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잘나신 아드님 곧 이혼당할 거예요
(7/92)
7. 잘나신 아드님 곧 이혼당할 거예요
(7/92)
#7. 잘나신 아드님 곧 이혼당할 거예요
2022.04.25.
“뭐어? 이게 진짜 미친 거 아냐?”
동시에 영숙은 현서를 향해 오른손을 번쩍 들어 휘둘렀다. 순간 현서는 그 손목을 틀어잡았다가 던지듯 놓았다.
“물건 깨부수시는 것도 모자라 이제 사람까지 치시려고요?”
잡혔던 손목을 어루만지며 영숙이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미쳤니? 이게 아주 어른이 눈에 안 보이지?”
“어떤 어른이 며느리를 패려고 해요. 어른 대접받고 싶으시면 어른 노릇을 하세요.”
지금까지 살면서 말대꾸 한번이 없던 며느리였다. 그런 며느리가 눈을 똑바로 부릅뜨고 시어머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 대체 너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시어미한테!”
영숙은 어안이 벙벙해서 넋을 놓고 외쳤다.
“아무리 제 자식 잃고 힘들다지만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거야?”
현서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영숙이 이런 식으로 서하 이야기를 꺼내선 안 되었다.
그러나 양심 없는 시모는 제 화만 못 이겨 퍼부어 대고 있었다.
“쥐뿔도 없는 걸 며느리로 받아줬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숙이고 살아야지, 어딜 대들어! 네가 기어이 쫓겨나고 싶어?”
“쫓아내실 필요 없어요. 안 그래도 제 발로 나갈 거니까요. 저 이제 어머니 며느리 자리 사표 내려고요.”
“뭐어? 사표? 그게 무슨 소리야?”
“사표 모르세요? 그만둔다고요.”
영숙은 실소를 금치 못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네가 지금 이 집을 나가겠다는 거니? 뭐 나야 좋다만. 네 주제에 도하 같은 남편을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네, 맞아요. 그 잘나신 아드님 곧 이혼당할 거예요. 어머니 때문에.”
자신의 말을 마지막으로 현서는 몸을 획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갑자기 뭐가 그리 당당한지 달라져 버린 며느리를 바라보는 영숙은 입을 허, 벌렸다.
“저! 저걸 어째! 뭐? 제깟 게 이, 이혼? 도하 버리지도 못할 것이 큰 소리는!”
현서는 남은 말을 마치고 후련한 얼굴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잔뜩 얼굴이 붉어져 있던 영숙만 혼자 남아 씩씩대고 있었다.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처럼 깐족대며 말하고 사라지는 이현서라니.
맘 같아선 당장 쫓아 올라가 머리채라도 휘어잡고 싶어 발이 들썩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아마도 저게 제정신이 아닌 걸 거야 . 저X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지.”
영숙은 이 층에 버티고 있는 큰아들 도하가 무서워 허공을 향해 삿대질만 해 댈 수밖에 없었다.
***
도하는 중요한 회의도 미룬 채 홀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둘만 사는 집이 아니었기에 집에서 대화하기가 조금 불편했는지 현서가 오늘 낮에 사무실로 오기로 했다.
“후…….”
지금까지 현서를 알고 지내온 무수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현서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마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본 것만 같았다.
요즘 현서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폭탄을 던질 줄이야.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냥 아주 심하게 화가 났었나 보다. 오늘 다시 이야기할 때는 그 말을 취소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그래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내는 결혼생활 동안 지금까지 그의 편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런 이현서에게서 갑자기 이혼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마음 가운데 있던 온기가 단번에 사라져 버린 것처럼,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심장에 서늘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선뜩함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딸 서하를 보냈을 때랑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지금은 이혼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만으로도 온몸이 얼음에 묻힌 것처럼 서늘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이내 익숙한 얼굴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도하는 다가오는 아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베이지색 심플한 원피스에 단정해 보이는 굽이 낮은 단화를 신은 아내가 새삼스레 눈에 꽂혔다.
문득 기분이 이상했다.
아내가 저렇게 예뻤던가.
물론 아내는 어릴 적부터 늘 예뻤다. 그건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내의 얼굴이 유독 더 달라 보였다.
왜인지 멍하게 바라보는 그를 향해 현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바쁜 거 아니에요?”
“괜찮아. 앉아.”
책상에서 일어난 도하는 아내에게로 걸어가며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뒤를 따라 들어온 비서가 평소와는 달리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도하의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차 준비해 드릴까요? 커피랑 홍차, 녹차 있습니다.”
“커피 줄까? 당신이 좋아하는 게이샤 있어.”
“아니요, 괜찮아요. 커피는 이따가 마실게요.”
“그냥 물 두 잔만 줘요.”
비서가 물러나는 사이 도하는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와 현서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내의 완고한 얼굴을 보니 도하는 어쩐지 숨이 찬 기분이 들어 넥타이를 당겨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커피가 별로면 밥을 먹을까? 5시 다 되어가니까 퇴근을 좀 일찍 하면 되는데.”
아내를 앞에 두고 이렇게 초조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난번에 네가 맘에 들어 했던 거기로 갈까. 그 JJ 호텔, 거기 파스타 좋아했잖아.”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현서는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신혼 때였다.
“우리 첫 결혼기념일이었을 때잖아요. 우리 엄마가 둘이 다녀오라고 손수 식사권까지 챙겨주셔서 다녀왔던…….”
“그게 그렇게 오래전 일이던가.”
“네. 어느새 몇 년이나 흘러버렸어요. 오빠는 너무 바빠서 몇 년이 1년 같은가 봐요.”
그는 바빠서 기념일에도 늦은 퇴근을 하는 적이 많았다.
물론 그는 바쁠 때도 늘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고 챙기긴 했다. 그때마다 화려한 꽃다발과 함께 센스있는 선물을 보내는 일은 빠뜨리지 않았다.
그걸 보며 주위 여자들은 남편 잘 만났다며 부러워하곤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고독감은 그의 아내인 현서만이 아는 부분이었다.
선물 자체보다 선물을 주는 주체인 남편이 더욱 필요한 걸 그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생각해보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무얼 기대한 것인지, 아직도 희미한 희망을 품고 있는 자신이 왠지 처량하게 느껴졌다.
“우리 한동안 대화도 잘 못 하고 살아왔는데, 이혼 얘기를 나누게 된 요즘에서야 이렇게 마주 앉게 되네요.”
“잘 알겠지만, 아버님이 서둘러 일을 넘겨주셔서 요즘 더 바빠진 거야. 그래도, 앞으로는 일찍 퇴근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할게.”
도하는 자꾸만 이미 늦어버린 것 같은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내려 했다.
아내는 그의 생각만큼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왜 몰랐을까. 어디서부터 놓치고 만 걸까.
“그럴 필요 없어요. 오빠에게도 아버님에게도 중요한 시기인데 나 때문에 그러지 말아요. 난 곧 나갈 사람이니까.”
그러나 아내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참담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성그룹의 안녕과 맞바꿀 만큼 내가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런 말 좀 하지 마, 이현서.”
똑똑-
어색해진 공기를 가르고 비서가 노크를 했다. 이내 안으로 들어와 물 두 잔을 차분히 두고 인사를 꾸벅하는 비서를 향해 도하가 말했다.
“오늘 일찍들 퇴근해요. 그동안 매일 늦게 퇴근하느라 고생했는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부터 며칠만 더 고생하자고.”
“네, 상무님.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멈칫하던 비서가 눈치 빠르게 대꾸했다. 아내와 민감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 깨달은 모양이다.
비서가 나가자 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무슨 일 있었던 거지? 얼마나 큰일이야? 얼마나 큰일이기에 현서 네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
“…….”
“어머니 때문이야?”
“어머니 때문만은 아니고요.”
도하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이 현서를 바라보았다.
“그냥,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오빠를 사랑하지 않나 봐요. 이 모든 게 감당하기 힘들어진 걸 보니…….”
지르듯 말을 던지고 현서는 눈을 들어 남편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말에도 의연할 줄 알았던 남편이 사방이 정지된 듯 그녀에게만 시선을 내리꽂고 있었다.
“다 내 잘못이에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노력을 하려 했던 탓인 거죠. 내가 자만했어요.”
현서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제 상황이 한탄스러워 가슴이 일렁였다.
‘오빠, 우리에게 또다시 아이가 생겼어요.’
이렇게 말할 수만 있다면.
뱃속 아기는 그의 소중한 아이이기도 했기에 현서는 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알면 그는 결코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남편도 회장님도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오빠를 떠나야겠어요. 미안해요.’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은 현서에게 눈을 고정한 채 그녀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왜요, 난 언제까지나 오빠를 짝사랑해줄 줄 알았어요?”
현서는 얼굴에는 덧없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지만 속은 한없이 서글프기만 했다.
실은 아직도 그를 사랑했으니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채도하만을 바라보았는데.
그 마음이 이렇게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거라면 지금의 이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녀의 삶은 채도하를 향한 열차였다. 철부지 같던 열 살 소녀일 때 올라타서 이십 대 후반까지 거의 이십 년의 세월을 내리지도 않고 계속 승차하고 있었다.
채도하라는 사랑의 목적지를 향해 하염없이 달려갔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내려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어쨌든 전 결정했고 결정을 바꿀 일은 없으니 되도록 빠르게 처리했으면 좋겠어요.”
잠시 말문이 막혀 있던 도하는 고민 끝에 입술을 뗐다.
“현서야……. 그러지 말고, 우리 잠시만 시간을 갖자.”
현서는 그 말에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무실 안에는 얼마간의 적막한 공기가 흘렀다. 왠지 이 답답한 분위기가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너도 알잖아. 나한테도 지금까지 여자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었다는 걸.”
신기하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게 오빠가 날 사랑했다는 증거는 아니죠.”
그 말을 하며 현서는 목이 멜 것 같았다.
이제 와 우스운 기분이었지만 지금이라도 도하가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나 보다.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너를 떠나서는 죽을 것 같다고 말해주기를 말이다.
그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미련하게도 버리지 못했었나 보다.
그러나 도하는 자신의 마음에 뚜렷한 확신이 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슴에 찬바람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여자는 이 세상에 이현서, 네가 전부야. 그래서 내가 청혼도 한 거고.”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말의 최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나마 그거 하나를 위안 삼아 여기까지 왔었지.
“오빠. 지금 오빠는 내가 익숙한 거지,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결론은 이거였다. 그는 끝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았다는 것.
“그냥 내가 오빠 옆에 없으면 불편한 거지, 죽을 만큼 힘이 드는 건 아니죠. 내가 아닌 누군가와도 익숙해지면 그냥……. 오빠는 잘살 수 있을 거예요.”
도하는 미간을 움찔댔다.
“이현서. 말이 너무 심하네.”
이현서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니. 그런 상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생각만 해도 어색하고 불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를 똑바로 응시하던 현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 오빠는 예전의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죠?”
“잘 알지. 코흘리개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그런데 그게 왜?”
오랜 인연이었다. 채도하가 한도하였던 시절일 때부터, 진성 그룹 황태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