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알라의 검 (22)
CIA는 현재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방면에서 운용중인 병력의 최대치를 대략 160만 정도로 추정했다. 이는 외국에서 온 의용병들과 용병들을 다 더한 숫자였다.
이에 맞서는 카자흐스탄 민주정부 측도 자체적으로 70만에 가까운 병력을 전장에 투입한 상태였다.
병력의 규모 면에서 러시아가 훨씬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그간 전황이 카자흐스탄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이유는 크게 셋이었다.
첫째는 각성체 전마 기병대로 대표되는 기동전력의 압도적인 비교우위다.
위협이 없거나 경미한 후방에서라면 하루에 2천 킬로미터씩 질주하기도 하는 이들 기병대는, 길의 유무에 구애받지 않고 지형지물을 가리지도 않는 그 탁월한 기동력 덕분에 자체적으로 보급선을 유지하는 일마저 가능하다.
심지어 이들은 다른 부대들에 대한 보급까지 도와주기도 했다. 기동전력의 비교우위가 보급의 비교우위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외부세계에서 지원 명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자의 흐름이 추진 난맥으로 고여 있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둘째는 지휘부의 능력 차이다.
카자흐스탄 침공 과정에서 러시아군 지휘부가 보여준 무능은 실로 끔찍할 정도였다. 조직문화의 건전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군대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반면 카자흐스탄 국민군의 지휘부는 적어도 상식의 범위 이내에서 전장을 파악하고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했다. 초기에 부족했던 전문성도 시간이 흐르면서 전장의 경험과 외부세계의 지원을 통해 많이 향상된 편이었고.
셋째는 일선 병력들의 기율과 사기 차이다.
카자흐스탄 국민군의 전의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기율 역시 그런대로 엄정하게 유지되었다. 러시아군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외부세계가 제공하는 유무형의 지원은, 한때는 카자흐스탄 국민군이 훨씬 더 우세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
중국 국가주석은 일찍이 내 거짓 대자들을 참관인으로 배석시킨 중앙군사위원회 회의에서 결연하고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지시했다고 한다.
「동지들은 모두 명심하라. 회교도 공포분자(테러리스트)들의 군세를 중국의 영토 바깥에서 최대한 많이 소모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토 방어 준비를 군사적 역량 분배의 최우선순위로 삼되, 러시아를 지원하는 일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그들에게 풍부한 장비와 전쟁물자를 제공하고, 머릿수를 채울 수 있는 2선·3선급 이능보유자들을 최대한 많이 보내주도록!」
중국은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 사용했던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 타이틀을 다시 한 번 꺼내들었다. 장비도, 편제도 모두 정규군과 같고, 지휘부마저 인민해방군의 현역 장성들이지만, 어쨌든 정규군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러시아를 지원하는 데 열심인 나라는 중국 이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북한이었다.
요즘 북한 방송에선 김정일 시절에 만들어졌던 조로우호의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서 흘러나오곤 했다. 김정일의 이름만 김○은으로 바꿔서 부르는 노래였다.
「평양과 모스크바 멀리에 있어도, 서로의 마음속엔 가까이 있어라. 친근한 상봉 속에 손과 손 굳게 잡은 김○은 뿌찐 뿌찐 김○은- 김○은 뿌찐 뿌찐 김○은-」
선동적 억양을 구사하는 한복 차림의 여성 앵커가 나오는 뉴스에서도 연일 조로우호(북한-러시아 우호)를 강조하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내긴 마찬가지였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은 동지께서는 조로공동선언을 채택한 지 22년째 되는 올해가 조로 친선관계 발전의 력사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교시하시었습니다.」
「로씨야 련방의 대통령 울라지미르 울라지미로비치 뿌찐 각하께서는 최근 미·일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우리 공화국의 핵 및 로케트 위협을 제멋대로 기광스럽게 떠들어대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는 립장을 밝히셨고, 우리 공화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변함없는 발전을 추동하여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나가는 기틀로 삼겠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은 동지와 웨. 웨. 뿌찐(В. В. Путин) 각하께서는 량국의 상호원조를 강화함으로써 조로 두 나라가 겪고 있는 외부의 위협을 단호하고 강위력하게 걷어치워야 한다는 데 견해를 함께하시었고-」
북한이 러시아를 열성적으로 지원하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러시아가 버텨줘야 북한의 안보환경이 안정되고, 또 위기에 처한 러시아에게서 식량과 자원, 첨단 무기제조 기술 등을 받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가상적국의 하나인 일본이 상임이사국 지위를 획득한 것,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군사·경제협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북한 정권을 몹시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런 배경에서 중국과 북한이 러시아에 밀어 넣는 병력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여, CIA의 추정치도 오차범위가 매우 컸다.
만약 내가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면, 카자흐스탄 국민군은 전선의 고착화가 계속해서 심해지는 꼴을 보아야 했을 터였다.
‘적의 공세를 허락하지는 않았겠지만, 이쪽에서 뚫고 들어가기도 어려웠겠지. 지뢰지대는 나날이 더 두꺼워지고, 참호선의 화력 밀도 역시 갈수록 증가했을 테니.’
1차 대전 스타일의 종심 깊은 참호선과 강화진지, 냉전이 빚어낸 막강한 포병화력, 그리고 현대화된 방공망 및 공중 요격세력의 조합은 저지력 하나는 실로 탁월했다.
‘그렇다고 러시아 본토를 때릴 수도 없고.’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북부와 동부에선 완충지대를 확보했지만, 서쪽에선 그렇지가 못하다. 카자흐스탄이 자랑하는 기병대는 하려고만 한다면 언제라도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핵보유국이다.
서구세계의 지원국들은 카자흐 기병대가 전쟁 이전의 국경을 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궁지에 몰린 러시아가 정말로 핵무기를 사용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던 까닭이다. 카자흐 국민군 내에서도 이에 관한 우려가 많았다.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자는 여론을 지속적으로 진정시켜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조국수호전쟁의 애국적인 혁명투사 동지 여러분. 우리의 영토 전체가 방사능으로 물든 폐허로 변해버릴 가능성은 1%라도 너무 큰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기병대의 상호확증파괴능력은 어디까지나 핵무기 사용 억제의 수단으로서만 활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민주화 혁명은 우리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우리의 아이들에게 미래를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결국 성전군과 카레아덱 조약기구를 내세운 내 개입이 없었을 경우, 이 전쟁은 길게 이어진 끝에 경제적으로 지친 카자흐스탄이 현실과 타협하는 것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카자흐스탄에 투입한 성전군 지하디스트의 규모는 현시점에서 대략 12만가량이었다.
전장의 규모에 비하면 숫자가 많다고 할 순 없다. 더 많은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기반이 갖춰져 있질 않았다.
하나, 질은 이야기가 다르다.
중국과 북한이 보내는 각성능력자 의용병들은 2선과 3선급 능력자들로만 이루어져있는 반면, 12만의 지하디스트들은 전원이 각성능력자인 성전군 내에서 1차적인 선별을 거쳐 차출한 양질의 병력이었으니까.
질의 차이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벌어졌다.
중국 인민지원군과 북한 용병들은 군기문란이 심각했다.
특히 북한 용병들의 군기문란은 상상을 초월하여, 군기가 결코 좋다고는 못할 러시아군 병사들조차 경멸을 표할 지경이었다.
평시 자국민을 대상으로도 약탈과 범죄가 일상이던 군대가 남의 나라에 와서 기강을 유지할 리가 있나. 알림 샤히디라는 우상에 홀려 종교적 사명감에 도취된 광신도들의 군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12만의 성전군은 장비도 거의 대부분 1선급으로 갖추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이 휴대하는 장비에 국한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장비로 무장한 양질의 각성능력자들은 다른 지원이 없어도 충분히 강력한 전력이다.
고로 성전군 12만의 충격력이란 우직한 힘겨루기만으로도 카자흐스탄의 전황을 뒤바꿔놓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내가 핵심 요충지인 콕셰타우 전면에 돌파구를 열어주기까지 했으니, 전선 전체가 단기간에 격변을 맞이한 건 당연한 일.
당장 ‘사이드’ 샴세덴 에흐메트 압두미지트 암살이 이루어진 아스트라한카부터가 콕셰타우에서 자동차를 타고 1시간 40분을 북상해야 나오는 마을이었다. 카자흐 기병대는 최초 돌파구 형성 후 고작 3시간 만에 이 마을에 도달했다.
경태는 말했다.
“둑이 터져서 물이 쏟아져 들어가는 형세입니다. 보급소요가 낮은 기동 전력이 최대의 위력을 발휘하는 국면이죠. 형님의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시려면, 지금은 대마법사로서 전장에 대한 추가적인 개입 이외의 일을 먼저 처리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전장 개입은 전장에 새로운 고착점들이 형성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는 말이었다.
카자흐스탄 측의 기병부대들은 2차 대전 당시 패튼이 지휘했던 전차군단처럼 움직이는 중이었다. 고정된 방어거점들을 우회하며 적의 종심을 최대한 깊숙이 침투하는 걸 목적으로 기동하고 있다는 뜻.
따라서 대마법사의 힘을 투사할 지점을 고르기엔 조금 때가 이르다.
그래서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혹은 내가 몸소 힘을 쓸 경우 효과가 극대화되거나 시일이 크게 앞당겨지는 다른 일을 찾았다.
예컨대, 프로파간다를 위해 러시아군의 집단학살 매장지를 찾는 것과 같은.
「끄응- 끙-」
꼬리를 내린 춘식이가 코를 움찔거리며 끙끙거린다. 전장의 냄새를 맡았을 땐 아무렇지도 않아하던 개인데,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진 현장엔 전장과는 또 다른 냄새가 감돌았다.
한쪽으로 흡음장막을 둘러친 경태가 춘식이를 엄하게 나무랐다.
“똑바로 서라, 김춘식이! 위대한 천마신교의 제자가 겨우 이런 걸로 위축되어선 안 돼!”
「끄응…….」
나는 콕셰타우 북동쪽에 자리한 볼쇼이 이지움(Большо́й Изюм)이라는 마을에 와있었다.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은 지역이라 마을 이름도 러시아식과 카자흐식을 병행해서 썼다는데, 괴뢰국 수립 이후로 카자흐식 이름은 표지판에서 지워졌다.
콕셰타우 근교엔 이곳보다 훨씬 더 거대한 집단매장지가 존재하지만, 그곳은 현재 시가지 공격을 앞두고 포위망 형성이 진행 중인 곳이어서 바로 발굴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나는 황금기의 눈으로 매장지의 흙 아래를 훑어보았다.
‘대충 3백 구 정도는 되어 보이는군. 이 작은 마을에서 참 많이도 죽였어. 이렇게나 좋은 프로파간다거리를 선물해주다니.’
러시아군의 주민 학살은 사실 필연적인 것이었다.
북부의 러시아계 주민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고는 하나, 이는 바꿔 말해 러시아계가 아닌 주민들의 비율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뜻.
거기서 독재자 나자르바예프의 지지자들을 제외하더라도, 2~3할 안팎의 주민들은 잠재적 불안요소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러시아계 주민들과 다른 주민들 사이엔 종교의 차이마저 존재한다. 러시아계 주민들은 절대다수가 정교회 신자들이고, 나머지 주민들은 다수가 이슬람 신자들이니까.
결국 점령지를 빠르게 안정화시키려면 주민들을 분리수용하거나 아예 죽여 없애버려야 한다.
쉽고 확실한 건 당연히 죽여 없애버리는 쪽이다.
학살을 행하는 과정에서 협력자들을 공범자로 만들어버리면 지역 안정에도 큰 힘이 된다.
내 지도를 전달받아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카자흐 병사들과 카자흐 측 다국적 의용군 병사들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체에 경악했다. 동행한 종군기자들은 시체 썩는 내음과 침출수의 악취를 힘겹게 견디며 집단학살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 신이시여……. 시청자 여러분. 보이십니까? 이곳 볼쇼이 이지움에서는…… 시체들이…… 우욱…… 너무도 많은 시체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모두 손발이 묶여있고…… 생전에 고문과 강간을 당한 흔적이 역력…… 심지어 애들까지…… 제길, 못 해먹겠군!”
의용군은 마을과 기차역을 지키다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힌 포로들을 발굴 현장으로 끌고 왔다. 겁에 질린 포로들은 폭력적인 추궁 앞에서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했다.
혹은, 이 와중에도 자신들이 한 일의 정당성을 역설하거나.
나는 러시아군 포로 하나가 필사적으로 부르짖다가 얻어맞는 모습을 보았다.
“저들은 나치였습니다! 저들은 나치였다고요! 우리는 분명한 악을 처단한 겁니다! ……컥!”
러시아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자신들이 나치와 맞서 싸우고 있다는 프로파간다를 행해왔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는 사실 전쟁과 함께 시작된 게 아니었다. 러시아는 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카자흐스탄의 반 러시아적인 움직임을 나치즘이라고 규정해왔기 때문이다.
서구 언론들은 러시아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조명했다.
「러시아는 과거 카자흐스탄에서 교육부장관직을 역임했던 아스카트 아이마감베토프도 나치라고 공격했었습니다.」
「아이마감베토프 전 장관은 카자흐스탄의 국가 통합을 위해 러시아어 사용보다 카자흐어 사용을 더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걸 보고 나치즘이라고 했던 거죠.」
「이게 대관절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러시아인들은 미쳤나요?」
논리 같은 게 어디에 있나. 극우 유대인들이 나치즘의 핵심을 반유대주의로 정의하듯이, 러시아는 나치즘의 핵심을 반러시아주의로 정의하고 있는 것일 뿐.
이에 따르면 러시아 친정부 용병세력의 중심인 러시아 네오나치들은 나치가 아니게 된다. 조직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데 나치의 상징물을 이용하고, 몸에는 나치 문신을 새겨놓아도, 어쨌든 러시아에 충성하기만 하면 나치가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엔 히틀러를 증오하는 히틀러들이 정말로 많이 존재한다.
러시아가 행하는 나치몰이는 벌써 20년 전 러시아식 유라시아즘의 등장과 함께 태동했던 프로파간다다. 세계는 이를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접하게 된 것이고.
발굴 작업을 진행할 범위를 통보해주는 것 자체는 오래 걸릴 구석이 없었다. 고문이나 그 외의 범죄들을 행한 장소들을 찾는 것 역시 그러했다.
다만 심문 대상을 선별하고 심문 과정을 단축하는 데에도 황금기의 눈이 쓸모가 있었으므로, 볼쇼이 이지움에서의 체류는 한 시간 남짓 이어졌다.
이런 종류의 폭로는 단시간에 최대한 큰 충격을 선사해야 효과적이니까.
역에서 사로잡은 포로들 중엔 짱깨 의용병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을 이끄는 대장 짱깨는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러시아어로 외쳐댔다.
“나는 중국인이다! 나는 중국인이라고! 뒷주머니에 여권이 있으니 확인해봐라!”
각성능력자가 있는 힘껏 악을 써대니 그 소리가 꽤나 요란했다.
카자흐 병사들은 중국 놈이 원하는 대로 여권을 확인했지만, 그게 다였다. 대장 짱깨는 거친 취급이 계속되는 것에 항의했다.
“중국인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니! 뒷감당이 두렵지 않은 거냐?! 나는 중국인이란 말이다! 나와 내 부하들에겐 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애국주의와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중국 공산당의 지속적인 세뇌로 말미암아, 많은 중국인들은 온 세상 사람들이 중국의 힘과 영향력을 경외한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비록 샤히디의 활동으로 중국의 체면이 곤두박질치긴 했어도, 샤히디는 샤히디고 다른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이다. 다른 나라들은 중국의 힘과 경제력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다…… 라는 게 많은 중국인들이 앓는 인지부조화의 핵심이었다.
한때는 중국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존중을 받는다는 착각도 있었지만, 그 착각은 내 손으로 박살을 내놓았다. 이제는 중국 공산당부터가 중국이 따돌림당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국가적 단결을 꾀하고 있는 상황.
이런 머저리들의 머리에 현실을 주입시켜주고 진술을 뽑아내는 작업을 마무리 지을 즈음, 나는 다른 일의 논의를 위해 통신을 연결한 수연 녀석으로부터 예상 밖의 보고를 받았다.
「메드크럭스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전파를 찾았다고?」
「예. 모스 부호로 의미 불명의 숫자들만을 나열하는 통신이었습니다.」
그동안 메드크럭스 탐색을 담당해왔던 내 부하들은 런던과 메드크럭스 사이에서 오가는 통신을 잡아내는 쪽으로도 노력을 기울여왔다. 상식적으로, 메드크럭스와 런던의 원탁 사이에선 최소한의 정기 교신이라도 이루어지고 있어야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알파 크루시스 아크가 발산하는 전파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는 곧 메드크럭스가 기이할 정도의 전파침묵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먼 위성궤도에서 교신을 하면서 전파 그 자체를 숨길 방법은 없으니까.
내용을 해독할 능력이 있는가와는 별개로, 위성궤도를 오가는 전파는 아마추어 연구자들에게도 노출된다.
그레이스가 알파 크루시스 아크의 실존 여부를 의심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
‘그런데 그 전파침묵이 이제 와서 깨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어쩌면 놈은 그레이스가 행한 지자기 폭풍 생성의 예행연습을 벌써부터 위험신호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레이스는 예행연습과 주변국에 대한 사전경고를 겸하여 간헐적으로 작은 규모의 지자기 교란을 일으킬 계획을 짰고, 오늘 아침 마침내 첫 번째 지자기 교란을 일으킨 참이었다.
「해당 숫자열을 불러드릴까요?」
「그래. 일단 들어보자꾸나.」
「8. 50. 4. 공백. 41. 3. 38. 공백. 12. 26. 49. 37. 17. 35. 23. 공백. 40. 6. 7. 공백. 43. 44. 공백. 17. 공백. 72. 24. 공백. 1. 51. 33. 55……」
수연이 불러주는 숫자열을 수첩에 옮겨 적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장 큰 숫자가 72이고 가장 작은 숫자는 1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72문자?’
신의 이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카발라의 72문자(마그눔 노멘 도미니 세멘포라스 릭테라룸 LXXII)를 떠올리기는 오랜만이었다.
나는 불식간에 카발라의 수비학적 해설서를 이어서 떠올렸다. 마치 스승새끼의 유해로부터 오래된 기억이 침출수처럼 새어나오는 듯한 감각이었다.
「신의 이름은 거룩한 네 글자(테트라그라마톤 IHVH)로 표기하니 넷은 신성한 숫자이다. 이 신성한 수는 또한 나의 주님(아도나이)의 상징이자 열쇠가 되는 네 문자(ADNI)를 의미하기도 하느니라. 전자와 후자는 서로 결합하여 IAHDVNHI의 여덟 문자를 이룬다.」
「이 여덟 수에 삼위일체의 수를 곱하면 스물넷이 되며, 이는 묵시록의 장로들이 앉을 스물네 개의 보좌를 상징하느니라.」
「장로들은 세 개의 광선으로 이루어진 황금관을 쓰고 있으며, 각각의 광선은 위대한 이름 테트라그라마톤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내포한다. 스물넷에 광선의 셋을 곱하면 일흔둘이니 이는 곧 우리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인 일흔두 개의 문자라.」
「하느님의 네 문자 속에 있는 아기 천사들(케루빔)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묵시록의 스물네 장로들이 일흔두 문자 앞에 면류관을 던지며……」
악마숭배자들은 이 72문자를 역칠망성을 넣은 원 바깥에 역순으로 적지만, 원탁은 「태양」의 상징 바깥에 올바른 순서로 적는다.
수연이 불러준 숫자를 원탁이 적는 순서의 72문자로 치환하자, 완성된 것은 메드크럭스가 런던에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나를 찾고 있는가?」
메시지의 수신인은 나였다.
「나는 여기에 있다, 크로우허스트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