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결심 (4/92)


#4. 결심
2022.04.14.


시동생 주혁이 요란하게 집 안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현서는 순간적으로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냈지만 이내 비수를 숨기곤 평이하게 내뱉었다.

1654946236309.jpg

“오셨어요?”

현서의 인사를 본 척도 안 한 주혁은 영숙을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16549462363101.jpg

“엄마!”

시동생 주혁이 아침부터 엄마를 찾는다? 그 모습에 현서는 괜스레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지?

시동생 주혁이 시모 영숙을 찾을 때는 항상 사건 사고와 연결되었다. 어떤 사건이든 항상 동서 혜미는 꼼짝도 안 하고 뒷처리는 결국 현서의 몫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남편 도하 모르게 해결한 사고가 한두 건이 아니다.

남편에게 말하지 않으려 애써 꾹 참고 살아왔기에 남편은 그의 식구들이 얼마나 제게 시련을 주는지 미처 다 알지 못한다.

16549462363107.jpg

“우리 아들, 아침부터 웬일이야? 출근은?”

방에서 화장을 하던 영숙은 새빨간 립스틱을 반쯤 바른 상태로 나와 주혁을 반갑게 맞이했다.

16549462363101.jpg

“형하고 아버지는 출근했어?”

주혁은 제 출근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안 하고 뜬금없이 형과 아버지의 출근만을 물었다.

16549462363107.jpg

“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출근했지. 왜?”

영숙 역시 갑자기 아침부터 집으로 쳐들어온 주혁의 행동을 보며 무슨 사고라도 쳤을까 봐 걱정이 됐다.

16549462363101.jpg

“엄마, 나 차 바꿨어.”

16549462363107.jpg

“뭐어? 지금 네가 무슨 차를 벌써 바꿔?”

깜짝 놀란 영숙이 큰소리를 냈다.

16549462363101.jpg

“벤츠야. 2억만 입금하면 돼. 엄마가 입금해줘.”

영숙은 아무렇지도 않게 2억을 달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반쯤 칠한 새빨간 립스틱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괴기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16549462363107.jpg

“너, 너 차 바꾼 지 6개월도 안 됐잖아. 그것도 꽤 비싼 차였는데.”

16549462363101.jpg

“그건 너무 평범한 국산 차고.”

16549462363107.jpg

“2억이 누구 애 이름이야? 부르기만 하면 나오게?”

16549462363101.jpg

“엄마 손자가 태어나서 탈 찬데 벤츠 정도는 돼야지. 1억도 안 되는 차를 엄마 손자에게 태우고 싶어? 벌써 계약했으니까 입금 좀 해줘요. 오늘 중으로.”

주혁의 말을 듣고 나자 영숙은 앞으로 태어날 손자가 탄다는 사실에 내심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16549462363107.jpg

“에이구, 너도 참……. 근데 엄마 지금 마음대로 돈 못 쓰는 거 알잖아.”

16549462363101.jpg

“아, 참 그렇지…….”

16549462363107.jpg

“그놈에 여편네한테 사기만 안 당했어도 내가 사줘도 되는데…….”

영숙은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과거 필리핀에 투자하면 10배 수익을 준다기에 채현우 회장 몰래 가지고 있던 돈에 대출까지 받아 투자했는데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영숙의 헤픈 낭비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채 회장이 이 기회에 도하 카드를 영숙에게 주고 영숙이 가지고 있던 모든 카드를 정지시켜 버렸다.

16549462363107.jpg

“정말 내가 치사해서. 백억도 아니고 천억도 아니고 겨우 몇십억 해 먹은 것 가지고 이렇게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묶어 놓으면 어쩌라는 건지. 빌어먹을.”

엄마 사정상 사줄 수가 없다는 걸 납득한 주혁은 별 대수롭지 않게 현서를 향해 차선의 공략을 해 왔다.

16549462363101.jpg

“뭐, 그럼 형수가 찻값 좀 입금시켜 주면 되겠네요.”

현서는 둘의 앞선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이런 전개를 예상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어이가 없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아들이라고 차를 바꾼다니.

우리 서하는 딸이라고 그렇게 박대를 하더니 아들이라고 시아버지도 타지 않는 벤츠를 산다니 기가 막혔다.

1654946236309.jpg

‘국산 차만 고집하시는 채 회장님이 아시면 잔소리 좀 들을 텐데.’

태풍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어지러웠다. 혼자 절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데 주혁이 시간을 보더니 일어섰다.

16549462363101.jpg

“알았죠? 형수? 부탁할게요. 전 출근길이라 이만 가봐야겠어요.”

현관문 밖으로 나가면서도 주혁은 끈질기게 외쳤다.

16549462363101.jpg

“형수! 오늘 중으로요! 오늘이에요!”

용건을 마친 주혁은 쌩하니 사라졌다.

어이가 없어진 현서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흘렸다. 그녀는 끝내 아무 말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큰 며느리가 긍정적 대답도 없이 들어가버리자 영숙은 속이 끓기 시작했다.

태어날 손자가 탈 차라니 얼른 돈을 보내고 싶었지만, 채현우 회장이 카드 한 장만 달랑 준 덕에 결국 현서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데 그것도 치사했다.

카드로 결제를 해줄 수도 없다. 카드를 긁자마자 사용 내역서가 큰아들 도하 핸드폰으로 간다.

채 회장이 국산 차만 고집하는데 주혁이 벤츠를 산다고 하면 당장에 난리가 나고 취소를 시킬 것이다.

돈은 현서 저것을 닦달해서 보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숙은 냉정한 도하나 채 회장보다 정 많고 곰살맞은 주혁에게 더욱 정이 갔다. 그래서 주혁의 부탁은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16549462363107.jpg

“저 곰탱이를 어떻게 구슬려서 돈을 보내게 하지? 한바탕 난리를 쳐서 집구석을 뒤집어 볼까?”

영숙은 현서를 어떻게 잡을지 고민에 빠져들었다.

1654946241873.jpg

 

***

여유로운 오후, 소파에 앉아 금칠한 잔에 담긴 럼 배럴 커피를 마시던 영숙은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전에 올라간 현서가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는다.

16549462363107.jpg

“서산댁, 얘는 뭐 하느라고 온종일 꼼짝도 안 한대. 얼른 가서 불러와.”

16549462418741.jpg

“작은 사모님 아프시대요. 어제부터 누우셨어요.”

서산댁의 대답에 영숙은 먹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서산댁을 향해 눈을 치떴다.

16549462363107.jpg

“아프면 지금 당장 죽는대? 시어미가 부르면 내려와야지! 얼른 가서 불러와!”

16549462418741.jpg

“예. 근데 정말 많이 아프신 거 같던데”

기죽은 대답 소리와 함께 서산댁 아주머니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영숙은 2층 현서에게까지 자신의 외침이 들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큰소리로 서산댁 아주머니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자신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도 내려오지 않고 있는 큰며느리가 더욱 괘씸한 것이겠지.

똑똑-

대답이 없는데도 서산댁 아주머니가 문을 빼꼼히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16549462418741.jpg

“작은 사모님, 큰 사모님이 내려오시라는데요.”

현서는 자는 척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영숙의 비위를 맞춰주기가 싫었다.

그런데 서산댁이 깨울 기세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16549462418741.jpg

“작은 사모님! 얼른 내려가 보세요! 큰 사모님이 부르셔요. 큰 사모님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

현서는 이불을 당겨 머리 위로 뒤집어쓰며 대꾸했다.

1654946236309.jpg

“몸이 안 좋아서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요. 어머니께 하실 말씀 있으시면 죄송하지만 올라오셔서 말씀하시라고 하세요.”

혼란한 심정이 극에 달한 탓일까.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16549462418741.jpg

“네에? 자, 작은 사모님, 많이 아프세요?”

현서는 이제야 아프냐고 묻는 서산댁 아주머니에게도 서운했다. 영숙이 괄시하니 사용인들도 모두 자신을 하대했다.

1654946236309.jpg

“나가보세요.”

16549462418741.jpg

“네. 그럼 큰 사모님껜 많이 아프시다고 전해드릴게요.”

한껏 곤란해하던 서산댁이 문을 닫고 내려갔다.

오로지 혼자 남은 방 안이 적막했다.

임산부가 되니 감정 기복이 심해져서인지 유독 센티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고 위로가 필요했다. 위로해주고 감싸 안아주고 괜찮다며 쓰다듬어 주던 엄마의 손길이 그리웠다.

1654946236309.jpg

‘엄마, 미안해. 내가 괜히 고집을 피워서. 엄마가 그렇게 염려를 했는데.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도하 오빠만 보여서 고집을 피웠어.’

현서는 이제는 세상에서 자신을 위로해주고 감싸 안아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진 것이다.

서산댁에게 현서의 상태를 전해 들었는지 아래층에서 영숙이 지르는 고함소리가 머리를 울려왔다.

그 소리에 더욱 서러워 현서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더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엄마와 서하를 보낼 때조차 이렇게 맘껏 울어보지 못했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현서는 그렇게 속에 있는 설움을 쏟아냈다.

1654946236309.jpg

“아가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까. 엄마랑 나갈까?”

자신을 찾아온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왠지 이대로 있다간 이 아이도 잃을 것만 같았다.

1654946236309.jpg

“불쌍한 우리 아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지?”

현서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렇게 누워만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침대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현서는 벌떡 일어나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결혼 이후 종종 도하가 사다 준 패물이 들어 있었다.

패물을 몽땅 꺼내 보던 현서는 이내 한쪽에 내버려 두고 드레스룸으로 가서 가방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더는 없다. 팔아서 돈이 될 게 없다. 결혼 패물을 빼곤 돈이 될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원래 악세서리나 명품백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도하가 선물한다고 할 때 거절하지 말걸, 지금에 와 후회가 밀려왔다.

현서는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나가면 뭘 해서 우리 아가를 키울까.

솔직히 사회에 나가 혼자 아이를 키울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칠 상황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잠시 했었지만 이미 경력이 단절된 지도 오래 인데 당장 나가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내 전부를 바친 채도하가 여기 있는데, 버리고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

어릴 적 첫눈에 반한 이후로 지금까지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남자였다. 그렇기에 그런 지독한 일을 겪고도 아직도 이 집구석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 도하를 떠나서 버틸 수 있을까.

도하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원래의 성격조차도 잃어버리고 살아왔었다.

1654946236309.jpg

“아니지. 이제 그만 하자. 종처럼 이 집에서 산 세월이 너무 길었어. 이젠 정신을 차려야 해. 이제는 아기만 생각하자.”

 

16549462448671.jpg

 
오래된 습관처럼 붙들고 있던 남편을 드디어 놓을 결심을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막막했다. 이 집을 나가도 반겨줄 사람도 없다는 게 기가 막혔다.

1654946236309.jpg

“대체 난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던 걸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도하에게 맞춰서만 살았다.

사람도 커리어도 남은 게 없었다.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오직 이 집 식구들의 시중을 들며 그게 행복이라고 스스로 세뇌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바꿀 수밖에 없었다. 비록 망망대해를 향해 나가는 상황이라도 부딪쳐봐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도하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의 결실이니까 제2의 인생을 살아가야겠지.

나가야 해, 이현서.

이 집 며느리가 아닌, 채도하를 사랑하는 아내가 아닌, 본래의 나 이현서로 내 아가와 함께 행복할 날만 생각해야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