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내가 없는 집 2022.05.09.
넓은 통창으로 햇빛이 환하게 비쳐 들어오는 탓일까. 계절을 모르는 춘란 서반이 꽃을 활짝 피워 내고 있었다. 춘란 서반에서 나는 향기는 봄의 향기처럼 은은했다. 요염하게 유혹하는 향수처럼 사무실을 감싸고 있었다. 넓은 소파에 30년 후의 얼굴과 30년 전의 얼굴을 한, 두 남자가 똑같이 눈썹을 찌그리며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도하는 출근하자마자 채 회장을 찾아왔다.
“저희 분가하겠습니다. 그 사람 서초동으로 보냈습니다.”
“들었다. 조찬모임 하는 중에 네 어미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채 회장은 아까 영숙이 큰 목소리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게 기억나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아버지. 저는 내일이라도 나가고 싶습니다.”
도하는 감정을 숨긴 채 무표정한 얼굴로 채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며늘아기한테서도 전화가 왔었다. 그런데 지금 서초동이 아니라 친정집으로 갔다고 하더라.”
“친정집이요? 그럴 리가.”
도하가 허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순간 현서와 이어져 있던 명주실처럼 가느다란 끈이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보고 너한테 전해주라고 하더라.”
채 회장은 도하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표정 변화일지 몰라도 아비인 그는 알 수 있었다. 아들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들의 아픔이 온전히 제 탓인 것 같아서 채 회장은 마음이 착잡했다.
“미안하다. 너도 알다시피 너 때문에 네 어미를 집으로 들인 거라 우리가 좋은 본을 보여주지 못했구나. 아무리 명목상의 사이라지만 부부 같지 않은 모습으로 너에게는 상처만 주었구나.”
“아닙니다.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도하야, 힘들겠지만 현서 그만 놔줘라.”
“아버지.”
“지금은 그 애가 원하는 대로 해줘라. 시집와서 고생 많이 했잖니.”
채 회장은 아들 내외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예쁘게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
“네가 알아서 잘 챙겨주겠지만, 혼자 살면서 고생 안 하게 해줘라.”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대답도 없이 인사하며 일어나는 도하를 바라보며 채 회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더 덧붙었다.
“네 마음은 안다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네 어미한테서 빨리 해방시켜 줘라.”
그러나 도하는 아무런 말 없이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갔다. 현서를 보내주라니. 아버지의 그 말씀이 강한 펀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타격을 주었다. 머릿속이 번쩍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 도하는 현서를 보내주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둥지를 튼 새 마냥 머리 주위를 맴돌며 계속 울어대서 온종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집으로 들어온 도하는 자신을 반겨주던 현서가 없는 방을 둘러보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있고 아내 한 명이 없는 것뿐인데. 집은 왜 텅 빈 집 같고, 이 방은 왜 이렇게 넓고 휑하게 보이는지. 도하는 옷을 입은 그대로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행동인데 앉아 있을 기운도 없었다. 집 안에 있는 밝은 기운은 모두 현서가 가지고 가버린 것만 같았다. 서초동도 안 갔고. 정말 끝인가. 한 번쯤은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도하는 현서가 자신을 완전히 떠났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얹힌 것처럼 묵직하게 조여 왔다. 결국엔 벌떡 일어나 충동적으로 차 키를 들었다. 그러나 무작정 문으로 향하다가 멈춘 그는 한참 고민하다 별수 없이 다시 돌아와 침대 모서리에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집이 답답한 거야.”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짜증을 내며 서성이다 어둠이 짙은 밤이 되어버렸다. . . . 끝내 도하는 아내의 친정집 앞에서 멍하니 대문을 보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여기까지 온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아내는 잠들었는지 집 안이 캄캄했다.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지만 자는 아내를 깨울 수는 없었다. 도하는 차에 기대어 아내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시선을 두고 바라보았다. 왠지 집에서 온기가 뿜어 나오고 있는 것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집은 도하의 삶에서도 가장 따뜻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겨주던 현서와 항상 인자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던 혜수가 살았던 곳이었다. 도하의 눈에 이 집은 항상 밝은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 행복이 넘치는 집이었다. 이곳에서 같이 있으면 도하도 행복해질 것만 같았었다. 그래서 집 앞을 지날 때면 혹시라도 들어오라고 불러줄까 싶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곤 했었다.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동이 환하게 밝아 왔다. 그러나 도하는 움직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멍하니 처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 주변이 시끌벅적한 작은 카페에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집을 떠난 며느리를 찾아 친히 그녀가 있는 동네까지 와 주신 채 회장이었다. 마주 앉아 있던 현서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단정하게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테이블 위의 음료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현서가 앞에 앉은 채 회장을 향해 숙인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아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내가 너무 무심해서 너를 힘들게 했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그동안 아버님께서 절 자상하게 살펴 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감사하지만 이건 받을 수 없어요.”
현서가 봉투 하나를 들어 채 회장 앞으로 조심스레 내밀며 말했다.
“너는 도하가 잘 챙겨주겠지만, 이건 너에게 주는 게 아니고 할아비가 손주에게 주려던 선물이었다. 네 맘 아플까 봐 말 안 하고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원래 서하 주려고 만들어 놓았던 주식이니 어미인 네가 받는 게 맞다.”
서하를 언급하는 채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직하고 무뚝뚝한 분이라 약한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분이신데, 오죽 그 속이 미어지면 눈물을 보이실까. 서하 장례를 치른 이후론 지금까지 한 번도 손녀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던 채 회장이 처음으로 그 이름을 말한 것이었다.
“우리 서하,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다.”
우직하면서도 알고 보면 정 많고 속이 깊으신 분이라는 걸 현서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었을까. 한 기업을 호령하는 채 회장은 평소 불같은 성정이라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런 분이 할아비로서 손녀 앞에서는 인자한 표정을 많이 보여주셨었다는 걸 현서는 아들인 도하보다도 더 잘 알아채고 있었다. 서하를 그렇게 귀히 여기셨었는데.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느라 시아버지의 상처는 미처 배려하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붉어진 시아버지의 눈가를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현서는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받아라. 할아비의 마지막 정이다. 거절하지 말아다오.”
현서는 정말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지극한 손녀 사랑을 말씀하시는데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의 마음 감사하게 잘 받을게요.”
“밥은 먹었냐?”
“예, 방금 먹고 나왔어요.”
채 회장은 까칠해진 현서의 얼굴을 보며 밥이라도 한 끼 챙겨 먹이고 싶었다. 그러나 현서의 표정을 보니 안 먹었어도 거절의 답을 한 것만 같아 미련을 버리고 일어났다.
“그만 가 보련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라. 도하 모르게 연락해도 된다.”
“예, 아버님. 말씀 감사합니다.”
현서는 함께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차가 아직 따듯하니 마저 마시고 가거라.”
“예. 살펴 가셔요.”
채 회장이 자리를 떠난 뒤 현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봉투에 막상 손대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박 기사를 통해 채 회장이 봉투 하나를 보내왔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되돌려 드리려고 만난 건데, 다시 서하의 이름을 달고 제 손으로 돌아왔다.
“아가, 이건 하늘에 있는 누나 거야.”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지만, 현서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당분간은 모든 것을 잊고 배 속의 아기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 현서가 떠난 집은 적막 그 자체였다. 집에 혼자 있던 영숙은 마주 보고 말을 할 사람이 없어 온종일 핸드폰 울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현서 고것이 있을 때는 그래도 입이 심심할 일은 없었는데……. 현서 고것이 만든 시원한 임자수탕이 먹고 싶은데, 사 먹는 건 그 맛이 안 난단 말이야.”
영숙은 현서가 없는 것이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이제 나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항상 손발처럼 움직여 줬었는데 없으니 매우 불편하기만 했다. 그나마 오늘은 약속이 있었다. 어찌한 일인지 아기 때문에 몸이 힘들다는 핑계로 도통 들르지 않던 작은 아들 내외가 오늘은 집에 오겠다며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왔다. 며칠 전 아기 사진을 가지고 온다고 하더니 이제야 가져오나 보다. 푼수 같은 작은놈은 제 마누라만 챙기며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을 해놓으라고 했었다.
“현서 고것이 살림은 야무지게 잘했는데……. 이상하게 사람을 구할 수가 없네.”
벌써 몇 사람을 들였다가 취소하고 내보내기를 반복 중이었다. 서산댁 혼자서는 집안 살림을 감당할 수가 없기에 집안 살림은 엉망이다.
“서산댁. 이따가 애들 오니까 전복하고 한우나 구워주게 준비해 놔.”
영숙은 뱃속에 들어 있는 아기 사진을 어떻게 만들어 오는지 몰랐지만, 손자 사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 . . 아침 일찍 온다던 주혁과 혜미는 점심이 한참 지난 후에 지친 얼굴로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 시간에 올 거면서 사람을 온종일 기다리게 해?”
“미안해, 엄마.”
“아기 사진은 어디 있어?”
영숙이 아기 사진을 찾자 주혁이 신이 난 듯 양복 안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그게 입체 초음파 사진인데 우리 딸이야. 봐봐, 예쁘게 생겼지?”
주혁이 영숙의 표정을 살피면서 푼수를 떨었다. 영숙은 제 귀를 의심하며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딸?”
“응! 예쁜 공주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