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알라의 검 (15)
러시아의 카자흐스탄 침공은 친러 성향의 독재자가 민주화 세력에 의해 축출당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옛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했던 독재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공식적으로는 지난 19년에 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직과 헌법위원회 의장직은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었고, 최대 다수당인 누르 오탄(Нұр Отан) 역시 그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대통령 재직 시절 스스로에게 부여한 엘바시(Елбасы/국가지도자) 지위 또한 여전히 법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상황이었다.
나자르바예프 본인이 만들어놓은 법령에 의거, 국가지도자는 대통령보다 더 높은 의전을 받으며, 명시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결국 껍데기뿐인 퇴임은 민주화 세력을 기만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후임자는 자신이 먹을 욕을 나누어 먹어줄 바지사장에 불과했던 셈. 나자르바예프는 외국 국가정상들과의 공식적인 교류 업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권력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매미들이 우는 계절은 독재자가 공들여 다져놓은 정치지형을 파괴적으로 바꿔놓았다.
예리하게 기회를 포착한 바지사장 대통령은, 민주화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욕받이 꼭두각시 신세를 벗어나고자 했다.
「저는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민주화 시위대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살인이나 방화와 같은 그릇된 행동들까지 긍정할 수는 없으나, 그들을 추동한 것이 자유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이 나라엔 정의가 없었습니다. 매번 선거를 치를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부정이 만연했고, 야당 정치인들의 권리는 보호받지 못했으며, 국영 언론은 그들의 목소리를 검열했고, 그들을 지지하는 온라인 선거운동은 공공연한 감시와 접속 차단으로 위축되었습니다.」
「또한 민주화 시위자들은 불법적인 감금과 고문을 겪어야 했습니다. 경찰과 검찰은 부패한 권력의 지휘와 비호를 받으며 권위주의 정권의 시종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국민의 생명과 권리 보호라는 근본적 사명 따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알다시피, ‘어떤 나라’가 우리의 내정에 개입하거나 선거 조작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국내외의 인권변호사들과 관련 비정부기구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겠습니다. 대통령 직속의 시민개혁위원회가 경찰과 검찰이 진행하는 수사의 합법성을 점검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영언론이 야당 정치인들에게 여당 정치인들과 동등한 출연 기회를 보장하게끔 조치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국민 여러분들에게 국민의 기본권과 정치적 자유를 돌려드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게 여러분의 힘을 모아주십시오. 이 나라의 변화는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날 카자흐스탄 제2공화국은 모든 국민들이 주권의 소유자로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국민들의 당연한 권리가 법률에 의해 보호받는 법치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언급한 ‘어떤 나라’는 당연히 러시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지사장 노릇이나 하라고 앉혀놓았던 꼭두각시가 기습적인 발표를 통해 시민들과의 연대를 꾀하자, 대경실색한 나자르바예프는 여당과 의회를 움직여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정지시키는 한편, 국가안전보장위원회를 소집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대통령의 담화를 본 시민세력들이 일제히 궐기한 다음이었다. 그 기세가 마치 마른 날에 번지는 들불과도 같아, 나자르바예프 본인의 능력만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우리는 대통령을 지지한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달라! 카자흐스탄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카자흐스탄 제2공화국 만세!」
대통령이 과연 순수한 의도로 민주화를 추진하는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민주화 시민세력은 대통령을 백 퍼센트 신용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인간도 부패한 여당 출신이고, 독재자가 손수 뽑아 후임자 자리에 앉혀놓은 꼭두각시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시위대는 대통령을 지지했다. 의도야 어쨌건, 대통령이 민주화를 쟁취할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준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잘못은 우선 민주화를 이뤄놓은 다음에 따져도 늦지 않다.」
-라는 게 현재 나와 손잡고 있는 카자흐스탄 민주화 진영의 통일된 견해였다.
결국 나자르바예프는 자신의 뒷배인 러시아에게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카자흐스탄 침공은 최악의 선택이 되었으나, 러시아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었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민주화를 성취한 카자흐스탄이 그간 행해진 내정간섭에 치를 떨며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로부터 이탈해버리면, 중앙아시아의 나머지 국가들도 줄줄이 러시아의 그늘에서 벗어나버릴 게 뻔했던 까닭이다.
문화적으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여러 민족들이 국경을 넘어 분포하는 지역적 특성상, 민주화의 물결이 한 나라에서 그치리라 기대하는 건 희망 함량이 지나치게 높은 망상일 뿐.
카자흐스탄의 이탈을 눈 뜨고 보기만 하는 것은 각국의 잠재적 ‘불온세력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가능성이 지나치게 높았다. 러시아는 CSTO를 단속할 능력이 없다는 신호를.
CSTO의 붕괴는 러시아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재앙이고, 군사적으로도 재앙이다.
카자흐스탄 한 나라만 이탈해도 나머지 중앙아시아 회원국들과의 육로 연결이 단절되며 7,644킬로미터에 달하는 잠재적 적성국과의 국경이 추가된다. 이게 어떻게 재앙이 아닐 수가 있나. 미국으로 치면 캐나다가 잠재적 적성국으로 돌아서는 꼴인데.
‘중국이 지금 왜 방어 거점 구축에만 전념하고 있는가를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지.’
중국은 무수한 각성능력자 지하디스트 전사들이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을 넘어 전방위적으로 밀려들어오는 악몽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여간해선 함락되지 않을 견고한 거점들을 건설해놓고, 그 거점들을 통해 최저한의 전장 지배력을 유지하며 기동 전력을 활용해 요격을 실시하겠다는 방어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이 같은 미래를 피하고자 러시아는 CSTO 평화유지군의 깃발을 들고 카자흐스탄을 침공했다.
러시아에겐 아군도 있었다.
「우리 중국은 카자흐스탄에서 번지고 있는 색깔 혁명이 불순한 의도를 지닌 외세의 선동으로 발생했다는 증거를 입수했다.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지역안보를 파괴하는 특정한 강대국에게 강하게 반대하며, 카자흐스탄 정통정부와 그 우방 러시아가 질서 회복을 위한 모든 종류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러시아 정부가 판단하기로, 중국이 유무형의 지원을 제공한다는 전제하에, 카자흐스탄을 제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내가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한 지금까지도 수렁에 빠져있다.
민주화 진영에서 호왈(號曰) 20만에 달하는 각성체 전마 기병대를 전장에 투입했음에도, 또 러시아가 부패한 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추태를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전쟁은 쉬이 끝날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러시아가 버티는 것은 전쟁목표의 수정과 사람을 갈아 넣는 인해전술의 힘이었다.
「금일, 세베로-카자흐스탄스카야 인민공화국과 외스케멘 인민공화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러시아 연방으로의 합류를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카자흐스탄의 반란세력과 맞서 싸워온 두 공화국의 영토는 합법적인 러시아의 영토로 귀속되었으며, 우리 러시아는 평화의 적들로부터 신성한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세베로-카자흐스탄스카야 공화국의 수도 페트로파블은 소련 시절의 이름인 페트로파블롭스크를 되찾았습니다.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시민들은 진정한 조국 러시아를 수호하기 위한 열의로 가득 차 자발적으로 징병사무소를 찾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역시 러시아 연방으로의 합류를 결정했습니다. 또한 이 두 공화국은 오랜 전쟁으로 다져진 숙련병들을 카자흐스탄 전역(戰域)에 파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오늘 크렘린 궁은 전통적인 우방국 북한으로부터 무기와 탄약, 그리고 용병을 지원받는 계약에 서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 러시아는 북한에 식량과 기술을 수출하기로……」
「위대한 조국 러시아는 평화의 적들에게 단 한 치의 영토도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카자흐스탄 영토 내에 두 개의 괴뢰국을 수립했다.
하나는 러시아계의 비중이 절반에 달하는 북부 접경주의 세베로-카자흐스탄스카야 인민공화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계의 비중이 70%가 넘는 동부 접경주의 외스케멘 인민공화국이었다.
독재자 나자르바예프를 복권시키고 중앙아시아 전역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한다는 최초의 목표는 물 건너 가버렸으니, 괴뢰국들을 형식적으로 흡수-병합하여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쪽으로 목표를 수정한 것이다. 이를 두고 경태는 “한때 세계 2위였던 군사대국의 눈물겨운 똥꼬 쇼.”라며 냉소했다.
러시아가 일찍부터 괴뢰국을 세워놓았던 우크라이나 동남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의 영토라고 확실히 못박아놓고는, 국경을 침범하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협박으로 우크라이나의 행동을 억누르며 병력을 재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20만 각성체 전마 기병대를 보유한 카자흐스탄 민주정부와 다르게, 상호확증파괴를 달성할 수단이 없는 우크라이나로서는 러시아의 핵 위협을 가벼이 여기기가 어려웠다.
‘하는 짓을 보면 핵무기는 멀쩡하게 있을까 의문이긴 하다마는…….’
나는 러시아의 추태를 보며 조직문화의 건전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되새겼다.
여하간 러시아는 전장에 시대착오적인 규모의 대군을 투입했다.
괴뢰국의 성인 남성들은 사지만 멀쩡하면 무조건 징병 대상으로 등록되었다.
러시아 본토에서도 부분동원령이 발효되었고, 러시아의 용병기업들도 모조리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소환되었다. 중국이나 북한, 그 외 제3세계의 우방국들로부터도 의용병과 용병들을 대대적으로 지원받았다.
그렇게 투입한 병력이 정규군 약 25만에 예비군 약 40만, 규모 미상의 용병들, 그리고 괴뢰국들의 군대 약 90만이었다.
물론 그 많은 병력들이 지금 다 살아있지는 않다. 연인원은 어디까지나 연인원일 뿐, 그간의 소모를 감안하면 적어도 3할은 전장의 고혼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동원령으로 모은 예비군이나 강제로 징병한 괴뢰국들의 군대는 무기는커녕 군복조차 지급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군적(軍籍) 편입으로 숫자만 채우고 있을 뿐, 전력화엔 시간과 자원이 필요한 병력자원들인 것이다.
러시아가 무너지면 정말로 큰일인 중국이 최선을 다해 무기와 군수물자를 찍어 공급해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중국도 당장 자기 앞가림이 급한 처지여서, 러시아가 중국의 지원만으로 대군을 전력화하는 데엔 무리가 많았다.
그래서 러시아는 요즘 옛 소련의 유산을 열심히 발굴하는 중이었다. 나는 전부 스크랩 처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골동품들이 전장에 나오는 꼴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경태는 말했다.
“아, 그거요? 제가 북해빙궁의 임 장로에게 물어봤는데-”
“북해빙궁? 임 장로?”
“브라츠키 크루그의 임마누일이요. 아무튼 스크랩 처리를 하겠다고 예산을 편성한 후 돈만 빼돌리고 일은 안 해놔서 남아있는 물건들이랍니다. 스크랩을 해서 수익을 뽑아내려면 최소한의 시설 투자를 해야 하는데, 일회성 사업을 위해 시설 투자를 하면 실무를 맡은 말단은 먹을 게 없어지잖습니까? 뭐, 결과만 놓고 보면 러시아에겐 전화위복이 된 부패죠.”
여기에 러시아 측에도 나름의 각성체 기병대가 존재했다.
「위대한 조국이 외세에게 선동당한 반란세력들에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진정한 애국자들은 내게로, 이 나자르바예프에게로 오십시오!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지도자로서의 신성한 책무를 이행할 것입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소련 시절부터 카자흐스탄의 최고 권력자였던 인간이다. 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에 오른 시점부터 계산하면 무려 33년 동안 카자흐스탄을 지배한 셈.
이렇게나 오랫동안 독재를 했는데 광신적인 지지층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카자흐 민주진영 내부에서조차 수시로 첩자들이 발견되었고, 나자르바예프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각성능력자 의용기병대는 비록 숫자는 적을지언정 전장의 소방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냈다.
이 같은 배경이 빚어낸 카자흐스탄의 전장은 참으로 볼만한 것이었다.
1차 대전 스타일의 참호가 종심 깊은 차단선과 요새화지대를 형성하고, 능동방호체계와 반응 장갑을 두른 기병들이 현대화기로 무장한 채 초원을 질주하며, 2차 대전 시기와 냉전기의 무기들이 최첨단 무기들과 합동작전을 펼치는 가운데, 미래적인 장비를 사용하는 초능력자들이 하늘과 땅 양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혼돈스러운 전장.
기병들이 끌고 다니는 형형색색의 대형 연들은 그렇잖아도 대단한 시각적인 혼돈을 한층 더 가중시키는 요소였다.
이런 전장은 내가 지하디스트들에게 실전경험을 쌓아줄 무대로서 가치가 높았다.
카레아덱 조약기구 평화유지군의 위장신분을 받은 성전군 지하디스트들은 카자흐스탄으로의 투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나는 샤히디의 이름으로 지하드 전사들에게 고했다.
「모든 평화의 근원이신 알라의 이름으로, 바위의 돔의 수호자이자 신자들의 총사령관인 나 알림 샤히디는 알라께서 흡족해하실 아름다운 질서를 건설해나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형제들이여. 단 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질서는 한철에 피고 지는 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 질서가 항구적이기 위해서는, 이 질서에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떨쳐 보일 필요가 있다. 싸울 수 있는 자가 나 알림 샤히디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형제들이여. 알라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전사들이여. 다음 전장은 나와 그대들이 이제껏 겪어왔던 어떠한 전장보다도 더 거대할 것이다. 그 거대한 전장에서 나는 싸움이 벌어지는 모든 장소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대들은 불가피하게 많은 피를 흘려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흘러야만 하는 피이며, 알라께서는 피 흘리며 싸우는 그대들을 어여삐 여기시리니. 그대들이 나를 믿듯이 나는 그대들을 믿는다. 그대들의 영혼에 전사의 신앙과 전사의 명예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아니한다.」
「함께 나아가자. 믿는 자들의 용맹으로 평화의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자. 천국의 문이 우리를 향해 열려있음이라.」
「알라께서는 실로 위대하시다. 알라 후 아크바르.」
이 발표가 나가는 동안, 샤히디는 내가 허락한 아프가니스탄 평정의 포상을 누리고 있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샤히디가 뭔가를 한 일은 딱히 없다. 그러나 그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고, 샤히디 본인은 여전한 인지부조화 속에서 자신이 행한 역할을 과대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니 통제력을 유지하자면 포상을 주어야 한다.
이번 포상엔 원래 있던 유대인 인형들은 물론이고 탈레반 포로들을 재료로 만든 새 시체인형들이 포함되었다.
경태는 짐짓 무서워하는 시늉을 했다.
“TS 유대인에 이어 이제는 TS 탈레반까지……. 저 김경태는 우리 형님의 비인간적인 냉혹함이 두려워져요…….”
샤히디가 가장 선호하는 새 인형은 학살자 헤크마티아르의 시체를 되살린 인형이었다.
헤크마티아르는 올해로 77세가 된 노인이었는데, 나는 「소생」과 「생명」을 다루는 기술이 그간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시험해보는 차원에서 이 늙은이를 인형의 재료로 선택했다.
완성품의 품질은 합격선을 넘어섰다.
77세의 탈레반 늙은이가 남긴 시체는 젊고 농염한 여인의 모습으로 뒤틀린 채 되살아났다. 노화에 따른 DNA 손상율과 체세포 돌연변이 발생 빈도까지는 정상화할 방법이 없었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앞으로 반년 정도는 무난하게 젊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탈레반 인형들은 반응성의 측면에서도 유대인 인형들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응호오오오옥-!」
샤히디의 아래에 깔린 헤크마티아르가 눈을 뒤집고 발을 오므리며 추하게 절정한다. 정상적인 인간 여성에게선 보기 어려울 동물적인 절정이었다. 나는 그저 쾌락을 느끼는 신경계를 조금 손봐놓았을 뿐이건만.
샤히디는 늙은 탈레반의 신선한 자궁에 세 번째의 질내사정을 했다.
헤크마티아르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꼭두각시는 쿤두즈에서 항복한 아흐마드 야시르 대령의 인형도 좋아했다. 각지고 턱수염이 수북했던 야시르 대령의 얼굴은 경태가 가져온 참고자료에 맞게 개조되어 현실에 드문 파슈툰계 미인의 상으로 변모한 상태였다.
나는 헤크마티아르 위에 엎어져서 헉헉대던 샤히디가 얼마 쉬지도 않고 아흐마드 야시르 대령에게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저렇게까지 좋은가?’
나는 요즘 들어 이 꼭두각시를 ‘대체’해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고 있었다.
「소생」과 「생명」을 다루는 내 기량은 이제 누군가의 모습을 완전히 복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물론 모습을 복제하는 것만으로는 특정 인물의 존재를 완벽하게 대체하지 못한다.
예컨대 내가 미국 대통령의 모습을 취한다 치자. 이는 어디까지나 외양을 훔쳤을 뿐이라, 그의 생활에 곧바로 들어가 그의 직무를 수행하고 그의 존재를 대체하기란 불가능하다.
타인의 모습을 취하는 건, 보통은 특정 시설의 출입 보안을 무력화하는 용도로나 쓸모가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림 샤히디는 예외다.
세상이 알고 있는 알림 샤히디의 언행들은 모두 내가 각본을 써서 내가 꾸며낸 것들이다. 또한 알림 샤히디의 모든 생활은 내 감시와 통제 아래에 있다.
고로 샤히디는 완전한 대체가 가능한 인간이었다. 메리옘의 동생들 중 하나에게 그 모습을 주고서 연기를 시키면, 원본이 죽어 없어져도 세상은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다. 어차피 처음부터 거짓된 이미지만을 알고 있었던 세상이지 않은가.
영국 본토를 침공할 때, 성전군은 초현실적인 공포에 직면하더라도 여전히 맞서 싸울 정신무장이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지하디스트들에게 정신적인 예방접종을 놓는 계획이 진행 중이지만, 그 계획이 실효를 거두더라도 샤히디 하나가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일이 조금 번거로워질 것이다.
샤히디를 대체하는 건 그러한 번거로움이 발생할 여지를 사전에 제거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럼에도 아직 샤히디의 목숨을 붙여두고 있는 것은 이놈의 연기력이 매우 우수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배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아진 메소드 연기는, 나로 하여금 ‘대체’를 미루게 만드는 유일한 요소였다.
샤히디의 생명줄은 가늘고 위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