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4 / 0269 ----------------------------------------------
Ep 9 재회
아침 식사를 끝내고 뒷정리까지 완전하게 마무리를 한 일행은 트럭에 탑승했다.
운전수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경철은 당연히 운전석에.. 그리고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해야 하는 길티는 바로 그 옆자리에 착석했고.. 나머지의 여성 3인방은 컨테이너 쪽의 좌석으로 이동했다.
모두가 착석한 것을 확인한 경철은 그대로 버스의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아 출발했다.
"어제 가리켰던 방향으로 가면되는건가?"
어제 오후 길티가 지정해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철이 물었고 길티는 꾸벅하
고 인형탈을 세로로 흔들었다.
"이왕이면 말로 해주면 안되겠냐? 이쪽은 운전 중이니까.. 한눈팔다가는 사고가 날 수
도 있다고?"
물론.. 이 불도저를 연상케하는 트럭이 쉽게 사고가 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지면이 몹시 불안정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기에 방심은 할 수 없었기에..
이왕이면 시선은 언제나 정면을 유지하고 싶었다.
"나..나..마.마말..이상..이상..하..하다."
"하핫! 덩치는 큰 주제에 부끄럼쟁이군."
길티가 자신의 말이 서투른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경철은 유
쾌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좀더 많이 내뱉다 보면 지금보다는 익숙해질 테니 마음껏 내뱉어 봐라. 어차피 오늘
새벽에 네 꼴사나운 모습은 잔뜩 봤으니.. 이 정도는 부끄러운 축에도 못 낄 테니까 말
이야. 좀 더 입 밖으로 이런저런 말들을 꺼내봐라. 내 심심풀이 겸 네 연습 겸 딱 좋겠
군."
오늘 새벽 경철에게 지도를 받은 길티는.. 그야말로 남들이 보기에 상당히 민망할 정도
로 많은 실수를 했다.
자신의 다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주먹을 휘두르다가 힘 조절을 못해 자신
의 인형탈을 자신 스스로가 때린다는 콩트 같은 짓까지 벌일 정도로 실수가 많았고..
당연하게도 경철은 그 실수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본 상태였다.
"무무..슨..무슨말..?"
"그렇군.. 오늘 새벽에 배웠던 것들에 대한 감상 같은 건 어때?"
"저전보다다.. 고,공격 빠빠..빠르다...그그리..리고..가가강하다다."
길티는 새벽에 배웠던 복싱의 기술들을 떠올리며 감상을 말했다.
그저 무턱대고 힘에 맡긴 채 휘두른 것보다 속도는 물론이고 파괴력까지 오른 것을 길티
는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게 익숙해지면 다음에는 좀 더 강력한 걸 알려주마."
"기..기대..기대된.된..다다"
"하핫! 그렇군.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는 건 강함을 목표로 하는 남자로서는 두근거리
는 일이지!"
어제까지만 해도 장례식장 마냥 조용하고 과묵한 공간이었던 운전석 쪽의 두 남자 사이
에는 활기와 웃음이 넘쳐났다
"아저씨랑 길티랑 무슨 일 있었나? 상당히 친해졌네?"
그런 두 남자의 웃음소리와 끊이지 않는 대화가 얼핏 들렸기에.. 그녀는 그런 의문을
입에 담았다.
"브로맨스..."
그런 그녀의 의문에 반응하듯 나라는 두 남자의 등을 바라본 채 중얼거렸다.
"어? 뭐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탓에 제대로 들을 수 없던 그녀는 자신의 귀를 나라 쪽에 근접
시킨 채 말했다.
"아,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뭐야? 아직 잠이라도 덜깼냐?"
명백하게 수상해 보이는 반응을 하는 나라를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지,진짜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그, 그건 그렇고.. 언제쯤이면 도착하는 걸까요?
나라는 자신의 이상함을 대놓고 넘기기 위해 빠르게 주제를 전환하기 위한 말을 내뱉었
다.
너무나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호기심이 동하는 그녀였지만.. 나라가 입에
담은 그 말은 자신도 궁금했던 사항이었기에 나라에 대한 것은 넘어가기로 했다.
"벌써 4일째니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같기는 한데..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답
답해 죽겠네.."
길티의 말로는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단지.. 거리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도..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지도 알지 못했기에 이
여행의 종착지에 언제 도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녀들은 물론 길티 역시 알지 못
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여행만큼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없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2달이 넘는 시간을 여행했던 그녀였지만.. 그때는 확실한 목적지
가 있었고 거리가 얼마 정도 되는지도 알았기에.. 비록 도착하면 새로운 여행이 기다렸
지만.. 적어도 여행의 끝을 대충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초조하고 불안하지는 않았지
만.. 이번 여행은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탓에 상당히 초조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동 수단도 있고.. 외국에 비교해서 땅덩어리도 넓은 편이 아니니니
까 조만간 도착하지 않을까요?"
걸어서라면 몇 달이 걸릴지 몰랐지만 지금은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 트럭이 있었
기에 여태껏 해왔던 여행보다 훨씬 빠르고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기에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라는 그런 이유로 초조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
다.
오히려 나라가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전 오히려 미도를 끌고 간 그 '여성'이 걸리네요."
아무도 직접적으로 끌려간 것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정황상으로 보면.. 길티가 마지
막으로 목격한 그 '여성'이 그의 머리를 가지고 간 것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그의 '패배' 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빌어먹을 년 말이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분위기가 단숨에 돌변해 적의와 살의를 뿜어내
기 시작했다.
"그년은 꼭 죽인다."
여성만 아니었어도 그와의 재회가 좀 더 빠르게 진행됐을 터였지만.. 그 여성의 덕분
에 이런 추가적인 고생을 하게 된 것 모자라.. 그의 머리를 베어버리기까지 한 그 여성
을 그녀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그 여성은 명백하게 그녀의 마음속 원한 대
상 넘버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후우.. 아무튼 그 여자는 내가 때려죽일 테니까 걱정하지마."
짧게 심호흡을 하며 여성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감춘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맡긴 채 편
안한 모습으로 별거 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당신이 강한 건 알지만.. 그래도 걱정되네요. 거기에 배도 불러서 예전만큼 움직이는
것도 힘들 것 같고요."
불룩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배는 누가 봐도 그녀가 임산부라는 것을 알릴 정도로 몹시 부
풀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녀의 거동도 홀쭉했던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제한을 받
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무지막지한 힘이나 육체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에.. 그녀의 주무기인 철골을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적은 오체 분쇄시키기
에 충분했지만 역시 배가 나온 만큼 물리적인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혹시 공격을 잘못 받았다가.. 아이한테 문제가 생길수도..."
"뭐.. 그 건에 관해서는 걱정 없을 것 같은데.. 애초에.. 나 이 힘을 얻고 나서 다친
적은 딱 한 번밖에 없다고?"
"있는거 자체가 문제잖아요!?"
없다면 걱정이 되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 튼튼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는 사실에 나라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때는 뭐.. 방심했었으니까.. 애초에 대충 철골 한번 휘두르면 풍압에 날아
갈 정도로 강도가 쌔지 않으니까. 방어하는데 문제가 없기도 했고 말이지.."
그녀는 그의 단서를 찾기 위해 다녀갔던.. 흡혈귀 실베른이 리더로 있던 주상복합상가
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분명 그때는 방심한 탓에 뭣도 모르고 꿰뚫릴뻔했지만.. 그 이후는 별다른 어려움 없
이 대처할 수 있었다.
즉 분명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만 주의를 한다면 몸에 닿
을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아.. 정말 걱정되네요..."
하지만 나라에 있어서는 그녀가 대처를 할 수 있든 없든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
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걱정이었다.
"오히려 나는 네가 걱정이다만.."
"윽..."
방금 전까지와는 반대의 입장이 된 탓에 나라는 차마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연구시설에 쳐들어갔을 당시 나라가 '납치' 당했던 일 때문이었
다.
설마 안전한 곳에 두었던 나라가 납치당한 것도 모자라 인질로 사용될 줄은.. 경철도
그녀도 꿈에도 몰랐었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한솔 일행이 적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적이었다면 무슨 일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
을 것이었다.
"언니는 내가 지켜줄게!"
"정말 믿음직 스..."
기특한 한솔의 말에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나라였지만.. 한솔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물건들을 보고 그 이상은 말을 잇지 못 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마른 헝겊과 여러 개로 분해된 부품
들.. 그리고 그 부품들의 완성체는 아이의 손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둔탁한 검은
색의 빗 깔을 뿜어내고 있는 한정의 자동권총이었다.
"얍..!"
한솔이 분해된 권총의 부품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놀라
운 것은 그 분해된 권총의 잔해들이 한솔의 손을 잽싸게 거쳐가며 원래의 형태로 돌아
온 것이었다.
완성된 권총을 손에 익은 듯한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둘러 본 한솔은 만족한 듯 홀더에
끼워 놓았다.
아무래도 여태껏 조용히 있었던 것은 권총의 정비를 하고 있어서였던 모양이었다.
"그랬죠.. 참.."
권총을 집어넣는 한솔을 보며 나라는 인질로 잡혔을 때 봤던 한솔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인 자신이 보기에도 정확한 사격 솜
씨와.. 자신의 몇 배나 되는 거구인 경철을 상대로도 주눅 드는 모습 없이 맞서 싸웠
던 용맹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라는 조용히 숫돌과 식칼을 꺼내 칼날을 조심스럽게 갈 고 있는 한솔의 모습을 바라봤
다.
자신도 그다지 크지 않지만 그런 자신보다 훨씬 작고 나약해보는 한솔..
하지만 실상은.. 자신 같은 나약한 존재와는 다르게.. 확실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나라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그를 찾는 그녀의 여행에 동행할 때부터.. 자신이 짐덩어리라는 사실은 당연하게 자각
하고 있었다.
싸울수 있는 능력이 전무한 것도 모자라 운동신경도 그다지 좋지 않은 자신은 짐 그 이
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단지 그때는 부상당한 경철의 케어가 필요했었기에 자신의 필요성이 있었기에 그다지 신
경 쓰지 않았지만.. 경철이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고.. 자신의 치료가 거의 필요 없
을 때쯤.. 짐 덩어리인 자신에 대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두 명이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다..라는 변명을 방패 삼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납득.. 아니 도망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한솔은.. 평범한 인간.. 심지어 이제 8살이나 9살이 됐을
법한 한자릿 수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총을 들고 칼을 들고 투쟁을 하는 데에 비교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가 없다.
누군가와 싸우기는커녕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짐 덩어리..
꼭꼭 감춰놨던 그 생각이 한솔의 존재를 보며 새삼스럽게 부활해 나라를 괴롭혀갔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던거네요..."
짓눌려오는 자괴감에.. 나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고 힘없는.. 너무나도 허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나라: 이러려고 의사가 됐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근데.. 사실 의사인 나라는.. 일반적인 생존자들한테는 거의 신급의 존재일텐데..
하필 엮이는게 이런 초월자파티라..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