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로 뒤덮인 세상-23화 (23/36)

10화 - 미친 것들의 최후

성배의 등 뒤로 묶인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자 등받이 뒤로 묶인 손은 생각보다 섬세함이 더 떨어졌다. 아무리 뒷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해도 자세가 잘 나오질 않았다.

‘아 놔, 씨발 진짜. 이것만 꺼내면 저것들은 오늘이 제삿날인데.’

성배는 몇 번이고 뒷주머니에 있는 낚시칼을 꺼내려 애썼지만, 좀처럼 그의 손가락은 낚시칼에 닿지 못했다.

거실에선 꽤 오래 전부터 세 사람이 큰소리를 내며 싸우고 있었다.

‘저것들은 같은 편이야 적이야. 가지가지 한다, 진짜.’

성배는 한숨을 쉬며 다시 한 번 방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것도 그의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성배는 다시 뒷주머니에 손을 넣기 위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왼팔을 오른쪽으로 뻗고, 묶인 손을 비비며 조금씩, 조금씩 뒷주머니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손에 압력이 가해졌지만, 성배는 고통을 참아내며 어떻게든 낚시칼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됐다. 닿는다, 이제.’

성배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이 낚시칼을 살짝 건드렸다.

탄력을 받은 성배는 다시 한 번 숨을 참고 온 신경을 오른손에 집중했다.

성배의 손이 드디어 낚시칼에 닿은 그 순간 거실로부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성배는 다급하게 낚시칼을 꺼내려고 마지막 힘을 냈고, 그와 동시에 방문은 활짝 열렸다.

성배는 깜짝 놀라 뒷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혜정이었다.

“뭐야, 야! 거 매너 좀 지키자. 아무리 내가 잡혀있어도 그렇지.”

혜정은 방문을 닫고, 성배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성배 씨, 제가 이거 풀어드리면 저 도와 주실래요?”

성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혜정은 결연한 표정으로 성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 수작이야 또?”

“수작 아니에요. 저 인간들 나 무시하는 거 더는 못 참겠어요.”

성배의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태연한 척하며 혜정을 확실히 구슬리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래 흰 티, 넌 저것들하고 안 어울렸어.”

성배의 말에 혜정은 고개를 숙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 사실 정도 오빠 좋아해요. 그래서 같이 다니기로 한 거예요. 진짜 지연이랑 할 짓 다 하면서 눈꼴사납게 굴어도 좋으니깐 나한테 따뜻한 눈길 한 번,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길 기다렸어요.”

“이런, 이런….”

“근데, 집안일은 내가 다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주지도 않고, 지연이 저 계집애는 사람 바보 취급만 하고, 더는 못 참아요.”

성배는 기회다 싶어 혜정의 감정을 흔들었다.

“흰 티, 아니지 혜정아. 이거 풀어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저 노란머리 새끼 네가 갖게 해줄게.”

“네? 어떻게요?”

“저 지연인가 하는 년은 내가 데리고 나가서 다리를 부러뜨려 아무데나 버리고, 저 노란머리는 팔, 다릴 부러뜨려서 영원히 네 옆에 있게 해줄게.”

혜정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홧김에 들어와 성배를 풀어준다고는 했지만, 보기만 해도 살벌한 성배가 거실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 보다 더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천천히 성배에게서 한 발 물러났다.

성배는 혜정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고, 다시 한 번 그녀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혜정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아는데, 난 널 도우려고 여기 온 사람이야. 이것만 풀어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날 믿어라.”

성배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간 얼어있던 혜정의 마음에 확실한 변화를 일으켰다.

혜정은 문과 성배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때마침 지연이 문을 두드리며 혜정을 찾았다.

“야, 혜정이 너 여기서 뭐해! 어? 문도 잠갔네.”

혜정은 방문을 잠시 쳐다보다 획하고 몸을 돌려 성배의 뒤로 다가갔다.

“풀어드릴게요. 그냥 아무도 해치지 말고 가주세요.”

혜정이 성배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빨랫줄을 풀었다.

드디어 성배에게 다시 자유가 찾아왔다. 그는 양팔을 쭉 벌리고 어깨와 목을 스트레칭 하며 일어났다.

“고맙다. 약속대로 넌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게.”

“네? 아니 그냥 아무도 해치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성배는 뒷주머니에서 낚시칼을 꺼내 칼날을 뽑으며 방문을 가리켰다.

“지금 총 누가 갖고 있냐? 나도 웬만하면 그냥 가고 싶은데, 나가면 분명히 총 들고 설칠 거 아냐?”

혜정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지금 총은 그냥 거실 소파 위에 있어요.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먼저 나가서 그냥 보내 주자고 할게요. 처음엔 망설여졌는데 아무리 미워도 내가 좋아하는 오빠고 친군데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부탁하는 혜정을 보며 성배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에휴, 알았다. 이렇게 물러 터졌으니깐 저런 병신들한테 무시당하지. 네 인생이니깐 네가 알아서 해라.”

혜정은 방문 앞으로 가서 지연에게 말한다.

“야, 지금 성배 씨랑 같이 나갈 거야. 풀어주면 우리 안 해친다고 했으니깐, 밖에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알았지!”

잠시 밖이 조용해졌다.

지연이 어디론가 갔다가 다시 방문 앞으로 돌아왔다.

“그래 알았어. 하여간 김혜정, 넌 물러 터졌어.”

혜정은 성배를 보며 이제껏 보지 못한 가장 밝은 미소를 보였다.

성배는 그런 혜정이 이해가 안 가면서도, 그녀의 착한 마음씨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해서,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혜정은 고개를 돌려 미소 짓는 얼굴로 성배를 바라보며 앞장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좆을 까세요! 이 씨발년놈들아!”

하지만 혜정의 생각과는 달리 문 앞에 서있던 정도는 산탄총을 들이대며 욕을 퍼부었다.

혜정은 그러지 말라며 재빠르게 정도의 앞에서 양팔을 벌려 성배를 보호했고, 지연은 그런 혜정을 잡아끌었다.

혜정은 지연과 몸싸움을 하며 정도가 들이댄 산탄총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산탄총이 발사됐다.

발사된 총알은 혜정의 배에 큰 구멍을 남기며 성배의 바로 옆으로 날아와 벽에 박혔다.

성배의 얼굴엔 혜정의 몸통이 뚫리며 사방으로 튀긴 피가 엄청나게 튀었다.

성배는 조용히 자신의 오른팔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지연과 정도는 자신들도 모르게 발사된 총에 자신들의 친구가 죽는 걸 눈앞에서 봤지만, 슬퍼하기는커녕 성배에게 죄를 물으며 따지고 들었다.

“너 때문이야. 이 개새끼야!”

“네가 착한 혜정이 꼬셔서 이렇게 된 거잖아!”

성배는 그것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은 듯, 인상을 쓰며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뭐야, 이거 안 놔!”

거세게 지연의 목을 잡은 성배는 곧장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와서 정면에 있던 정도 쪽으로 그녀를 밀어버렸다.

지연과 정도가 부딪치며 얽혀서 넘어졌지만, 정도는 끝까지 산탄총을 쥐고 성배를 겨냥했다.

성배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뚜벅뚜벅 그들에게 걸어갔다.

정도는 허겁지겁 일어나려다 다시 지연과 몸이 꼬여 넘어졌고, 성배는 정도의 면상을 발로 강하게 걷어차 버렸다.

얼굴을 강하게 차인 정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성배는 넘어져 있는 지연의 다릴 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왔다.

“이거 안 놔! 오빠 어떻게 좀 해봐!”

성배는 아무 말 없이 지연의 아킬레스건을 낚시칼로 그어 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

지연의 비명이 큰 저택을 가득 메우며 울려 퍼졌다.

성배는 지연의 다리를 놔주는가 싶더니 이번엔 반대쪽 다리를 잡았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요. 죄송해요. 다 이 새끼가 시킨 거예요.”

지연의 변명에 성배는 코웃음을 치며 한 마디 던진다.

“나도 내가 시켜서 하는 거야.”

“으아아아아아아아!”

지연의 반대쪽 다리의 아킬레스건마저 그어버린 성배는 무서운 눈으로 정도를 노려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정도는 어느새 일어나 자세를 잡고 성배에게 산탄총을 겨눴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산탄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성배는 정도를 비웃으며 발로 산탄총을 차버렸다.

총을 잃은 정도는 다가오는 성배의 정강이를 강하게 걷어찬 뒤, 도망가려고 몸을 틀었지만, 성배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 정도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끌고 오자 정도의 상체는 자연스레 숙여졌다.

위에서 정도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성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산탄총은 한 발 쏘면, 장전을 해야 돼. 이 미친놈아.”

“네, 알겠습니다. 살려….”

정도의 살려달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배의 거대한 주먹은 정도의 안면을 마구 가격하기 시작했다.

십여 차례의 안면 가격이 끝나자 성배는 정도의 목을 잡고 거실 중앙으로 질질 끌고 갔다.

소파 위에 놓여있던 자신의 배트를 오랜만에 잡은 성배는 소파 위에 정도를 던져 놓고 배트로 때리기 시작했다.

턱!

텅!

퍽!

텅!

뼈와 살에 맞는 각기 다른 소리가 또 십여 차례 저택에 울려 퍼졌다.

이미 정도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고, 온 몸은 피투성이가 돼있었다.

캬악 퉤!

성배는 정도에게 침을 뱉은 후, 거실에서 기어 다니던 지연을 보고 말한다.

“어이 녹색 티. 네가 저번에 나한테 그랬지. 생긴 건 무시무시한데 사람도 한번 안 죽여 본 샌님이라고.”

겁에 질린 지연은 아주 빠르게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니들은 우리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그래. 우리 아버지 유일한 유언이 ‘제발 사람만 죽이지 마라’였거든.”

성배의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핏빛이 돌던 저택은 조용해졌다.

성배는 냉장고로 가서 시원한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산탄총과 배트를 챙겼다.

그리고 거실에 걸려있던 큰 칼을 떼어내려고 다가갔다.

칼이 걸린 위치가 조금 높아 까치발을 들고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잡으려던 그때, 성배의 오른쪽 옆구리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큭큭큭, 우리 이따구로 만들어 놓고 혼자 멀쩡히 가면 안 되지.”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 정도를 보며, 성배는 긴 한 숨을 쉬었다.

“하여간 살려 준데도 이 미친놈이 진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 성배는 벽에 걸려있던 큰 칼을 잡아 그대로 정도의 목을 날려 버렸다.

잘린 목은 지연의 앞으로 떨어졌고, 지연은 기겁을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오줌까지 지렸다.

성배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수건 몇 장을 구해서 길게 묶었다. 그리고 그 묶은 수건을 허리에 다시 묶어 상처를 감쌌다.

잠시 거실에 멍하니 서 있던 성배는 혜정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서서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휴우, 미친년.”

성배는 혜정의 시체를 담요로 잘 덮어주고 돌아서서 저택을 빠져 나왔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날 기다리고 있으려나.’

나라를 비롯한 일행 모두를 떠올리며, 성배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한이에게 선물할 큰 칼을 어깨에 올리고, 배트는 왼손에 쥔 채, 저택까지 걸어왔던 기억을 더듬어 반대로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허리에 묶인 수건은 이미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성배의 호흡은 심하게 가빠왔다.

성배는 잠시 벽에 기대서서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성배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몸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하필 그때, 불행하게도 성배의 시야에 저 멀리서 좀비가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성배는 어떻게든 좀비를 처리하려고 산탄총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성배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갔고, 귓가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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