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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0 탄생
D-8
달이 밤하늘에 한참 차오르고 있는 늦은 시각..
경철은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두 눈을 감은 채 있었다.
자고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철이 현재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명상' 이었다.
원래부터 하던 일은 아니었지만.. 요 근래 할배에게서 요령을 전수받은 덕분에 혼자 있
는 시간이나 짬이 나는 시간에 이런 식으로 명상을 하며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는 했
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 길티에게 야간훈련을 하지 못한다고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한솔의 상태가 이상해서 오늘 하루는 쭉 붙어 있을 모양이라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경철은 평소에 길티와의 훈련으로 소비하던 긴 밤을 할배에게 배운 명상으로
보내기로 했다.
경철은 솔직한 심정으로 명상은 그냥 눈 감고 멍 때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만.. 할배에게서 요령을 터득한 뒤에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명상이란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나 제대로 수면을 취할 수 없는 자신에게 있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이고.. 어느 정도 정신적인 피로를 풀어주면서 마음의 안정까지 찾을 수 있었기에.. 수
면 대용으로서는 그 이상 없는 최적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아침해가 뜰 때까지 이대로 명상을 지속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던 경철이었지만..
그런 경철의 안식을 방해하듯.. 작은 노크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누구지?"
그저 작은 노크소리가 들렸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진 경철은 자신의 미숙
함에 쓴웃음을 지은 채 노크의 주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일세."
연륜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가 문의 밖에서 들려왔다.
"노인장?"
이 연구시설 내부에 이런 목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할배 단 한사람뿐이었기에.. 경철
은 어렵지 않게 노크 소리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부좌를 풀고 침대에서 내려온 경철은 방의 문을 열었다.
"여어~ 오늘 저녁 시간 있나?"
손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지은 할배는 그렇게 말했다.
"시간...? 아..."
할배의 말에 의아하던 경철이었지만.. 들어 올린 할배의 손에 들려져 있는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라면 없어도 만들어야겠죠."
안에든 내용물들은 각양각색의 술병들.. 주당이라고 할 수 있는 경철에게 있어서는 거절
할 이유는 없었다.
"허허! 그럴 줄 알았지! 그런데.. 미안하지만 밖에서 마셔도 되겠나? 그럴 일은 없다
고 생각하지만... 자칫 실수(오바이트) 했다가는 이 방이 독극물 투성이가 될지도 모르
니까 말일세."
할배의 몸 안은 현재 '독'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고.. 이런 상태의 할배가 안의 내용
물을 토해낸다면 그것은 이미 '맹독성의 물질' 이었다.
"그러도록 하죠."
그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고.. 이런 세계에서는 귀하다고 할 수 있
는 술을 이런 골방 같은 곳에서 마시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경철은 할배의
말에 바로 찬성했다.
"좋아! 그럼 가도록 하지!"
할배는 콧노래를 흥얼 가린 채 앞장서 걸어나갔고.. 그 뒤를 경철이 따라나섰다.
"악어.. 자드는..?"
경철은 할배의 오른손.. 자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녀석 말인가? 자는 중일세. 이렇게 보여도 일단 자라나는 사춘기 소년이니까 말일
세! 허허허!"
"사춘기입니까..."
할배의 말에 경철은 어디서 난 것인지 알 수없는 안대를 눈에 뒤집어쓴 채 반쯤벌려진
입 사이로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중인 자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들었지만.. 악어의 얼굴이라고 밖에 생각할수 없는 그 얼굴에서 그
런 사춘기 소년대의 나이를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달도 밝고 하니.. 옥상 어떤가?"
"달구경이라.. 운치 있어 좋군요."
"허허허! 그나마 나이대가 가까워서 그런지.. 잘 아는군!"
그렇게 두 명은 달 구경을 하며 술을 마시기 위해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고.. 얼마 지나
지 않아 옥상의 한중간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어차..! 자! 자! 이것저것 있으니까 골라보게!"
할배는 비닐봉지의 입구를 열고 안의 내용물들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흘려냈다.
"소주..맥주에.. 럼주... 보드카.. 응? 이건 스피리터스!? 잘도 이런 물건이 있군
요."
경철은 스피리터스라고 써져있는 병을 들어 올렸다.
세계 최강의 도수를 자랑하는 술중 하나.. 알코올 도수 96도의 술이었다.
"이거참 그리운 물건이군요. 젊었을 적에는 제법 마셨었는데.."
젊었을 적 동료들과 내기를 할 때 자주 마시던 물건이었기에 경철은 그때를 짧게 회상
한 채 미소 지었다.
"허허! 자네 도인가? 나도 동료들과 술판을 벌일 때 벌칙 주로 자주 마셨던 녀석이
지.. 뭐 언제나 필름이 끊겨버려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의외로 사람이란 건 거기서 거기인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연기자와 용병.. 전혀 다른 직종에 종사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공통된 추억이 있다는
것에 왠지 모를 공감을 느낀 경철은 자신도 모르게 감상적인 말을 흘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좋아! 그럼 시작은 이걸로 가볼까?"
"좋습니다."
첫 술을 96도의 괴물술로 시작하기로 한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의 잔에 넘
치기 일보 직전까지 술을 따랐다.
"첫잔은..."
"원샷!"
두 사람은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조심스럽게 서로의 잔에 부딪치게
한 뒤.. 그대로 괴물 같은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크흐으으! 그래 이 맛이야.. 이 목구멍을 불태우고 뇌를 삐걱거리게 하는 맛!"
"저희떄는.. 불타는 휘발유를 들 이 붙는 느낌이라고 표현했죠."
막상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그런 술을 잔 한가득 원샷 한 인간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멀쩡한 모습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감상을 내뱉었다.
"그립구만 그리워.. 하지만 아쉽기도 하군..."
"그렇군요.."
딱히 무엇이 아쉽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철은 할배가 어째서 아쉬움
을 나타내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취기' 였다.
젋었을떄는 물론이고.. 그때보다 나약해진 자신들의 몸이라면 이 한 잔으로 취기가 오르
던가 아니면 그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야 됐을 터..
하지만 그들에게는 별다른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분명 알코올이 몸에 도는 느낌은 있었다.
있었지만.. 96도의 술을 먹은 것치고는 상당히 미적지근 한 느낌.. 굳이 느낌으로 치자
면 달콤한 칵테일을 한두 잔 정도 마신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자신들이 이런 술에 이 정도의 취기밖에 느끼지 않는가.. 하는 것은
각자가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인간'을 초탈했기 때문...
그 탓에 이런 독하디 독한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다지 큰 취기를 느낄 수
가 없었다.
"뭐.. 술에 취하지 못한다면.. 분위기에라도 취하면 되겠지!"
"때 마침 달도 만월이니.. 딱 이군요."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었고.. 각자가 자신의 잔을 환하게 비추
고 있는 달을 향해 들어 올렸다.
"환하게 빛나는 달을 위하여!"
"위하여!"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바로 자신의 입가에 컵을 가져가 안에 있는 내용물을 목구멍 안
쪽으로 삼켰다.
단지..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3분의 1정도만 마셨다.
자신들의 몸 상태로 취하는 것은 무리였고.. 그렇다면 천천히 마시며 느긋한 심정으로
달구 경이라도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후우.. 좋군.. 좋아... 이런 식으로 같이 술을 마셔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건...
"어쩔수 없죠.. 그 녀석들이 술맛을 알리가 없으니까요."
현재 이 연구시설에 있는 인간들 중 술을 좋아하는 인간은 두 명을 제외한다면 단 한
명.. '그녀' 뿐이었지만.. 임산부인 그녀는 논외였고.. 다른 이들은 그 쓴 걸 왜 마시
냐는 반응이었다.
"허허허! 아이들에게는 아직 달달한 음료수 쪽이 더 좋을때려나!"
"이런 세계이니.. 차라리 술맛을 모르는 쪽이 더 날지도 모르겠군요. 술맛을 아는 건
저희 같은 구시대 인간이면 충분한 일이겠지요."
컵 안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신 채 경철이 말했다.
"구시대 인간인가...허허.."
경철의 말에 할배는 자신의 술잔을 내려다봤고.. 투명한 액체에 늙은 자신의 얼굴이 비
추어진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제가 실례되는 말을 했습니까?"
"응? 허허허! 아니야! 아니야! 뭐 구시대 인물인 건 틀림없으니까 말이야!"
할배의 반응이 자신의 말에 언짢아졌다고 생각한 경철이었지만.. 그런 경철의 말을 할배
는 바로 부정했다.
"나야 곧 '퇴장' 해야 하는 퇴물이니까 맞는 말이지.. 하지만..."
할배는 잔에 든 투명의 액체를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긴 뒤 그 비어있는 잔을 바닥에 내
려놓고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경철을 가리켰다.
"자네는 아니야. 자네의 퇴막은 아직이야."
"저 말입니까..? 저도 눈 깜짝할 사이에 60이 됩니다. 여기에 있는 젊은애들과 비교하
면 '고인물'이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어려.. 나이나 능력이나 그런 게 아
니라.. 인생의 경험이 너무 얕아. 물론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기는 하지
만..."
할배는 말끝을 흐린 채 조용히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밤 하늘을 눈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는 만월의 눈부심에 할배는 조용히 눈
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눈을 뜬 할배는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려 경철에게 내밀었고.. 경철은 말
없이 할배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가득 찬 자신의 잔을 한번 내려다본 할배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뒤 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시간이 흘러 인생 경험을 쌓아가는 그 과정에서 틀어지지 않게 조율해줄 수 있는 인간
이 필요해. 연륜 있고 경험도 많은.. '고인물'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게 꼭 저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할배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던 경철은 그런 반문을 내세웠다.
즉.. 자신이 아니라 할배 본인이 해도 되지 않냐고 하는 의미였다.
"난 안돼.. 이런 '독'을 품고 있는.. 제대로 부대낄 수조차 없는 이 몸으로는.. 애초
에 무리지.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자네여야해."
자조 섞인 미소를 띤 할배는 경철의 눈을 바라본 채 말했다.
평소의 장난기도 가벼움도 없는.. 묵직하고 올곧은 그 눈동자에.. 압도당한 경철은 아
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아직 반이나 남아있는 자신의 술잔을 묵묵히 바라볼 수밖
에 없었다.
간파당해버렸다.
마지막 싸움이 될지 모르는 그 전장에서..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을.. 할
배에게 간파당해버린 것이었다.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자신 혼자만 묵묵히 가지고 있던 그 생각을.. 할배는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그리고 방금 전의 그 발언은 그런 자신의 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네. 사람이란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인
순리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그냥 노인네의..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인생 선배의 조언
정도로만 생각해주게나."
"................"
할배의 말에 경철은 대답 대신.. 자신의 술잔에 남은 액체를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긴
뒤.. 조용히 할배에게 잔을 내밀었고.. 그런 경철의 모습에 할배는 웃음을 띤 채 외롭
게 비어있는 잔을 외롭지 않게 가득 채워나갔다.
"그럼.. 이 미친 세상을 이끌어가야 할 젊은이들을 위하여 건배라도 하지!"
거의 비워져 가는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할배는 자신의 잔을 낚아채듯 잡아 올린 채
경철을 향해 들어 올렸고.. 그것에 응하듯 경철 역시 말없이 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젋은이들을 위하여 건배!"
"...건배"
그렇게.. 옛 시대의 인간들이 들어올린..
옛 시대의 술이 가득 담긴 유리 잔이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를 만월이 밝게 빛나는 밤하늘에 울려퍼트렸다.
============================ 작품 후기 ============================
역시 중년 노년 캐릭터는 진리..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