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로 뒤덮인 세상-32화 (32/36)

19화 - 하얀 사람들 (2부. 세 가지 규칙)

“이쪽으로 오세요.”

범식은 한이 일행을 아파트 단지 안으로 안내했다.

63 빌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파트는 외벽에 큰 글자로 대기업의 상호명이 새겨져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수억을 호가하는 고급 아파트 같아 보였다.

아파트는 좌우로 두 개의 집으로 이루어진 15층짜리 고층 아파트였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의 입구 앞에 선 범식은 두 개의 열쇠를 내밀었다.

“202호는 여성분들이 쓰시면 되고, 302호는 남성분들이 쓰시면 됩니다.”

범식이 바로 앞에 있던 나라에게 202호 키를 내밀자, 나라 대신 성배가 덥석 열쇠를 가로챘다.

“남자들이 202호, 여자들이 302호를 쓰도록 하죠.”

“아, 네…, 뭐 싸움지도층님께서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시죠, 어허허 농담입니다.”

범식이 어색한 농담을 하며 성배의 어깨를 두드리자, 성배는 범식에게 코웃음을 쳤다.

“그 농담 재미없습니다.”

성배의 반응에 무안해진 범식은 서둘러 열쇠를 전달한 후, 점심식사 시간이 다시 오겠다고 한 뒤 사라졌다.

성배는 잠시 동안 두 개의 열쇠를 들여다보다가 202호의 열쇠를 나라에게 내밀었다.

“아니, 방금 202호 쓰신다면서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사실은 302호를 쓰는 고도의 전략이지.”

왠지 모르게 자신감 넘치며, 거만해 보이는 성배의 표정에, 이제 모두들 그러려니 하며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집으로 들어가고 성배와 한이는 1층 복도에 남아 이곳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단 저렇게까지 친절한 걸 보면, 제가 너무 민감했나 싶기도 하네요.”

“나도 일부러 더 건방지게 해봤는데, 저 정도 반응이면 진짜 착한 사람들인 건데….”

성배는 그래도 뭔가 찜찜한 듯 담배를 한 대 꼬나물고, 아파트 입구 밖으로 나가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한이도 성배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아참, 근데 넌 아까 왜 이 사람들 의심한 거냐? 너 성격상 쉽게 누굴 의심하거나 그러진 않을 거 같은데.”

한이는 성배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까 진모 아저씨가 63빌딩 얘기를 꺼낼 때요. 그 사람들 전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경직된 거 같았어요. 물론 모두의 표정을 다 확인한 건 아니지만…, 분명히 그런 느낌이었어요.”

성배는 한이의 말을 듣더니 아파트 단지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이도 곧바로 성배를 쫓아 나갔다.

그 둘은 아파트 몇 채와 횡단보도 두, 세 개를 사이에 두고도, 워낙 높은 탓에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웅장하게 서 있는 63빌딩을 동시에 쳐다봤다.

성배는 들고 있던 배트를 들어 63빌딩을 가리켰다.

“역시 씨발 저게 걸리지. 그치 한이야?”

한이도 63빌딩의 저층부터 꼭대기까지 천천히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그랬죠, 의심나면 확인하라고…. 제가 밤에 조용히 다녀올게요. 아무래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거 같아요.”

“근데, 그건 누가 한 말이냐? 의심나면 확인해라. 캬! 이 차성배한테 잘 어울리는 말인데.”

한이는 진지하게 뭔가를 생각하며, 그들이 머물기로 한 아파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성배는 63빌딩 쪽으로 요란스럽게 침을 뱉은 후 한이의 뒤를 따라갔다.

“공잔가…, 톨스토이 였나…, 외삼촌 이었나?”

“뭐?”

“아, 뭐 별거 아니에요.”

그렇게 성배와 한이는 하얀 옷의 사람들에 대한 의구심을 조금 남겨 놓은 채 302호로 들어갔다.

아파트 내부는 원래 살던 사람들의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푹신한 침대, 넓은 식탁, 아늑한 거실과 4개나 되는 넉넉한 방까지 그동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이들에겐 너무나도 귀한 집이었다.

남녀로 나뉜 각각의 집에서 아주 오랜만에 깔끔하게 샤워를 마친

모두는 잠시 쉬다가 점심식사 시간이 되자, 다시 202호에 다 같이 모였다.

범식이 쌀과 라면, 고기 등을 갖다 줘서 그들은 정말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야, 근데 저기 소희랑 나라는 큰 집에 둘이 있으면 안 무섭냐? 나도 거기서 지낼까?”

성배의 능청스러운 말에 나라가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안 되죠. 성배 씨가 젤 위험할 거 같은데요.”

“위험하긴 개뿔! 그래, 싫음 관둬라.”

왠지 아쉬워 보이는 성배를 뒤로한 채, 소희가 다른 얘길 꺼냈다.

“근데 전에 병원에서도 그렇고, 아까 그 사람들도 말하던데, 도대체 벙커가 어디 있을까요?”

“그래, 소희 양 말대로 나도 사실 궁금하긴 했는데.”

“사회지도층 새끼들은 전부 땅속에 처박혀서 목숨 구걸이나 하고 있고, 정작 시민들은 시민들끼리 뭉쳐서 살아남고 있으니 씨발.”

그들은 각자 벙커에 대한 생각을 꺼내놓았다.

이번엔 한이가 나라에게 물었다.

“혹시 나라 씨는 뭐 아는 거 없으세요? 우리야 뭐, 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나라 씨는 조금 다르잖아요.”

“다르긴요 뭐, 다 똑같죠. 저도 그렇게 큰 규모의 벙커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나라의 이야기에 모두는 아쉬워하며, 벙커에 대해선 차차 알아보기로 했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지겨웠는지, 정배와 예지는 슬쩍 일어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흐뭇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던 진모가 성배를 보며 말한다.

“성배 군, 아직도 여기 사람들이 의심돼?”

“아니 뭐, 허여멀건 정신병원 환자 옷 같은 걸 단체로 입고 다니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망치로 좀비 대가릴 깨부수는 걸 보면 조금은 경계해야 될 것 같아요.”

성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한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성배 형한테는 말했는데, 오늘밤에 제가 63빌딩 좀 살펴보고 오려고요.”

“아니 한 군, 거긴 왜?”

“아무래도 이상해요. 아까….”

한이가 미처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 벨을 눌렀다.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성배가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엔 정희가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서 있었다.

“뭡니까?”

“아예, 식사는 맛있게들 하셨나요?”

“뭐, 그럭저럭.”

성배의 짧은 말에도 정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혹시라도 성배가 너무 건방지게 대할까봐 소희가 슬쩍 일어나 성배의 뒤로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주머니 오셨네요.”

“아이고, 네네. 우리 귀여운 아가씨네요.”

성배는 소희와 정희의 사이를 자신의 몸으로 완전히 막으며, 둘의 대화를 차단했다.

정희의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소희는 여전히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니깐 제가 온 이유는, 여러분들은 여기서 얼마든지 계셔도 좋고, 아예 눌러 사셔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 계시는 동안만큼은 몇 가지 꼭 지켜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성배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턱을 몇 번 긁었다.

“텃세를 부리시겠다.”

성배의 계속되는 건방진 말투에, 뒤에 있던 소희가 최대한 밝은 톤으로 정희에게 얘기한다.

“아주머니, 이 오빠가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오늘 좀 피곤해서 예민해서 그래요. 너무 기분 나빠 하지마세요.”

“네네, 그럼요. 하여간 몇 가지만 말씀 드릴게요.”

“뭐, 해보시던가요.”

“네, 우선 하루에 한 번씩 저희는 영등포로 식량을 구하러 나갑니다. 아시겠지만, 영등포시장이 워낙 넓다보니 아직도 식량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전에 시간 봐서 두 분만 저희랑 같이 가주시면 됩니다.”

성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거라면 이 차성배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같이 가도 상관은 없고요. 우리도 어차피 놀고먹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이고, 역시 좋은 분이셨네요.”

“다음!”

“아…, 네네. 두 번째는 밤 12시 이후엔 가급적 외출을 하시면 안 됩니다.”

“나이 40 다 돼가는 사람한테 외출금지라…. 이유나 들어 봅시다.”

“저희가 모시는 신께 12시부터 기도를 드립니다. 그 시간부터는 이 근처 모두가 조용히 해야 합니다. 만약 꼭 나갈 일이 있으시다면…, 반드시 조용히 다녀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이라… 예수? 부처? 뭘 믿으시길래 12시부터 우릴 못나가게 하는 겁니까?”

그 순간 처음으로 정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나긋나긋하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우리가 믿는 신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우리의 신은 당신이 함부로 뭐라고 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정희의 갑작스런 모습에 성배는 조금 당황했다.

“아… 거, 뭐 이렇게 성을 내세요.”

“다른 건 몰라도 우리의 신을 모욕하면 참지 않겠습니다.”

성배는 정희를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꼈다.

“자알 알겠습니다. 그 두 가지입니까?”

정희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끝으로 63빌딩엔 들어가지 말아 주세요.”

‘역시 63빌딩에 뭔가 있어.’

성배는 자신의 의심이 단순한 의혹이 아니라는 걸 더욱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된 거죠? 매일 같이 식량 구하러 가자. 12시 이후에 외출금지다. 혹시 나가더라도 주둥이는 닫아라. 끝으로 63빌딩엔 가지 말아라.”

“네. 꼭 그 세 가지만 지켜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렵진 않은데…,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로 튈지 몰라서….”

성배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말을 하며 문을 닫아버렸다.

문을 닫고 돌아선 성배를 보고, 소희가 미간에 인상을 쓰며 한 마디 던졌다.

“으이구, 오빠.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됐어요? 저 착한 분이 그렇게 화를 내게 만드셔야 됐냐고요.”

“아니, 그거야 뭐…. 그건 그렇고 다들 모여 봐. 방금 얘기 다들 들었지. 12시 이후 나가지 마라, 63빌딩 가지 마라. 이게 말이 되는 거냐? 아저씨 이딴 걸 지킬 겁니까?”

하얀 옷의 사람들의 행동에 별다른 반감이 없던 진모는, 성배가 기분 나쁘지 않게 그를 설득했다.

“성배 군. 내가 성배 군 좋아하는 거 알지? 근데 이번엔 성배 군이 잘못한 거 같아. 나도 물론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많지만, 인간은 원래 모든 걸 이해하기 어렵잖아.”

나라도 진모와 의견을 같이했다.

“그래요. 성배 씨가 우릴 위해 저들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건 고맙지만, 저들도 저들의 삶이 있는 거예요. 저들이 믿는 신을 함부로 말하거나,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걸 어기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아니, 전 생각이 달라요.”

한이가 진모, 나라와는 다른 의견을 말하려고 하자, 성배가 그를 막았다.

“아냐, 한이야. 아저씨랑 나라 말이 맞아. 63빌딩이나, 저들이 뭘 믿는 건지 궁금하긴 한데…. 그건 우리가 간섭할게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형!”

성배는 한이의 어깨를 살짝 주물렀다.

“아냐. 너도 오늘 괜히 63빌딩 가지 말고, 우리 그냥 푹 쉬자. 그러고 보니깐 난 어제 새벽부터 한숨도 못 잤다.”

성배는 그렇게 말하고 예지와 정배를 번쩍 안아서 비행기를 태워주며 잠시 아이들과 놀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한이는 거실에 있던 사람들에게 뭔가 말하려다 끝내 말하지 않았다.

성배가 들어간 방문을 지그시 응시하던 한이도, 일단은 의심을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소희는 아까부터 할 말이 있어보였던 한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한이 씨, 아까 63빌딩은 왜 간다고 하신 거예요?”

한이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그냥 제가 너무 신경이 예민했나 봐요. 진모 아저씨랑 나라 씨 말이 맞아요. 저도 좀 쉴게요.”

한이는 왠지 힘없어 보이는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 남은 세 사람도 하얀 옷의 사람들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음식과 잠자리를 선뜻 내주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적대감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성배 군이랑 한 군이 부담감이 클 거야. 아무래도 나이 든 아저씨랑 젊은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지켜야 하니까 말야.”

진모가 성배와 한이의 심적 부담을 걱정하며 말하자, 나라와 소희도 그들이 안쓰럽다는 듯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라는 천천히 일어나서 성배의 방으로 갔다.

“성배 씨, 아직 안 자면 좀 들어가도 돼요?”

방안에서 성배가 들어오라고 하자 나라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막 잠들려던 참인데 뭔 일 있냐?”

“아뇨.”

“근데 왜 들어왔어?”

“성배 씨가 무슨 일 있을 때만 찾는 사람인가요 뭐….”

이상하게 나라의 말투가 평소와 달리 따스하고 애정이 듬뿍 담긴 것처럼 성배의 귓가에 들려왔다.

성배는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에 거리낌 없이 앉는 나라를 보며 갑자기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나라는 날….’

나라가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성배는 평소와 달리 말수가 적어졌다. 그리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저기 그래서 뭔데. 왜 들어온 건데?”

“아아, 그냥 성배 씨가 요즘 많이 고생하셨잖아요. 칼에 찔리고…, 생존자들 아파트에서 눈칫밥 먹고… 고맙다고요.”

“아까도 말했잖아. 남자가 뭐 그 정도는 해야지.”

나라는 성배를 만난 이후 가장 밝은 미소로 성배를 바라봤다.

“진짜 고마워요. 앞으로는 조금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세요. 이제 소희도 무기를 써서 자신을 지킬 정도는 됐어요.”

“그래, 알았다. 그럼 나가봐라 난 좀 자야겠다.”

“네, 그럼 쉬세요.”

나라가 일어나 등을 돌린 순간, 성배가 아주 성급하고 아주 빠르게 마치 랩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렇게 고마우면 밤에 나랑 한잔 할까?”

성배 딴에는 눈을 감고 무심하게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가 들어도 아주 성급한 작업 멘트였다.

나라는 그런 성배가 귀여웠는지, 조용히 대답을 하고 방을 나갔다.

“지금 세상이 이 모양인데 술을 어디서 구하지…. 있으면 뭐, 한 잔 정도야 뭐….”

나라가 웃으며 방을 나오자 소희가 궁금한 듯 물었다.

“뭐에요? 언니 왜 웃으면서 나와요?”

“어? 아냐. 아무것도 아닌데. 난 좀 피곤하네. 먼저 집으로 갈게.”

나라가 어색하게 집을 빠져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성배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이번에도 소희가 성배에게 물었다.

“뭐야 성배 오빠, 안 자요? 피곤하시다면서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야, 아까 그 하얀 아저씨랑 하얀 아줌마 집이 어디라 그랬지?”

“그분들은 길 건너편 아파트에 전부 모여 산다고 하셨어요. 그 아저씨는 702호 라고 들었던 거 같아요.”

소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배는 집을 뛰쳐나갔다.

성배는 미친 사람처럼 소희가 말한 아파트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성배는 어쩐 일인지 엘리베이터가 고층에서 내려오질 않자, 그냥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단숨에 7층까지 올라간 성배는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침착하게 702호의 벨을 눌렀다.

새들의 지저귀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안에서 범식이 나왔다.

“아니, 성배 씨가 어쩐 일로…?”

성배는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범식에게 말한다.

“그게 그러니깐, 아… 이게 저기.”

범식은 미소를 지으며 성배를 달랬다.

“괜찮아요. 성배 씨, 편하게 말씀하세요.”

“와인하고 빈방 열쇠 좀 하나만 주실 수 있을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내는 성배의 부탁에 범식은 다소 놀랐지만, 우선 집으로 그를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면서 성배에게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게 와인이 있긴 한데, 저도 정말 마시고 싶을 때 마시려고 아껴둔 건데….”

성배는 대뜸 부엌으로 들어가 범식의 손을 잡았다.

너무 적극적인 성배의 모습에 범식은 놀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저씨, 아니지. 큰아버지, 아까 무례하게 군거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어허허, 성배 씨가 이렇게 좋은 분이신 줄도 모르고…, 그래요 여기 와인 가져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뭐 빈방 열쇠는 여기 1층 101호로 가면 거기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하나 내 달라고 하면 내줄 겁니다.”

성배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전 그럼 이만.”

범식의 집을 나와 1층 101호에서, 자신이 머물고 있는 아파트의 501호 열쇠를 받은 성배는 와인을 들고 곧장 자신의 집 302호를 지나 501호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성배는 대충 집 안을 정리했다.

그는 식탁 위에 와인을 올려놓고,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실실 쪼개다가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302호로 들어가서 담배 한 대 피고 왔다며 둘러 댄 후, 방으로 들어갔다.

‘좋았어. 오늘 밤이다. 기다려라 권나라.’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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