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아온 남편
(1/92)
1. 돌아온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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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아온 남편
2022.04.04.
현서는 한날에 엄마와 딸아이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그녀도 죽었다.
“미안해, 엄마. 엄마한테 내가 너무 미안해…….”
매일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모를 나날들이었다. 그저 시댁 식구들을 응징하고픈 마음뿐.
친정엄마 혜수와 딸 서하. 소중한 두 사람의 사진이 다정했던 생전처럼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엄마. 내 딸…… 우리 서하 잘 있지?”
사진 속 두 사람의 미소가 티 없이 맑았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세상 시름이란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둘의 모습이 생생하고도 참으로 아득했다.
"아가야, 엄마가 만나러 갈 때까지 할머니랑 잘 지내. 금방 갈게.”
현서는 딸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숨이 막힐 것 같아 가슴을 틀어쥐었다.
통통한 볼에 입을 맞추면 빵실 웃어주던 사랑스러운 아이. 품에 꼭 안으면 말랑하고 따듯했던 딸아이의 작은 몸.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없고 그 몸을 다시 안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단 하루도 그 현실을 납득하지 못한 채로 그런 매일이 쌓이고 쌓여 1년이 되었다.
“엄마, 나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매일 지독하게도 실감하고 있어."
딸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여전히 납득하기가 싫었다.
"엄마가 엄마 손녀, 여기서처럼 억울한 대접 안 받고 사랑만 받을 수 있게 잘 돌봐줘. 다시 만날 때까지 엄마만 믿을게.”
눈물을 머금은 그녀는 엄마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꼭 복수할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줘. 사랑해. 엄마 사랑해, 우리 아가 사랑해.”
고즈넉한 추모공원. 예전에는 아버지를 모셨고 엄마 혜수를 모시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곳에 혜수와 서하를 나란히 놓았다.
죽은 자들을 위함인지 산 자들을 위함인지 모를 조경이 붉은 가을의 정취를 나타내며 쓸쓸하게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죽은 자를 추모하는 방문객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이 서글프게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현서는 두 사람의 웃는 얼굴에서 천천히 물러섰다.
이제는 가야 한다.
또다시 그 집에 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또 하루를 지내야 한다.
***
“형님, 저 왔어요.”
“얘, 우리 아직도 점심 안 먹었다. 네가 시원한 바지락 칼국수 좀 끓여 봐라. 둘째 얘가 네가 해 준 바지락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해서 내가 집으로 데리고 왔다.”
시어머니 한영숙이 아랫동서 혜미와 함께 들어오며 카랑카랑한 목청을 높였다.
“식사 때가 늦어서 얘 배 많이 고프니까 어서 서둘러라, 어서.”
그럼 미리 전화라도 좀 주시지, 라고 말하려던 현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두 여자의 뒤로는 김 기사 아저씨가 양손 가득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김 기사 아저씨, 내 건 이쪽. 어머니 건 저쪽.”
김 기사는 시키는 대로 부랴부랴 쇼핑백을 양쪽으로 나누어 두었다. 곧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현서를 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김 기사님, 잠시만요.”
현서는 빠르게 주방으로 사라지더니 곧 쟁반에 주스 한잔을 따라 가지고 나왔다. 그러곤 현관 밖으로 나가려는 김 기사에게 잔을 내밀었다.
“고생하셨는데 주스 한잔 드시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작은 사모님.”
김 기사는 큰 사모 한영숙의 눈치를 흘끗 보더니 잔을 들고 한 번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쫓아다니느라고 꽤나 힘들었나보다.
“얘, 너는 둘째 배고프다는데 얼른 식사 준비 안 하고 뭐 하고 있어? 하여간 또 쓸데없는 오지랖은……. 으이구.”
한영숙은 평소에도 현서가 일하는 사람들을 챙기는 걸 마음에 안 들어 했다.
“얘가 지금 홑몸도 아닌데 끼니가 늦으면 되겠니. 잘 먹여야 튼튼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어머니, 저 괜찮아요. 아까는 배가 고팠는데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
“그러게 내가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영숙의 시선은 혜미를 향해 살갑게 빛나다가 이내 현서를 향하며 표독스럽게 변했다.
“얘가 굳이 네가 만든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해서 집으로 왔는데…….”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괜히 형님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해서 어머니만 시장하시게 했나 봐요. 형님도 불편하신가 본데 저희 지금이라도 나가서 사 먹고 와요.”
혜미가 엉덩이를 들썩이는 시늉을 하자 현서는 얼른 두 손을 들어 저지해야 했다.
“아니야, 동서. 마침 바지락 해감해 놓은 것도 있고, 금방 끓여줄게. 조금만 기다려.”
그러나 현서가 주방을 향해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뒤에서 두 사람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좌우지간 굼뜨기나 하고. 뭐하나 똑 부러지는 게 없지.”
“괜히 제가 죄송하네요. 형님이 오늘은 별로 하기 싫어하시는 거 같아요.”
어쩌면 모르는 척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너만 아들 가졌다고 그러는가 보지.”
“설마요. 임신이 유세도 아니고.”
“제깟 게 저런 일마저 못 하면 어디에다 써먹는다고…….”
걸음이 주춤할 뻔했지만 현서는 스스로 귀를 닫았다. 입술만 잘근 깨물던 그녀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갔다.
맛깔스러운 칼국수가 완성되자 현서는 곱게 떠서 식탁에 놓으며 서산댁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나가셔서 어머니랑 동서한테 식사 준비되었다고 하세요.”
“네. 작은 사모님.”
“저는 이만 들어갈게요, 나머지는 아주머니께서 정리 좀 해주세요.”
현서는 앞치마를 던지듯 벗으며 현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뻔뻔스러운 인간들을 위해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내내 죽을 것 같은 갑갑함이 누르고 눌렀다.
참다가 한계에 다다라 도저히 제어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저 인간들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게 될 것만 같았다.
시원한 공기라도 마셔 자신을 제어해야만 했다. 도저히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와 서하를 보고 온 날이면 더욱 심해지는 증상이었다.
현관문을 벌컥 열고 나가자 단추가 겅중겅중 뛰며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어 댔다. 지금은 커다래진 하얀 사모예드였다.
작은 강아지였던 시절 처음 이 집에 데려왔을 때 서하가 자신이 입고 있던 원피스의 까만 단추랑 강아지 눈이 닮았다고 이름을 단추라고 지었다.
“단추야. 나 오늘 서하 보고 왔어. 너도 서하 많이 보고 싶지?”
현서는 단추를 끌어안고 조곤조곤 읊조렸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어 이 커다란 솜뭉치 같은 녀석에게라도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이렇게 바보처럼 살고 싶지 않은데. 꼭 되갚아 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언젠가 말이야.”
단추는 현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며 낑낑거렸다.
현서는 단추의 희고 고운 털을 쓰다듬다가 그 복슬한 등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유난히 개를 좋아하던 서하를 생각했다.
순한 단추가 서하를 등에 태우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면 서하는 단추를 끌어안고 깔깔대며 좋아했다.
그럴 때면 시모 영숙이 계집아이가 개 등에 올라탔다며 재수 없다고 잔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때라도 제대로 알아차릴걸. 그녀가 얼마만큼 손녀에게 비정한 조모였는지를.
분노에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있던 그때, 굵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서야.”
눈을 반짝 뜨이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남편 채도하였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그러니까, 몇 달 만이었다. 그가 해외 지사로 떠난 후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만나기까지.
정원으로 들어서던 그가 발길을 멈추었다.
“서하에게 다녀온 거야?”
저 냉철한 얼굴은 남들 보기에는 표정 변화가 잘 없어 보일 테지만 현서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한구석에서 개를 끌어안고 가슴을 펑펑 두드리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고는 놀라고 있다는 걸. 다만 내색하지 않으려 할뿐.
“며칠 뒤에 오는 거 아니었어요?”
“일정 당길 수 있었어. 너 전화 안 받던데.”
“아……. 몰랐네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전화기도 팽개쳐두고 들여다보지 않았다.
“오늘…… 서하 기일이잖아.”
기억하고 왔구나. 오늘, 남편이 함께하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단출한 캐리어 하나만을 끌고 온 그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도 일을 막 하다 온 사람처럼 반듯한 정장 차림이었다.
늘 그렇듯 흐트러짐이란 없는, 근사한 모습이었다.
그는 늘 완벽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언제 어느 때라도. 일도 가정도. 이런 날조차도.
아마도 이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도하의 모습에 현서는 왠지 이러고 앉아 있는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개만 끌어안고 앉아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던 도하가 보다 못해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자…….”
현서는 남편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끝내 잡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잠깐의 어색한 공기가 흐른 뒤 도하는 손을 거두었다. 억지로 일으키지는 않기로 했다.
“해 지면 쌀쌀해. 늦지 않게 들어와.”
“…….”
대꾸 없는 현서를 잠시 바라보던 도하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발을 뗐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혜미와 영숙이 쇼핑한 물건을 보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아주버님! 오늘 한국 들어오신 거예요?”
혜미가 유독 반색을 표하며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예.”
도하는 마지못해 대답하며 영숙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영숙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뭐야, 오늘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네 처는 왜 그런 얘기도 안 해준다니. 참나.”
“연락이 안 됐어요.”
“연락이 왜 안 돼?”
“오늘은 워낙…… 힘든 날이잖아요.”
도하는 서하의 기일에 어울리지 않게 떠들고 있는 영숙과 혜미에게 뼈가 담긴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영숙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도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대충 눈치를 챈 영숙은 찜찜한 표정을 짓더니 되레 큰 소리를 냈다.
“그래서, 현서 걔는 아직도 그 궁상을 떨고 있냐? 한참 전에 나가서 지금까지 저러고 있다.”
“어머니.”
영숙이 현서에 대해 한소리를 늘어놓자 도하가 매서운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궁상이라니요.”
그 모습을 본 영숙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세요. 그것도 오늘 같은 날에. 아무리 어머니라도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하, 함부로 하긴 누가! 그냥 오늘따라 궁상이 기니 해본 말이지……. 이제 1년이나 지난 일이잖니.”
영숙은 뜨끔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아들이 없는 동안 괄시해오던 버릇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죠. 저 사람 그냥 놔두세요. 아직 힘들 때라는 거 아시잖아요.”
도하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기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들이 올라가 버린 걸 확인한 영숙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다시 구시렁거렸다.
“제 동서가 아들을 가졌는데, 저녁해서 먹일 생각은 안 하고 밖에서 청승만 떨고 있으니. 쯧쯧……. 저렇게 시샘을 해요. 시샘을.”
그사이 도하가 올라가 버린 위층을 향해 혜미가 눈을 흘끗댔다.
“아주버님도 오셨으니 같이 저녁 드시겠죠?”
도하가 오자마자 사라져버리자 못내 아쉬운 혜미가 물었다.
“모르지.”
영숙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시모는 꿈에도 모르지만, 사실 혜미는 결혼 전부터 시아주버니 도하에게 반해서 이 집을 유난히 더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모델처럼 쭉 뻗은 장신에 군살 하나 없는 멋진 몸매에 크고 날카로운 눈매, 깎아 놓은 듯한 콧날, 부드러운 입술선, 날렵한 턱선, 어디 하나 부족한 곳이 없는 남자였다.
어떤 연예인보다 잘생긴 사람이 시아주버니다. 아쉽게도 제 남편이 아닌.
도대체 남편 주혁은 누굴 닮은 건지 형제가 하나도 닮지 않았다.
우월한 유전자는 왜 다 저 사람에게 몰빵 된 건지!
생각할수록 현서에게 화가 났다.
왜 내가 아니라 저 모자란 여자인 거야?
이 생각만 하면 이런 결혼을 시킨 시어머니 영숙에게도 화가 났다.
저렇게 보기만 해도 빛나는 채도하가 자신과 먼저 맺어졌더라면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었을 텐데…….
그런 망상을 혜미는 요즘도 가끔 하곤 했다.
“그나저나 주혁이는 언제 퇴근하니?”
“퇴근할 때 됐어요. 저 데리러 이리로 온다고 했어요.”
“그래, 마침 잘됐네. 그럼 저녁 먹고 가라고 해. 아줌마, 저녁상 차려요.”
이어 영숙은 주방을 향해 고개를 빼고 서산댁에게 소리를 쳤다.
“그럼 어머니, 제가 한번 올라가서 아주버님께도 식사하실 거냐고 여쭤볼게요.”
혜미는 자꾸 위층 계단 쪽으로 몸을 틀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집에 오셨으니까 가족이랑 저녁은 드시겠죠.”
그런데 그녀가 엉덩이를 들썩이는 순간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괜찮아, 동서. 내가 올라가 볼게.”
언제 들어왔는지 현서가 눈앞에 서 있었다.
“홑몸도 아닌데 무리하면 안 되잖아. 아깐 몸 힘들다고 물 떠다 먹는 것도 어렵다며.”
“아…….”
“2층 계단까지 납시기는 더 힘들지 않겠어?”
몇 시간 동안 쇼핑은 했으면서도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앓는 얼굴로 현서에게 갖은 수발을 다 받았던 그녀였다.
이제 안정기라 의사가 가벼운 운동을 권했다며 백화점에서 한껏 걷고 와서는 큰 동서가 물 한 컵도 턱주가리 아래에 가져다 바치길 바라던 그녀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