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54화 (554/561)

#53. 알라의 검 (17)

그레이스는 내 당혹감 섞인 침묵을 즐기듯 빙글거리며 웃었다. 나는 짧게 뜸을 들인 후 미간을 모으고 물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라. 레이디 아밀라리아를 어떻게 쓰겠다는 건지.”

「음,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 사이의 대화라기엔 지나치게 건조하고 사무적인 어조인걸……. 따뜻하고 부드럽게,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부탁해, 여보.”라고 해봐. 어서.」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이러고 싶나?”

「당연히 이러고 싶지. 나는 남편의 애정에 목말라있는 외로운 아내거든. 그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부탁이다. 지랄 좀 그만해라. 매번 말하지만, 시간이 아깝다.”

「아. 어떡하지?」

“또 뭐가?”

「케이크처럼 달콤한 속삭임을 듣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쏘아보면서 욕해주는 것도 좋아. 짜릿해. 두근거려. 사랑스러워. 아랫배에 신호가 오는 게 느껴져. 내 머리채를 한 손에 틀어쥔 당신이 쾌락을 위해 나를 물건처럼 사용하는 장면이 떠올라.」

“…….”

「당신도 상상해봐. 당신이 나를 밀어붙일 때마다 침대가 거칠게 삐걱대는 소리. 힘주어 쥔 머리카락을 무자비하게 콱콱 당겨댈 때의 촉감. 밧줄처럼 꼬인 머리카락은 당신 손아귀에 찬 땀에 살짝 젖어있겠지. 냄새를 맡으면 굉장히 좋을 거야.」

미친년의 입에서 또 정신 나간 방언이 쏟아진다.

「아, 그 머리카락을 내 목에 감아 숨통을 죄는 것도 괜찮겠네. 당신은 밧줄을 당길 때마다 컥컥대는 내 모습을, 그리고 수축하는 전신의 근육과 본능적인 버둥거림을 즐기는 거지. 오, 그 지배감이란…….」

이럴 땐 그냥 반응을 안 해주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불쾌감 속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레이스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키득거린 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예전에 레이디 아밀라리아가 제 위로 제초제를 살포하는 미친놈들을 번개폭풍으로 지져버렸던 사건, 기억하지?」

“물론이다.”

「내가 파악한 레이디 아밀라리아의…… 여기선 아밀라리아 D 군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버섯 여신이 지닌 진정한 힘에 비하면 그때 방출한 번개폭풍은 정말로 별것 아니었어. 요즘 들어선 나와 내 아이들이 회로를 조금씩 최적화해주고 있기도 하고.」

“뭐, 아밀라리아의 힘으로 전파방해라도 걸어보겠다는 말인가?”

「비슷해. 국지적으로나마 캐링턴 사건(the Carrington Event)에 버금가는 강도의 지자기 교란을 일으켜서, 나나 당신이 대기권을 이탈하는 과정을 은폐하는 거지. 내 딸들과 추종자들의 계산이 맞다면, 아밀라리아를 중심으로 반경 칠팔백 킬로미터 정도의 범위가 지자기 폭풍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거야. 레이디 아밀라리아와 가까운 중심부의 폭풍 강도는 G 척도(G-Scale)를 기준으로 규모 5에 달할 테고.」

캐링턴 사건은 1859년, 강력한 태양 흑점폭발이 지구 자기장을 뒤흔들었던 일을 말한다. 흑점폭발에 의한 지구 자기장 교란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1859년의 대폭풍은 지구 관측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자기 폭풍이었다.

그런 폭풍을 국지적으로라도 재현할 수 있다면 대기권 이탈 따윈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지자기 폭풍의 강도는 본디 K 지수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는 지구 전역에 걸친 자기장 변화를 정량화하는 지수이므로, 국지적인 폭풍의 경우 그레이스가 사용한 G 척도로 구분하는 게 더 적합했다. G 척도는 위성통신장애나 도체에 흐르는 유도전류의 세기 등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가지고 폭풍의 강도를 구분하는 까닭이었다.

“……말하는 걸 보니 하루 이틀 준비한 일이 아니로군?”

「나라고 해서 메드크럭스에 대해 손을 놓고 있었을 리가 없잖아? 당신보다는 내가 훨씬 더 많이 놈의 위협에 노출되어있는 처지인걸. 아밀라리아의 지자기 폭풍은 내 나름대로 마련해온 대(對) 메드크럭스 전투계획의 핵심적인 구성요소 중 하나야.」

“해낼 자신은 있나?”

「백 퍼센트 성공한다는 확신까지는 없어. 먼저 낮은 위력으로 사전시험을 몇 번 해봐야지. 미국과 캐나다에 대비할 시간도 줄 겸 해서.」

“시도해보고, 안 될 것 같으면 내가 처음 제안했던 방법으로 선회를 하겠다?”

「그래야겠지?」

“아무리 국지적인 폭풍이라지만, 그 에너지량이 감당이 되나?”

「처음부터 지자기 교란을 목적으로 설계한 응용술식이 있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여파로 자기장을 교란할 뿐인 태양폭풍과 직접적으로 에너지량을 비교하면 곤란해. 내가 고안한 응용술식은…… 음…… 남편 앞에서 하기엔 조금 부끄러운 자화자찬이긴 한데, 그래도 만들어낸 입장에서 하나의 예술에 가깝다고 자부할 만큼 완성도가 높아.」

나는 속에서 경계심이 비등하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술식의 효율이 우수하다고 해도, 직간접적 영향권이 반경 칠팔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자기 폭풍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그토록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음을 알린 셈이었다.

사실 직접적인 조종이 불가능할 뿐, 레이디 아밀라리아의 마법적 역량은 페르 아스페라를 능가하는 게 정상이다. 생체질량부터가 압도적이고, 영혼의 크기와 격 또한 조립식 아기들에 비해 우월하다.

그레이스는 거대 균사체의 인지 네트워크에 인간 의식의 메아리를 충동의 형태로 남김으로써 간접적으로 조종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이 방식으로 정교한 술식을 구현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내가 보기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거대 균사체가 원래부터 쓸 수 있는 힘을 쓰도록 유도하는 정도가 현실적인 한계이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저가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노라 말하고 있었다.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텐데.’

나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기반이 될 회로를 닦아놓고, 잘 가공된 충동을 연쇄적으로 부여하면 정교한 술식의 구현이 가능해지나? 굳이 ‘응용’ 술식임을 밝힌 이유는 뭐지? 어떤 술식을 근간으로 응용을 했기에? 지자기를 흔들어놓는 힘이라면 「방전」의 응용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건 너무 단순하다. 그레이스는 내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자기. 혹시 불안해?」

이렇게 묻는 마녀는 예의 그 짓궂은 미소를 물고 있었다.

「불안해하지 마. 우리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당신이 나를 배반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나는 진심으로 당신의 옆자리를 소망하고 있어.」

나는 내 동요를 감추며 말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좀 더 구체적인 실행계획에 대해 이야기해보지.”

페르 아스페라가 지구 저궤도에 도달하기까지 소요될 예상 시간은 10분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11분이 지나면 국제우주정거장보다 높은 고도에 도달할 수 있다.

이때 지구 표면을 기준으로 환산하는 수평적 이동거리는 넉넉하게 1천 킬로미터 정도로 잡으면 된다. 그레이스가 반경 칠팔백 킬로미터의 교란을 호언했으므로, 지자기 폭풍 생성에 실패하지만 않는다면 은폐 범위엔 상당한 여유가 남는다.

그레이스가 정리했다.

「그럼 태평양 동쪽 연안지대에서 떠서 오리건 주(州) 상공을 가로지르는 경로로 이탈하면 되겠네. 더 정리할 게 있어?」

“지금으로선 더 없다.”

「정말로?」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무슨 말이 하고 싶다기보다는, 자기가 응당 꺼내야 할 이야기들이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가령 지자기 간섭을 위성요격에 활용할 수 있는가 여부에 대한 확인이나, 당신 대신 내가 출격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 같은.」

나는 생글거리는 그레이스의 낯짝을 보며 가벼운 낭패감을 느꼈다. 스스로에게 혀를 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레이스는 눈웃음을 치며 놀리듯이 말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사소한 실수를 하는 남편의 모습도 사랑스럽네.」

스피커를 통해 즐겁게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넘어온다.

「이대로 통화를 종료했으면, 당신은 이내 내게 또 전화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인상을 구겼겠지. 모르는 척 연결을 종료한 후 당신의 행동과 표정을 상상해보는 것도 나름 즐거웠겠지만, 역시 이렇게 직접 반응을 볼 수 있는 쪽이 정답이었던 것 같아.」

“…….”

「저기, 이럴 땐 조금 더 솔직한 반응을 보여줘도 좋지 않아? 부끄러워하는 것까진 기대하지 않으니, 아까처럼 욕이라도 해주지 않겠어? 당신이 욕하는 거 정말 자극적이거든.」

나는 피곤한 한숨과 함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지자력을 활용한 투사체 공격이 가능한가?”

자기력을 이용해 투사체를 날린다면 그게 바로 레일 건이고 매스 드라이버(Mass driver)다.

한데 강력한 자기폭풍을 일으킬 정도의 힘으로 매스 드라이버를 대신한다? 터무니없는 질량의 투사체를 엄청난 속도로 사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답은 “그렇다.”이기도 하고 “아니다.”이기도 해. 가능 여부가 아니라 실효성을 따진다면 후자에 한없이 가깝지.」

“정밀 제어가 안 된다는 말인가?”

「그래. 단순히 자기장을 뒤흔들어 폭풍을 빚는 것과, 그 모든 자기장을 정교하게 조작해서 투사체를 발사하는 것. 그냥 듣기만 해도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잖아? 내가 준비하던 대(對) 메드크럭스 전투계획의 미달성 과제야.」

이렇게 쉽게 털어놓는 정보들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봐야 한다. 더욱이 그게 자신의 전력(戰力)에 관한 정보임에야.

그럼에도 그레이스의 말 자체는 타당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인지 네트워크에 충동을 부여하는 조종방식으로 자기폭풍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내게 당혹감을 선사할 만큼 대단한 위업이다. 그 거대한 힘을 매스 드라이버 수준으로 정교하게 제어하는 건, 대마법사가 아니라 우주적 존재로 승천한 황금기의 인류가 돌아와야 비로소 가능할까 싶은 일.

‘이 마녀가 그 정도의 마법적 역량을 성취했으면 싸움은 벌써 다 끝났어야 정상이지.’

런던은 진즉에 다 불타버린 폐허가 되어있었을 테고, 나는 내 생존을 그레이스의 변덕스러운 자비에 맡기는 처지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레이디 아밀라리아에게 우주공간에서의 교전능력이 있나?”

「실제로 해봐야 알겠지만, 우주로 나가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어. 물론 처음엔 다소의 시행착오가 따르겠지. 그 거대한 질량을 우주방사선으로부터 방호할 수단도 마련해야 하고. 또 지구 밖 환경에서 아밀라리아의 인지구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미지수이고…….」

“나는 메드크럭스에게 더 시간을 주고 싶지 않다.”

「동감이야. 그래서 나는, 당신이 요구한다면 무리를 감수하고서라도 출격을 해보려고 해.」

“왜? 단순히 동맹간 상호기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당신이 그걸 ‘단순히’라고 말해주는 건 참 고맙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이게 단순하게 취급할 문제는 아니잖아? 내게는 개인적인 동기도 있고.」

“개인적인 동기? 새삼스럽군. 애초에 우리의 싸움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로 시작된 것이지 않나?”

「내 말은, 당신과 나란히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야.」

“또 미친 소리를.”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게 지금 내가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소린가? 겨우 그딴 이유로 비효율과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자는 제안에?”

그레이스가 쉽게 내놓는 정보들을 있는 그대로 믿는 건 아니다. 아니지만, 설령 아밀라리아의 우주항행 및 교전 능력이 그레이스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한 수준이라 해도, 그레이스와 아밀라리아를 출격시키는 건 결코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이 패를 왜 지금 까보여야 하나?’

아밀라리아에 대한 그레이스의 통제력은 명백히 내 예상을 초월한 것이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원탁의 늙은이들 또한 예상하기 어렵다는 뜻이지 않나.

단순히 자기폭풍을 만들어내는 선에서 그칠 경우, 이는 지배적인 영향력 행사의 결과가 아니라 아밀라리아에게 특정한 자극을 가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후자로 판단이 기우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아밀라리아를 우주로 끌고 나가버리면, 그때는 이쪽이 거대 균사체에 대해 발휘하는 통제력이 확실히 노출되고 만다.

이는 ‘원숭이 손’을 다루는 늙은이들이 더더욱 무리수를 두게 만들 것이다. 극도의 주의 속에서 다뤄야 할 마법도구에 안전선을 넘어선 소망들을 마구잡이로 투사하겠지.

지나친 비효율이고, 불필요한 위험이다.

‘이 미친년이 나를 기만하는 것이라도 상관없다. 지금은 기꺼이 속아주도록 하지.’

일찍이 대마법사를 잡아먹은 마녀에 대한 의심은 한시도 내려놓아선 안 되는 것이다.

흘러간 대화의 내용을 보건대, 그레이스는 자신에 대한 출격요구를 자연스럽게 차단하면서 내 출격을 확정짓는 쪽으로 흐름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우주로 나간 짧은 시일 사이에 그레이스가 나를 배신해서 챙길 만한 이익이 있지 않은 한, 여기서는 속아주어도 무방하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어떤 종류의 부채는 조기상환을 막는 게 더 이익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레이스가 벌써부터 동맹으로서의 부채감을 덜기를 바라지 않았다. 내가 메드크럭스까지 사냥해버리고 나면, 런던으로 진공할 때 누가 앞장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의 여지조차 없게 될 테니까.

「말했듯이, 개인적인 동기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유일 뿐이야. 중요한 건 균형이지.」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봐. 다소 비효율적인 일이든 아니든 간에, 당신은 어쨌든 스스로가 직접 위험에 노출되는 일을 피하는 거야. 여기서의 비효율은 생명의 안전을 위한 비용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어? 동맹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데 따르는 비용 말이야.」

“됐고, 이번 사냥은 내가 담당하겠다. 아까 논의했던 대로, 넌 레이더 음영지대만 제대로 제공해주면 된다.”

「음, 왠지 서운한걸. 당신에게는 내게 희생을 요구할 권리와 의무의 이행을 요구할 자격이 있어.」

“됐다니까.”

「자기. 혹시 악몽의 근원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하고 싶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거 아니야?」

“…….”

이번엔 내 정신 상태를 핑계 삼아 제 부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건가. 어디까지나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몰아감으로써.

화면 저편의 마녀는 짐짓 걱정스러운 체를 하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짓이다. 마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헛소리는 언제쯤 그만할 건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애정 어린 관심이라고 봐주면 안 돼?」

“그렇게까지 해서 욕을 먹고 싶나?”

「욕? 이번엔 딱히 바란 건 아니지만, 해주면 고맙지.」

“……관두지.”

「에이. 그럼 이건 어때? 내가 당신에게 자기간섭 술식을 공유해주는 거야. 동맹으로서 최소한의 성의를 표현하는 셈 치고.」

이 말은 나를 순간적으로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레이스는 내 반응을 보며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진심인가?”

내가 해당 술식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그레이스가 레이디 아밀라리아를 통해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을 정확하게 역산해낼 수 있게 된다. 그뿐인가? 그 힘의 활용에 관한 한계 역시 파악이 가능하다.

설령 의도적으로 다운그레이드한 술식을 넘겨주어도 상관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조치에 불과한 것을. 현상적으로 유사한 결과를 도출할 뿐인 가짜 술식이라면 또 모르겠으되, 황금기의 눈을 가진 나를 상대로 그런 모험을 하는 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레이스가 모르는 사이에 그레이스 복제체가 소모되는 현장을 관찰한 전력이 있다. 진위를 판별할 능력은 충분히 있다는 뜻.

「나는 아내로서 남편에게 빈말을 하지 않아.」

그레이스가 화면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제 가슴골을 보여주는 자세였다.

「단, 조건이 하나 있어.」

“무슨 조건?”

「딱히 대단한 건 아니야. 그냥 말 한마디만 해주면 돼.」

그레이스의 두 눈이 불길하게 휘어진다.

「자, 이번에야말로 말해봐. 따뜻하고 부드럽게. 애정을 담아 귓가에 속삭이듯이, “부탁해, 여보.”라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담아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뭐해? 겨우 말 한마디로 내가 공들여 만든 걸작을 얻을 기회잖아? 이런 기회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야. 놓치면 분명히 후회할걸?」

그레이스는 내 시선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나는 이마를 짚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부탁한다.”

화면 너머의 눈꼬리가 축 내려간다.

「그게 아니잖아. “부탁해, 여보.”라니까? 제대로 해줘.」

“어차피 알려줄 거, 이런 장난치지 말고 그냥 알려주면 안 되겠나?”

「장난? 난 진지해. 말해주지 않으면 술식 공유는 없어.」

마녀가 요구한 말을 뱉는 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뚱한 표정을 지은 그레이스가 조용한 카운트다운을 개시했다. 두 손을 펼친 후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한 것이다.

남은 손가락이 세 개가 되었을 때, 나는 이런 미친년과 동맹을 맺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부탁해, 여보.”라고.

「꺄악. 무서운 표정이다.」

지랄병이 도진 그레이스는 한참을 소리 내어 웃은 뒤에 말했다.

「애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처음이니까 이 정도로 봐주도록 할게. 더하면 정말로 화를 낼 것 같기도 하고.」

“약속은 지켜라.”

「당연하지.」

그레이스의 입가에 전보다 더 투명한 미소가 걸렸다.

「다시 말하는데, 나는 남편이 될 사람에게 빈말을 하지 않아. 나 스스로 그렇게 정했지. 당신을 진실로서 대하는 단 하나의 사람으로 삼기로. 약속은 꼭 지킬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