐어?”
영숙은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분명 아들을 임신했다며 임신 축하선물로 그 비싼 가방을 사달라고 했었다.
마침 사기를 당한 직후여서 채 회장에게 겨우겨우 허락을 받고 사줬는데, 이제 와서 딸이라니.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영숙은 혜미를 노려보았다.
“너, 너 당장 그 가방 도로 가지고 와. 나나 들게!”
“네? 어, 어머니 그건 제 거예요. 저한테 주신 거잖아요.”
“야, 일억이 넘는 그 가방 사 주려고 내가 회장님한테 얼마나 사정했는지 알아? 내 카드 뺏겨서 나도 못 샀는데!”
“엄마, 내가 그 가방 나중에 사 드릴게, 응?”
“그 버킨이 원래 내 거였어! 그거 받으려고 얼마나 오래 대기했는지 알아? 그걸 쟤가 눈독 들여서 채간 거야! 아들 가졌다고 해서 눈 딱 감고 양보한 건데.”
“아, 엄마! 그렇다고 선물을 줬다가 뺏으면 안 되지.”
속없는 놈처럼 주혁은 옆에서 혜미의 편을 들었다.
“닥쳐! 이 팔불출 같은 놈!”
“엄마. 엄마도 아들만 둘 낳아서 딸 하나 있었으면 했잖아. 손녀딸이라도 있으면 좋지 않아? 손녀 하나를 잃었으니 또 하나를 주신 거야.”
“남의 집에 시집을 왔으면 대를 이어야 할 거 아니냐. 며느리들이 하나같이…….”
영숙은 열이 뻗쳐 주체할 수가 없었다. 뻔뻔한 혜미나 며느리 편만 드는 아들이나 다 꼴 보기가 싫었다.
그래도 큰며느리는 임신 선물이나 뜯어가는 짓은 안 했는데, 지금 영숙은 현서가 아쉬워졌다.
“서산댁, 전복하고 한우 냉장고에 도로 집어넣고 얘들 찬밥이나 내줘!”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영숙은 안으로 들어가 부서질 듯이 방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
아무도 살지 않는 집처럼 집 안이 캄캄했다. 혹시 집 안에 있나 싶어 벨을 눌러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늘은 그리 늦지 않은 저녁에 찾아왔다. 잠들었을 리는 없는 시간이었는데도 불이 켜지지 않는 걸 보니 비어 있는 것 같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제도 처가 근처를 맴돌다 차 안에서 깜박 잠이 든 것이 전부다.
피곤이 온몸을 덮쳐오는데도 오늘 역시 이곳으로 발길이 향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무리 찾아와도 현서의 얼굴은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대문 모퉁이에 택배가 있는 것을 보면 사는 것이 확실한데 도저히 마주칠 수가 없었다.
마치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정말 아내를 보내야만 하는 걸까?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나를 떠나 정말 행복해진다면…….’
그렇다면 보내야만 하는 걸까.
“하아…….”
도하는 낮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내가 자신을 떠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없는 세상에서 오히려 더 잘만 살아가는 아내라니. 그런 모습은 상상만 해도 싫었다.
알 수 없는 패배감에 휩싸이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
.
.
좁은 골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 보이는 남편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더 핼쑥해져 있었다. 날렵한 턱선과 높은 콧날이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종종 남편은 밤새 멍한 얼굴로 집 앞을 지키고 있다가 날이 밝아 오면 돌아가곤 했다.
그런 날이면 현서는 거실 창문 앞에 쪼그려 앉아 같이 밤을 새웠다.
임신 초기라 가능하면 외출을 삼가고 있었다. 더구나 남편이 보일 때면 더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몇 년간 함께 살았던 남편이니 자꾸 마주치다 보면 임신한 걸 눈치챌 일이 생길지도 몰라 조심스러웠다.
배가 불러오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서성이던 남편은 검은 세단에 기대어 섰다. 옷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는 듯했다.
그 손에 들린 건 담배였다. 현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았다.
결혼하며 끊은 뒤로 한 번도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현서는 울컥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마요…….”
고작 저 정도의 동요로 자신마저 흔들릴 수는 없었다.
‘그간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면 알잖아. 저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아.’
마음을 다잡으며 현서는 커튼 틈새로 바라보던 그 광경을 외면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다시 내다보았을 땐 남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희미하고 노란 가로등은 커다란 차가 사라지고 난 골목만을 비추고 있었다. 어둑한 골목이 텅 비어버리자 더욱 쓸쓸해 보였다.
***
사무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도하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침내 소파에서 몸을 세운 그는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기왕이면 빠르게 처리하세요.”
맞은 편에 앉아 서류를 검토해보던 정 변호사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가서 진행하겠습니다.”
정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예, 상무님. 말씀하십시오.”
“…….”
막상 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 변호사의 손에 들려 나갈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할 뿐이었다.
이미 아내는 저와 끝났다는데, 저깟 서류가 무어라고 이런 상실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안다. 잘 알고 있다. 현서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그 결정이 쉽지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데 현서는 어떻게 그렇게도 쉽게 결정을 내렸는지.
아내에게 그렇게 독한 면이 있었나, 사람이 새롭게 보일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겠지…….’
“아닙니다. 그냥 오늘 제출하세요.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정 변호사는 아무 말 없이 도하를 바라보았다. 회사 업무는 결단력 있게 처리하시는 분이 이 이혼서류 접수 문제는 벌써 몇 번째 면담인지 모른다.
“내 마음 바뀌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주세요, 정 변호사님.”
“예. 지금 나가는 데로 다녀오겠습니다.”
도하는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돌아갔다.
이현서를 보낸다는 것. 그것은 살아온 날 중에서 가장 따뜻했던 봄날을 도려내 버리는 느낌이었다.
***
영숙은 속이 지글지글 부글부글 끓었다. 화가 난 감정을 풀어야 하는데 어디 풀 곳이 없었다.
“빌어먹을 여편네들. 잘난 척은. 지네나 나나 뭐가 다르다고 잘난 척이야.”
뒷좌석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며 걸진 욕을 뱉어내고 있었다.
오늘 사모님들 모임에 나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얼마 전에 산 옷을 입고 나가서 자랑했는데, 그 여편네들이 낄낄거리며 그렇게 품위 없는 옷을 어디서 찾아서 샀냐며, 그것도 재주라고 놀려댔다.
‘분명 혜미 고것이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한 옷인데.’
“지들은 얼마나 고상하게 입고 다닌다고 꼴값들이야.”
“예? 사모님,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영숙의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에 김 기사가 물었다.
“아니야, 운전이나 똑바로 하라고.”
애꿎은 김 기사에게 소리만 버럭 지른 영숙은 혼자서 씩씩거렸다. 좀 전에 만나고 온 영우 물산 지 여사와의 대화가 떠올라서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대성실업은 재취라서 안 보낸다고 하고. 최 사장님네도 곽 회장님댁도 전부 말은 해보았는데 혼담이 오가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고.”
“아니, 갑자기 전부 혼담이 오고 간다니. 그거 이상하지 않어? 우리 도하가 돌싱이긴 해도 그만한 신랑감이 어디 있다고.”
영숙은 지 여사에게 도하의 혼처 자리를 부탁했었다. 지금부터 알아봐서 이혼이 되자마자 결혼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선조차도 보려 하지 않는다.
선을 보겠다는 곳은 마음에 차지 않고, 마음에 드는 곳은 선조차 안 보려 하다니.
물론 뚜쟁이에게 말을 해도 되지만 뚜쟁이는 이혼이 확정되면 그때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러니 친하고 만만한 지 여사에게 부탁한 것인데, 하는 소리가 전부 혼처가 있단다.
“너무 이상한데? 이거 아무래도……. 일부러 피하는 거 아니야?”
영숙이 성질을 내며 씩씩거리자, 살며시 다가온 지 여사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자기 큰아들 훌륭한 건 내가 잘 알지. 신랑감만 보면 덤빌 만한 집들 꽤 있을 거란 걸 아니까 나도 주선해보려고 한 거고.”
“그래,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 질문에 지 여사는 잠시 머뭇대다 답해주었다.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 자기 때문에 안 보내려는 거 같아.”
“뭐? 나 때문에?”
“자기 성질 때문에 며느리 내쫓았다고 소문이 났거든. 그런 집에 누가 자기 딸을 보내려 하겠어.”
“아, 아니, 어디서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내가 언제 며느리 내쫓았다고! 제 발로 나갔다고, 제 발로 그냥. 어떤 년이 그런 소문을 내고 있어!”
지 여사와의 대화를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 소문은 현서 고것이 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영숙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리지도 않고 전화가 끊어졌다. 몇 번을 걸어도 똑같았다.
이상하다. 전화가 고장이 났나? 고개를 갸웃하던 영숙은 김 기사를 향해 말했다.
“현서 고거 전화번호 알지?”
“예, 작은 사모님 연락처 저장되어 있습니다.”
“전화 한번 걸어봐.”
김 기사가 전화를 거니 전화벨이 울리고 잠시 후에 현서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김 기사님. 어쩐 일이세요.
역시나 김 기사의 전화는 받는 걸 보자 영숙은 도끼눈을 부릅떴다. 더 들어볼 것도 없이 그녀는 김 기사의 전화를 뺏어 들었다.
“야!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네? 무슨…….
현서가 황당했는지 주춤하다 대꾸했다.
“너 때문에 내가 개망신을 당했다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모님이랑 연관이 되는 일을 전혀 한 적이 없어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뭐, 사모님? 너 지금 나더러 사모님이라고 불렀니?”
-예.
“허, 허! 이게 정말 가지가지 하고 있네.”
영숙은 기가 막혀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것이 이제 하다 하다.
-예전에 저랑 도하 씨 결혼하기 전에 제가 어머님이라고 부르니까 결혼 반대하시면서 사모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었잖아요. 이제는 집에서 나왔으니 어머님이라고 부르면 야단하실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