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47화 (547/561)

#53. 알라의 검 (10)

비록 병력동원능력이 급감한 탈레반이었으나, 운명을 건 최종결전엔 근 3만에 달하는 군대를 집중시켰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셋이었다.

첫째는 탈레반 정권의 정치·행정 중심지인 수도 카불과 북부동맹의 근거지인 판지시르 주(州)가 서로 지척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동부 산악회랑지대(와칸 회랑)에서 대치 중인 중국군이 진지구축과 요새화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

탈레반 지도부는 설령 중국군이 공세로 전환하더라도 그냥 무시한다는 각오로 병력을 긁어모았다. 중국군이 산악회랑을 다 점령한다 한들 후일 알라의 검이 나서면 해결될 문제라는 게 벼랑 끝에 몰린 탈레반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탈레반의 위기를 곧 투자기회로 여기는 일부 부족들의 존재.

이 시점에서 탈레반에게 전사들을 제공하는 부족들은, 그 행동양상이 대마불사를 믿는 투자자들의 행동과 매우 유사했다.

이제껏 벌어져온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권력투쟁과 세력경쟁의 역사를 보면, 거대 계파가 완전히 몰락해버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무장집단이 현지 부족들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특성상, 특정 계파의 완전한 소멸은 특정 지역 부족사회의 완전한 붕괴에 준하는 대사건인 까닭이다.

탈레반이 한때 공존이 불가능한 적으로 규정했던 학살자 헤크마티아르를 자기 세력으로 받아준 게 대표적인 예시였다.

하물며 탈레반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부터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버텨온 아프간 최대의 무장단체이지 않은가.

아프간 땅에서 탈레반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부족들은, 미군이 주둔하던 구 공화국 시절에 투자종목에 대한 믿음을 지켜내지 못했던 부족들 정도가 전부다. 경태의 표현에 따르면 ‘존버’라는 걸 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래서 투자자 마인드를 보유한 일부 부족 지도자들은, 자신의 오랜 경험에 의거하여, 현시점의 탈레반을 상장폐지 위험이 큰 관리종목이 아니라 시장에 만연한 공포로 인해 극도로 저평가된 가치주쯤으로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투자시장에서는 모두가 공포에 질렸을 때 저점을 잡으려는 자들이 큰 수익을 올리는 법.

탈레반의 병력구성과 그 출처를 파악한 경태는, 짐짓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어 웃음을 감추며 혀를 찼다.

“어이구…… 야수의 심장들 같으니. 심장은 야수인데 두뇌는 짐승이네. 이렇게 먼 땅에서 한국 개미들의 동료들을 보게 될 줄이야…….”

북부동맹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투자를 받아 5천의 병력을 방어에 투입했다. 탈레반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숫자지만, 내가 출장을 오기 전까지만 해도 실 전투병력 2천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간의 소모를 감안하면 이쪽도 한계치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다만 이게 북부동맹 지도부의 자의적인 결단은 아니었다.

내가 샤히디의 이름으로 관계를 정리하라고 요구했던 불건전한 동맹세력들이, 북부동맹 지도부를 압박하는 차원에서 대대적인 투자를 집행한 까닭이었다.

이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료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지원을 해주는데 너희는 우리를 버릴 수 있나? 그 결과를 감당할 자신은 있고? 우리를 단물만 삼키고 뱉는 짓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 당신들과 우리들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각성능력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대된 탈레반과의 격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던 일부 동맹세력들이 이제는 샤히디의 도덕적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로 변한 상황.

이는 당초 내가 구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구도로 짜인 판이었다.

처음부터 각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구축할 의도 따윈 없었으나, 같은 봉건질서를 구축하더라도 이런 판을 거치고 나면 질적으로 다른 장악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겠는가.

안다랍, 풀리 히사르, 디 살라 등, 판지시르 주(州) 내의 주요 접전지들마다 동시다발적인 교전이 벌어졌다.

탈레반은 압도적인 물량과 각성능력자 숫자를 토대로 출혈을 감수하는 소모전을 펼쳤다. 탈레반 판지시르 방면 사령관 굴람 라술은 휘하 전군을 전선으로 밀어붙이며 포효했다.

「이젠 정말로 더는 시간이 없다! 모든 전사들은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전투에 임해라! 저 지긋지긋한 놈들을 이번 일전으로 끝장내야 한다! 알라께서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실 것이다! 알라 후 아크바르!」

그러나 이렇게 포효하는 인간이 실상은 간접적인 경로로 내 지시를 받는 쥐새끼였으므로,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부에서 가해지는 사보타주 내지 정보유출은 탈레반 측이 잡은 승기를 번번이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탈레반 전사들은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하는 북부동맹 세력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북부동맹이 물러날 수 있는 후방지대가 착실하게 깎여나가고 있었으므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탈레반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터였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신자들의 총사령관 알림 샤히디가 고한다. 현시각부로, 점령지에 국한하여 적용해온 교전금지 조치의 시행범위를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확대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하는 모든 무장세력들은 일체의 교전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반복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하는 모든 무장세력들은 일체의 교전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이 지시에 불응하는 자들은, 앞서 발표한 포고령의 내용과 같이 나 알림 샤히디와 내 성전군의 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싸움을 끝낼 수 있으리라 여기던 탈레반 최고지도자 물라 아훈드자다에게, 이 새로운 포고는 너무도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었다.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이제야……! 알라의 검은 옥석을 가리기 위해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생존경쟁을 시키는 게 아니었나? 옥석이 알아서 가려지는 동안, 자신의 위용과 명예를 드높일 기회들을 만들어 민중의 선망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느냐고!」

바로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었다.

내게 최고지도회의 라흐바리 슈라의 내부사정을 생중계로 전해주던 쥐새끼들은, 내가 샤히디의 이름으로 내려둔 비밀스러운 지시에 따라, 머리를 쥐어뜯는 최고지도자 아훈드자다를 간교한 속삭임으로 충동질했다.

「이젠 정말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깝지 않습니까? 이대로 교전이 종료되면 우리의 권리가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통신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쯤은 그분의 군정청도 잘 알고 있을 사실입니다. 이를 핑계 삼아, 새 포고령을 전달하는 게 조금 늦었다고 치고 남은 공격을 속행하시지요.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에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카불에서 먼저 공개적으로 포고령 수용의사를 밝힌다면 눈속임이 되고도 남겠지요! 누가 보더라도 현지 사정상 교전중지 명령 전달이 지연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최고지도자께서 공개석상에 나서서 수용의사를 밝히시면 향후 지도자님의 무고함을 입증할 증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현지 지휘관들에게 혐의를 덮어씌우면 그만입니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만! 딱 한 시간 정도만 공격을 속행하라는 밀명을 내리시죠! 설마하니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아미르 샤히디의 성전군이 그 넓은 전장을 다 장악하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혼란스러운 전장을 파악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말입니다!」

「기왕 하는 김에 다른 지역에서도 명령 전달 지연에 의한 우발적 교전들을 무더기로 연출하는 건 어떻습니까? 군정청의 주의를 분산시킬 또 다른 연막이 되어줄 겁니다!」

「일부 교전들은 아예 북부동맹 측에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 잘난 구 공화국 특공연대와 불경스러운 각성능력자 톨리(특공연대 산하 중대를 일반 중대와 구분하여 부르는 명칭)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놈들은 통일된 복식이 없잖습니까?」

「옳은 말입니다. 우리끼리도 피아구분이 어려운 마당에 제3자인 아미르 샤히디의 성전군이 무슨 수로 단시간에 책임소재를 가리고 전장을 정리하겠습니까? 이제까지 성전군이 겪은 싸움들은 교전대상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었던 싸움들이지요. 하지만 지금 펼쳐지는 싸움들은 성질이 다릅니다. 성전군은 그들의 위대한 최고사령관에게 오명을 씌우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황파악에 신중을 기할 겁니다!」

이렇게 교언을 속삭이는 쥐새끼들은, 추후 이슬람식 법정에서 아훈드자다가 직접 교전 속행을 지시했다는 진술을 하기로 약속한 비열한 예비 증인들이었다.

사실 아훈드자다가 유혹에 넘어오지 않아도 큰 지장은 없다. 일찌감치 포섭해놓은 판지시르 방면군 사령관 굴람 라술과 또 별개로, 전장에 나가있는 현장 지휘관들 가운데 최고지도회의의 쥐새끼들과 같은 가계(家系)에 속한 배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아훈드자다의 명시적인 명령은 음모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일 뿐이었다. 다 그려놓은 화룡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점 하나를 찍는 일이라 하겠다.

‘꼴에 무슬림들이라고, 완전한 거짓 진술은 못 하겠다니.’

알라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하겠노라 맹세하는 종교법정에서 위증을 할 수는 없다는 게 비열한 예비 증인들의 입장이었다.

이런 고집을 무시하고서 위증을 강요하는 건 내 꼭두각시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쥐새끼들은 진정한 신자들의 총사령관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자기최면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기에, 신앙과 유리된 위증을 강요하여 꼭두각시의 이미지를 훼손했다간 쥐새끼들에 대한 장악력 그 자체가 흔들리는 수가 있었다.

그러니 아훈드자다의 명시적인 명령이 없을 경우, 추후 열릴 재판에선 정황증거로 유죄평결을 내리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래서 현장지휘관들 가운데 포함되어있는 배신자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고.

최고지도회의의 쥐새끼들이 아훈드자다에게 한 시간이면 성과를 볼 수 있으리라 한 것은, 거짓 정보를 기반으로 한 조언이었다.

아훈드자다가 받아보는 전장정보는 실제보다 더 유리한 양상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장정보 왜곡은 이전까지는 위험성이 너무 컸던 일이다. 아훈드자다의 장악력이 사후 사실 확인조차 불가능할 지경으로 떨어져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배를 갈아타는 쥐새끼들이 실시간으로 증식하고, 더는 뒤를 염려할 필요가 없는 싸움을 치르는 지금이라면 부담 없이 왜곡된 보고를 전달할 수 있다.

「좋다.」

함정에 빠진 아훈드자다는 자신의 운명을 확실하게 결정짓는 명령을 하달했다.

「나는 바로 회견을 열어 교전중지 포고령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겠다. 전선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한 시간 내에 결판을 내라는 지시를 전하도록. 만약 성전군과 대치하게 될 경우 곧바로 투항하되, 이후 협조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전장파악을 최대한 지연시켜라. 아예 포로를 잔뜩 안겨줘서 전력을 분산시키거나 발을 묶는 것도 괜찮겠지.」

비록 함정에 빠지긴 했으나, 아훈드자다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생존감각을 발휘하여 이렇게 강조했다.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다. 위장공격? 그딴 건 집어치워! 알라의 검이 일선의 하급 전사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강력하다. 한데 진실이 새어나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나? 우리가 스스로를 변호할 구실은 오로지 열악한 통신환경과 전장의 혼란으로 인한 명령전달 지연이 전부임을 명심하도록!」

이 사냥감은 일찍부터 최고지도회의 내부의 배신자들을 경계해왔다. 나는 쥐새끼들이 보내오는 녹취록과 보고들의 행간으로부터 그 예민한 경계심을 읽어낸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인간이 정전명령 위반을 지시한 건, 북부동맹의 숨통을 끊지 못하면 어차피 자신의 권력은 끝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터였다.

북부동맹을 배제하여 샤히디의 유일한 선택지, 현지 토착세력과의 연결이 긴밀한 통치 협력자로서 자리매김하지 못할 경우, 결국 아프간 땅을 인세의 지옥으로 만든 실정의 책임을 가장 크게 져야 할 사람이 바로 아훈드자다 자신이지 않은가. 이는 탈레반의 존속 여부와는 별개로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다.

독재자에게 권력은 제2의 생명과도 같다. 자신의 지위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독재자들은 또 얼마나 많이 존재하던가.

여기에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의 본성이 더해지면 아훈드자다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게 정상이다.

그래도 교토삼굴이라. 짐작건대, 아훈드자다는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갈 경우 사법거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공개재판에서 순순히 죄를 인정함으로써 샤히디의 권위를 드높여주고, 샤히디의 군정청에 아프가니스탄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할 또 하나의 명분을 주며, 자신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부족들을 샤히디에게 연결시켜준 후, 마지막으로 속전(贖錢)을 모아 바침으로써 생명과 최소한의 권익을 보장받는 일.

국민을 버리고 달아났던 구 공화국 최후의 대통령이 부정하게 쌓은 재산을 바치고서 목숨을 부지한 일은, 분명 아훈드자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겠지.

그 또한 내가 의도한 바이긴 하지만.

나는 가벼운 아쉬움을 느꼈다.

‘민간인 학살을 지시해주었으면 그 이상 완벽할 수가 없었을 텐데.’

교전이 계속된 책임을 북부동맹에 떠넘기기로 작정한다면, 아예 민간인 거주지를 공격해놓고 혐의를 북부동맹에 뒤집어씌우는 방안도 고려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아훈드자다가 그 정도까지 이성이 마비된 상태는 아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정전명령 위반 그 자체였으니, 본래 목표했던 바는 다 달성한 셈이다.

이제 내 앞엔 공들여 차린 밥상과도 같은 전장이 놓여있다.

이 전장에서 모든 교전세력을 압도적인 힘으로 짓이긴 것처럼 보이는 승리를 연출해놓으면, 그 전과는 아프간 전역을 완전히 제압할 누름돌이 되어줄 터.

프로파간다는 연출이 중요하다.

탈레반의 지방장악력과 병력동원력을 토막쳐놓은 상태에서 탈레반이 남은 전력을 모조리 집중시키도록 유도해놓았으므로, 세상은 내 꼭두각시가 탈레반 카불 정부를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무너뜨리는 극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내 꼭두각시의 브랜드 가치는 또 한 차례 극적으로 치솟아 오르겠지.

한편으로 이번 싸움에선 아주 많은 수의 각성능력자들을 포획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만족스러운 수량의 인간 발전기와 인간 보일러 재료들을 조달하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