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로 뒤덮인 세상-31화 (31/36)

18화 - 하얀 사람들 (1부. 첫 만남)

잠시 달리기를 하며 몸을 풀던 성배도 어느새 나라의 옆에 다가와 섰다.

“뭐냐 저것들은?”

“글쎄요. 의상들이 참 깨끗하네요. 온통 하얀색이라니.”

나라는 뭔가 수상쩍은 듯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온통 하얀 옷만을 입은 그들의 손엔 식량을 비롯한 이런저런 생필품들이 들려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고, 걸음걸이 또한 편안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어딘가 수상쩍어 보인다고 한이를 비롯한 모두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잔뜩 경계심을 품은 한이 일행과 달리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다가올수록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뭐, 좋은 일들 있으신가? 아니면 오랜만에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서들 그러신가? 표정들이 엄청 밝으시네.”

성배가 먼저 하얀 옷의 사람들에게 성큼 다가서며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하얀 옷의 사람들은 놀라거나 불쾌해 하기는커녕, 덥석 성배의 손을 잡았다.

“아이고, 신께서 우리의 응답을 들어 주셨나 봅니다. 안 그래도 어젯밤 꿈에 나타나셔서 곧 좋은 손님들이 찾아 올 거라고 하셨는데.”

영락없는 선량한 사람의 목소리에 표정 또한 아주 밝았다.

남자와 여자 할 거 없이 전부 언성이 높지 않고 나긋나긋 했으며, 표정 또한 소름끼칠 정도로 모두가 똑같이 밝았다.

“이 양반들이 어디서 손을 함부로 잡아.”

성배는 불쾌한 듯 손을 뿌리치고 하얀 옷의 사람들을 잔득 경계했지만, 진모는 성배의 등을 두드리며 뒤로 보내고, 자신이 앞서나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입니다. 여기저기 떠돌다가 63빌딩이 유독 밝은 것처럼 보여서 혹시나 하고 63빌딩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진모의 얘기 도중 63빌딩이란 말에 하얀 옷의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짧은 순간 굳었었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고, 오로지 한이만 그 낌새를 알아챘다.

‘뭐지? 방금 63빌딩을 말할 때 저 사람들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던 거 같은데….’

한이가 속으로 의문을 키우는 동안 차에서 자고 있던 아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아빠! 아 하얀 사람들 뭐에여?”

진모는 예지를 번쩍 들어 올려 안으며 말했다.

“어, 이분들도 우리 같은 생존자들이야. 좋으신 분들 같아.”

“아이고, 이렇게 예쁜 공주님하고 왕자님이 계셨네요. 역시 신은 우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들을 보자 갑자기 한 나이 든 여자가 무리에서 튀어나오며 반갑게 말했다.

그 여자도 역시나 좋은 인상이었지만, 한이의 불안감과 의구심은 계속됐다.

그 여자는 예지와 정배를 보며 물었다.

“이렇게 예쁜 공주님하고 이렇게 멋진 왕자님을 아버지께서 잘 지켜주셨구나?”

정배가 아무 말 못하고 뒷걸음질 치자, 진모가 정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요, 우리 아들, 딸은 제가 지킬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이렇게 든든한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켜야죠. 그건 그렇고 다들 따라오세요. 여의도 안은 천국입니다.”

여자의 다소 황당한 말에 나라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천국이란 말씀은…?”

여자는 다시 미소 지으며 한이 일행 모두와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쳤다.

“저 안에는 이제 대부분의 미지의 존재들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엔 많은 군대와 경찰들이 저 안을 샅샅이 뒤져 그 미지의 존재들을 모두 처리했고요. 모두가 떠난 이후엔 남은 우리가 거의 처리했습니다.”

여자의 말을 듣던 소희가 한이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미지의 존재라는 건 역시 좀비겠죠?”

“네,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왜 좀비라고 안 하고 미지의 존재라고 할까요?”

“글쎄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저 사람들 어딘가 수상해요.”

한이와 소희의 귓속말하는 모습을, 젤 처음 성배의 손을 잡았던 중년의 남성이 웃으며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한이와 소희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심성 많은 나라는 뭔가 이해가 안 가는 듯 다시 여자에게 물었다.

“저도 대충 예감은 했지만, 역시 여의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방어하는 수준이 차원이 달랐나 보네요. 근데 모두가 떠났다는 건 무슨 말씀이죠?”

“그러니깐 그 미지의 존재들이 나타난 이후로, 여의도로 대부분의 정치인을 비롯해서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요. 며칠간은 이곳에서 지내다가 충청도에 무슨 벙커가 있다면서 헬기로 전부 떠났죠. 서울 하늘에 헬기가 그렇게 많았던 건 처음 봤습니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과 방어병력이 전부 떠났는데 여기 계신 분들은 왜 같이 안 가셨나요?”

여자가 대답하려 하는 순간, 성배의 손을 잡았던 중년의 남성이 대신 대답한다.

“이미 여기도 안전한데 굳이 그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요. 떠난 분들이야 벙커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여기가 더 안전하다고 믿거든요. 여러분들도 이제부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이 일행은 아직 많은 의구심이 남았지만, 자꾸 캐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우선은 하얀 옷의 사람들을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

성배의 손을 잡았던 중년의 남성은 자신을 황범식이라 소개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던 나이든 여성은 백정희였다.

하얀 옷의 사람들은 그 둘을 각각 큰아버지, 큰어머니로 불렀다.

한이와 일행은 서울교 근처의 주거지역에 밴을 잘 주차 해두고, 각자의 무기만 챙겨 가기로 했다.

나라는 기관단총, 성배는 이곳저곳 찌그러진 알루미늄 배트, 진모는 산탄총, 한이는 성배가 선물해준 회색빛의 큰 칼, 소희는 진모가 개조해준 창을 들고 다시 하얀 옷의 사람들 앞에 섰다.

하얀 옷의 사람들은 무기를 든 그들을 보며 흠칫 놀랐다.

“굳이 안전한 곳에 그렇게 무시무시한 무기들은 안 가져가셔도 될 것 같은데요.”

범식이 조심스레 말하자, 성배가 혀를 차며 곧바로 대꾸한다.

“우리가 댁들을 뭘 믿고 맨몸으로 가요?”

성배의 건방지고 거친 말투에도 하얀 옷의 사람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얀 옷의 사람들 중에는 덩치 좋고, 젊은 남자도 여럿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도 항상 밝았다.

“네, 우리 남성분 말씀이 맞습니다. 아직 저희를 잘 모르시니 무기를 들어야 마음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게 인간이죠. 그런데 우리 남성분은 성함이…?”

“차성배입니다. 보면 알겠지만, 돈 많고 빽 있는 인간들이 사회지도층이라면 난 싸움지도층이니깐, 어설픈 개수작 설계해 놨다면 실행 안 하는 걸 추천합니다.”

성배가 너무 거칠게 나가자 진모가 그를 만류하며, 범식을 비롯한 하얀 옷의 사람들에게 대신 사과를 전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원래 성배 군이 마음이 여린데, 최근에 안 좋은 일들이 겹치다보니 좀 날카로워진 것 같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일단 가시죠.”

하얀 옷의 사람들이 앞장서자, 한이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곧장 서울교 위로 올라가 방어벽이 있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조금 떨어져 걷던 하얀 옷의 사람들 중 젊은 남자 둘이 소희에게 다가와 웃으며 이름을 물어왔다.

소희가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려던 순간 성배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어이, 내 동생들한테 관심 갖지 마.”

하얀 옷의 젊은 남자들은 성배의 시비에도 끝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단지 이름이나 알자고 그런 겁니다.”

성배가 하얀 옷의 사람들과 너무나도 각을 세우자 소희가 성배를 만류하며 일행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자, 자 됐어요. 여기가 정말 안전하다면 우리도 계속 머무를 건데, 서로 이름은 알아야죠. 전 윤소희에요. 저 언니는 권나라고요.”

소희는 손가락으로 진모와 한이를 순서대로 가리켰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신 임진모 아저씨, 그리고 저분은 강한 씨에요. 이름이 외자세요.”

진모의 손을 잡고 쫄래쫄래 따라가는 예지와 정배를 가리키며 소희는 말을 이어갔다.

“이 귀여운 친구들이 임예지와 박정배에요. 끝으로 이 무섭게 생긴 오빠는 차성배에요.”

일행의 소개가 끝나자 약간 서먹하던 하얀 옷의 사람들과 한이 일행은 서로를 보며 자유로운 대화를 나눴다.

다리 중간쯤에 도착했을 때, 다리 위에 있던 좀비 몇 마리가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성배가 가장 앞에서 걷던 범식을 앞질러 나가며 큰소리로 말한다.

“보아하니 군인이나 경찰들이 지켜줘서 용케도 살아남았나 본데, 저것들은 이렇게 죽이는 겁니다. 잘 보고 우리 떠나면 알아서들 싸우세요.”

말을 마친 성배는 배트를 치켜들고 다가오는 좀비들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 순간, 소희의 이름을 묻던 남자 둘이 성배보다 빠른 속도로 뛰어나갔다.

어디서 났는지 순식간에 망치를 꺼낸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좀비의 머리를 박살내버렸다.

조금은 민망해진 성배가 그 둘을 노려보며 천천히 배트를 내렸다.

‘하, 나 이것들 봐라.’

성배는 속으로 그들을 경계했지만, 겉으론 태연한 척 행동했다.

“오, 거 친구들 좀비 좀 죽여 봤나보네. 무시해서 미안해, 흐흐.”

겉으론 미소를 보인 성배지만, 그는 슬쩍 한이 곁으로 다가가서 한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한이야, 이놈들 조심해라.”

한이도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답한다.

“저도 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성배와 한이가 의심을 키워가는 사이 진모와 나라는 반대로 하얀 옷의 사람들과 많은 얘길 나누며 친해져가고 있었다.

나라는 처음에 꼬치꼬치 캐 물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정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정희는 특히 아이들을 아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나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계속, 진모의 손을 잡고 가는 정배와 예지에게 쏠려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방어벽 앞에 모두가 도착했다.

바리케이드와 모래주머니로 튼튼하게 쌓여진 방어벽의 우측 끝에는 두터운 철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범식이 방어벽의 우측 끝으로 가서 쇠사슬로 잠긴 문을 풀고, 사람들에게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참 재밌지 않습니까? 저 미지의 존재들 말이에요. 이 단순한 쇠사슬을 풀 줄 몰라서 늘 이 앞에서만 방황하다 결국 인간들한테 당하죠.”

범식의 말에 진모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문을 통과하며 그에게 말한다.

“하지만 이미 좀비들은 전 세계를 뒤덮었고, 둘러보시면 알겠지만 생존자는 갈수록 적어지고 있잖아요. 쇠사슬을 푸는 방법은 몰라도 저것들은 세상을 집어 삼키는 방법은 잘 압니다. 늘 조심 해야죠.”

범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이어 모든 사람들이 문을 통과하자 범식은 이번엔 안쪽에서 쇠사슬로 문을 걸어 잠갔다.

방어벽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풍경이 한이 일행을 맞이했다.

“역시 이 안도 그때는 지옥이었겠군요.”

바닥에 뭉개져서 사람인지 좀비인지 구분이 안 가는 시체를 보며 나라가 말했다.

그 시체를 같이 쳐다보던 정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치운다고 치워도 뭐 여의도에 한, 두 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저희가 사는 곳 주변만 깔끔하게 해놓고 있습니다.

정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까마귀 떼가 날아와 바닥에 시체들을 쪼아 먹으며, 그곳의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까마귀와 한동안 눈이 마주쳤던 소희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으며 두려움의 표현을 했다.

“전 까마귀는 실제로 처음 보는데, 너무 무섭게 생겼네요. 기분 나빠요.”

“소희 씨, 이쪽으로.”

어느새 한이가 소희의 앞으로 나서며 까마귀를 보고 무서워하는 그녀를 자신의 뒤에 서게 했다.

까마귀들은 사람들이 아주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시체들을 쪼아 먹으며 거리를 누비다, 성배가 배트를 휘두르자 푸드덕거리며 모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어디서 이 시커먼 것들이 사람을 꼬나봐!”

까마귀 떼는 성배를 피해 하늘로 빠르게 날아가더니, 주변의 나무에 모두가 다시 앉았다.

마치 ‘니들과는 상관없으니 어서 꺼져’라는 듯이 나무 위에서 끝까지 사람들을 쳐다봤다.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까마귀들이 앉아 있던 나무를 멀리 돌아서 그곳을 지나갔다.

하얀 옷의 사람들은 다시 한이 일행을 데리고 여의도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서울교 방어벽을 지나서부터 20 여분을 걸어, 여의도 끝으로 들어 갈수록 정말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마치 천국에라도 온 것처럼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희가 뭔가 궁금한 게 있는 듯, 범식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첫 대면에서 그들을 많이 경계하고 의심 했던 게 미안했는지, 소희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저 아저씨, 근데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범식은 소희에게 환한 미소를 보였다.

“뭐든 물어 보세요. 싸움지도층님이 계시니 실례가 되도 제가 어쩔 도리가 없네요. 어허허, 농담입니다.”

범식의 농담에 성배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따로 반응은 하지 않았다.

성배와 한이는 아직도 이곳과 이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겉으론 티를 안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곳저곳을 곁눈질하며 계속해서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럼, 여기 분들은 왜 다 하얀 옷을 입고 계세요?”

소희의 질문에 한이 일행은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범식을 쳐다봤다. 내색은 안 했지만, 소희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었다.

동시에 하얀 옷의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멈춰 소희를 쳐다봤다.

그들의 얼굴은 계속 그래왔듯 미소로 일관하고 있었다.

모두가 멈추자 소희는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를 환기 시켰다.

“아…, 뭐 하얀 옷을 좋아 하실 수도 있죠. 아하하하, 저도 하얀 옷 좋아해요.”

“그냥 별 이유 없습니다. 세상이 너무 썩어서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자는 의미에서 가장 깨끗한 색인 하얀 색의 옷을 입는 거죠.”

정희가 소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자, 소희는 미소와 함께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얀 옷의 사람들과 한이 일행 그 사이에는 분명히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범식과 정희의 계속되는 친절함에 한이와 성배를 제외한 일행 모두는 점점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범식이 아파트 단지 앞에서 일행을 멈춰 세웠다.

한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성배는 일행의 곁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태연한 척 주변을 경계했다.

범식과 하얀 옷의 사람들은 일행만 남겨둔 채,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해주던가. 뭘 기다리라는 거야?”

“뭐, 우리가 지낼 곳을 마련해 주는 거겠죠. 성배 씨, 너무 공격적으로 굴지 마세요. 저도 처음엔 좀 의심이 갔는데, 시종일관 성배 씨의 건방진 태도에도 저렇게들 밝게 맞아주시는 거 보면 나쁜 사람들은 아닌 거 같아요.”

성배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며 나라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라는 멀뚱한 표정으로 그런 성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여간 우리 나라는 나한테만 쌀쌀맞고, 나한테만 막대하고 아주 그냥 남한테는 아주 천사야, 천사!”

“성배 씨가 저한테 막하니깐 저도 막하는 거죠. 몰라요? 기브 앤 테이크?”

성배는 담배를 깊게 빨아 긴 한숨으로 내뱉으며 나라에게 빈정거렸다.

“어련하시겄어. 아오, 내가 이런 걸 구한다고 그 하이에나 같은 새끼들이랑 고등학교 강당에서 영화를 찍었으니….”

나라는 조금 미안한 듯, 성배에게 다가가 미소를 보이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땐 고마웠어요. 정말로… 성배 씨, 아니었으면 전 여러 번 위험했을 거예요.”

나라의 스킨십에 성배의 표정이 조금 풀리며,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그는 곁눈질로 나라를 힐끗 보며, 민망한 듯 괜히 큰소리를 쳤다.

“뭐, 남자가 그 정도는 하는 거지. 뭘 고맙긴 뭘.”

그 둘을 옆에서 지켜보던 소희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 분위기가 좋은데요. 성배 오빤, 역시 나라 언니한테 약하단 말야.”

언제 돌아왔는지 한이도 그 둘을 놀리기 시작했다.

“소희 씨, 글쎄 이 두 분은 곧 결혼한다니까요. 두고 보세요!”

부부란 말에 성배와 나라는 발끈해서 한이한테 소릴 질렀다.

진모는 젊은이들의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전에 보기 힘든 평화로운 광경을 연출했다.

그렇게 한이 일행은 정말로 오랜만에 마음 편한 시간을 갖고 있었다.

물론 성배와 한이는 이곳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하얀 옷의 사람들의 친절에 그들의 경계심도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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