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55화 (555/561)

#53. 알라의 검 (18)

그레이스가 고안한 자기(磁氣) 간섭 및 제어 술식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일이 필요했다. 언제나 그러했듯, 마법술식의 구체적인 구성과 구현 원리는 전화상으로 전할 수 있는 종류의 지혜가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영감이나 기본 개념 정도는 말로도 전달이 가능했다. 그레이스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받아보면 알겠지만, 이미 「침식」을 쓸 줄 아는 당신이라면 이 응용술식 역시 어렵지 않게 숙달할 수 있을 거야.」

이는 마법적인 자기 간섭 및 제어의 기초가 「방전」이 아닌 「침식」이라는 말이었다. 「침식」에 의한 자기 간섭이 가능하다고? 어떻게? 이것도 혹시 기만의 방편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에 내가 내심 당황하고 있는 동안, 그레이스는 흐흥- 하는 비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뉴턴의 사과를 생각해봐. 거대한 발견은 때론 생각지도 못한 곳에 보란 듯이 숨어있기도 해. 나는 거대 균사체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관찰하고, 또 정신적인 공명을 더해가는 과정에서 「침식」이 지닌 진정한 잠재력을 깨달았지.」

「「침식」의 가치는 상대가 지닌 마력장을 중화하고 파고드는 게 전부가 아니야. 버섯 교회의 광신도들이 「접신」 과정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을 떠올려봐. 처음엔 나도 당신처럼 생각했어. 그건 침식당한 마력회로의 비정상적인 활성화에 따른 뇌와 육체의 단순 오작동이라고.」

「그런데 아니더라.」

「「침식」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과 힘에 대한 간섭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비록 그 간섭이라는 게 다분히 무질서하고 비정형적이어서 통제에 뚜렷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간섭은 간섭이지.」

「그렇기 때문에, 아밀라리아를 이용한 지자기 간섭 및 제어는 당신의 상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야. 어디까지나 버섯 여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을 쓰도록 유도해서,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힘에 간섭을 하는 것뿐이니까.」

「쉽게 말해, 침식의 영향 아래에서 광신도들이 일으키는 발작과, 마찬가지로 침식의 영향 아래에서 지구 자기장이 일으키는 광란은 마법적으로 거의 동일한 작용기전을 공유한다는 뜻이야. 자기장의 광란에 한시적이고도 부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건, 착란에 빠진 광신도들의 입에서 어쨌든 문법적으로는 맞는 문장이 튀어나오도록 유도하는 것과 유사하고.」

「어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교사 아내 그레이스의 일대일 수업이. 이 정도면 이해가 잘 가는 설명 아니야?」

이해가 잘 가는 설명이었고, 의도를 의심해야만 하는 수상한 친절함이었다.

나는 경계심을 품고서 나 자신을 관조해보았다. 혹여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 마녀에 대한 내 경계심이 무뎌지고 있지는 않은지.

누가 알겠는가. 진리의 서기 마스터 엘름스테드 또한, 처음엔 이런 과정을 거쳐 그레이스의 거미줄에 걸려들기 시작한 것일는지.

나는 경계심을 감추며 감사를 표했다.

그레이스와 논의한 대로 메드크럭스 요격을 한다고 해도, 그전까지는 남는 시일이 있었다. 나는 이 기간 동안 카자흐스탄 방면을 정리한 후 위구르 해방 준비를 마쳐놓을 참이었다.

그레이스 역시 그레이스 나름대로 진행하던 확장 작업 하나를 마무리 짓겠다고 했다.

현재 그레이스가 주술사 왕으로서 작업을 치고 있는 국가는 남아공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보츠와나였다.

「요즘 들어 여러 견제들 때문에 신규 영토 확장이 까다로워졌단 말이지.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보츠와나는 딱히 매력적인 목표가 아니었을 거야. 같은 노력을 들일 거라면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을 공략하는 게 더 나으니까.」

주술사 왕의 영토 확장에 자국의 직접적인 이권이 걸려있는 1세계 국가들은, 다양한 지원책과 유화책을 통해 아프리카 국가들의 주술사 왕 동군연합 합류를 방해하는 중이었다.

합류를 완벽하게 막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두기만 하면, 옛 식민지 국가들의 경제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자국 기업들이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져나올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까닭이다.

보다 이상적으로는, 주술사 왕의 통치 아래에서도 기존의 이권을 일정부분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거나.

동군연합의 확장을 방해하면서, 한편으로는 방해를 중단하고 아프리카 패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협상을 시도하는 전략이다.

전략이라기보다는 발버둥에 더 가깝지만.

옛 강도질의 유산을 토해내고 싶지 않은 은퇴한 강도들의 집단적인 현실 부정.

보츠와나는 서구세계가 남아공과 함께 아프리카 남단의 보루로 선택한 국가였다. 남아공보다도 시민의식이 높고 민주주의가 잘 돌아가는 이 나라는, 외부지원이 주어지는 동안에는 주술신앙의 확산만으로 잡아먹기가 다소 곤란한 측면이 있었다.

서구세계의 후원자들은 보츠와나가 주술사 왕의 영향권에 편입되더라도 종속국으로서 들어가지는 않기를 바랐다.

교육수준이 우수한 시민들 또한, 주술사 왕 개인은 존경할지언정 신정일치 전제군주로서 섬기고 싶지는 않다는 의견이 과반이었다. 국가의 실질적인 주권은 그대로 두고, 영연방처럼 주술사 왕을 명목상의 군주로 추대하며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정도가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사례들이 늘어나면 동군연합의 ‘순수함’이 낮아지지.’

순수함이 낮아지면 행정비용과 통치의 비효율이 증가하며, 동군연합의 덩치 그 자체가 주술사 왕의 확장행보를 지연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여러모로 아프리카의 평균과는 거리가 먼 이 남방의 보루, 보츠와나의 약점은 국가경제가 다이아몬드 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이었다.

그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도, 명품시장이나 보석시장은 오히려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장의 근간은 초능력 졸부들의 과소비다.

난데없이 분에 넘치는 돈을 만지게 된 중무장 용팔이들은 서로 경쟁을 벌이듯이 과시성·전시성 과소비를 일삼았다. 이 천박한 행태는 딱히 국적을 가리지도 않았다.

고급 승용차 안에서 온갖 명품과 보석류를 두르고 사진을 찍어 SNS로 과시하는 짓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머리로는 이해할지언정 가슴으로는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다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성공한 중무장 용팔이들이 그 많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빚까지 져가며 써대는 돈은 명품시장과 보석시장을 부양하고도 남는 수준의 자본공급이었다.

보츠와나는 그러한 과소비의 수혜를 직접적으로 입는 국가였다. 경제가 안정적이니 정치도 안정적이고, 무상교육을 포함한 사회복지가 충분한 사회에선 시민들의 주술신앙 의존도를 일정 수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도 까다롭다.

그래서 나는 아라비아 해(海)로 옮겨놓은 페르 아스페라를 이용해 도합 4천만 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합성했다.

재료는 바다에 녹아있는 이산화탄소와 유기탄소들을 모아서 썼다. 그래봐야 평균적인 한국인 한 사람이 1년간 배출하는 탄소량을 기준으로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적은 양이었다.

대량생산한 원석의 행선지는 ‘왕의 항구’ 다르에스살람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레이스가 말한 내 도움이었다.

4천만 캐럿이면 전 세계 다이아몬드 연간 생산량의 3할을 넘는다. 이 막대한 물량을 단기간에 쏟아내 버리면, 국제 다이아몬드 시세는 조만간 어마어마한 폭락을 보여줄 것이다.

보츠와나의 경제를 파괴할 수단이다.

그레이스는 즐거운 듯 웃어 보였다.

「하필 이때가 4월이라는 게 참 공교롭지 않아? 다이아몬드는 4월의 탄생석이니까. 4월은 보츠와나라는 나라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 하는 잔인한 달이야.」

「뭐, 고통이 길지는 않겠지. 일단 내게 숙이고 들어오기만 하면, 다이아몬드 시세를 전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줄 방법이 많으니까.」

「예를 들어 내가 주술사 왕으로서 다이아몬드를 태우는 주술 같은 걸 발표하거나, 태우고 남은 재를 영약 재료에 섞는 레시피를 공개하거나 하면 다이아몬드 가격은 폭등을 거듭하겠지. 보증서가 있는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레페와 연동하는 방안도 괜찮겠네.」

「보츠와나 국민들은 단기간의 고통을 겪는 대가로 전대미문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될 거야. 그야말로 왕이 베풀어주는 은혜지.」

그토록 원탁과 영국을 증오하는 마녀가 하필 미국계 영국인의 시를 비틀어 자신의 정복을 담아내는 건, 단순한 농담이라기엔 다분히 비틀린 느낌을 선사했다.

어쩌면 지금 그레이스가 짓고 있는 웃음 너머엔 내게도 익숙한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기만족의 선을 긋도록 만드는 그 감정이.

비록 목적이 다르다고는 하나, 방법론적인 영역에서 제국주의자들과 비슷해지는 건 속이 많이 불편해지는 일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어느 순간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나 자신을 대입하여 그레이스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뭐 이런 개 같은…….’

내가 표정을 굳히자 그레이스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졌네? 뭔가 문제라도 있어?」

이렇게 묻는 그레이스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위험한 식인괴물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것 아니다. 조직 운영과 관련하여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을 뿐이야.”

이 핑계로 나는 통화를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그레이스는 아쉬움을 가장하는 낯짝으로 끄덕였다.

「아, 참. 끊기 전에 이 말을 해야겠네. 연결을 끊고 나면, 조용한 시간에 오늘 나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당혹감을 한번 복기해보는 게 어때?」

「무슨 당혹감이냐니. 큭큭. 솔직히 아까는 철렁하지 않았어? 내가 아밀라리아를 조종해 지자기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말이야. 그 순간의 기분을 곱씹어보는 게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그렇지만, 요즘의 당신이 보여주는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강자로서의 힘을 행사하는 데 많이 익숙해졌다는 느낌이 들거든.」

「물론 그게 나쁜 변화는 아니지. 작은 위험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자는 자신의 잠재력을 열에 하나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니까.」

「하지만 미지의 적을 치고자 낯선 전장으로 나아가기 전에는, 한 번쯤 옛날의 감각을 되살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뭐, 우리 현명한 남편이 어련히 알아서 잘할 일이긴 하지만,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노파심이라는 게 있는 법인걸.」

「이 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지.」

「그럼, 일 보도록 해. 그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요즘 당신이 하는 일은 방향성이 뚜렷하니까. 당신의 지하디스트 대군에게는 나 역시 기대를 걸고 있어.」

그레이스는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에서 사라졌다. 암전한 화면은 신호 없음 문구만을 보여주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여러모로 구멍이 많았던 나 자신을 곱씹었다. 눈꺼풀 안쪽의 미세혈관들이 뭉근한 화와 자기혐오의 심박을 따라 미세한 약동을 보여주었다.

스스로를 얼마간 다스린 다음에는 일에 대한 생각으로 다른 잡념들을 몰아내었다. 눈으로는 여러 개의 벽을 뚫고 통제실에 떠있는 지도들을 보면서.

보급은 군대 건설의 알파요 오메가다.

무기, 탄약, 그리고 식량.

전장에 배치되는 지하디스트 군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물자 소모 역시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식량의 경우엔 전량을 할랄 푸드로 공급해야 하는 까닭에 조달이 조금 까다로운 편이었다. 할랄 인증을 받은 일반 식자재야 조달하기가 쉽지만, 군대의 공세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전투식량은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식자재를 일일이 조리해서 먹어야 하는 군대는 공격작전 수행시 충분한 기동성과 즉응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더욱이 지금의 카자흐스탄은 러시아가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파괴해놓은 탓에 전투식량의 수요가 폭증하는 환경이었다. 중국 본토 진공시 산악 게릴라로 투입할 병력들 또한 일반적인 군대보다 훨씬 높은 전투식량 수요를 보여줄 터.

마지막으로, 대망의 런던 공략은 오로지 전투식량으로만 보급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구성원들의 식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다. 군대는 밥을 잘 먹어야 한다.

당장은 이슬람 국가들이 비축해둔 전투식량과 상용 할랄 비상식량 및 장기보존식을 품질 검증을 거쳐 사들이는 방식으로 보급수요를 채우고 있었다. 특히 세 개의 대동맥 계획에 눈이 돌아간 터키가 전투식량 제공에 적극적이었다.

장기적인 보급역량 확대를 위해 세계 각지의 업체들과 조달계약을 맺고 있기도 하다.

여기엔 사실상 내 영향권으로 편입된 이스라엘의 업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셔 푸드는 할랄 푸드와 공통분모가 많으니까. 팔레스타인 이슬람 성직자들과 이스라엘 업체들은 내가 만들어준 일거리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조달 규모와 속도에 비례하여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공급선이다. 공급처가 지나치게 파편화되어 있어, 관련 사무를 총괄하는 수연의 업무 부담이 과중했다. 총괄하는 사무 영역이 이것 하나가 전부도 아니지 않나. 실무진을 따로 부린다고 해도 과중한 업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지면, 수연 녀석은 그 모든 공급처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통합된 보급 행정 시스템을 완성해낼 것이다. 아예 제로에서부터 모든 걸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 개별 이슬람 국가들과 카레아덱 가맹국들의 군수보급 시스템을 단일한 체계로 엮어놓기만 하면 되는 일.

그러나 지금은 통합 시스템이 출범하기도 전에 대군에게 보급을 하느라 고생인 것이다. 더 많은 대군을 담을 그릇으로서, 카레아덱 조약기구를 하루라도 더 빠르게 완성하고 싶은 내 욕심 때문이었다.

‘본인은 나를 위해 하는 일이 힘들수록 보람을 느낀다고 하지만…….’

지도상에 가상의 공세축선들을 그려보며, 나는 카자흐스탄 전역(戰域)을 단기간에 종결지을 방안을 골몰했다.

대군을 동원한 정규전의 형식으로 러시아를 박살내고 나면, 카레아덱 조약기구의 안전보장기능은 더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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