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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9 재회
늦은 저녁 모두가 곤히 잠든 시간..
달이 구름에 가려진 탓에 평소 이상으로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밤
경철은 잠도 자지 않은 채 트럭으로 들이박아 부숴버린 건물의 잔해에 걸터앉아 먹구름
에 가려진 칠흑 같은 밤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만간 내리겠군."
먹구름 낀 하늘과 코끝에 스쳐 지나가는 비 오기 전 특유의 냄새에 비가 내린다는 것
을 예상할 수 있었다.
"습관이란건 무섭군.."
하늘에서 시선을 뗀 경철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야상 코트의 앞주머니에 손
을 뻗었고.. 현재 담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지금은 금연 중이라는 것을 새삼스럽
게 깨달았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금연 중이었기에 슬슬 담배 생각이 나지 않을 법도 했건만..
몇십 년 가까이 피워온.. 담배는 이미 경철의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기에.. 2개월
이 넘은 지금도 계속해서 담배를 찾았다.
특히나.. 다들 잠들고 난 이후.. 혼자 남겨진 이 시간만큼은 담배가 더욱더 간절했지
만.. 그녀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던 경철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때마다 흡연욕
구를 깊숙한 곳에 밀어 넣으며 이겨내 갔다.
"밤이 길군.."
경철은 담배 생각을 없애려고 하려는 듯 검은색 페인트를 뿌려놓은 것 같은 새까만 하늘
을 올려다 본채로 중얼 거렸다.
경철은 거의 잠을 자지 않는다.
아니.. 자지 못한다는 말이 더 들어맞았다.
이유는 제법 복잡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정신적인 문제..
당연히 어느 정도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몸이 버티질 못하기에.. 아예 수면을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깊게 잠들지는 않았다.
깨있는 것도 아니고 잠든 거라고도 말할 수 없는 상태의 미묘한 수면..
물론.. 그런 수면으로 계속 쌓여가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완전하게 풀 수 있을 리는
없었고.. 그때마다 경철은 약의 도움을 받아 강제로 잠들어 버린다는 극단 책을 사용했
었다.
하지만 늑대인간의 습격을 받고 팔 하나를 잃고.. 나라를 제외한 병원의 인간들을 모조
리 잃은 그 사건 이후부터는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큰 부상을 입었을 당시 상처의 속도가 상당히 더디어서 문제가 됐던 때도 있
었지만.. 가고일을 쓰러트리고 육체가 강화된 현재의 경철은 며칠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해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그저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우는 상태로 있는 것만으로도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 '영웅' 이 된 이후로 씁쓸한 감각을 느낄 수밖에는 없었지만..
약을 복용하면서까지 강제로 수면을 취해도 되지 않는다는 강점은 상당히 큰 도움이 됐
다.
단지.. 문제라고 한다면 시간이 너무 남아돈다는 점이었다.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는 할 일이 있어 괜찮았지만.. 늦은 저녁.. 지금처럼 다들
잠든 시간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담배를 피거나 몸이 굳어지지 않게 몸을 움직이거나 하며 적당하게 시간
을 때워왔지만 지금의 경철은 금연 중이었기에 담배도 필수 없었고 이미 강화된 육체는
굳이 움직여 주지 않아도.. 전성기 때의 자신보다 더 잘 굴러가는 상황이었기에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재 경철의 가장 큰 적은 '지루함' 이었다.
아직 해가 뜨기 까지는 4시간 이상이 남아있는 상황.. 이 남은 4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할지가 지금의 경철에게는 몹시 큰 과제였다.
"음..?"
지루함과 어떻게 싸워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던 경철은.. 트럭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느끼
고 고개를 돌렸다.
문에서 나온 것은 이곳저곳에 헤진 인형 탈의 소유자.. '길티' 였다.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트럭의 문을 닫은 길티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
는 경철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 앞에 섰다.
"무슨일이야?"
명백하게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은 길티의 행동에 경철이 물었다.
"부..부..탁..있다."
"부탁?"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길티가 어눌하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말을 하는 것도 모자
라 자신에게 부탁이 있다는 말을 한 탓에 경철은 조금 놀랍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
은 상태로 되물었다.
"싸..싸우는...싸우우느는..바방방버법..배..운운..다. 너너..가강하하다아..나..나지
지킨..지킨다..하..한솔...구..구하.구한다..주..주인... 더..강해..강해지진다..
나..."
붕대로 감긴 자신의 주먹을 꽉 쥔 채 길티는 어색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말로
서 표현해나갔다.
길티의 말을 정리하자면.. '그를 구하고 한솔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고 싶으며.. 자신
을 농락한 강자인 경철에게 그 기술을 가르침 받고 싶다' 라는 말이었다.
경철 보다 강한 자들은 길티의 주변에 더 있었다.
일단 자신의 주인인 '그' 에서부터 같이 지내왔던 할배와 자드.. 그리고 이번에 합류하
게 된 그녀..
스펙면으로 본다면 경철은 그다지 강하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성능으로만 판단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할배와 자드나 그녀도.. 전문적인 기술이 아닌 자신의 특성과 육체 능력만을 믿고 싸우
는 스타일인 반면.. 경철은..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몹시 세련된 기술을 사용했다.
물론 자신의 주인인 '그' 역시 경철과 비슷한 스타일의 전투 방식을 구사하지만.. 트리
키한 그의 움직임을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반면.. 경철의 기술은 그와 비교하자면 화려한 맛도 없고.. 수수해 보이지만..
그 실용성은 몸으로 직접 체험했기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단순하지만 확실하게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에 특화된 효율적인 기술들.. 그저 힘만을 믿
고 무턱대고 주먹을 휘두르는 자신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투박한 자신과는 다르게 세련
된 그 동작들.. 그것을 배운다면 분명 자신은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길티는 그 기술을 배워 강해지고 싶었다.
비록 경철의 몸에 베인 그 기술들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급격한 변화가 있을 거라고
는 길티 역시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솔은 자신을 강하다.라고 생각하며 믿어주고 있기는 했지만.. 자신은 평범한 인간보다
는 강하고 튼튼한 것은 맞았지만 단지 그것뿐.. 주위에 있는 다른 이들의 특수한 능력
들을 비교하면 자신은 하찮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었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돤다고 생각했다.
주인을 구하고 한솔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신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길티는 경철에게 부탁했다.
좀 더 강해지기 위해...
"강해지고 싶다..라..."
경철은 길티의 그 말을 음미 하듯 조용히 두 눈을 감았고.. 고목과 같이 경철의 앞에
우뚝 선 길티는 잔해 위에 앉아있는 경철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경철은 길티의 인형탈을 한번 올려다 본 뒤.. 천천히 건물의 잔해 위에서 일어
섰다.
"좋아 어울려주마."
경철은 호전적인 미소를 띤 채 길티에게 말했다.
"고..!고마..고마..고마워.."
길티는 기쁘다는 듯 자신의 인형탈을 거세게 위아래로 흔든 채로 경철에게 감사를 전했
다.
"감사해야할것 까지는 없어. 그냥 단순한 시간 때우기니까 말이야."
경철은 무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경철이 길티를 지도하려는 것은 그 이유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어차피 이 시간에 잠을 자지 않는 경철에게 있어 시간은 남아돌았고.. 길티를
지도하는 것은 확실히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재격이었다.
다만.. 그런 외적인 이유 외에도 경철이 길티를 지도하자고 마음먹은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길티의 그 마음에 '공감' 했기 때문이었다.
나약한 자신에 대한 무력함과.. 강한 힘에 대한 갈망.. 얼마 안 되는 사이 그것을 경험
한 경철이었지만.. 지금보다 더 강해지 고 싶다는 힘의 갈망만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
는 중이었기에..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길티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철은 길티의 부탁을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해볼까?"
경철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린 채 한쪽 벽면이 무너져 내린 폐건물을 가리켰다.
저 안쪽이라면 시끄러운 소리에 자고 있는 이들이 깰 염려도 적었고.. 언제 비가 내릴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훈련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건물의 안으로 들어갔고.. 움직일 때 걸리적거릴만한 물건들을 적당하
게 구석에 박아둬 사각 링 정도 크기의 깔끔한 스페이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경철은 자신의 코트 자락을 걷어 올리며 시작을 알렸다.
그렇게 경철에 의한 길티의 지도가 시작됐다..
육체적 능력은 분명 뛰어난 길티였지만.. 아무런 기술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던 탓
에.. 경철은 길티에게 주먹을 쥐는 방법부터 가리켜 나가며.. 기본적인 자세들을 가리
키고 교정 시켜 나갔다.
몇 개월 전까지 전투법을 지도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경철이었지만.. 오랜만인 탓인지 상
당히 신선했다.
특히나.. 그야말로 백지와 같을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길티를 가르치는 것은
상당히 고역인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느껴졌다.
그 탓인지.. '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을 가르칠 때가 떠올랐다.
물론.. 그와 길티는 정반대..
비유하자면 그는 거의 완벽하게 세공된 보석이었고.. 경철은 그 보석 위에 장식을 좀
더 다는 정도의 느낌이었고.. 길티의 경우 원석만 덩그러니 놓인 상태에서 그것을 처음
부터 깎아내가는 느낌으로.. 두 존재는 완전하게 달랐다.
다만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지도하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탓에 오랜만에 열이 올라 몰두할 수 있었던 경철은.. 강인한 체력을 바탕을 쉬지 않
고 길티의 지도에 집중했고.. 피로를 모르는 육체를 가진 길티는 별다른 일 없이 그 스
파르타의 훈련에 묵묵히 따라왔다.
어느새 내린 빗줄기의 시원한 소리 속에서.. 너무 몰두한 탓인지 날이 밝은 것도 자각
하지 못한 두 남자는 땀범벅이 된 채로 계속해서 훈련을 진행해 갔다.
그리고.. 그런 뜨거운 남자들과는 다르게.. 몹시 가라앉은 표정으로 우산을 들고 트럭
밖으로 나온 나라는 커다란 하품을 씹어 참으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살폈
다.
나라가 찾는 것은 다름 아닌.. 경철과 '길티' 였다.
평소랑은 다르게 가장 먼저 기상한 나라는.. 주변에 경철과 길티가 없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고.. 그런 그들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와본 것이었다.
그러나 트럭의 주변에서는 그들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
[좋아! 그래! 그거야!]
트럭의 앞쪽 건물 안에서 경철의 열기를 띈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라는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좀 더! 좀 더! 깊숙이! 깊숙이 박아 넣어!]
라는 경철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라는 그 자리에서 망부석마냥 우뚝 멈춰
선 채 굳어졌다.
[그래! 잘하는군! 그럼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볼까? 자! 이쪽에 넣을 테니.. 확실
하게 조여라!]
그리고 계속해서 경철의 열 띈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사이 사이 마다 길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와 무엇인가 물기를 띈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좀 더! 좀 더 강하게 조여! 그래 그런 식으로 확실하게 조이는 거다. 잘하는
군.. 이 정도라면 100점 만점에 80점 정도는 줘도 되겠어!]
계속 들려오는 경철의 흥분 섞인 말과.. 길티의 신음.. 그리고 질척이는 물소리가 들
려 옴에 따라.. 나라의 얼굴을 점점 붉어져 가기 시작했다.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했다가는 망가질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건 그
렇고 너무 격렬하게 움직였나..? 너도 나도 땀투성이가 됐군. 좋아.. 따라와라 여자들
이 일어나기 전에 후딱 씻어버리자.]
[그어...]
그 직후 두 사람의 발 마른 발소리가 들려왔고.. 건물의 안에서 웃통을 깐 상태로 땀투
성이가 된 경철과 길티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제야 굳어진 채로 정신줄을 놓고 있었던 듯 보인 나라는 제정신을 차린
채...
"브로맨스으으!?"
왠지 모르게.. 흥분한 어조와 함께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
"그으?"
그리고.. 갑작스럽게 높은 목소리로 이상한 말을 내뱉는 나라를.. 땀범벅이 된 근육질
의 두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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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대련한것뿐입니다.
오해하지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