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사자 VS 하이에나
권기천과 배영민,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
쭉 한동네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으며, 성인이 되고 나서는 따로 직장을 다니다가 운명처럼 같은 날 자신들을 괴롭히던 직장 상사를 폭행하고 사직서를 던졌다.
그 이후 작은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둘 다 학창시절 신림동 일대에서 유명한 싸움꾼 이었으며, 특히 배영민은 이종격투기 선수를 꿈꾸기도 했을 정도로 싸움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많은 후배들과 친구들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동네에도 좀비가 나타나면서 그들은 무작정 좀비를 피해 도망갔다.
평소 자신들을 따르던 동생들과 모여 강덕 고등학교를 자신들의 아지트로 삼아 식량 구하는 일에만 열중하며 지냈다. 그들은 곧 좀비 사태가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좀비들은 생각보다 더 위험했다.
날마다 나오는 뉴스는 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식량은 충분해서 식욕의 충족은 어려움이 없었다.
강덕 고등학교는 정문을 제외하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안전하게 잘 수도 있었다.
문제는 성욕이었다.
한창때인 2, 30대 사내들은 그 점이 가장 괴로웠다.
처음엔 위험에 처한 여자들을 도와주고,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성욕을 채웠다.
그러나 강제성이 강한 그들의 요구는 보통의 여자들로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들을 거부하고 그곳을 떠나거나, 혹은 그들에게 잡혀 강제로 유린당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권력 서열이 높은 배영민은 그 부분에 있어선 늘 뒤로 물러나 있었다.
아무리 미인을 데려와도 배영민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흥미를 보인 여자가 권나라였다.
나라는 강덕 고등학교에서 가장 안전하고 아늑하게 꾸며진 양호실에 감금돼있었다.
그곳은 오로지 권기천과 배영민 두 명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배영민은 성배가 오기 전까지 나라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사내들이 돌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라는 간절히 성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 먹어라.”
영민이 잘 차려진 밥상을 들고 와서 나라에게 식사를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식욕이 있을 리 없었다.
“너 같으면 지금 밥이 넘어 가겠냐?”
“그래, 뭐 배고프면 먹지 말래도 먹는 게 인간이니깐. 근데 넌 이름이 뭐냐?”
“별로 너희들한테 말하고 싶지 않은데.”
말끝마다 쏘아붙이는 나라를 영민은 가만히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봐요 섹시한 아가씨. 당신이 지금 누구 때문에 안전하게 있는 건지 알아?”
“이게 안전한 거야? 나한테 안전은 내가 살던 집에서 내 사람들하고 있는 거야.”
“그런 겁쟁이 아저씨랑 시끄러운 애새끼들하고 사는 게 재밌냐? 여기서 안전하게 우리랑 지내는 게 더 재밌지 않을까?”
나라는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니들은 참 생각하는 게 단순하구나.”
영민은 나라의 맞은편에 의자를 놓고 앉으며 말한다.
“지금은 단순하게 먹고 자는 게 가장 중요해진 거 몰라? 세상에 사람보다 좀비가 더 많아지는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이젠 그 흔한 인터넷 기사도 하나 안 올라와.”
나라는 대화하기 싫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긴 한숨만을 쉬었다.
영민은 담배를 한 대 꺼내 물더니, 나라 쪽으로 연기를 뿜으며 조용히 말한다.
“그 사자는 언제 오는 거야? 오긴 오는 거야? 아무튼 그 새낀 안 오는 게 더 좋을 거다, 오면 내가 죽여 버릴 거거든. 그럼 넌 영원히 돌아갈 때가 없어. 그 겁보 아저씨랑 귀여운 여자애랑 비리비리한 놈이 여길 올 리도 없고 말야.”
나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영민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양호실을 나가버렸다.
나라는 영민이 나간 양호실 문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녀는 간절히 믿고 있었다. 곧 성배가 와서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그래서 자신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저씨! 말 좀 해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진모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성배는 아무 말 없이 앞서서 걷기만 하는 진모의 등 뒤에서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성배는 불안해졌다.
얼마안가 낯선 집 앞에 도착한 진모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성배 군, 여기가 우리 집이야. 들어가자.”
진모가 먼저 들어가고, 성배는 뒤따라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희가 예지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
그 옆엔 정배도 같이 있었다.
소희는 성배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성배는 울며 다가오는 소희를 보자 더욱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오빠,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서야….”
소희는 성배에게 원망하듯 따졌다.
성배는 영문도 모른 채, 소희를 다독였다.
“아, 진짜 이 사람들 단체로 왜 이래! 야, 한이 어딨어, 인마! 형이 왔으면.”
성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에서 한이가 나왔다.
성배는 한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에게 다가갔다.
“이거 뭐야? 얼굴 왜이래.”
“그… 그게.”
한이가 망설이자 정배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성배 삼촌, 한이 형 어제 나쁜 놈들한테 맞았어요.”
정배의 말을 들은 성배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게 뭔 개소리야. 아니 씨발 어떤 새끼들이 이런 거야!”
성배가 화를 내자, 진모와 소희가 우선 성배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성배의 분노는 쉽게 가라안지 않았다.
잠시 한이의 얼굴을 보며 화를 내던 성배는 진모와 소희가 계속해서 달래자 조금씩 화를 누그러트리며 이성을 찾아갔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잠시 집을 둘러보던 성배는 모두에게 물었다.
“근데, 권나라 얘는 아직도 나한테 삐진 거야? 그게 언제적 일인데 그래. 야! 나라야, 좀 나와 봐라 자식아.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래도 네가 젤 보고 싶더라.”
드디어 올게 왔다는 듯, 소희는 두 눈을 감았다. 한이도 정배도 예지도 모두 진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모는 성배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나라 양은 여기 없어.”
“네? 그럼 어디 갔는데요?”
“미안해, 성배 군. 우리가 나라 양을 지키지 못했어. 나라 양은 악마 같은 놈들이 데려갔어.”
진모는 성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성배는 의외로 흥분하지 않고,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했다.
누구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건장한 사내들이 집에 침입해 아이들을 겁주고, 한이를 폭행했으며, 나라를 데려갔다고 전부 말했다.
모두들 성배가 당장이라도 나라를 구하러 가겠다며 분노를 폭발시킬 걸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성배는 무심하게 반응했다.
“흐흐, 권나라 그 자식 그거, 내가 까불거릴 때부터 알아봤다니깐.”
주변에 있던 모두는, 그중에서도 특히 소희는 성배의 무심한 반응에 섭섭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밖으로 나가는 성배의 두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고, 심지어 가볍게 떨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그들 모두는 성배가 슬퍼하지 않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도 나라를 믿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성배 군은 지금 나라 양을 믿는 거야. 자신이 구해주러 갈 때까지 의연하게 그리고 침착하게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진모의 말이 끝나자, 한이는 슬며시 성배를 따라 나갔다.
성배는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이가 다가가자 그는 가볍게 웃으며 한이에게 말을 건넸다.
“당했으면 복수해야지.”
“그럼요, 근데 절 이렇게 만든 놈은 형 거예요. 자존심 상하지만, 전 게임이 안 되더라고요.”
성배는 기죽어 보이는 한이를 다독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우리의 적은 좀비뿐만이 아니야. 미친놈들하고 악마 같은 새끼들도 우리의 삶에 위협을 가하면 가차 없이 결단을 내려야 돼.”
한이는 성배의 눈을, 그리고 성배는 한이의 눈을 서로 바라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그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성배는 미친놈의 저택과 생존자 아파트의 일들을 대충 얘기했고, 소희는 예지를 구하러 갔던 곳에서 만난 기는 좀비와 정말 어마어마했던 좀비군단과의 전쟁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래서요 성배 오빠, 우리끼리 정말로 수백 마리를 처리 했다니깐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한 어조로 말하는 소희의 말에 성배는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아, 우리 소희 이거 이거, 나 없는 동안 뻥이 왜 이렇게 늘었어. 무슨 이런 허약한 사람들끼리 수백 마리를 죽여?”
그때 진모가 흥분하여 침 까지 튀기며 말한다.
“진짜야! 성배 군, 우리가 정말로 예지가 잡혀있던 병원 앞에 있는 수백 마리의 좀비를 다 날려버렸어!”
한이도 한마디 하려다 얼굴이 아픈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성배는 그런 그들이 웃긴 듯, 끝까지 믿어주질 않았다.
“좋아, 그랬다 칩시다. 뭐, 아저씨까지 이렇게 흥분하시는데 어쩌겠어. 나 혼자만 편이 없으니 이길 수가 없네.”
예지는 처음 보는 성배가 무서운 듯, 계속 정배와 진모의 뒤에 숨어 성배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성배는 그런 예지를 보고 윙크를 하며 자신은 착한 사람이라고 어필했지만, 성배의 윙크에 예지는 더욱 겁을 먹고 정배와 방으로 피신해 버렸다.
한동안 각자의 지난날들을 얘기하던 그들은 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간다.
“성배 군도 대충 느꼈겠지만, 우리 중에 가장 성배 군을 걱정하고, 기다린 건 나라 양이야. 그리고 우리가 수백 마리의 좀비군단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나라 양의 역할이 컸지.”
“아이, 뭐 설마 권나라가 날 걱정했겠어요. 그냥 하는 소리였겠지.”
겉으론 무심한 척 했지만, 성배의 표정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로 가득 찼다.
그는 소희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까, 나라 걱정 그만해라.”
성배는 이번엔 진모를 보며 말했다.
“내가 올 때까지 나라 안 건드린다고 말했다면서요. 일단 한이 자식 얼굴부터 치료 좀 하죠.”
끝으로 성배는 한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네가 나 없을 때 고생이 많았구나. 보아하니 내일쯤이면 가라앉을 거 같으니깐. 내일 오후에 그 새끼들 치러 가자.”
한이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형, 근데 그 자식 진짜 괴물 같았어요. 정면으로 붙지 말고, 어떻게든 나라 씨를 먼저 구하는 방향으로 해야 될 거 같아요.”
성배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한이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야 인마, 이 세상에서 젤 쓸데없는 걱정이 리오넬 메시 축구 못할까봐 걱정하는 거랑 이 차성배 싸움에서 질까봐 걱정하는 거야. 내 걱정 말고, 네 얼굴부터 좀 잘 치료해. 그리고 저기 큰 칼, 저거 너 가져. 내가 저거 가져오려다가 옆구리에 칼까지 맞았다.”
한이는 성배가 가져온 큰 칼을 들어 보더니 아주 맘에 들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칼은 180cm가 넘는 한이의 가슴까지 올 정도로 길었고, 칼날은 짙은 회색빛이 감돌며, 매우 날카롭게 서 있었다.
게다가 매우 가벼워 한 손으로 들기에도 적합했다.
뭐라도 닿기만 하면 베일 것 같아 보여서, 보기만 해도 좀비들에게 아주 위협적일 것 같았다.
“형, 고마워요. 꼭 우리 모두를 지키는데 잘 쓸게요.”
대충 대화의 자리가 끝났고, 소희가 다시 한이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사이 성배는 진모에게 강덕 고등학교의 위치를 물었다.
강덕 고등학교는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큰 대로변을 쭉 따라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성배는 내일, 차로 갈지 아니면 걸어갈지를 진모와 상의하다 차로 가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대충 저녁을 먹은 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진모와 소희, 한이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성배는 예지와 친해지기 위해 좀비 흉내를 내며, 예지, 정배와 술래잡기를 해주다 늦은 시각 거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집안에 모두가 잠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각 방의 문 앞에서 방문을 쳐다보며 짧은 시간을 보낸 그는 배트만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한이는 얼굴이 저 지경이라 안 되고, 진모 아저씨는 혹시라도 잘못되면 예지 때문에 안 되고, 씨발 아무리 세상이 개판이 됐어도 남자들 싸움에 소희 같은 연약한 여자를 끌어 들이면 안 되지…. 뭔 놈의 팔자가 일생이 싸움이냐. 흐흐흐.’
성배는 조용히 대문을 열고 나갔다. 아직 여름이었지만, 새벽 공기는 생각보다 찼다. 그는 진모가 말해준 강덕 고등학교의 위치를 떠올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희미한 가로 등불만이 유일하게 성배의 편인 것 같았다.
살짝 달리기도 하고, 전력질주를 하기도 하면서 어느덧 강덕 고등학교의 팻말이 있는 골목 앞까지 다다랐다.
‘나라야, 내가 왔다.’
성배는 지체 없이 강덕 고등학교로 걸어갔다.
그는 잠시 학교 외벽을 돌며 주변을 살펴봤다. 생각보다 담장이 높아 넘어갈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씨발, 나라가 어딨는 줄 알고 담을 넘어 가냐.’
성배는 콧방귀를 끼며, 다시 정문으로 향했다.
학교의 정문은 대한민국의 많은 학교가 사용하는 창살로 된 철문이었다.
그런데 유독 이 학교의 창살은 감옥의 창살을 연상케 했다.
정문에 도착하자 두 명의 사내가 굳게 닫힌 철문 안쪽에서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성배의 눈에 들어왔다.
성배는 철문 바로 앞까지 다가가 배트로 철문을 두드렸다.
쇠붙이 끼리 부딪쳐나는 깡깡 거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졸고 있던 두 사내의 귀에 거슬렸는지, 사내들은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문 앞에 성배가 웃으며 서 있는 걸 발견한 그들은 성배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뭐냐?”
“뭐긴 뭐야, 생존자지.”
사내들은 서로 쳐다보며 웃더니 성배를 향해 말한다.
“여긴, 남자들한텐 대피소가 아닌데?”
성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문 앞에 바짝 다가가 사내 한명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사내는 의기양양하게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성배는 넓은 창살 틈 사이로 잽싸게 손을 뻗어, 다가오는 사내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잡아당겨 머리를 창살 틈에 강하게 짓이겼다.
손이 들어가기엔 넓은 틈이지만 사람의 머리가 빠져나오기엔 비좁은 틈이었기에 사내의 머리는 심하게 눌리며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당황한 다른 사내가 성배의 손을 잡아 뜯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동료만 더 괴로워 할 뿐이었다.
“뭐야! 원하는 게 뭐야?”
“가서 전해, 이 씨발 새끼들아! 이 차성배가 우리 나라 구하러 왔다고.”
성배가 머릴 놔주자 두 사내는 뒤도 안 돌아보고 학교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온 그들은 문을 열고 성배를 들여보냈다.
“보아하니 힘 좀 쓰나본데, 그래도 여길 혼자 오다니 참 미련하네.”
구시렁거리는 사내를 성배가 무섭게 노려보자 사내는 입을 닫고 조용히 성배를 강당으로 데려갔다.
강당 안에 들어서자 스무 명 남짓한 사내들이 전부 성배를 위아래로 갈구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성배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강당 중앙에 우뚝 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두 사내가 강당의 단상에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있었다.
성배는 강당을 한 번 둘러봤다.
보통의 고등학교 강당과 다를 바 없는 구조였지만, 어디서들 그렇게 구해왔는지 고급 소파들이 여기저기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널려있었다.
단상 위에 있던 영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성배를 향해 말했다.
“어이, 말로만 듣던 사자가 드디어 나타나셨구만. 생각보다 집을 빨리 찾았나 보네.”
성배는 단상 위에 있는 두 사내를 천천히 올려다봤다.
“동네 양아치 새끼들이 뭉쳐서 좀비로부터 잘 살아남았으면, 계속 잘 살아남으면 되지 왜 뒤질려고 발악을 하냐?”
이번엔 기천이 되받아쳤다.
“남자가 어떻게 밥만 먹고 사나, 안 그래? 앞으로 여자는 점점 더 귀해질 텐데. 그렇게 섹시한 언니를 어떻게 가만 놔둬.”
성배는 콧방귀를 끼며 응수한다.
“함부로 나라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진짜 뒤진다.”
“그래그래, 근데 각오는 하고 왔겠지. 보면 알겠지만, 만만한 애들 하나도 없다.”
성배는 계속해서 차분히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도 흥분돼있지 않았고, 말도 천천히 내뱉었다.
“개소리 하지 말고 우리 나라 당장 데려와. 어딨어?”
“여기서 젤 좋은 곳에 안전하게 있으니깐 걱정 마. 어차피 너한텐 볼 기회가 없을 테지만 말야.”
그 순간 덩치가 아주 큰 사내 하나가 성배에게 달려들었다.
“주둥이 털러 왔냐. 이 씨발놈아!”
덩치 사내는 성배의 뒤에서 뛰어와 성배를 잡으려 했지만, 성배는 바로 몸을 숙이며 느려터진 덩치사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배트로 덩치 사내의 뒤통수를 갈겼다.
텅 소리와 함께 덩치 사내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그걸 본 기천은 성배를 비웃었다.
“뭐야, 우리 애들은 주먹인데 넌 왜 무기를 써!”
성배는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배트를 쥐고 있던 오른쪽 손과 팔을 크게 회전시키며 어깨근육을 풀었다.
“그럼, 사내새끼들이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아이들 위협하고, 아저씨한테 함부로 하고, 한이 얼굴 그렇게 만들어 논 건 참 잘한 짓이다.”
그러더니 배트를 들어 기천과 영민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한다.
“너냐? 아님 너냐? 우리 한이 얼굴 그렇게 만든 거.”
영민이 소파에서 일어나 담배를 한 대 씹어 물며 느긋하게 웃음 지어 보였다.
“나야. 그 비리비리한 놈 면상 그렇게 만든 거.”
성배는 어금니를 꽉 물고 영민을 노려보며 한 마디 던진다.
“넌 조금만 기다려라.”
영민과 성배는 서로를 노려보며 잠깐의 기 싸움을 펼쳤다.
잠시 그 둘을 바라보던 기천이 손짓하자 이번엔 작은 사내가 성배에게 달려들었다.
키는 작지만 몸놀림이 아주 빨랐다. 성배의 주변을 빠른 속도로 돌던 작은 사내는 성배가 다가오자 성배의 배를 발로 빠르게 내질렀다.
그러나 성배는 작은 사내의 발을 가볍게 잡고 밀어서 넘어트린 후, 곧바로 일어나려는 그의 얼굴을 배트로 내리쳤다. 그리고 또 내리쳤다.
단 두 방의 공격에 작은 사내는 얼굴을 부여잡고 뒹굴었다.
성배는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배트를 던져버렸다.
“뭐가 이렇게 싱거워. 이 씨발놈들아! 다음!”
성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사내가 옆에서 달려오며 성배를 공격하려고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성배가 먼저 그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사내의 턱을 성배의 거대한 주먹으로 정확히 강타했다. 성배의 주먹에 턱을 제대로 맞은 사내는 그대로 뒤로 밀리며 주저앉았다.
“다음!”
성배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치자 무리 중에 그나마 존재감 넘치던 둘이 다가왔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성배를 앞뒤로 둘러싸고 두 사내가 거리를 좁혀왔다. 성배보다 키가 큰 거한과 아주 뚱뚱한 사내였다.
성배는 앞과 뒤의 상대를 확인한 후 앞쪽에서 다가오는 거한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거한은 성배가 달려오자 그에게 거대한 주먹을 뻗었다.
성배는 거한의 거대하지만 조금 느린 주먹을 자신의 왼쪽 팔을 들어 겨드랑이 사이로 흘린 후, 자신의 팔뚝과 겨드랑이로 거한의 팔을 졸랐다. 그리고 성배는 오른쪽 주먹을 이용해 거한의 얼굴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뒤에서 뚱보가 다가오자 성배는 거한의 팔을 조른 채로 몸을 돌려, 뚱보와 자신의 사이에 거한을 위치시켜 함부로 공격을 못하게 만들었다.
거한의 얼굴이 알록달록하게 멍 들자 성배는 겨드랑이에 끼웠던 거한의 팔을 놓고 배때기를 강력하게 발로 차버렸다. 거한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성배는 곧바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뚱보에게 바짝 다가가 귀싸대기를 가차 없이 날렸다.
철썩 하는 소리가 강당에 크게 울려 퍼졌다.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얼굴과 목 주변을 성배의 거친 손바닥으로 수차례 공격당한 뚱보는 마지막 반항이라도 하듯 성배의 가슴을 두 손으로 힘껏 밀어버렸다.
느려터진 뚱보지만 그 힘만은 대단했다. 성배는 꽤 먼 거리를 날아가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성배의 주먹은 무자비 그 자체였다. 곧바로 일어나 뚱보에게 달려들어 왼팔로 헤드록을 건 후, 오른쪽 주먹으로 바닥이 피로 물들 때까지 뚱보의 안면을 가격했다.
뚱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성배는 쉬지 않고 또 외쳤다.
“다음!”
강당 안은 고요했다. 아무도 성배에게 덤빌 생각조차 못했다.
성배는 다시 한 번 외친다.
“다음! 없어? 이 씨발 새끼들아 이게 다야?”
이번엔 성배가 먼저 상대를 골랐다. 멀뚱히 서 있던 사내 하나의 목을 잡고 그대로 들어서 벽으로 밀쳤다. 그리고 그 사내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성배는 오른발로 그 사내의 하체를 차서 쓰러트리고 그 사내의 얼굴을 발로 마구 짓밟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들의 동료를 무참히 짓밟는 성배를 보며 나머지 사내들은 점점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성배에게 짓밟힌 사내의 얼굴은 코가 삐뚤어져 있었고, 눈과 입술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 광경을 보던 기천은 소파 아래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하지만 영민이 기천의 손을 막으며 다시 칼을 집어넣게 했다.
영민은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고, 성배는 그 장면을 보고 호탕하게 웃으며 시비를 걸었다.
“이제 본 게임 시작이구나. 네 동생들 불쌍해서 어쩌냐? 면상이 전부 씹창이 났는데. 흐흐.”
영민도 야비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꾸한다.
“집도 못 찾아서 지 여자도 못 지킨 게, 어디서 나대.”
그렇게 각자 서로를 겨냥한 웃음과 말을 내뱉던 그 둘은 강당의 중앙에 마주섰다.
순식간에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지하다 못해 살벌할 정도의 기가 둘에게서 느껴졌다.
“네가 그랬다며, 내가 오기 전까진 우리 나라 손끝하나 안 건드린다고. 그래도 이 양아치들 가운데 쓸 만한 새끼가 있어서 다행이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날 이기면 개 데리고 가도 돼. 그런데 말야, 과연 내가 진짜로 섹시한 언니를 가만 놔뒀을까? 씨이발, 그 섹시한 목덜미에서 어찌나 좋은 향기가 나던지.”
영민의 도발에 드디어 성배의 화가 폭발했다.
“야이, 씨발!”
흥분한 성배의 주먹이 곧바로 영민의 얼굴 정중앙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영민은 여유 있게 고개를 꺾어 성배의 주먹을 흘리며, 자신의 오른손으로 성배의 오른쪽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넘어트렸다.
“하, 나 이 씨발놈 봐라.”
바닥에 넘어진 성배가 황당해하며 영민을 쳐다보자 영민은 살짝 웃으며 말한다.
“흥분하지 마. 어차피 승패는 뻔한데 뭘 그리 흥분해.”
성배는 천천히 일어났고, 영민은 두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또 다시 성배를 도발했다.
“다음부턴 넘어지면 안 기다릴 거야. 네가 몇 게임 뛰었으니깐 한 번 봐준 거다.”
성배는 말없이 영민을, 영민은 입을 다물고 성배를 서로 노려보며 서로에게 무서운 기세로 다가섰다.
그렇게 괴물 대 괴물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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