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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로 뒤덮인 세상-14화 (14/36)

시즌2) 1화 - AGAIN

치이이익

뜨거운 불판 위에 삼겹살 두덩이가 올려졌다. 고깃덩이 사이사이로 마늘과 버섯을 몇 개 올려놓은 성배가 소주를 허겁지겁 따서 진모에게 따른다.

“진모 아저씨, 한잔 받으세요.”

진모는 벌컥벌컥 들이키던 물 잔을 내려놓고, 소주잔을 들어 성배가 따라주는 소주를 받았다.

“성배 군, 이게 꿈이야, 생시야? 우리가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날이 올 줄이야.”

진모에게 술을 따르던 성배의 오른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는 소주잔을 지긋이 응시하며 무언가를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진모 아저씨, 이제 다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나야 뭐 고생한 게 있나. 성배 군이 힘들었지. 한잔 하지.”

쩡!

날카롭게 부딪힌 각각의 소주잔은 성배와 진모의 입술로 자석처럼 들러붙었다. 둘은 그렇게 연거푸 몇 잔을 연속으로 들이켰다.

“키야아아, 그래 이거지. 우리 이슬이 너 오빠가 격하게 만나고 싶었다. 우리 나라는 너무 차가워. 근데 넌 너무 뜨거워서 좋아.”

소주병을 들고 대화를 시작한 성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진모의 뒤로, 식당 문이 열리며 한이가 들어왔다.

“진모 아저씨, 성배 형, 저 왔습니다.”

한이는 식당으로 들어오며 둘을 보고 밝게 인사를 했다. 진모도 손을 들어 한이를 반갑게 맞았다.

“여, 한 군. 어서와 이게 얼마만이야.”

성배는 대화를 나누던 이슬이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한이에게 다가가 그를 터프하게 끌어안았다.

“한이, 이 자식 형이 보고 싶었다. 인마.”

한이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배와 포옹을 한 후, 비틀거리는 성배를 부축해 다시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자릴 잡고 앉았다.

“아니, 6시 약속인대 벌써 취한 거예요?”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진모가 옆에 놓인 사이다를 한 모금 하며 한이에게 대답했다.

“어제 나라 양한테 바가지 좀 긁힌 거 같던데.”

“아, 형수님한테 혼나셔서 또 과음 하셨군요.”

성배는 까맣게 탄 삼겹살을 하나 집어 한이에게 내밀었다.

“이 자식이, 이거나 먹어 인마. 내가 기집 따위한테 바가지나 긁히고 살 놈으로 보여?”

“하하, 아니요. 성배 형이 그럴 리가 없죠. 근데 기왕 주실 거면 잘 익은 걸로 주시지 까맣게 탄 걸 주세요.”

성배는, 능청스럽게 원망하는 한이의 입속으로 탄 삼겹살을 기어코 집어넣고, 그대로 식탁에 고개를 처박고 쓰러졌다. 진모와 한이는 동시에 성배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진모가 한이에게 소주를 한 잔 따라주며 그간의 근황을 나눴다.

“정배는 좋은 양부모님들을 만나서 요즘 잘 지내고 있더라고, 우리야 뭐 금방 잊겠지만, 애들은 아마 꽤 오래갈 거야.”

“네, 그게 가장 안타깝지만, 그래도 이렇게 진모 아저씨와 삼겹살에 소주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왔다는 게 진짜로 기적이죠. 우리 그때 정말로….”

한이는 말끝을 흐렸다. 진모는 잠시 미동도 없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한이는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예지는요? 우리 예지 잘 커요?”

어두운 표정으로 담배를 깊게 들어 마시던 진모는 예지 이야기가 나오자 반사적으로 폰을 꺼내 한이에게 영상을 보여줬다. 영상 속에는 예지가 손뼉을 치며, 에델바이스를 부르고 있었다. 한이는 그런 예지가 귀여운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영상에 집중했다.

그때 또 다시 식당 문이 열리며, 이번엔 나라가 들어왔다.

“형수님, 오셨습니까!”

“나라 양, 오랜만이야.”

나라는 여전히 늘씬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아이의 엄마가 돼있었다.

“진모 아저씨, 한이 씨.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나라가 왔다는 소식에 기절해 있던 성배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우리 나라 오셨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치 이슬아.”

나라는 술 취해 해롱대는 성배에게 다가가서, 어금니를 꽉 물고 그의 볼을 꼬집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우리 멋진 서방님, 어제는 어디서 주무시고 외박을 하셨나, 그래.”

나라의 무언의 압박에 성배는 마른침을 삼키며, 진모에게 눈빛을 보냈고, 진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라에게 말했다.

“저기, 나라 양. 어제 성배 군이랑 나랑 한잔했어. 정말이야.”

나라는 진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다시 성배를 째려봤다.

“성배 씨, 이제는 저 착한 진모 아저씨까지 거짓말하게 만든 거야?”

천하의 성배도 나라 앞에선 고양이 앞에 생쥐에 불과했다. 그는 애꿎은 머리만 긁적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진모와 한이는 나라에게 꼼짝없이 잡혀 사는 성배를 보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성배는 일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라의 어깨를 주무르며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 우리 아름다운 나라, 이 어깨 뭉친 것 봐. 내가 오늘 집에 가면 설거지랑 애기 잠재우는 것 까지 다 해야겠네. 우리 나라는 푹 쉬어.”

장소가 장소인지라 나라도 일단은 한 수 접어주며 강렬한 눈빛으로 성배에게 ‘집에 가서 두고 보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성배는 나라의 눈빛에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모인 넷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참, 한이 씨 오늘 소희한테 고백하기로 했다면서요?”

나라는 부럽다는 표정으로 한이를 바라봤다. 한이는 멋쩍은 듯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름대로 때가 된 거 같아서요. 저도 이제 일 시작한지 한 달쯤 됐고, 어느 정도 자리도 잡은 거 같고, 소희씨도 안정을 찾은 거 같아서요.”

진모가 껴들었다.

“그래, 한 군 이제 칼을 뽑을 때야. 소희 양도 한 군 덕에 치료를 잘 끝냈고, 알바도 다시 시작하면서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고. 어제도 우리 집에 와서 예지랑 놀다 갔어. 표정이 아주 밝더라.”

성배도 옆에서 거들었다.

“한이 멋지다. 소희처럼 귀여운 애는 빨리 접수하지 않으면 다른 놈이 접수한다고, 우리 나라처럼 드센 여자야 뭐, 나밖에 접수할 사람이 없지만 말이야.”

성배의 말을 어이없다는 듯 듣던 나라는, 성배의 입에 쌈을 집어넣어 막으며 다시 한 번 강렬한 눈빛을 쏘았다. 성배는 다시 침묵했다.

“한이 씨, 소희도 아마 한이 씨 마음 받아 줄 거예요.”

나라의 말에 한이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근데 소희 양은 언제 와?”

“알바 끝나고 바로 온댔어요. 곧 올 거 같은데요.”

시계를 보며 한이가 답했다.

진모와 성배는 다시 잔을 부딪치며 소주를 마셨고, 나라는 출동 전화를 받고 성배에게 한마디를 남기며 급하게 나갔다.

“너 오늘도 외박하면 남대문 경찰서 강력계 유치장 안에 집어 처넣는다. 곱게 마시고 집으로 가라.”

나라가 나가자 진모가 기다렸다는 듯이 성배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성배 군은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더 고생스러워 보이네. 나라 양이 저렇게 강한 여잔 줄 난 오늘에서야 알았어.”

성배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저도 얼굴하고 몸매만 보고 사람을 잘못 판단했어요.”

둘의 대화를 듣던 한이는 시계를 보고 소희가 올 시간임을 확인 한 후, 마중을 나가려고 점퍼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12월 중순이라 그런지 날씨는 아주 쌀쌀했다. 때마침 하늘에선 눈도 조금씩 내려왔다. 한이는 식당에서 조금 걸어 나가서 큰길가로 소희를 마중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많은 인파 가운데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소희가 오고 있다는 느낌을 그는 받았다. 한이는 점퍼 안에 소중히 챙겨놓은 반지케이스를 손으로 꽉 쥐었다. 그리고 소희가 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 뒤로, 드디어 멀리서 소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아주 밝은 표정이었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한이는 어느새 추위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다. 일분일초라도 소희를 빨리 만나고 싶었다. 소희에게 반지를 내밀며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다.

소희는 이제 바로 한이의 눈앞에 있었다. 한이는 소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소희는 한이를 못 본 듯 그냥 지나쳐갔다. 한이는 당황하며 지나쳐간 소희를 바로 따라가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이의 손길이 느껴지자 비로소 소희는 걸음을 멈췄고, 고개를 돌렸다.

“크으으으윽”

한이의 눈앞에 있던 소희는 더 이상 사랑스러운 소희가 아닌 역겨운 좀비였다. 더 이상 한이 앞에서 밝게 웃어주던 소희는 없었다.

좀비는 곧바로 한이의 물기위해 다가왔다. 한이는 좀비를 밀어버리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 있던 반지케이스를 꺼냈다. 반지케이스는 어느새 창으로 변해있었다.

한이는 다가오는 소희 좀비를 차마 찌를 수가 없었다. 그는 일어나서 식당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이가 달리며 마주치는 사람들은 곧바로 좀비로 변했고, 역겨운 괴성을 내며 전부 한이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뭐야, 왜 다시 시작된 거야?’

한이는 두려웠다. 그는 미친 듯이 달려 식당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황급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식당 안엔 아무도 없었다. 한이는 식당 이곳저곳을 뒤져봤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곧이어 식당 문을 열고 소희 좀비가 들어왔다. 좀비의 모습을 한 소희의 뒤로 수백 마리의 좀비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한이는 저항을 포기했다.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소희 좀비는 한이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희 좀비의 거친 이빨이 한이의 목으로 다가왔다.

한이는 목을 물린 채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야, 인마! 정신 차려 신림동 다 왔어. 이 자식 이거 악몽 꾸나 본데?”

성배가 몇 차례 한이의 뺨을 때렸고, 나라는 한이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한이는 눈을 떴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의 차는 한적한 길가에 서 있었고, 운전석에서 소희가 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차 밖에선 성배와 나라도 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이 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소희가 걱정하듯 물었고, 한이는 멍하니 소희를 바라봤다.

“네.”

아직 정신이 없는 한이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크게 좌우로 몇 번 흔든 뒤에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내만큼은 아니었지만, 신림동 역시 곳곳에 많은 차들이 서 있었고, 사람들의 모습은 눈에 띄진 않았다. 거리에 보이는 이런저런 매장들은 대부분 한눈에 보기에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앙상히 뼈만 남은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 시체들을 반기는 건 오로지 파리와 바퀴벌레뿐이었다.

“여기도 역시나 비슷하네요. 우리가 오면서 본 사람들 말고는 이미 도망치거나 죽었겠죠.”

성배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너 젊은 놈이 왜 그래? 난 무슨 큰일이라도 난줄 알았다.”

“네? 왜요?”

“너 거의 30분 동안 깨웠는데 안 일어났어, 인마. 소희가 깨우다 안돼서 내가 싸다구를 몇 번이나 날렸는데, 그래도 안 일어나서 나라가 물까지 뿌렸다.”

한이는 자신의 오른쪽 뺨에 손을 가져갔다. 얼얼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많이 피곤했나 봐요.”

“아무튼 진모 아저씨랑 정배는 화장실 갔고, 나라랑 나는 먹을 것 좀 구해올게.”

“아니 차로 다 같이 가면 되죠? 왜 위험하게 따로 가요?”

“아, 그게 주택가 안쪽으로 들어가야 마트가 있는데, 혹시나 차로 갔다가 좀비들한테 둘러싸이면 동네 좁은 길에서 이도저도 못하고 뒤지는 거지. 그냥 둘이 걸어가서 적당히 들고 오는 게 더 안전해.”

“듣고 보니 그러네요. 밴이 주택가 돌아다니기엔 좀 크죠.”

성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리고 진모 아저씨는 이 근처에서 옷이나 신발, 속옷 같은 거 쇼핑하신데, 아무리 상황이 엿 같아도 우리가 옷은 갈아입고 다녀야지 않겠냐? 암튼 소희나 잘 지키고 있어.”

한이는 성배의 말에 재빨리 소희를 쳐다봤다. 소희는 한이와 눈이 마주치자 특유의 환한 미소로 웃어 보였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성배에게 조용히 말했다.

“성배 형, 저랑 같이 가시죠. 나라 씨는 위험해요. 제가 갈게요.”

“뭐가? 나라가 위험하다고? 잘 알지, 저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 말을 듣고 나라가 어이없다는 듯 성배 옆으로 다가왔다.

“성배 씨 보다 위험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뭐, 이 자식이 좀 친해 졌다고 나한테 너무 막말하는 거 아냐?”

“그러는 성배 씨야 말로 저한테 좀 더 예의를 갖춰 주세요. 참을 만큼 참았어요!”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나라와 성배였지만 뜨거운 태양빛에 불쾌지수가 올라가서 그런지 둘은 신경이 매우 날카로웠다. 한이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두 사람 사이로 끼어 들어가서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한 건 나라 씨가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여기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나라 씨 보다는 제가 가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다는 말이었어요.”

으르렁대던 나라와 성배는 한이의 말을 듣고 분을 삭이며 돌아섰다.

그렇게 성배와 한이가 먹을 것을 구하러 가기로 했다.

성배는 산탄총을 하나 등에 메고, 오른손엔 배트를 움켜쥐었고 한이는 칼을 하나 꺼내 들었다.

한이의 무기를 본 성배는, 차의 뒷좌석에 있던 가방에서 산탄총을 한 정 꺼내와 한이에게 내밀었다.

“야, 이거 써. 그 칼 너무 허접하다.”

“전 총을 다룰 줄 몰라요.”

자신이 내민 총을 사양하는 한이 앞에서 성배는 산탄총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고, 근처에 있던 우체통을 겨냥하는 자세를 취하며 허세를 떨었다.

“별거 아냐. 요기 긴 부분 보이지. 여기다 미리 총알을 6발 쑤셔 넣고, 이 부분을 이렇게 뒤로 잡아당기면 장전이 돼.”

철컥!

“그다음 그냥 쏘면 돼. 반동이 심하니깐 꽉 움켜줘야 되고.”

어느 틈에 나라가 성배의 뒤로 지나가며 한마디 던진다.

“고작 이틀 전에 나한테 배웠으면서, 잘난 척은 쳇!”

성배는 그 특유의 시건방진 말투로 즉각 응수했다.

“어이구, 우리 엘리트 경찰님, 대에에단한 거 알려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이는 또 한번 싸움이 일어날까 전전긍긍했지만, 둘은 오히려 피식거리며 화가 풀린 듯 했다.

“전 그냥 칼로 할게요. 근데 두 분은 진짜 특이하게 화해를 하시네요.”

한이는 둘의 감정이 조금 풀린 걸 보며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했고, 성배는 자신의 말투 때문에 나라가 화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 먼저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성배만의 방법이었다.

“야, 권나라! 너 내가 식량 구해올 때까지 우리 착한 소희 잘 지켜라.”

나라는 못 들은 척 하며, 차에 올라탔고, 소희는 빵과 물을 챙겨 넣은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서 한이에게 내밀었다.

“한이 씨, 여기 저번처럼 빵과 물 좀 넣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한이는 소희의 시선을 피한 채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근데 저한테 뭐 서운한 거 있으세요? 그냥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한이는 이상하게 소희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아주 잠깐 소희와 눈을 마주치고 다시 시선을 피했다.

“아니에요. 제가 소희 씨한테 서운할 게 어딨어요. 그냥 꿈에서 소희 씨가….”

“네? 제가 한이 씨 꿈에 나온 거예요?”

“아니, 그러니깐 이상한 꿈은 아니에요. 오해 하지마세요.”

한이는 당황해서 말끝을 흐리며 머뭇거렸지만, 소희는 다행이라는 듯 밝은 표정으로 한이를 바라보았다.

“다행이에요. 아까부터 제 눈을 피하시길래,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네, 알았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소희와 인사를 나눈 한이가,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던 성배와 함께 떠나려던 그 때, 진모와 정배가 돌아왔다.

“한 군, 일어났네. 아까 어찌나 정신없이 자던지.”

“예, 제가 좀 피곤했었나 봐요. 이제 괜찮습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정배도 조금만 기다려 맛있는 거 많이 가져올게.”

정배는 한이와 성배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네, 형, 삼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성배도 진모와 정배에게 인사를 건네며, 한이와 함께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주로 가정집들이 모여 있는 일반적인 주택가였고, 곳곳에 식당과 구멍가게들이 있었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전부 털어가 버린 뒤였다.

“근데 성배 형, 위치는 정확히 아세요?”

“어, 아까 진모 아저씨가 대충 길을 알려주셨어. 이 길로 쭉 가면 꽤 큰 마트가 있데.”

“그렇군요. 근데 이렇게 집들이 많은데 인기척이 전혀 없네요.”

“그러게 말이다. 빌어먹을 좀비 새끼들.”

한참 주변을 살피며 걷던 한이가 입을 열었다.

“성배 형, 혹시 나라 씨랑 그런 사이신가요?”

“그런 사이라니?”

“그러니깐, 서로 티격태격하지만 실상은 사랑하는 그런 사이요.”

성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정색을 했다.

“뭔 소리야, 내가 왜 그 딴 자식이랑 사랑을 해!”

한이는 아까 전 꾸었던 꿈의 내용을 성배에게 설명했다. 성배는 한이의 꿈 이야기를 듣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참나, 그러니깐 네 꿈속에서 내가 나라랑 결혼해서 애 아버지가 됐고, 심지어 나라한테 잡혀 산다고? 이 천하의 차성배가!”

“물론 꿈이지만, 너무 현실감 있었어요. 그래서 소희 씨를 쳐다보는 게 좀 힘들었어요.”

성배는 그런 한이가 웃긴 듯, 한이에게 다가와서 어깨를 부딪치며 말했다.

“이 놈 이거 은근히 골 때리는 놈이네. 걱정마라 인마. 소희가 좀비로 변할 일도 없고, 네가 죽을 일도 없다. 무엇보다 내가 권나라랑 결혼 할 일은 더! 더! 더! 더! 더욱 없어.”

“그렇겠죠.”

“그래, 네가 좀 많이 피곤 했나보네. 그리고 꿈은 현실의 반대라잖아. 그런 악몽을 꿨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길거야.”

한이는 자신이 꾸었던 끔찍한 꿈이 단순한 꿈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아직도 생생한 꿈속의 끔찍한 영상들이 한이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고, 마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불쾌함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대화를 마친 성배는 담배 한 대를 꼬나물고 오른손에 쥔 배트를 들어 멀리 보이는 마트를 가리켰다. 한이는 배트의 끝이 가리키는 마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식량을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뜨거운 햇빛과 맞서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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