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재회...
“언니, 저 사람 깨어나면 좀비로 변하는 거 아닐까?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
“얘는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선생님들이 잘 치료 했으니깐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정말 오랫동안 안 일어나긴 한다.”
낯선 방 안의 침대에 누워 링거를 꽂고 조용히 자고 있는 성배의 곁에서, 여자 둘과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 한명이 그를 보며 대화중이었다.
성배는 악몽이라도 꾸듯 눈꺼풀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의사로 보이는 남자는 성배의 맥박과 호흡, 체온 등을 재본 후 별 다른 이상은 없다며 방을 나갔다.
두 여자는 의사가 나간 뒤에도 계속 성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방금 이 사람 움직인 거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언니는, 동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성배의 손을 쳐다봤다.
하지만 성배의 손은 움직임이 없었다.
“너 장난하니? 아픈 사람 갖고 장난 하지 마.”
“아냐, 언니 진짜야. 이거 봐!”
다시 한 번 언니에게 성배의 손을 보라고 하자, 그녀는 짜증을 내며 동생을 꾸짖었다.
“너 정말···.”
그 순간 정말로 성배의 손이 조금 움직였다. 언니는 성배의 손이 움직이자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들은 성배의 손에 집중했다.
성배는 거기에 호응이라도 해주듯,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선생님!”
동생이 의사를 부르며 뛰어 나갔고, 언니는 계속해서 성배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으··· 음.”
성배가 입을 열고 짧게 소리를 내자, 언니는 성배에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드세요?”
성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옆에 있던 언니가 성배를 부축해서 그 자리에 앉혔다.
성배는 한동안 멍하니 언니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
“아, 네, 걱정 마세요. 길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계셔서 저희가 구해 드렸어요. 여기 의사 선생님도 계셔서 치료도 잘 됐고요.”
성배는 주위를 둘러봤다.
방 안은 한눈에 보기에도 병원 같아 보이진 않았다.
성배는 옆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시고, 언니에게 물었다.
“제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요? 종로였나요?”
“아뇨, 여긴 신림동인데요. 의사 선생님께서 칼에 찔린 거 같다고 하셨어요.”
성배는 천천히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봤다.
많이 아물었는지 딱히 고통이 느껴지진 않았다.
언니는 성배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 같자, 자신을 소개했다.
“전 윤희선이에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성배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네, 전 차성배입니다. 근데···.”
성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
“근데, 제가 왜 신림동에서 칼을 맞은 거죠?”
희선은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 글쎄요. 저희는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라서요.”
“아, 그렇군요. 식량을 구하다니···.”
그때, 동생과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간단하게 성배를 진찰한 뒤,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말했고, 성배는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의사에게 말했다.
한동안 성배의 얘기를 듣던 의사는 뜻 밖에 말을 던졌다.
“아무래도 일시적인 기억상실 증세인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제 이름이나 가족, 동생들까지 최근의 일들만 빼고 전부 기억이 나는데요.”
“기억상실이란 게 꼭 모든 걸 기억 못하는 건 아닙니다. 성배 씨처럼 특정 부분에 대한 기억만 지워지는 경우가 오히려 많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 하지마세요. 과다 출혈로 인한 경미한 쇼크나 심리적인 충격 등의 이유로 누구든 경험할 수 있는 증상이니까요. 푹 쉬시면서 마음 편히 갖고 계세요.”
성배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제 동생들한테 전화 좀 해야 되겠는데요.”
희선이 성배를 부축하며 묻는다.
“동생 분들도 살아 계신가요? 그럼 연락이 되면 이곳으로 오라고 하세요. 지금 상황에 여기만큼 안전한 곳은 없어요.”
성배는 희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요?”
“네, 지금 바깥은 지옥이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지···.”
성배의 기억은 정확히 좀비와 관련된 것들만 지워져버렸다.
할루신과 좀비사태는 물론이고 임진모, 강한, 윤소희, 박정배 그리고 권나라까지 성배는 그 누구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성배는 허탈함에 다시 침대에 앉아 버렸다.
옆에서 성배를 딱하게 보던 희선이, 그가 기억을 되찾는 것을 돕기 위해,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성배는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3일이나 지났네요. 성배 씨는 3일 내내 누워만 계셨어요.”
“그렇군요. 근데 그 좀비는 한국에만 있는 건가요?”
“아뇨, 뭐, 언론이 떠드는 걸 다 믿을 순 없지만, 유럽 쪽에서 최초로 좀비가 나타났다고 하더라고요. 이틀 전엔 중국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좀비들이 북한 국경도 뚫고 들어갔다고 하니, 이젠 정말 온 세상이 좀비로 뒤덮인 거죠.”
성배는 또 궁금한 게 생긴 듯 희선에게 물었다.
“근데, 좀비는 왜 생긴 건가요?”
“글쎄요. 이런저런 얘기들이 너무 많아요. 뭐라더라 할루겐? 하여간 신종마약 때문이다, 미국이 자신들의 신무기를 팔아먹기 위해 퍼뜨렸다, 환경오염이 음식물에 변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뭐가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죠.”
이번엔 희선이 성배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근데, 성배 씨는 외모가 심상치 않은데, 뭐 하시던 분이셨어요?”
“아, 저는 저기, 그··· 약을···.”
“아! 약사셨어요?
희선의 약사였냐는 말에 성배는 대충 얼버무렸다.
“네, 뭐··· 비슷한 겁니다. 사고, 팔고···.”
“죄송해요. 문신도 많고, 좀 그래서 혹시나 했어요.”
희선은 성배의 첫 인상이 무서워 보였지만, 대화를 조금 나눠본 그는 그리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아, 참! 이것들이 성배 씨가 갖고 계시던 거예요.”
희선은 산탄총과 알루미늄 배트, 그리고 큰 칼을 성배에게 내밀었다.
성배는 다소 당황한 듯, 멀뚱히 그것들을 쳐다보다가 하나씩 만져보며 자신의 지워진 과거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워진 성배의 기억은 그리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성배는 잠시 혼자 있게 해달라며 희선을 밖으로 내보냈고,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만을 바라봤다.
‘다른 건 다 기억이 나는데, 좀비와 관련된 것만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이 상처는 또 뭐지? 동생들하고 다니다 시비라도 붙은 건가···.’
성배의 머릿속엔 희미하게 누군가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고, 어렴풋이 그간의 일들이 기억날 듯 기억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다음날부터 성배는 그곳에서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그곳은 수십 명의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생존자 아파트였다.
원래 주변에 집 들이 거의 없는 한 동짜리 아파트에 모인 수십 명의 사람들은, 아파트 입구에 장애물을 쌓아 방어를 단단히 해놓고 있었다.
총은 없었지만 나름의 무기들을 들고 철저히 보초를 서며 그들은 그들 삶의 마지막 터전을 지켜내고 있었다.
성배도 어색하지만, 그들과 어울리며 그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희선이 성배의 곁에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어렵지 않게 그곳에서의 생활에 녹아들고 있었다.
게다가 희선과 있으면 성배는 너무 행복했고, 과거 따윈 이제 상관없다고 생각 할 정도로 그곳에서의 생활은 안정적이고, 즐거웠다.
성배는 희선과 보초를 서며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뭐 때문에 기억을 잃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난 예전처럼 거칠고, 드럽게 살고 있었을 거야. 기억 따위 아무렴 어때, 이곳에서의 생활이 이렇게 즐거운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성배를 보고 희선이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아, 뭐 별거 아니에요.”
“잘은 모르겠지만 성배 씨는 분명히 기다리는 가족이 있을 거 같아요.”
“예, 어머니가 계시긴 한데, 상황이 이러니 잘 살아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밖엔 뭐 동생들 정도···.”
“그럼 애인은 없으셨나요?”
“전 그딴 거 안 키웁니다.”
“아, 그래요. 훗, 근데 성배 씨는 말투가 너무 거칠어요.”
“원래 제 말투가 좀 그래요. 맘에 안 드는 인간들이나 나보다 어려보이면 무조건 반말부터 하고···, 제가 좀 거칠게 살아서 그런 거죠, 뭐.”
성배의 말을 듣던 희선이 미소를 띠며 성배를 빤히 바라본다.
“전 나이 들어 보이나 보죠? 저한테는 계속 존댓말 하시네요.”
“아, 아뇨. 제 목숨 구해준 분인데, 함부로 반말 할 순 없죠. 저도 가릴 건 가립니다.”
자신의 농담에 말까지 더듬는 성배의 모습이 맘에 들었는지, 그녀는 성배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희선은 성배에게, 성배는 희선에게 자신들도 모르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성배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곳에서의 생활에 크게 만족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나라는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예지를 구했던 날만 해도, 나라와 모두는 성배를 곧 다시 만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벌써 열흘이 넘도록 성배는 나타나질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나라는 너무나 달콤한 잠을 자고 일어났다.
오늘따라 새들의 지저귐이 달콤했고, 그녀에게 약간은 거슬리던 잠자리마저 오늘은 너무 편안했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라를 보며, 아침을 준비하던 소희가 물었다.
“언니! 오늘 뭐 좋은 일 있어요?”
“응? 아니, 그냥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좋네.”
“오늘 나랑 당번이라서 그런 거죠? 솔직히 말해요!”
“아, 뭐 그것도 있고.”
원래는 진모와 한이가 야간에 성배를 기다렸고, 소희와 나라가 주간에 기다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다리는 날이 길어지자, 소희와 나라는 번갈아 가면서 가끔 야간에 한이, 진모와 짝을 이뤄 성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들은 성배와 처음 헤어졌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빈 집을 찾아 자신들의 새 집을 마련했다. 방 네 개에 넓은 거실, 게다가 작지만 마당도 딸린 안전한 보금자리였다.
그간 한이와 나라는 끝내 가족들과 소식이 끊겨버렸다. 소희와 둘이서 한이가 살던 목동에 다녀온 뒤로 꼬박 하루 동안 한이는 방에 틀어박혀 끼니도 거른 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나왔다.
한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진모를 비롯한 모두는 한이를 말없이 꼭 안아주었다.
나라는 아버지와의 통화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단 한 번도 연결되지 않았다.
애써 담담한 척하는 그녀를 보는 건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지만, 냉정하게 보면 자신의 삶이 계속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축복받은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가족 얘기가 아예 없었던 소희에겐 가족에 대해 끝내 아무도 묻지 않았다.
“우리 왔습니다.”
한이와 진모가 야간 당번을 서고 돌아왔다.
“수고 하셨습니다. 배고프시죠? 어서 식사하시고 푹 주무세요.”
소희와 나라는 한이와 진모에게 아침상을 차려준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에서 나와 골목길을 따라 7분 정도를 걸으면, 성배와 처음 헤어졌던 곳이 나온다.
밤에는 바로 길 건너편에 있던 세탁소에서 성배를 기다렸고, 낮에는 그 근처에 있는 빌딩 5층에서 소파와 식량, 망원경을 가져다 놓고, 그 지역을 넓게 관찰하고 있었다.
오늘도 소희와 나라는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근처를 둘러보고 있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시간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잘 간다.
배고프면 밥도 먹고, 뻐근하면 스트레칭도 하면서, 그들은 성배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고, 소희와 나라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웬 사내가 한 명 어슬렁거리며, 나라가 붙여놓은 성배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긴 전단지 쪽으로 접근했다.
가만히 서서 그 전단지를 쳐다보던 사내는 갑자기 그걸 뜯어버렸다.
그 광경을 보던 소희가 짜증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언니, 저 사람 뭐죠? 왜 저러지···.”
“일단 좀 더 두고 보자.”
나라는 침착하게 소희를 진정시키고, 그 사내 쪽을 주시했다.
사내는 눈에 보이는 전단지를 계속해서 뜯기 시작했다.
한동안 지켜보던 나라와 소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사내에게 달려갔다.
“저기···, 이걸 왜 때세요?”
소희가 조심스럽게 사내에게 물었다.
가까이서 본 사내는 한눈에 보기에도 다부진 몸을 갖고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소희를 빤히 쳐다보더니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요 귀염둥이는 누구야?”
그 사내의 목소리는 톤이 가늘고 야비했다.
“네? 아니, 지금 장난하세요?”
“장난 아닌데, 길거리에 이런 지저분한 걸 붙여놓으면 안 되지.”
“이게 왜 지저분한 거예요? 이 오빠는 가족 같은 우리 일행이라고요.”
“오빠? 와, 그 소리 좆나게 오랜만인데. 야, 귀염둥이, 나한테도 불러줘 봐. 오! 빠! 라! 고!”
사내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소희에게 다가가자, 나라가 등 뒤에 메고 있던 기관단총으로 사격자세를 취하며 사내를 위협했다.
“대갈통 날라 가기 싫으면 소희한테 접근 하지 마.”
나라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빼서 나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 다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오호라, 가만 보니까 저게 물건이네. 키도 크고, 몸매도 죽이고, 저게 딱 내 스타일이네. 역시 여자는 섹시지. 안 그래? 귀염둥이.”
사내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소희를 보며 기분 나쁜 말투로 말했다.
소희가 조금씩 무서워하며, 뒷걸음질 치자 남자는 재빨리 소희의 팔을 잡았다.
“어디 가? 오빠라고 불러 보라니깐.”
나라는 최근 들어 쓸 일이 없었던 기관단총을 오랜만에 장전하고, 사내의 머리를 정확히 겨눴다.
“그 손 안 놔?”
기천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나라를 도발한다.
“어어, 왜 이래 섹시한 언니. 그거 진짜 같은데, 경찰한테 뺏은 거야?”
“주둥이 닫아. 너 따위 양아치한테 말할 이유 없어. 소희야, 내 뒤로 와.”
사내는 소희의 팔을 놔주었고, 소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라의 뒤로 숨었다.
그 순간, 주변에서 여러 명의 사내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기천이 형, 얘들 뭐에요? 저거 진짜 총인가?”
“어이구, 하난 귀엽고, 하난 섹시하네.”
그들은 나라가 총으로 겨누던 사내를 형이라 부르며 다가왔다.
총 네 명이 기천이란 사내의 옆으로 가서 섰다.
전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내들 사이에서, 딱 한 명만이 유독 튀었다.
배영민이란 남자로 180cm이 훌쩍 넘는 키에, 몸 또한 근육질로 뒤덮여 있었다. 성배와 견주어도 오히려 영민의 체구가 더 커 보일 것 같았다.
그 배영민만이 유일하게 기천과 서로 반말을 섞었다.
“야, 권기천. 씨발 쪽팔리게 여자애들한테 당하고 있었던 거냐?”
“당하긴 무슨, 귀염둥이랑 섹시한 언니랑 좀 놀아주고 있었지.”
그 둘은 아주 친해 보였고, 무리에서 유독 강해보였다.
그들의 등장에도 나라는 쫄지 않고, 그들을 하나하나 경계하고 있었다.
“그 전단지 당신들 맘대로 해, 우린 갈 테니깐.”
나라는 우선 그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듯, 사격자세를 풀지 않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소희도 나라와 함께 뒷걸음질 치며, 그자들로부터 멀어져갔다.
의외로 그자들은 담배를 꼬나물고, 멀어져가는 그녀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근데 재들 아까운데, 저 섹시한 애는 딱 내 스타일인데···.”
영민의 말에 기천도 맞장구를 쳤다.
“너도 개야? 나도 개야. 뭐, 일단 보내주자고, 어차피 저 건 우리 건데.”
영민은 멀어져가는 그녀들을 보며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근데, 재들 총 갖고 있는 거 보면, 보통 애들은 아닌가 본 데, 일행들도 다 총이 있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걸.”
“이거 왜 이래. 천하에 배영민이 무서운 게 있어? 걱정 마. 설마 일행이 전부 총을 갖고 있을라고. 아무튼 가자, 슬슬 어두워지네.”
기천과 영민이 앞장서서 걷자, 그 뒤를 나머지가 어슬렁거리며 따라갔다.
골목길에 숨어 그들을 주시하던 나라가 기관단총을 다시 등에 멨다.
“소희야, 아무래도 불안한데. 저것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게 아무래도 찜찜해.”
소희는 아직도 무서운 듯, 얼굴이 많이 굳어 있었다.
“언니, 일단 돌아가요. 가서 모두랑 얘기 해봐야겠어요.”
“그래, 많이 놀랐지. 가자.”
해는 거의 저물어 그녀들의 정면에 떠 있었고, 그 때문에 아주 길게 드리워진 그녀들의 그림자는 보통 때보다 더 쓸쓸해 보였다.
애써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소희와 달리, 나라의 불안감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좋았던 오늘 아침의 달콤함은, 어느새 씁쓸함으로 변해 그녀의 마음을 뒤죽박죽 헤집어 놓고 있었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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