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로 뒤덮인 세상-29화 (29/36)

16화 - 강적

성배는 한 번의 부딪침으로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영민에게 성큼 다가간 성배는 가장 방어하기 애매한 위치인 가슴 중앙을 짧게 끊어서 가격했다.

“컥!”

흥분한 성배가 크게 휘두를 줄 알았던 영민은, 의외의 공격에 허를 찔리며 적잖은 충격과 함께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곧바로 성배의 발이 영민의 턱을 노리며 올라왔지만, 영민은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피하며, 아슬아슬하게 발차기를 피한다.

둘의 거리가 조금 벌어지자, 이번엔 영민이 왼발로 땅을 박차고 짧게 앞쪽으로 뛰어 성배에게 접근했다.

상체를 오른쪽으로 크게 회전시킨 영민은 그 반동을 이용해 강력하게 성배의 얼굴 쪽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성배는 순간적으로 양팔을 들어 막았지만, 팔의 빈틈으로 주먹이 꽂히며 그대로 턱을 가격 당했다.

고개를 짧게 여러 번 흔들며 성배가 정신을 가다듬는 사이, 영민은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성배의 왼쪽 어깨를 발로 찼다.

성배는 어깨에 힘을 줘 충격을 감소시킨 뒤 바로 오른쪽 주먹을 날렸지만, 영민의 발차기는 같은 곳으로 한 번 더 왔다.

거의 동시에 영민의 발차기가 먼저 성배의 목을 정확히 공격했고, 그 때문에 성배의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약간 힘이 덜 실린 채 영민의 얼굴로 주먹이 들어갔다. 그래도 성배의 힘은 대단했다.

힘이 다 실리지 않았음에도 영민의 얼굴은 상당한 타격을 입어 얼얼했다.

영민은 입을 꿈틀거리며, 성배와의 거리를 벌렸다.

성배도 잠시 크게 한숨을 쉬며, 영민에게 말했다.

“후우우, 이 새끼 봐라. 양아치는 아니네.”

영민도 코웃음을 치며 바로 응수한다.

“집은 잘 못 찼더니, 그래도 싸움은 좀 하네.”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던 기천과 사내들은, 단지 싸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성배와 영민의 싸움은 긴장감이 넘쳤다.

성배는 다시 양팔을 좌우로 쭉 벌리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싸울 의지를 불태웠고, 영민은 자신의 머리를 좌우로 꺾으며 다시 성배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주먹을 날렸다.

먼저 성배의 주먹은 영민의 관자놀이를, 영민의 주먹은 성배의 턱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서로의 얼굴에 타격을 입힌 둘은 연이은 후속타를 내질렀다.

성배는 턱을 맞은 뒤, 곧바로 영민의 복부를 강타해 갚아줬고, 복부를 맞은 영민은 성배의 다음 공격을 피하며 발로 성배의 다리를 차서 넘어트렸다.

영민의 발이 넘어져있는 성배의 얼굴을 몇 번 걷어찼고, 성배는 다시 영민의 발목을 잡은 후 잽싸게 일어나 영민의 한 쪽 다리를 걷어차 쓰러트린 후 영민의 위로 올라타 영민의 얼굴에 강력한 주먹질을 쏟아냈다.

한동안 서로를 난타하던 두 괴물은 잠시 떨어져 숨을 고른 후 다시 붙었다.

이번엔 영민의 주먹이 먼저였다. 넓고 큰 반원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간 그의 주먹은 성배의 옆구리에 정확히 꽂혔다.

성배가 타격을 입은 쪽으로 상체를 약간 숙이자 그 반대쪽에서 영민의 주먹이 또 한 번 날라 온다.

성배는 가까스로 팔뚝을 들어 영민의 주먹을 쳐냈다. 하지만 영민은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주먹질 이후 바로 성배의 복부를 향해 발을 간결하게 뻗었다.

옆구리에 이어 복부 중앙까지 공격받은 성배는 갑자기 호흡이 막히며 반사적으로 기침이 나왔다.

성배는 연이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영민은 기회다 싶었는지 한 번 더 욕심을 내서 성배 쪽으로 낮고 빠르게 뛰며 다시 한 번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계속 당할 성배가 아니었다. 영민의 무리한 발차기는 거리가 조금 짧았고, 발에 온 힘을 실었던 만큼 영민의 균형은 깨지고 말았다.

균형을 잃고 성배 쪽으로 주춤거리는 영민의 턱에 성배의 주먹이 정확히 들어갔다.

강당을 울리는 퍽 하는 굉장한 타격음과 함께 영민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성배는 주저앉은 영민에게서 두 걸음 물러나며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한다.

“어이, 이걸로 퉁 친 거다. 나중에 개소리 하지 마라.”

영민은 잠시 고개를 털더니 다시 일어났다.

그때, 기천이 잔머리를 굴렸다. 영민이 받은 충격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음을 눈치 챈 뻔한 수였다.

“야, 좀 쉬었다 해라. 거기 사자도 담배 한 대 빨고 하지.”

성배는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를 한 대 꼬나물었다. 사실 그도 이제껏 받은 데미지가 적잖이 쌓여있었던 터라 기천의 의도를 알고도 받아들인 것이다.

둘은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서로의 상태를 신경 안 쓰는 듯 했지만, 속으론 오랜만에 만난 괴물 같은 상대를 엄청 신경 쓰고 있었다.

성배가 먼저 담배를 끄고 다시 몸을 풀었다.

영민도 턱을 만지며 다시 일어났다.

“2라운드 시작이다. 5분 안에 끝내고 나라 데리고 갈 테니깐 약속이나 지켜라.”

영민은 그런 성배를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글쎄, 그럴 일 없다니깐.”

성배는 혼자 외롭고, 무서워하고 있을 나라 걱정에 조금이라도 빨리 싸움을 끝내야겠다고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 보이는 영민에게 기술로 승부하지 않고, 단순한 힘과 맷집으로 승부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영민이 다가오자 성배는 바짝 붙어 그의 멱살을 잡고 두어 번 흔들다가 다리를 걸어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그리고 곧바로 충격이 가장 크게 들어가는 턱 주변을 사정없이 발로 걷어찼다.

영민은 잽싸게 양팔로 얼굴을 방어했고, 성배는 방어를 하든 말든 무식하고 집요하게 발로 계속 걷어찼다.

기회를 보던 영민이 성배의 느려진 발길질의 타이밍에 맞혀 몸을 반대로 굴리며 일어났다.

분명히 영민의 팔과 얼굴에 데미지가 들어가긴 했지만, 체력적으로 지친 것은 반대로 성배였다.

이번엔 영민의 반격이 시작됐다. 일어나자마자 방금 당한 걸 복수라도 하듯 바로 성배에게 달려와 거리를 좁혔다.

성배는 뒤로 물러나며 귀싸대기를 날렸지만, 영민은 가볍게 막고 성배의 목을 주먹으로 쳐버렸다.

“크헉!”

순간적인 고통에 움찔한 성배는 연속공격이 좋은 영민에게 한 번 당한 걸 떠올리며, 한 대 맞더라도 같이 한 대 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오른쪽 주먹에 온 힘을 실어 영민의 관자놀이를 향해 내질렀다.

퍼, 퍽!

두 번의 찰진 타격음이 강당 안에 울려 퍼졌다.

앞선 소리는 작았고, 뒤에 난 소리는 훨씬 컸다.

성배의 예감이 적중했던 것이다.

영민은 성배의 목에 공격을 가한 후, 곧바로 두 번째 공격을 빠르게 성배의 얼굴 쪽으로 넣었고, 성배는 그걸 맞으면서도 기어코 반격한 것이었다.

영민은 머리가 심하게 흔들리며, 순간적인 어지러움을 느꼈다.

성배는 그걸 놓치지 않고, 영민을 뒤에서 끌어안고 기합을 내지르며 살짝 뛰어올라 바닥에 찍어버렸다.

“으아아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영민의 목이 꺾이며 떨어졌지만, 성배 역시 낙하충격을 받았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대로 기절했을 테지만, 이 괴물들은 아직도 힘이 남아있었다.

물론 성배에 비해 영민의 충격은 상당했다. 영민은 연속된 큰 공격에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상당히 타격을 입었다.

성배는 여세를 몰아 일어남과 동시에 영민의 얼굴을 향해 오른발을 날렸다.

영민은 가까스로 양팔로 성배의 발을 막으며 일어났다.

“하, 나 이 씨발놈 봐라. 그렇게 맞고도 또 일어나네….”

성배의 말에 영민은 살짝 웃어 보이며, 여유를 부렸다.

“네 걱정이나 해라, 이 새끼야. 넌 이제 정말 끝이다.”

“끝이긴 개뿔. 너 지금 좆나게 버거워 보여, 이 새끼야.”

둘은 씩씩대며 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도 성배의 전략은 동일했다. 내 걸 조금 내주고, 상대 걸 많이 뺏는다고 생각한 그는 아예 대놓고 영민의 사정거리로 들어갔다.

‘뻗어라, 네가 잘하는 연속공격을 한 번 해봐라.’

성배의 생각대로 영민은 곧바로 성배의 턱을 향해 아래에서 위로 오른쪽 주먹을 날렸다. 성배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양손으로 올라오는 큰 공격을 막았다.

연이어 성배의 계산대로 영민은 곧바로 왼쪽 주먹으로 성배의 얼굴을 노렸다.

‘걸렸다.’

성배는 자신의 턱을 노리던 큰 공격은 막고, 상대적으로 약한 왼손으로 날린 펀치는 맞아주며, 자신의 양손으로 영민의 목덜미를 잡았다.

“끝났다, 이 새끼야!”

영민은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지만 이미 성배의 공격은 시작되고 있었다.

성배는 영민의 목덜미를 잡고, 자신의 무릎으로 영민의 턱과 목을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십여 차례를 무릎으로 찍힌 영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쓰러졌다.

성배는 의식을 잃은 영민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신도 주저앉았다.

“후우, 개새끼 좆나 질기네.”

성배 역시 이제는 많이 지쳐 보였다. 성배는 숨을 몇 번 몰아 쉰 뒤, 기천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우리 나라 데려와. 약속은 지켜야지.”

기천은 잠시 성배를 노려보다가, 기어코 소파 밑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미안한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가 생각보다 영민이한테 너무 심하게 해서 말야.”

성배는 기천의 말에 강당을 한 번 둘러봤다. 사내들은 여전히 성배에게 덤빌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럼, 이 양아치 새끼야! 너도 그 칼 버리고 내려와서 한 판 뜨던가!”

성배가 큰 소리로 기천에게 고함을 치던 그때, 단상 뒤쪽의 쪽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 들어온 건 한이였다. 한이의 오른손엔 성배에게 받은 큰 칼이 들려있었다.

뒤이어 진모와 나라도 들어왔다.

기천은 뜻밖의 상황에 놀랐지만, 일부러 태연한 척 칼을 들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며 일어났다.

“야, 이 비리비리한 새끼가 뭐 저렇게 무식한 칼을 들고 다니냐. 그거 쓸 줄은 알아?”

한이는 기천의 도발에 흥분하지 않았다.

“난 솔직히 사람 죽여 본 적도 있고, 그리고 지금 당장 니들 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우린 인간이야. 그 칼 내려놔.”

“네 특기가 야부리냐? 저번에도 말했지. 너 같은 새끼는 총을 들던, 칼을 들던 절대로 위협적이지가 않다니깐.”

한이는 칼을 들어 기천의 앞으로 뻗었다.

“그냥 살고 싶으면 그 칼 버려, 이 씨발놈아! 그리고 사과해.”

“그래…, 섹시한 언니 구했다 이거지. 그래도 내 체면이 있지, 영민이까지 피떡이 돼서 뻗었는데, 니들 그냥 보내면 저기 있는 동생들이 우릴 따르겠냐?”

기천은 칼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고 한이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한이는 처음으로 살인을 했던 기억이 불현 듯 떠올랐다.

상황이 사람을 괴물로, 살인자로, 미친놈으로 만든다지만 한이는 살인만큼은 더는 하기 싫었다.

“제발 그 칼 버려라. 마지막 경고다. 너 같은 개새끼 살려주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람을 더 이상 죽이기 싫어서 이러는 거야!

“이런 세상에 사람 하나 죽이는 게, 뭐 대수라고 이 씨발놈아!”

기천은 끝내 한이에게 달려 들었다.

한이는 순간적으로 기천을 공격하려다 멈칫했다.

또 한 번의 살인만큼은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한이가 멈칫한 틈에 기천은 기어코 한이에게 칼을 휘둘렀다.

한이는 가까스로 칼질을 피하려다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래, 이 씨발 비리비리한 새끼야! 넌 이렇게 뒤지는 거야!”

기천은 넘어진 한이를 칼로 찌르려고 다가왔다.

기천이 한이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찰나의 순간에 시끄러운 산탄총의 굉음이 강당에 울려 퍼졌다.

산탄총에 맞은 기천은 수십 개의 총알구멍을 온몸에 남긴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한이가 고개를 돌려 진모를 바라봤다.

나라와 성배의 시선도 모두 진모에게 향했다.

진모는 계속 산탄총을 든 채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천천히 총을 내렸다.

강당 안은 잠시 고요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사람들의 숨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그 무거운 정적을 성배가 깼다.

“아, 나! 이 사람들이 날 감동 시키네. 안 그래도 이제 우리 나라 데리고 여기서 어떻게 빠져 나가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성배는 큰소릴 치며 시선은 나라를 지그시 바라봤지만, 딱히 나라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나라에게 다가갔다.

성배가 움직이자 사내들은 알아서 그의 주변에서 슬금슬금 멀어져갔다.

나라는 다가오는 성배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단상 위로 올라온 성배는 곧장 나라 앞으로 걸어갔다.

나라는 성배가 다가올수록 그동안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했다.

드디어 성배가 나라의 바로 앞까지 왔지만, 그는 나라를 그냥 지나쳐 곧장 한이에게 걸어갔다.

‘그럼, 그렇지.’

나라는 고개를 돌리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성배는 한이를 일으켜 세워주고, 그를 다독였다.

“에휴, 이 얼굴로 기어코 왔네. 그래도 고맙다, 인마. 안 그래도 저 새끼가 칼 꺼냈을 때, 혼자 온 거 무지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한이는 성배의 진지한 고마움 표시에 한 번의 잔잔한 웃음으로 답했다.

성배는 뒤이어 아직도 멍해 보이는 진모를 끌어 앉았다.

그리고 진모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저씨, 저런 쓰레기는 죽여도 됩니다. 아저씨 아니었으면 제가 죽여 버렸을 거예요.”

성배의 말에 진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씩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자, 이제 나가자. 아저씨 나가시죠. 이 양아치 소굴에서 나가고 싶네요.”

이렇게 말하며 나라의 어깨를 슬쩍 두어 번 두드린 성배는 단상에서 내려가며 사내들에게 외쳤다.

“뭐, 더 할 말 있는 새끼 있으면 손들어!”

사내들은 쓰러져있는 영민만 쳐다볼 뿐, 그 누구도 감히 나서질 못했다.

그렇게 유유히 성배와 모두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학교 앞에는 소희와 아이들이 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배가 밴에 올라타자 소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신 거죠? 걱정은 했지만 그래도 성배 오빠 믿었어요. 그리고 멋있어요! 애인을 구하러 간 기사 차성배!”

성배는 소희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멋있긴 개뿔. 뭐가 애인을 구하러 간 기사야? 권나라는 경찰이고 난 마약조직의 보스야. 우린 이 좀비 사태가 끝나면 곧바로 적이라고.”

“아, 진짜 성배 오빠는 늘 저게 문제야….”

툴툴대는 소희에게 보조석에 앉아있던 한이가 슬쩍 한 마디를 던졌다.

“소희 씨, 성배 형하고 나라 씨는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 거예요. 걱정 마세요!”

한이의 말을 들은 성배와 나라가 동시에 발끈해서 한이에게 소리친다.

“아니, 내가 왜 이런 드센 여자랑 결혼을 해? 너 아직도 꿈에서 못 벗어난 거야?”

“아니, 한이 씨. 무슨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하세요!”

아주 오랜만에 한 자리에 다 모인 그들은 모였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나도 큰 행복감을 느끼며 한 동안 마구 떠들어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소희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남은 얘기는 집에 가서 하죠.”

막 출발하려던 그때, 성배가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 집? 아까 거기?”

“네, 우리 집이 거기 말고 어딨어요?”

성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우린 거기로 못가.”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이유를 묻자 성배는 방금 나온 학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새끼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이유가 어찌됐건 지들이 대장처럼 모시는 새끼가 뒤졌고, 또 한 놈은 나한테 얻어터져서 피떡이 됐는데….”

한이도 잠시 학교를 쳐다보더니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저놈들은 분명히 복수하러 올 거예요. 예지랑 정배도 있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죠.”

모두의 표정이 5분 전과 달리 어두워졌다.

사실 그 집은 좀비로 세상이 뒤덮인 이후, 어찌 보면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였다.

물론 처음엔 성배와의 예정에 없던 이별 때문에 마련한 임시 거처였지만, 그곳에 살면서 주변의 좀비들도 많이 정리가 됐고, 식량도 많이 비축을 해뒀었다.

하지만 근처에 좀비보다 위험한 인간들이 있는 한, 더는 그 집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럼 어쩌죠?”

소희의 물음에 성배는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뭘, 어째. 둘 중 하나지. 지금 들어가서 저 양아치 새끼들 다 죽여 버리던가, 아니면 안전한 집과 많은 음식, 따뜻한 잠자리를 버리고 일단 출발하는 거지.”

그들 모두는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돌아가며 바라봤다.

지금 상황에 정답은 없었다. 뭐가 옳고 그른지의 기준은 이미 무너졌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사람만은 죽이지 않았던 성배도, 한이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산탄총을 발사한 진모도,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소희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던 남자의 목을 그은 한이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 타인의 삶을 빼앗았다.

지금 그들에겐 생존이 우선이었다.

모두들 선택의 어려움을 겪자, 진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수결로 하자. 어차피 저 금수 만도 못한 놈들 죽이는 게, 어쩌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를 다른 생존자들한테도 더 좋을 거야.”

모두는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진모도 담배를 꺼내 물고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필터 바로 위까지 초조하게 담배를 피운 진모가 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창문을 닫았다.

“그럼 다수결 시작할게. 우리의 앞으로의 안전한 삶을 위해 저 금수 만도 못한 놈들을 지금 들어가서 다 죽이자는데 찬성하는 사람 손 들어줘.”

미약하게 빛나는 가로 등불 밑에 세워진 밴 안에서 그들의 다수결은 그렇게 시작됐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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