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40화 (540/561)

#53. 알라의 검 (3)

야시르 대령이 빠른 투항을 결정한 원인 중 하나는 심각한 수준의 전력부족과 열악한 상황이었다.

작년 중순까지만 해도 쿤두즈 주(州)엔 탈레반 217군단의 모든 전력이 배치되어있었다. 말이 군단이지 실제로는 4개 여단이 전부였고, 그 여단들 또한 항시 전투준비가 되어있는 병력의 규모는 저마다 일개 연대 정도에 불과했으나, 다른 무장단체들의 사정은 이보다 더 좋지 않았으므로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하기엔 충분한 수준의 전력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 동부 산악회랑(와칸회랑)으로 진입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갈등이 가장 격화되었을 때 두 개 여단을 차출하여 전선으로 재배치하고 나니, 지역 장악력이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회를 잡은 IS 분파들이 거센 공세를 펼치며 탈레반의 영역을 좀먹어 들어왔고, 결정적인 전투에서 한 번 패배하고 나서는 탈레반의 소집명령에 응하지 않는 전사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전사들을 보내주는 부족들 입장에서, 탈레반은 상황의 유불리에 따라 얼마든지 갈아탈 수 있는 배에 불과했으니까. 개중엔 강압에 의해 병력을 내놓았던 부족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중국과의 군사갈등이 양측의 내부사정으로 소강상태에 이르고 나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갈등이 한창일 때 소모된 부대들이 있는 터라, 전선에서 병력을 빼내기가 여의치 않았던 까닭이다.

결국 쿤두즈 주에 잔류해있던 두 개 여단 중 하나는 완전히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오직 야시르 대령의 여단만이 한 개 대대 규모로 남아서 공항 인근을 위태롭게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오늘내일하던 차에 온 이슬람 세계가 인정하는 신자들의 총사령관이 몸소 행차하여 투항을 요구했으니, 백기를 들지 않고 버틸 재간이 있나.

「알라의 검께서 오셨다! 우리 모두 위대한 사령관을 기쁨으로 맞이하자!」

일찍부터 쥐새끼 노릇을 하던 이맘들이 거리로 나와 바람잡이 역할을 수행했다. 이맘으로서 지닌 인맥과 명성은 바람잡이 노릇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샤히디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통해 점령지에 적용할 포고령을 발표했다.

「높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지의 수호자이자 신자들의 총사령관인 나 알림 샤히디는 아프가니스탄 쿤두즈 주(州) 전역에 포고를 발하는 바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세계에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정착시키기 위한 성전의 첫걸음으로서,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신 승리와 불패의 영광에 빛나는 나의 군대는 오늘 쿤두즈 주에 대한 점령 작전을 개시한다. 이 작전의 범위는 향후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

「나는 점령지와 점령대상지역의 주민들에게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가 필요하다.」

「주민들은 내 목적이 오랜 기아와 폭정과 무질서에 마침표를 찍는 것임을 기억하고, 다음의 조항들을 숙지·준수해주기를 바란다.」

「첫째. 점령지의 통치권은 추후 하느님의 은총과 민주주의의 원칙,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총의에 의거하여 정당한 질서가 수립될 때까지 나 알림 샤히디가 행사한다.」

「둘째. 점령지의 공공기관 근로자들은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 본래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직무와 관련된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그 외의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자유로이 생업을 영위하라.」

「셋째. 점령지와 점령대상지역에선 자기방어를 제외한 어떠한 형태의 교전도 불허한다. 이를 위반하는 자들은 설령 내 군대를 공격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대변하는 이슬람 세계의 공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또한 이 시간 이후 내 허가를 득하지 아니한 무기휴대는 잠재적 적대행위에 해당하니 부디 명심하라. 무기를 소유한 믿는 자는 그게 누구든 나 알림 샤히디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점령지 내에 내 군대가 아닌 무장 세력은 존재할 수 없다. 믿는 자들이여, 무기를 반납하라. 지시를 이행하는 자들에겐 합당한 보상과 인정, 그리고 나 알림 샤히디의 안전보장이 주어질 것이다.」

「이 무장해제 명령은 다른 어떤 명령보다 우선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여러 사정상 부득이하게 무기 반납이 늦어지는 자들은, 먼저 위협을 당하기 전에는 절대로 무장상태에서 무리를 이루지 말라. 현저한 위협에 직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휴대한 채 무단으로 무리를 이루는 자들은 내 예고 없는 공격을 받을 것이다.」

「무기 반납에 관한 세부적인 시행규칙들은 추후 올라올 별도의 게시물을 참고하라.」

「넷째……」

이제껏 시민들의 소셜 미디어 이용을 마음대로 차단하거나 제한해왔던 탈레반이지만, 그런 그들도 샤히디의 계정에 대한 접근을 제한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만만찮게 가난한 예멘이 그러했듯,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스마트폰은 행정망과 사회 인프라의 공백을 채워주는 생활필수품으로 취급되었다. 통신망의 범위가 기기 보급률을 따라잡지 못하기는 해도, 아프간 사람 셋 중 하나는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다. 샤히디의 포고는 쿤두즈 주와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내 꼭두각시의 군세는 거침없는 무혈점령을 이어나갔다.

경태는 즐거워했다.

「큭큭. 꼴통 쉑들. 어어- 하면서 당하는 꼴들 좀 보십시오. 진짜 웃기네…….」

허가를 얻지 않은 무기휴대를 잠재적 적대행위로 규정한 것, 그리고 점령지 내에 샤히디의 군대가 아닌 무장 세력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은 IS 분파들의 의사결정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놈들은 협상을 시도하고자 우호적인 부족의 장로를 사자로 보내왔다.

「저희들이 무장과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사령관께 충성을 서약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저희는 당신의 종주권을 인정하오니, 저희의 땅은 곧 당신의 땅이오며, 다만 저희가 당신께 바친 땅에서 당신의 권위를 대행함을 공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협상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지정된 장소로의 집결 및 무장해제부터 요구했다. 사실상 무조건적인 투항을 요구한 것이다.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간 사자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겠지. 총부리에서 나오는 협상력을 포기할 수가 없지.’

야시르 대령의 탈레반 여단처럼 협상 없는 투항을 했다간, 기득권은커녕 최소한의 신변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수가 있다. IS 꼴통들의 인지부조화가 아무리 중증이라지만, 내 요구로부터 불길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건 뇌가 없어야 가능한 수준의 멍청함이다.

「위대한 사령관은 우리를 전사로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그가 예상보다 너무 빨리 왔다. 모두가 안일했던 거야. 저 높은 곳에 있는 자의 기준을 범인의 잣대로 헤아렸던 거지……. 우리는 더 일찍 자격을 갖춰놨어야 했어. 어느 누구도 우리의 능력과 권리를 부정하지 못할 지배영역을 구축해놨어야 했다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순순히 포고에 따르는 수밖에 없나? 그가 신자들의 총사령관이라고는 해도 우리를 이렇게까지 무시하는 건 부당한 일이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 속에서 샤히디 군세의 진격을 지켜보던 꼴통들은, 우선 시간부터 벌고 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IS 분파 내의 쥐새끼들은 이 결론조차도 거의 실시간으로 내게 물어다 바쳤다.

「일단 다른 지역이나 산악지대로 이동한다. 앞으로의 행동방침은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 철수가 여의치 않은 전사들은 믿을 수 있는 부족들의 거주지로 가서 무기를 숨기고 일반인 행세를 하고 있도록.」

「쿤두즈 외에 우리가 공세를 펼칠 만한 곳들을 물색해봐! 단기간에 점령할 수 있으면서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을 찾아야 한다!」

「싸워서 이기는 것과 통치에 성공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지. 이 땅엔 불순한 자들이 너무나 많아! 그러니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위대한 사령관에게 우리의 가치를 보여줄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올 것이다. 그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더라도 결국 우리를 필요로 하게 될 거야! 예멘을 보면 아는 일이지!」

일견 느긋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러한 판단은, 아프가니스탄의 일반적인 세력전 양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한쪽이 아무리 유리한 형세를 점해도, 불리한 쪽이 낮에는 산악지대로 들어갔다가 밤에만 나와서 싸우기 시작하면 어지간해서는 제압할 방법이 없다. 예멘보다 훨씬 험준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형은 현지인 게릴라들에게 엄청난 어드밴티지를 제공한다.

또한 어딘가에 무기를 숨겨놓고서 일반인 행세를 하면 외부인들로선 구분할 방법이 없기도 했다. 게릴라들이 숨은 마을은, 부족사회의 혈연과 지연에 더해 보복의 우려 때문에라도 쉽게 게릴라들을 고발하지 못한다.

샤히디가 자신들과 타협을 해야 할 날이 오리라는 꼴통들의 기대엔 의외로 상식적인 근거가 깔려있는 셈이다.

아프가니스탄이 공연히 제국의 무덤으로 악명을 떨쳐온 게 아니다. 이 땅에선 최전성기의 대영제국조차 숱한 치욕을 겪은 끝에 보호국을 세운 게 고작이었다.

‘당시의 대영제국에게 황금기의 눈을 가진 대마법사가 있었다면 사정이 많이 달랐겠지만.’

어떤 매복도, 어떤 기습과 은신도 무용지물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대영제국의 1·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원탁의 전신인 대영박물관 제0과조차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역사였다.

샤히디의 군세가 쿤두즈 시를 장악하고 카나바드 강에 걸린 다리를 확보할 무렵, 북쪽의 국경에서는 타지키스탄 육군의 정예 183독립정찰대대가 판즈 강의 다리를 건너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새로 출범한 카라아덱 조약기구의 깃발을 들고 있었으며, 조만간 UN으로부터 평화유지군 자격을 인정받을 예정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지 무장세력들은 위장공격을 가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극소 웜홀 통신으로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에 있는 수연과 대화를 나누었다. 통신거리는 대략 2백 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여 회로에 걸리는 부하가 가벼웠다.

「타지키스탄 대통령은 형님께서 제시하신 출구전략을 최종 수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게는 군 기지 임차와 경제지원에 관한 협약의 즉각적인 파기를 통고했고, 현재 타지키스탄 영내에 주둔 중인 모든 러시아군이 이달 말일까지 퇴거를 마치지 않을 경우 불법적인 군사적 점유로 간주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연합 야당 측과는 지역 자치 및 연립 정부 구성에 관한 협의가 진행되는 중이며-」

강대국과 인접한 약소국의 독재자들은, 좋으나 싫으나 강대국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게 된다.

타지키스탄의 독재자에겐 그 강대국이 바로 러시아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군사·경제·외교 분야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지금, 각성능력자들의 대두와 국제정세의 변화로 말미암아 불안정성이 증가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타지키스탄 대통령은 생존을 보장해줄 새로운 스폰서를 찾아야 하는 처지였다.

나는 알림 샤히디의 이름으로 타지키스탄 대통령에게 매력적인 출구전략을 제시했다. 지금까지 저질러온 모든 부정과 범죄에 대한 면책을 조건으로, 내 제안을 받아들인 대통령은 연립정권의 과도기를 거쳐 권좌에서 내려올 예정이었다.

이렇게 하면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지겠으나,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의 손해가 거의 없게 된다. 타지키스탄의 경제는 대통령과 그의 족벌이 완전히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모든 부정과 범죄에 대한 면책이 이루어지면 그 지배력도 고스란히 남는 까닭이다.

여기에 타지키스탄 서부는 대통령의 골수 지지층이 과반이므로 대통령의 정당은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보존할 것이고, 이 같은 기반 위에서 대통령의 자식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권력 승계를 도모할 수 있었다.

‘강력한 경제 지배력으로 민주정부의 경제실패를 연출하면 끝이지. 굳이 의도적으로 연출할 것도 없이, 지배력을 유지하기만 해도 실패는 정해진 결과나 마찬가지이니.’

이런 유형의 실패국가들이 다 그러하듯, 국민들은 경제실패의 원흉을 찾기보다 새로 출범한 정부의 미숙함을 성토하는 쪽을 더 많이 택할 것이다. 그다음은 “차라리 독재정권 시절이 나았다.”라는 말이 나올 차례.

즉 확실한 안전보장과 권리보장이 이루어진다면, 내가 제시한 출구전략은 대통령 입장에선 자식들을 위해 은퇴 시점을 조금 앞당기는 정도의 일일 뿐이다.

심지어 대통령 그 자신이 권좌로 복귀한다는 시나리오도 실현 가능성이 있다. 대놓고 복귀하지 않더라도, 자식들의 배후에서 상왕 노릇을 하면 그만인 일.

물론 미래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나, 러시아의 몰락으로 당장의 권좌가 불안해진 대통령 입장에선 고를 가치가 충분한 선택지였다.

어쨌든 알라의 검에게 맞선다는 선택지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내가 파견한 영업사원들은 수연의 감독하에 이런 시나리오들을 가지고 독재자를 설득했고, 그 설득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에 해외 비밀계좌에 입금된 거액의 뇌물이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뇌물의 액수는 ‘설마하니 이런 거액을 투자하면서 버리는 패로 쓰진 않겠지’ 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나는 타지키스탄의 독재자에게 아무런 유감도 없는 사람이다. 그가 ‘내 개새끼’가 되어주기만 한다면 굳이 번거롭게 몰락시킬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내 개새끼들에게 양질의 엑시트 컨설팅을 제공할 의향이 있다.

대군을 육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단기간에 구축할 유일한 길이다.

「이걸로 타지키스탄은 확실히 내 카드가 된 셈이군.」

「예. 쿠크사로이(Куксарой/우즈베키스탄 대통령궁)도 이번 일을 매우 관심 깊게 지켜보는 중입니다. 그들도 장래 동일한 솔루션을 필요로 하게 될지 모르는 입장들이니 말입니다.」

러시아가 가꿔놓은 텃밭은 구조가 다 비슷하여 취약점도 거의 대동소이했다. 고로 타지키스탄 대통령의 성공적인 엑시트는 인접 국가의 독재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수연은 북부동맹과의 협상 진행상황에 대해서도 보고를 올렸다.

북부동맹이 회유 대상이라고는 하나, 그 회유는 북부동맹의 간절한 구원요청을 내가 받아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이상적이다.

북부동맹의 세력은 약소하다.

그럼에도 이들을 우선적인 회유 대상으로 고른 것은, 북부동맹 지도부의 세속적이고 개혁적이며 민주적인 성향이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샤히디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는 까닭이다.

구 공화국이 멸망을 맞이한 이래, 북부동맹이 펼쳐온 비장한 항전이 서구세계의 동정과 지지를 얻어온 탓도 있고.

현재 아부 알 까심의 회유를 받은 탈레반 국방차관 대행 겸 판지시르 방면 사령관 굴람 라술은 북부동맹의 영역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는 중이었다.

탈레반 지도부는 북부동맹 세력에 대하여 강렬한 경쟁의식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오늘 쿤두즈 공항을 강습하여 야시르 대령의 투항을 받아낸 것은 놈들의 위기감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특히, 현 최고지도자인 물라 아훈드자다의 위기감을.

아훈드자다 본인의 속내를 입수할 순 없었으되, 그의 심복들이 떠드는 말들은 쥐새끼들의 귀를 통해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시간이 없다. 알라의 검은 시간을 주지 않고 우리를 몰아붙일 셈이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알아서 조각나도록 유도한 후, 본보기 삼을 놈들은 쳐내고 흡수할 놈들은 흡수하여 위신과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거지. 우리의 초대 최고지도자,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께서 일찍이 다른 군벌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한 심복의 말처럼, 지금의 상황은 탈레반에게 강한 기시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이 순간 우리가 참고해야 할 것은 헤크마티아르의 생존전략이다.」

헤크마티아르란 아프간의 유력 군벌들 가운데 하나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를 말했다.

비교대상이 드물 만큼 생존능력이 우수한 이 박쥐새끼는, 그때그때 대세인 세력에게 붙어 온갖 종류의 전쟁범죄를 자행했는데, 탈레반은 처음엔 헤크마티아르 세력을 심판하는 징벌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헤크마티아르 세력 전체가 심판을 당하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의로운 싸움’으로 위신을 챙기긴 했지만, 헤크마티아르와 아예 끝장을 보는 건 최대이익을 달성하는 길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위신을 세울 만큼 세운 탈레반은 헤크마티아르의 충성서약을 받아주었고, 학살자 헤크마티아르는 지금도 탈레반 내에서 제법 세력이 있는 파벌의 수장으로 남아있다. 탈레반 주류로부터 사실상 외부인 취급을 당하는 감이 있긴 해도 최소한 무시를 당하지는 않는다.

「다가오는 새로운 질서 아래에서 우리 탈레반이 최대다수의 생존과 최대다수의 최대이익을 누리려면, 물라 아훈드자다께서 탈레반 전체를 대변하여 알라의 검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단단히 뭉치면 뭉칠수록 본보기로 처단당하는 자들이 줄고, 바쳐야 할 이권도 최소화될 거란 말이지.」

「그러기 위해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경쟁자가 저 북부동맹 놈들이야. 우리가 저놈들을 신속히 궤멸시킨다면, 알라의 검이 가늠하는 위신과 이익의 저울은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 것이다.」

「우리는 헤크마티아르보다는 훨씬 더 잘 해내야만 해. 헤크마티아르는 패배자로서 우리에게 합류했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신의 죄를 알아서 바로잡은 바람직한 봉신으로서 알라의 검의 휘하에 들어가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여, 굴람 라술은 분열된 지도부와 서로 다른 동아줄을 잡은 음모가들, 그리고 최고지도자의 기묘한 의견일치 속에 판지시르 방면 대공세를 전개할 수 있었다.

차후 북부동맹을 구원해줄 때, 내가 중재를 하든 박살을 내든 하여 해소해줄 극적인 위기의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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