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50화 (550/561)

#53. 알라의 검 (13)

라마단의 시작을 이틀 앞둔 3월 30일.

영국이 마침내 상임이사국 지위를 상실했다.

지난날 같은 일을 겪었던 대만은 UN 회원국 지위마저 포기해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진탈퇴의 형식을 취했으나, 알고 보면 중국과의 수교를 희망하는 국가들의 암묵적인 강요에 떠밀려 불가항력으로 행한 일이었다. 어차피 쫓겨날 거면 최후의 자존심이나마 지키자는 게 당시 대만 외교부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영국은 당시의 대만보다는 형편이 더 나았다. 상임이사국 지위를 상실했다곤 해도, 미승인국으로까지 떨어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각국의 언론들은 반쯤 넋이 나간 영국 UN 대사의 모습을 생중계로 보도했다.

같은 날 NATO 이사회는 영국의 회원국 자격이 정지되었음을 발표했다. 발표엔 영국이 추후 ‘정상국가’로 돌아온다면 회원국 자격을 회복시켜주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는 누가 봐도 근시일 내로는 실현되지 않을 일이었다.

“지금으로선 정상국가의 구체적인 정의조차 제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수연은 발표문의 근거가 되는 공개회의록을 꼼꼼히 읽어본 후 결론 내렸다.

“GIUK 라인의 해양각성체 이동 감시나 영국 영토 내 미군기지 및 시설 임차운영 등의 사안에 관해서는 별도의 협약을 체결하기로 했다는군요. 영국으로선 최소한의 외교적 입지라도 확보하기 위한 발버둥이었겠지요. 여하간 미국이든 NATO든 당장 아쉬울 건 없게 된 만큼, 영국이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소 연 단위의 노력과 협상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내게 남은 UN 관련 사안은 내일로 예정된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에 관한 투표였다.

예전부터 이 투표를 영국의 상임이사국 지위 박탈 투표와 같은 날 해치워버리자는 의견이 꽤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하루의 시차를 두는 걸로 결정이 났다. 영국에게 그렇게까지 수모를 줄 필요가 있겠느냐는 여론 때문이었다.

이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UN 주재 일본 대사는, 하루의 시차를 두는 데 찬성표를 던진 이유를 묻는 자국 기자들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내뱉었다.

「이유? 간단합니다. 저 혐오스러운 나라가 받을 동정을 최소화해야 하니까요. 세상엔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만 보고서 패자에게 이입하는 정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존재하지요. 도쿄가 불타던 참혹한 밤을 벌써부터 까마득한 옛날로 기억하는 그런 사람들이 말입니다.」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가 다른 게 기본인 일본인의 입에서, 그것도 외교관의 입에서 이렇게까지 직설적인 언사가 나오는 건 그만큼 증오가 뿌리 깊다는 방증으로 보아야 할 터였다. 내가 성심껏 새겨놓은 인공의 증오가.

「회기는 아직 엿새나 남았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가끔은 오히려 느리게 다가가는 걸음이 유용할 때도 있습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에게 더 큰 절망과 공포를 주고 싶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지요.」

역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중인 일본 총리 역시 같은 맥락의 발언으로 안달 난 국민들을 억눌렀다.

「우리 일본은 지금 칼자루에 손을 얹고 천천히, 그러나 무거운 기세로 한 걸음 한 걸음 간합(間合)을 조여 가는 사무라이와도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사가 칼을 뽑아드는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지요. 선명하게 확정된 죽음은 느리게 다가올수록 더욱 두려워지는 법입니다. 저는 우리가 뽑는 검에 천하의 법(天下の法)이 온전한 힘으로 실리기를 바랍니다.」

언론이 보도하기를, 총리가 언급한 천하의 법이란 에도 시대 겐로쿠(元祿) 연간에 있었던 사무라이들의 복수 사건과 관련된 표현이라 했다.

죽은 주군을 위한 복수 자체는 민중과 사족들의 찬사를 받았으나, 막부는 아무리 명예로운 복수라 할지라도 사사로운 감정을 공공의 법보다 우선해선 안 된다며 사무라이들에게 할복을 명했다. 천하의 법은 그때 처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총리가 이 표현을 차용한 것은, 문맥상 나중에 혹여라도 국제사회의 판단이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경태는 총리의 담화를 듣고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아저씨, 평소엔 개그맨 흉내를 내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만 멋있어지는 거 좀 비겁하단 말이죠. 6성 돌파 부가효과인가?”

일본 국민들은 지금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내일의 총회 투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본래는 전통적인 분쟁지역들을 모조리 포기해버리겠다는 총리의 방침에 반발하는 자들도 없지 않았으나, 스스로 천명한 과제를 착실하게 이루어나가는 총리의 행보엔 정치적 반대자들의 마음까지도 돌려놓는 힘이 있었다. 애당초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은 우익 진영의 오랜 숙원 중 하나이기도 했고.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영국의 기념비적인 추락을 두고 측근들과 더불어 축배 한 잔쯤은 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딱히 좋아하지 않는 요식행위지만, 이런 게 의외로 업무효율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 부하들과의 심리적 거리도 거리이고.

그러나 예기치 않게 들어온 소식 하나가 축배를 들 여유를 앗아갔다.

“비정상적인 궤도 변화를 보인 폐기위성의 기록을 찾아냈다고?”

내 물음에, 보고를 가져온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 메드크럭스가 손을 댄 위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석 결과를 직접 보시죠.”

해당 폐기위성의 정체는 과거 소련 시절 오카(О́КО) 계획에 따라 발사된 후기 조기경보위성(УС-КМО)들 가운데 하나였다. 상업위성으로 위장하기 위해 부여되었던 식별 코드는 코스모스 2379(Космос 2379).

나는 보고서에 기록된 위성의 정체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거…… 인류를 멸종시킬 뻔했던 시스템의 일부로군.’

오카 계획의 목표는 전 지구적인 감시를 통해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조기에 감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석 컴퓨터가 위성 렌즈에 반사된 태양광을 미국의 미사일 발사 섬광으로 오인하여, 하마터면 자동화 핵보복 프로그램(Периметр)의 전면 가동으로 이어질 뻔했다.

당시 한국은 소련이 전면핵전쟁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공격목표로 설정했던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내가 영문도 모르고 핵의 화염에 휩쓸려 죽을 위기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매우 싫어한다.

수연이 말했다.

“지난 2001년, 러시아의 비밀도시 세르푸호프-15(Серпухов-15)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지요. 이 사고로 오카 프로그램의 서부 위성관제소가 전소해버렸는데, 이 여파로 네 개의 위성이 망실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성, 코스모스 2379는 해당 위성들의 목록에 포함되어있지 않았지요.”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폐기위성이라고 하지 않았나?”

“폐기위성이 맞습니다. 임마누일에게 협조를 구해 확인한 결과, 해당 시점에선 비밀도시 피반-1(Пивань-1)이 코스모스 2379의 통제권을 다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기술적 문제가 추가로 발생하면서 결국엔 통제능력을 상실했던 모양입니다.”

“즉, 대외적으로 존재가 노출되지 않은 폐기위성이었다 이거로군.”

“예. 영국 정보부는 소련과 러시아 내 첩보에서 CIA를 곧잘 능가했던 집단이잖습니까. 그들이라면 이 위성의 존재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겁니다. 메드크럭스가 가져다 쓰기엔 이만큼 좋은 물건이 드물었던 셈입니다.”

“흠…….”

“아시다시피, 몰니야 궤도를 도는 위성들이 정해진 궤도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세 번의 공전당 한 번의 정밀 궤도보정이 필요하지요. 달리 말해, 몰니야 궤도를 도는 폐기위성들은 매일같이 공전각이 틀어지는 게 정상입니다. 코스모스 2379가 비정상적인 궤도 천이를 보이더라도, 비슷한 궤도를 도는 다른 폐기위성이나 우주쓰레기에 묻혀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환경이라 하겠습니다.”

항상 궤도가 변하는 수많은 공전체들을 숲으로 삼아 다소의 특이성을 지닌 나무 한 그루를 은닉했다는 뜻이었다.

그간 우리가 해온 추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너무나도 많은 우주쓰레기들과 폐기위성들, 그리고 몰니야 궤도의 특이성으로 말미암은 추적의 어려움이었다.

장축이 4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몰니야 궤도는 위성의 분포 범위가 입체적이라는 점에서 추적과 감시가 더 까다로웠다.

정지궤도도 장축이 3만 6천 킬로미터쯤 되긴 한다. 그러나 이건 적도 상공에 그어지는 궤도이기에 추적범위가 좁은 띠 형태의 평면으로 수렴되며, 활성화된 위성이든 폐기위성이든 상관없이 항상 동일한 위치에서 관측되어야 정상이므로 역추적이 매우 용이했다.

그래서 추적의 어려움은 고도가 훨씬 낮은 지구 저궤도(LEO)의 위성들이 정지궤도보다 오히려 큰 측면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위성의 숫자부터가 압도적으로 더 많고, 그 많은 위성들이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분포하는 까닭이다.

고로 추적의 어려움은 정지궤도-지구 저궤도-몰니야 궤도 순으로 커진다.

개중에서도 몰니야 궤도는 꽤나 독보적이었다. 경태가 말하는 요즘 젊은 세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구 저궤도와 몰니야 궤도 사이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라는 게 존재했다.

이 어려움은 몰니야 궤도가 폐기위성 및 발사체를 일부러 갖다 버리는 묘지궤도(Graveyard orbit)로 활용되는 바람에 더 커진 측면이 있었다.

우주개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소련과 그 후신인 러시아가 선두주자로 쓰레기를 투기했고, 대략 5년쯤 전부터는 점잔을 빼던 유럽우주국도 투기범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쓰레기를 버렸을 때 충돌 우려가 가장 적은 궤도라는 계산이 나온 까닭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과거의 기록에서 추적의 시발점이 되어줄 만한 단서를 잡아야 했다.

수연이 추적에 할당한 인력들은 그런 단서를 통해 메드크럭스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고.

보고서에 첨부된 자료를 보건대, 코스모스 2379는 특정 시점부터 일정한 범위 이내에서만 공전각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이 일정한 범위는 필시 메드크럭스의 접근성을 위한 것일 터.

나는 자료를 보며 말했다.

“원지점(遠地點/Apogee) 영국 상공을 지나지는 않는구나.”

“그렇습니다. 정석적인 데이터 분석만으로는 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마스터 메드크럭스가 효율보다는 은밀성과 본인의 생존성을 더 중시한다는 뜻이겠지요. 위성의 숫자가 충분하다면 운용상의 효율은 다소 낮아도 무방하고 말입니다.”

“코스모스 2379의 형상을 확인할 방법은 없나? 메드크럭스가 손을 댔다면 형상이 원형과는 많이 달라졌을 텐데.”

“저도 고민해봤습니다만, 현재로선 관측수단이 마땅치 않습니다.”

“국안부 놈들에게 영국의 비밀 위성이 있다고 알려주면…… 흠, 소용없겠군.”

“예. 우주 망원경이라도 활용하지 않으면 무리입니다.”

광학 이미징(Optical Imaging)이 가능한 합성개구레이더(SAR) 탑재 군사위성의 운용고도는 높아봐야 1400km 수준이다. 그 높이에서 지상관측을 기준으로 해상도를 따지는데, 내가 아는 중국 최신예 첩보위성들의 해상도는 0.8미터 안팎이었다.

이런 관측수단을 가지고서 코스모스 2379의 형상을 확인하기란 무리다.

‘근지점(近地點/Perigee)에 가까워질 때라면 거리 문제는 해결이 되겠지만, 그땐 상대속도의 차이가 지나치게 클 거란 말이지.’

원지점은 지구에서 가장 멀어지는 지점이고, 근지점은 지구에 가장 근접하는 지점이다.

몰니야 궤도를 도는 위성들은 근지점을 지날 때 엄청난 가속을 선보인다. 궤도의 이름을 번개(몰니야/Молния)라고 명명한 이유가 바로 이 가속이었다. 원지점에 가까워질수록 느려지고, 근지점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진다.

이런 위성을 첩보위성으로 포착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또한 관측 방향에 변화를 준다 함은 곧 위성의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값비싼 첩보위성의 수명을 깎아먹는 짓이었다.

마지막으로, 표적의 궤도와 표적을 관측할 위성의 궤도가 시간에 맞게, 가급적 비슷한 방향으로 겹쳐져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거짓 대자들이 이렇게나 무리한 요구를 따를 리가 있나.

내가 요구를 전한다면 그들은 난감한 기색으로 이렇게 반문할 게 뻔하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게 영국의 비밀 군사위성이라면 외양 확인이 왜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기능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외양이든 기능이든, 우주에서의 관측보다는 지상에서의 첩보작전을 통해 입수해야 할 정보입니다. 어쨌든 영국의 위성이라면 그들이 자료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결국 구체적인 외양을 관측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다만 코스모스 2379의 과거 궤적들을 토대로 상호작용을 했거나 상호작용이 가능한 범위 내의 폐기위성 및 우주쓰레기들을 집중적으로 추적하는 건 가능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메드크럭스의 다른 흔적들을 감자를 캐내듯 줄줄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관측의 어려움이 일방적인 게 아니라는 점이다.

메드크럭스 쪽 역시 지상에 대한 직접적인 감시능력은 없거나 약하다고 보아야 합당하다.

영국의 우주 감시 프로그램들은 모두가 미국과 공동으로 추진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미국과의 오랜 동맹이 효력정지에 직면한 현재, 영국과 원탁은 지상에 대한 광학적 감시능력을 거의 상실해버린 처지였다.

그리고 영국이 원래부터 굴리던 스카이넷 위성들은 이미징 레이더가 탑재되어있지 않다.

메드크럭스가 강력한 지상감시 능력을 손에 넣으려면 폐기된 첩보위성을 복원하고 통제권을 강탈하여 지구 저궤도에 띄우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주요 우주개발 국가들의 감시에 걸릴 위험이 상당한 일이다. 지구 저궤도는 첩보위성들의 주 활동영역인 만큼 주요 국가들의 감시가 매우 치열하게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얼빠진 사고가 일어나곤 하지만…….’

감시에 그토록 노력을 기울이는데도 불구하고, 이 분야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조차 구 소련의 폐기위성과 자국의 현역 위성이 충돌하는 사고를 겪은 바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 대략 10년 전쯤의 일이었을 것이다.

지상에서의 10년은 제법 긴 시간이지만, 우주개발에서의 10년은 감시수단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엔 짧은 시간이다.

요컨대, 위성궤도 감시엔 지금도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원탁의 대마법사가 스스로를 과도한 위험에 노출시켰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저궤도에서 작업을 하려면 지상 발사 레이저의 유효사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하니까.

경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이 할배가 도망은 안 갔군요.”

“도망?”

“예. 저는 우주로 나갔다기에 아예 도망을 쳐버렸을 확률도 상당하다고 봤었거든요. 대마법사는 단신으로도 테라포밍이 가능한 존재잖습니까? 우주에서 장기간 마소의 흐름을 관측했다면 어느 방향으로 튀어야 좋을지도 알 수 있었을 거고요.”

나는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나부터가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던 사람이지 않은가.

경태는 코스모스 2379의 과거 기록들을 토대로 추정한 메드크럭스 소유 위성들의 예상 분포범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음, 우주에서의 교전을 상정하는 게 여러 가지 의미로 낯설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형님께서 공격에 나서신다고 치면, 메드크럭스가 채택할 대응 전략은 아무래도 점감요격의 닮은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

점감요격은 옛 일제 해군이 미국을 상대로 세웠던 방어계획이다. 내용은 일본이 장악한 영역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의 전력을 점진적으로 깎아내어 최종결전을 도모한다는 것.

일제의 계획은 망상에 불과했으나, 메드크럭스는 옛 일제보다는 점감요격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경태 녀석도 그 부분을 언급했다.

“우리 귀여운 응애 전함의 덩치에 「환시」를 이용한 스텔스의 조합은 완벽하지가 못하니까 말이죠. 조기감지에 성공한 메드크럭스는 형님께서 선택하실 경로상의 공간을 무조건 먼저 장악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실제로 싸워봐야 알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전장을 이탈할 기회쯤은 만들 수 있겠지요.”

메드크럭스가 전장을 이탈한다는 게 내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놈의 가속능력이 나와 거의 비등하거나 능가하는 수준일 경우, 나는 전략적 후퇴를 감행하는 사냥감을 무한정 쫓아갈 수가 없는 까닭이다.

‘올라간 시기가 시기인 만큼 놈에게 확장회로가 있진 않겠지만…….’

확장회로가 없더라도 놈이 나와 기동력을 겨룰 방법은 있다.

예컨대 추진기로 열핵 로켓(Nuclear Thermal Rocket)을 사용한다고 치면 회로 낭비가 전무한 초고속 기동이 가능할 것이다. 추진제는 운석에서 물이라도 포집해 쓰면 해결이고.

물론 미리 준비해둘 수 있는 추진제의 양이 유한하니, 추격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내게 따라잡힐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곱씹은 바, 내가 놈을 쫓아갈 수 있는 선엔 한계가 있다. 자칫하다간 화성이나 목성 거리를 넘어서까지 놈을 뒤쫓아야 할지도 모르는 노릇. 이는 내가 지구에서 최소 수 주 가량은 이탈해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로부터 파생될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다. 일시적으로 나를 무대에서 배제하는 게 원탁의 계획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결국 메드크럭스는 내가 단념할 때까지 술래잡기를 이어가다가 다시 원위치로 복귀하면 그만이었다. 무제한적인 추력 생성이 가능한 우주발사체의 강점이라 하겠다.

그 과정에서 그간 공들여 가공해놓았을 폐기위성들 태반을 포기해야 할 테지만, 최소한 메드크럭스 본인의 생존만큼은 확실하게 챙길 수 있는 방안이었다.

방대한 공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유격전을 이어가기만 해도, 놈은 런던과 원탁의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역할을 해내는 셈이다.

‘그나마 무제한 핵공격 걱정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메드크럭스의 핵무장은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폐기된 위성들과 우주발사체들은 원자력 전지(RTG)나 원자력 발열장치(RHU)를 최소 하나씩은 탑재하고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연료는 플루토늄-238.

플루토늄-238은 작은 임계질량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제조엔 부적합한 연료로 간주된다. 반감기가 87.7년에 불과하고, 그로 인해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너무 많은 열이 발생하여 폭탄의 유지관리가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탄두를 보관하는 장소가 우주라면 발열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탄두의 수량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폐기위성 및 우주발사체들의 연한을 고려할 때, 탄두 한 개 분량의 핵연료를 확보·재처리하려면 스무 개 가까운 원자력 전지를 모아 재활용해야 할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얽히는 와중에도, 전보다 조금이나마 구체화된 메드크럭스의 존재감은 내 가슴 속 근심의 총량을 약간은 덜어주는 느낌이었다.

가장 거대한 두려움은 역시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무지는 맞서 싸울 수가 없는 적이다. 나는 내 힘으로 죽일 수 있는 적을, 죽여서 잡아먹을 수 있는 인간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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