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알라의 검 (19)
얼마 전, 라마단이 시작되던 날, 러시아는 크렘린궁 대변인 드미트리 명의의 성명을 통해 카자흐스탄 측에 라마단 휴전을 제안했다.
「러시아 이슬람의 수호자이신 우리 위대한 지도자 블라디미르 대통령 각하께서는, 러시아 연방의 대(大) 무프티(مفتي/이슬람 법학자) 이스마일 베르디예프가 러시아 연방 무프티 협의회를 대표하여 올린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카자흐스탄의 반란세력에게 한 달간의 라마단 휴전을 허락할 뜻을 밝히셨다.」
「우리 용맹한 러시아 연방의 군대가 거대한 전략적 목표들을 차례차례 달성해나가고 있는 지금, 한 달이나 되는 기나긴 휴전은 우리에게 분명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대통령 각하께서는 러시아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다소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이슬람의 가장 거룩한 달을 존중해야만 한다고 판단하셨다. 우리의 전쟁은 정의와 올바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이며, 테러리즘과 퇴폐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슬람 신앙은 러시아 정부가 보호해야 할 올바른 가치에 포함되어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관대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니, 카자흐스탄의 반란세력은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이 일방적인 제안을 보고받은 나는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이게 정말 먹힐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제안인가? 저쪽엔 다 저능아들만 있나?’
경태 역시 “던져도 너무 막 던진다.”며 어이없어했다.
한 달의 휴전은 러시아가 전선을 요새화하는 데 아주 큰 힘이 될 시간이었다. 승기를 잡고 있고 기동전에 강점이 있는 카자흐스탄 민주정부가 미쳤다고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그러나 어딘가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 러시아 놈들은 진심인 것 같았다.
「우리 러시아 연방 무프티 협의회와 러시아 연방 중앙 영적 행정기구는 지고하신 알라의 율법에 의거한 파트와를 발표한다. 라마단의 평화를 먼저 깨는 자는 알라의 적이다. 알라의 적에게 맞서는 싸움은 성전이다.」
「성전의 길 위에서 죽는 자는 순교자다. 순교자는 천국으로 갈 것이다. 오염된 믿음을 경계하라. 우리가 지켜야 할 순수한 믿음은 알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위대한 어머니 조국의 품 안에 있다. 알라께서는 실로 위대하시다. 알라 후 아크바르!」
러시아의 종교계가 정교회와 이슬람을 불문하고 중앙권력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러시아 연방 무프티 협의회(Совет муфтиев России)는 대통령에게 러시아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아첨하듯 가져다 바쳤다. 러시아 내 이슬람 인구가 천오백만에 달하니, 나름 구색은 갖추고 있는 타이틀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권력의 단 꿀을 받아먹는 삶에 길들여진 성직자들은 독재정권의 시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러시아 바깥의 이슬람 세계는 하루하루 도덕적인 타락을 거듭하고 있다. 알림 샤히디는 이슬람 세계를 테러리즘과 퇴폐주의로 물들이는 사악한 자다!」
「그가 오염시킨 이슬람 신앙은 더는 올바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 이제 올바른 믿음은 오직 어머니 러시아에만 남아있는 것이다. 고로 오늘날의 애국은 러시아의 무슬림들이 올바른 신앙을 실천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알라께서는 신앙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들을 어여삐 여기실 것이다!」
「러시아 이슬람의 수호자이신 블라디미르 대통령을 따르자! 그는 전사의 영혼을 천국의 문으로 인도하는 자다!」
러시아의 무프티들은 내가 샤히디의 이름으로 내놓은 각종 프로파간다용 성명들을 중대한 종교적 오염으로 규정했다. 그중에서도 여성할례나 여성교육권 등에 관한 발표들이 특히 더 심각한 오염이라고 주장했다.
크렘린궁 대변인의 성명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대 무프티 이스마일 베르디예프는 내 꼭두각시를 거칠게 비판했다.
「여성의 생식기를 임신 기능만 남기고 모두 제거하는 것은 이 세상에 만연한 성적 타락을 없앨 단 하나의 방법이다! 믿는 자들이여! 부디 그 사악한 자의 간교한 혓바닥에 현혹되지 말라!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는 것으로 믿는 자의 증거를 삼으면 된다는 주장은 명백한 이단이다!」
한편, 같은 대 무프티이자 러시아 이슬람계의 최고 원로인 셰이크 알 이슬람(شيخ الإسلام) 탈가트 타주딘(Талгат Сафич Тадзетдинов)이라는 자 역시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을 잇달아 내놓았다.
「카자흐스탄 반란의 본질은 나치즘의 부활입니다. 자칭 민주투사라는 자들에게서 나치 숭배의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 게 그 증거입니다. 나치즘의 부활은 이슬람 신앙의 미래에도 어둠을 드리울 것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여. 나치에 맞서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십시오.」
「서방진영은 카자흐스탄 반란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 국민들을 대량학살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한다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오, 친애하는 이슬람의 수호자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우리가 세베로-카자흐스탄스카야 인민공화국과 외스케멘 인민공화국에서 한 일을 시리아와 이스라엘에서도 반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러시아의 영토가 성지 메카까지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참된 신앙의 수호자인 당신에게 그렇게 할 권리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 발표를 접한 경태는 러시아 대통령의 항문을 걱정해주었다. 성직자들이 너무 핥아주는 바람에 일찌감치 헐었을 것 같다면서.
돌아가는 꼴을 보건대, 아무래도 러시아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에게 내 꼭두각시와 대등한 종교적 위상을 부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점령지에서의 프로파간다에 큰 도움이 될 일이다.
그래. 성공하기만 한다면.
굉장히 병신 같긴 하지만, 어쨌든 적들도 프로파간다라는 것을 하고는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프로파간다를 접한 내 지하디스트들은 격노로 눈이 돌아갔다.
「저 미친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라! 저것들은 신앙의 형제자매 취급을 받을 자격도 없다! 차라리 배교자들이 저놈들보다 더 도덕적일 것이다!」
적이 본격적으로 맞붙기도 전부터 알아서 내 군대의 전의를 끌어올려준 셈이니,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러시아 내부에서의 단결 효과도 대단한 수준까지는 못 되는 모양이었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러시아의 무능은 정말이지 보고만 있어도 끔찍했다.
나는 한껏 격앙된 지하디스트 군대를 콕셰타우(Көкшетау) 전면으로 집중시켰다. 이는 경태의 조언과 카레아덱 조약기구 합동참모부의 자문을 참고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카자흐 북부의 도시 콕셰타우는, 지금은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으로 전락한 괴뢰국 세베로-카자흐스탄스카야 공화국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동서로는 철도를 통해 러시아 영토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괴뢰국의 수도 페트로파블롭스크(페트로파블)와 역시 철도로 연결된다.
페트로파블롭스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간선이 지나는 도시다.
고로 콕셰타우는 그간 시베리아 횡단철도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러시아와 중국의 물자를 막힘없이 받아먹으며 강력한 요새화 거점으로 기능해왔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콕셰타우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남서쪽의 얄팍한 강줄기(Шағалалы/샤갈랄리)나 야트막한 구릉지 몇 개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방향이 평탄하게 열려있는 까닭이었다.
사실 카자흐스탄의 전장 대부분이 이런 환경이다.
그래서 러시아 놈들은 요충지의 방어전면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지뢰를 매설해놓았다. 이전까지 지뢰 매설량에서 부동의 1위였던 한반도의 비무장지대가 카자흐스탄에 왕좌를 내주었을 정도. 카자흐 북부와 동부의 지뢰매설지대 면적은 자그마치 3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세에 앞서, 나는 콕셰타우 인근 지역을 담아낸 군사지도를 보며 생각했다.
‘종심이 5킬로미터가 넘는 지뢰밭이라……. 광기가 느껴지는군.’
지도상에서는 그저 얇은 띠처럼 보이지만, 그 띠의 두께는 평범한 비각성자 보병부대가 한 시간 이상을 행군해야 하는 거리다.
이게 평범한 지뢰밭이었다면 각성능력자들이 포함된 군대를 상대로 제한적인 효과만을 발휘했을 것이다.
염동능력자는 허공답보를 하거나 자기 마력장의 범위 내에서 지면을 두들기며 전진할 수 있고, 발화능력자는 기동로 주변의 지표와 얕은 땅속을 함께 구워버리면서 파편 방어용 방패를 들고 나아가면 그만이며, 방전능력자는 휴대용 지면투과레이더(GPR)를 무제한적으로 가동하여 지뢰매설지점을 파악하면 되니까.
그러나 러시아가 깔아놓은 지뢰밭에선 다양한 스마트 지뢰들과 원격제어 및 관측 네트워크 시스템이 각성능력자들의 운신을 제한했다.
여기에 대공화망과 포병화력, 무인포탑, 항공지원까지 더해진 결과, 지뢰밭은 여간해서는 뚫지 못할 강력한 접근거부지대로 화했다.
하여 나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
부하들이 볼 수 있게끔 내가 지도상에서 손가락으로 짚어 보인 지점은, 그간 콕셰타우를 공격해온 카자흐스탄 민주정부군 부대들이 하나같이 가장 치가 떨리는 지뢰매설지대라고 평가하는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전술적인 층위의 기적 하나를 연출해 보이도록 하지.”
위치를 확인한 경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뢰밭을 그냥 뚫고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그야말로 전장을 지배하는 대마법사의 위엄이로군요. 러시아 애들이 충격깨나 받겠네요. 지뢰를 믿고 병력을 적게 배치해둔 게 뻔히 보이는 곳이니 말입니다.”
내가 고른 돌파지점은 콕셰타우 시가지 남쪽의 평야 한복판이었다. 지뢰밭을 뚫고 북상하면 주변보다 80미터쯤 고도가 높은 언덕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말이 80미터이지, 어느 방향에서나 쉽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대초원에서는 나름 귀한 감제고지라 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군이 이곳에 가장 지독한 지뢰지대를 구축해놓은 것은 새벽마다 전장을 침식하는 대초원의 안개 때문이었다.
카자흐스탄 북부 고원지대엔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호수들이 존재하며, 이 호수들은 대초원의 큰 일교차에 힘입어 곧잘 짙은 안개를 만들어내곤 한다.
고정된 거점을 방어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짙은 안개는 언제 괴물을 뱉어낼지 모를 미지의 장막과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콕셰타우 시가지 남쪽의 평야는 지난 반년에 걸쳐 러시아군에게 무거운 부담을 선사해온 방어전면이었다. 서쪽엔 차글린스코예 저수지가 있고, 남쪽엔 두 개의 호수가 있는데, 대초원의 바람은 가을부터 봄까지 8할 이상이 서풍과 남풍이다.
다른 방어전면에도 작은 호수들이 널려있긴 하나, 바람을 고려하면 이쪽이 가장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이곳의 지뢰지대를 최우선순위로 강화해왔다. 카자흐 민주정부군이 피를 흘리며 확인한 스마트 지뢰의 종류만 20종이 넘어간다.
여기엔 낮은 고도의 허공답보 기병이나 제트 바이크를 갈아버리는 지대공 스마트 지뢰들이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인들이 흔히 상상하는 지뢰와는 크기와 작동방식, 위력 전부가 근본적으로 다른 물건들이었다.
“공격 시점은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경태가 묻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괜히 시간 끌 필요 있나. 전과확대를 노리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프로파간다용 연출에 불과한 것을. 내일 새벽에 바로 치도록 하자꾸나.”
지뢰지대를 뚫고 감제고지를 점령하더라도 콕셰타우 시가지까지는 거의 4킬로미터 가까운 간격이 남는다. 그 사이엔 1차 대전 스타일로 겹겹이 깔린 예비 참호들과 살상지대들이 있어, 단숨에 치명타를 가하기는 어려웠다.
프로파간다에 더해, 지하디스트들에게 적당한 수준으로 피를 흘리며 뚫을 만한 취약점을 만들어주는 정도가 내 목표였다. 이것만으로도 콕셰타우 공략 날짜가 크게 앞당겨질 테니까.
그러나 다음 날 새벽.
나는 내가 러시아를 너무 얕보았음을 깨달았다.
마법으로 밀도를 더한 안개를 내 지배력 아래에 두고, 무인지경으로 지뢰지대를 돌파하여 감제고지를 점령하는 것까지는 계획한 그대로 이루어졌다.
방어전면 전체에 걸쳐 1m³당 3개 이상을 심거나 설치해 놓았다는 지뢰들은 내 간섭을 받아 모조리 멍텅구리로 변해버렸다. 신관에서 튀는 불티는 발화억제로 차단했고, 스마트 지뢰의 센서들은 일시적으로 동력을 끊거나 「환시」로 교란하는 식으로 무력화했다. 단순히 농밀한 안개의 벽에 가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도 있었고.
움직이는 열원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쏴버리는 중국제 자동포탑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농락할 수 있었다.
어떤 각성능력자 집단이라도 이렇게까지 조용하게 지뢰지대를 돌파하진 못한다.
고로 우리의 기습을 받은 감제고지의 러시아군이 마치 유령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기겁을 해서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Как сюда попали враги?! Ни одна мина не взорвалась!(적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지뢰가 하나도 터지지 않았잖아!)」
경태는 안개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듣고 유쾌하게 웃었다.
“아아, 모르는가? 이것은 알라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알라라는 건 요즘 우리 형님께서 애용하시는 다른 신분이지!”
동원령을 선포한 이래 최소한의 훈련조차 소홀히 하며 병력을 마구 전선으로 던져댄다더니, 과연 러시아군의 군기는 엄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계병들은 태반이 자거나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스마트 지뢰 제어 및 원격 감시 시스템을 담당하는 특기병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긴급 대응조로 보이는 각성능력자들은 각성능력자용 방어구를 다 벗어놓은 채로 침낭 속에 들어가 있었다. 대초원의 새벽안개와 바람은 여간한 각성능력자들에게도 쌀쌀함을 느끼게 하는 냉기를 몰아왔다.
아무리 가장 치명적인 지뢰지대의 안쪽이라지만, 최소한의 경계수칙조차 지키지 않는 군대의 꼬락서니는 보는 입장에서 한숨마저 나오는 것이었다.
「Отступление! Отступление! Отойди ко второй линии обороны! Торопиться! ублюдки! (후퇴! 후퇴! 2차 방어선으로 빠져! 빨리! 새끼들아!)」
지하디스트로 분장한 내 부하들이 카메라 앞에서 연신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쳐대는 가운데, 러시아군은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감제고지를 내주었다.
1차 방어선을 버리기 전 진내사격이라도 요청하는 게 정상인데, 러시아놈들은 진내사격 요청은커녕 음어표와 무전기, 각종 비밀문서들마저 고스란히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말단 병사에서 장교에 이르기까지 제정신인 놈이 없었다.
심지어 끝까지 처박혀 자다가 포로로 잡힌 놈들마저 있을 지경.
그나마 철근 콘크리트 강화진지 몇 개가 한바탕 기관총 사격과 대전차포 포격을 쏟아내기는 했다. 후방이 아니라 강화진지 안으로 도망쳐 들어간 병사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이것들을 염동 절삭 와이어로 정리했다. 총안구로 침투해 들어간 탄소나노튜브 와이어는 러시아 병사들을 순두부처럼 부드럽게 잘라냈다. 전원이 각성자인 내 지하디스트들과는 달리, 러시아 병사들은 비각성자의 비중이 높았기에 토막 치기가 더욱 용이했다.
「쿠웅! 쿠콰콰쾅!」
내게 안개는 연막차장의 수단인 동시에 공격수단이기도 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소폭명기 폭발이 도망치는 러시아군을 충격파로 후려쳤다. 안개가 섬광으로 번뜩일 때마다 내장이 파열되거나 몸통 전체가 터진 시체들이 늘어난다. 고기 굽는 냄새가 언덕 위로 올라왔다. 전형적인 열압력탄 피해였다.
도망자들이 하다못해 교통호로 내달렸다면 사상자가 줄었을 것이다. 지그재그로 판 교통호는 직상(直上)에서 내려치는 충격파 외의 다른 모든 충격파들을 줄이거나 막아주니까.
그러나 도주하는 러시아군은 많은 수가 참호를 뛰쳐나갔다. 좁은 교통호에서 발생한 병목현상이 침착함을 앗아간 것이다.
애초에 앗아갈 침착함이 있었는가부터가 의문이긴 하지만.
나는 적당한 수의 생존자를 남겨둔 채로 공격을 마무리 지었다. 보고를 올리고 소문을 퍼트려줄 놈들이 있어야 서구 언론들이 교차검증을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너무 그렇게 경멸하진 마십시오. 솔직히 말해, 황금기의 눈과 대마법사의 조합이 지나치게 사기인 거죠.”
경태 녀석은 포로들과 노획장비를 확인하며 러시아 놈들을 변호해주었다.
“한쪽 지평선에서부터 반대쪽 지평선까지 지뢰로 채워놓은 살상지대를 누가 조용히 뚫고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저 친구들이 군기가 좀 심하게 빠진 건 사실이지만, 저 친구들 입장에서 우리는 안개와 함께 찾아온 초자연현상입니다, 초자연현상.”
어쨌든 이걸로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
죽음을 각오한 지하디스트 특공대가 지뢰지대로 돌격했고, 알라의 보우하심에 힘입어 단 한 사람의 피해도 없이 완벽한 기습을 성공시킨 거다.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나는 진즉에 공격을 멈췄건만, 노획한 무전기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비명과 절규가 도무지 그칠 생각을 않았던 것이다.
「뭐라고?! 380고지 방면 지뢰지대가 뚫렸어?! 그게 어떻게 가능해?! 구라 치지 마, 씹새끼야!」
「지뢰가 하나도 터지지 않았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잠깐, 잠깐! 우리가 깔아놓은 지뢰들, 정말 믿을 수 있는 거 맞나?! 총알마저 다 썩은 소련 시절 물건을 주는 게 요즘 우리 보급인데, 지뢰들이라고 멀쩡하리라는 보장이 있어?!」
「요즘은 세탁기에서 뜯어낸 회로를 전차에 넣는다며! 전차가 그 모양인데 지능형 지뢰라고 멀쩡할 리가 있나!」
「걱정 마라! 우리 쪽 전면은 대부분 중국산으로 깔았다! 우리 물건은 얼마 없어!」
「중국산이면 더 걱정을 해야지, 병신 새끼야! 믿을 게 없어서 중국을 믿어?!」
최선을 다해 러시아를 지원하는 중인 중국이 들으면 무척이나 억울해할 말들이었다. 내가 직접 확인한 바, 중국제 스마트 지뢰들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살상력과 파괴력도 러시아제 이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장교와 병사들 모두 중국제 무기의 신뢰성에 불안을 품고 있는 듯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범세계적 인식에 더해, 중국 무기를 자국산의 열화판 불법복제품쯤으로 보는 러시아인들의 자부심 탓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빨리 병력 재배치해! 그 부근의 지뢰지대는 일단 없다고 가정한다!」
급작스러운 병력 재배치는 지휘체계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다.
여기에 2차 이상의 방어선에서 후방이랍시고 태만하게 늘어져있던 놈들이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느닷없이 철수하거나 도망쳐오는 1차 방어선 병력을 맞이하여 덩달아 패닉을 일으키는 경우는 차라리 양호한 축에 들었다. 2차 방어선의 병력들 중엔 징집병들을 전선으로 내몰기 위한 독전대가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짙은 안개는 도망쳐오는 아군을 적으로 오인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곳곳에서 우발적인 교전들이 발생했고, 도미노처럼 확산되는 붕괴는 연락망의 마디들을 끊어놓았으며, 자연히 관측과 상황보고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돌파구의 크기는 확인 가능한가? 뭐? 그것도 확인이 안 돼?! 적들이 얼마나 들어왔는지도 모른다고?! 관측할 위치에 있는 병력이 전혀 없나?!」
「2차 방어선도, 3차 방어선도 연락이 닿질 않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접적! 접적! 대대 규모의 적들을 상대로 교전 중! 긴급히 지원 바람!」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군은 최소 1개 사단 이상의 대병력이 콕셰타우 남쪽 방어선을 돌파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군은 2차, 3차 방어선 곳곳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며 서로의 머리 위로 포격지원과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빗발치는 긴급 지원요청으로 인해 포격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는지, 내가 있는 지점으로는 포탄 한 발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이가 없었고, 경태는 옆에서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폭소를 터트렸다.
“으핰핰핰핰핰핰! 아핰핰핰핰핰핰!”
“…….”
“아핰, 앜, 크엌, 경련…… 배에 경련이…… 아파…… 앜…… 김경태 죽는다…… 김경태가 웃겨서 죽는다…… 비, 비겁한 러시아 놈들…… 싸움으로는 못 죽이니까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그만 좀 웃어라.”
경태는 힘겹게 헐떡거리며 말했다.
“형님…… 제가 죽거든…… 꼭 러시아 놈들에게 복수해주십시오…….”
“…….”
만신창이가 되면서 시가지 외곽까지 물러난 러시아군은 새벽안개가 걷히고 나서야 겨우 아군간의 교전을 중지했다.
「적은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는다! 반복한다! 적은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는다! 각 부대는 시가지 방어에 전념하며 피해상황을 보고하라!」
나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바보 같은 소리를 들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조직문화의 건전성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