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너 기다리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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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 기다리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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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 기다리고 있었어
2022.04.18.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김 실장이 들어왔다.
“상무님 안 계시던 동안에 올라온 안건들 확인해 주십시오.”
열어보니 올라온 안건들이 한가득했다.
“급한 거만 받아 놓으시지 그러셨어요.”
“전부 오늘 중으로 결재가 나야 하는 것들만 받았습니다. 오늘 중으로 꼭 결재가 나야 합니다.”
잠시 보류했던 기업 인수 건이 다시 대두되었다. 계속되는 회의와 실태조사 등으로 오전을 외부에서 보내고 점심도 못 먹은 채 이제야 사무실에 들어왔다.
김 실장이 나간 뒤엔 키폰을 눌러 윤 비서를 연결했다.
“커피 한잔 부탁해요.”
실내가 조금 답답했다. 모니터를 노려보며 도하는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소매를 걷어 올렸다.
빨리 하지 않으면 오늘도 퇴근이 늦을 것이다. 현서의 상태가 영 불안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요즘 자꾸 채 회장이 사업에서 손을 놓기 시작하면서 정신없이 바빠졌다.
퇴임을 준비하시기에는 아직 이른데. 서하를 보내시면서 마음에 충격이 컸는지 하나 둘씩 손을 놓으시는 게 느껴졌다.
결재 안건들에 파묻혀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현서의 전화였다. 요즘은 도통 전화를 하지 않는 아내인데. 요즘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듯한 아내의 전화가 내심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염려스럽기도 했다.
이상하다. 무슨 일이 있나?
-오늘 언제 퇴근해요?
“생각보다 많이 늦진 않을 거야.”
요즘엔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아내인데 별일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 너무 늦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도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대답했다.
“알았어.”
-기다릴게요.
평소답지 않게 묘하게 초연한 아내의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도하는 귀에서 뗀 전화기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집에서 언제든 대화할 수 있는데 일부러 전화까지 하며 시간을 묻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기분이 이상했다. 요즘의 아내의 모습에 점점 더 불안해지는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왠지 자꾸만 뒷골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던 영숙은 계단을 내려오는 현서를 발견했다.
그녀는 마침 잘 마주쳤다는 듯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현서를 가리키며 큰소리를 질렀다.
“너는 지금 몇 시인데, 온종일 누워 있다가 지금 내려오는 거야?”
현서는 시어머니 영숙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변명도 없이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집을 나갈 마음을 먹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이제 저 지겨운 목소리도 들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영숙은 무시라도 하듯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가는 현서의 머리채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주혁의 찻값이 생각나 참았다. 대신 현서의 뒤통수에다 대고 외쳤다.
“얘! 근데 너 주혁이한테 돈 보냈니? 오전 중에 보내야 했는데, 안 보냈으면 지금이라도 보내라.”
“무슨 돈이요?”
현서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돈이긴. 너희 조카 태울 차 살 돈이지.”
“조카요? 동서 벌써 아기 낳았어요?”
“뭐어?”
영숙이 놀라 눈을 깜빡이며 어물거렸다.
“이런 이야기 좀 그렇지만, 태어나야 차를 타는 거죠.”
“너는 네 시조카가 잘못되었으면 좋겠니? 하는 말이 왜 그따위야?”
“이야기가 왜 그렇게 건너뛰나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그렇게 예쁘시면 우리 서하도 좀 예뻐해 주시지 그랬나요,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가치조차 없어, 입만 아플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머니, 저 서방님한테 빚진 것 없어요. 제가 왜 돈을 보내야 해요? 저한테 돈 맡겨두셨대요?”
시모는 평소와 달리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은 큰 며느리에게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거기다 빈정대기까지 했으니.
“내가 네 돈 보내라고 했니? 채 회장님이랑 내 큰아들이 번 돈인데 그거도 못 보내?”
현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돈 한 푼 마음대로 쓰지 못하면서 채 회장님과 내 큰아들이 번 돈이라고 큰소리치는 영숙을 보니 왠지 재미있었다.
“그러면 어머니가 보내세요. 회장님이랑 아들이 그렇게 돈이 많은데 왜 가진 거 없는 며느리한테 그러세요?”
현서는 이죽거리듯 말하고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뒤를 돌았다.
그때 였다. 막 주방으로 향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휙 소리와 함께 귀를 스치며 지나갔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바닥에는 고급 본차이나 도자기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영숙이 씩씩대며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소서만이 들려있는 걸 보니 커피잔은 던진 것이다.
현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마음에 안 들면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그나마 채 회장님이 더 이상 회장님의 수집품을 깨뜨리면 카드마저 뺏는다고 해서 거실의 물건은 집어 던지지 못하는 거였다.
하……. 아가야. 엄마가 이런 꼴 보여줘서 미안하다. 이제 곧 예쁜 것만 보여줄게.
“현찰이 없으면 가서 카드로 결제해 주고 와, 당장. 주혁이 차 취소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한심하고 기가 막혔다. 그러나 영숙의 이런 행동은 처음이 아니다. 이런 억지를 당연하다는 듯 들어주었던 탓에 더 버릇이 고약해진 것 같았다.
“어머니, 서방님네 일은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세요. 도하 씨가 다시는 돈 주지 말라고 했어요.”
“……뭐야?”
현서는 영숙에게 큰아들 도하를 핑계 댔다. 왠지 모르지만, 도하는 어머니 영숙에게 냉정했다.
“그, 그놈도 참…….”
신혼 때는 현서가 어머니에게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주라고 말을 해보았지만, 도하는 영숙과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했다.
영숙도 도하가 어려운지 무슨 일이 있으면 아들 대신 항상 만만한 현서에게 말을 전했었다.
“서산댁! 뭘 보고 있어? 깨진 잔 안 치우고.”
현서가 도하를 방패삼자 할 말을 잃은 영숙은 괜히 애꿎은 사람들을 향해 잔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현서는 결국 주방으로 향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깨진 커피잔을 치우는 서산댁 아주머니를 향해 지친 어조로 내뱉었다.
“아주머니 저녁준비는 알아서 하세요, 저 좀 나갔다 올게요.”
“네, 네!”
“야! 너 저녁준비도 안 하고 어딜 나가겠다는 거니?”
화를 삭이기도 전에 현서가 돌발 행동을 하자 영숙은 더욱 도끼눈을 희번덕였다.
“전 나가서 먹고 올게요. 오늘은 저 없이 식사하셔요.”
“뭐? 나간다고? 회장님 오실 때도 다 되어가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
현서의 음식 솜씨가 워낙 출중한 덕에 영숙은 현서가 주는 식사 시간을 즐겼다. 어느새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틀간 아프답시고 방에 처박혀만 있어서 불만이 많아 보였다.
“어머님, 저 시집 생활 5년 동안 저녁 식사 준비 안 한 적이 없어요. 그 시간엔 제 맘대로 외출도 잘 못 했어요.”
“뭐, 뭐야?”
“심지어 서하 장례식 다음 날에도 어머님 드시고 싶다는 구절판까지 해서 바쳤잖아요. 저도 한 번쯤은 나가게 그냥 두세요.”
“아, 아니,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네. 누가 널 묶어 놓기라도 했니?”
순하던 큰 며느리가 이러는 게 너무도 이례적이었던 탓이었나보다. 영숙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말을 더듬었다.
“서산댁, 쟤가, 쟤가 뭐라는 거야?”
그러든지 말든지 현서는 얼이 빠져 있는 영숙과 서산댁을 그대로 두고 돌아섰다.
한시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람처럼 그녀는 부랴부랴 지갑을 챙겨 집을 나섰다.
***
어제는 종일 굶다시피 했다. 오늘은 뭐라도 먹어야겠지 싶어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떠오른 건 엄마표 김치찌개였다.
비록 엄마는 안 계시지만 엄마가 살던 동네에 엄마 솜씨와 비슷한 이모가 하는 음식점이 있다. 거기 가서 먹고 와야겠다.
지금쯤 집은 덜컥 뒤집혔겠지. 영숙이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들어간 이후가 걱정도 되고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통쾌한 기분도 들었다.
늘 시댁 식구들이 어렵기만 했는데 되는 대로 내지르는 것도 생각보다 쉬웠다. 막상 해보니 왜 진작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살았을까 싶다.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
아내의 전화가 은근히 신경 쓰였던 도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일찍 퇴근을 서둘렀다.
막상 집에 와 보니 아래층에도 위층에도 현서가 보이지 않았다. 서산댁만 마주치게 되어 인사를 건네왔다.
“오셨어요?”
“현서 안 내려왔어요?”
서산 댁이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작은 사모님 안 계셔요. 조금 전에 밖에 나가셨어요.”
결혼 후 지금까지 저녁 식사를 준비를 빼놓은 적 없던 아내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해도 미련할 만큼 항상 손수 준비를 하던 현서였는데 자리에 없다.
이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혹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서산댁은 곤란한 얼굴로 영숙의 방 쪽을 향해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돌렸다.
“그게……. 큰 사모님 위로해드리셔요.”
이내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서산댁을 바라보던 도하는 영숙이 있는 안방 문을 흘끗 보았다.
위로?
왠지 기분이 싸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아주 좋지 않았다.
도하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다시 정원으로 나갔다.
아내라면 멀리 나가진 않았을 것 같고 왠지 여기서 기다리면 곧 만날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정원 잔디밭을 서성인 지 30분이 넘어갔다. 기약 없이 기다리던 도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도 묘하게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퇴근하면 대화 좀 하자는 그 초연한 어조가 겹쳐졌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누르려고 할 때였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현서가 들어왔다.
“어디 갔었어?”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자 생각 이상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초조했던 탓인지 말은 지나치게 퉁명스럽게 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지금 퇴근했어요?”
현서는 정원에 서 있는 도하를 보고 발을 주춤했다.
“아니, 좀 됐어. 너 기다리고 있었어.”
의외의 대답에 현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지금 퇴근해서 들어가는 길에 마주친 줄 알았다.
살면서 어느 때라도 그가 저를 기다린 적이 있던가. 항상 기다리는 건 자신의 몫이었는데.
그는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치 어느 화보 속 모델처럼 새삼 멋진 모습으로.
그림 같은 모습으로 정원 속에 서 있는 도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문득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늦은 시간에 집을 다 비우고 무슨 일이야?”
“그냥 나가고 싶었어요.”
“너답지 않은 모습이네.”
“오빠가 아는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데요?”
도하는 날카로운 현서의 반응에 되레 입을 다물었다. 싸움을 피하고 싶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이런 대화가 단절되자 현서는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들어가요. 중요한 할 말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