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전쟁의 기반 (19)
내 꿈자리가 사나워지는 빈도는 원탁을 겨냥한 투쟁의 성과에 반비례하여 감소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그날, 스승새끼의 유해가 지박령처럼 박혀있는 지긋지긋한 악몽에도 작별을 고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끝이 다가오고 있노라고.
그러나 오늘의 악몽에 나타난 스승새끼의 유해는 이를 부정했다.
「다가오는 건 끝이 아니다. 너와 나의 영원이지.」
유해는 뻥 뚫린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순조롭게 승천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네 승리는 너를 불멸의 권좌로 이끌 것이며, 나는 네 안에 영원토록 거할 것이다.」
익숙한 불쾌감 속에서 무시로 일관하자, 내가 잠에서 깨는 순간까지, 스승새끼의 유해는 내 무의식으로부터 훔친 관점과 제게 남은 찌꺼기 같은 지성을 교묘하게 뒤섞어 떠들어댔다. 굳이 내 목소리를 흉내내가면서.
「너는 알 것이다. 착취는 인간의 본성이며, 사람은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임을.」
「그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다. 생산과 착취와 유통과 분배의 과정들이 문명의 발전에 비례하여 세분화되고 복잡해져서, 누구도 자신이 잡아먹는 인간을 직시할 수 없는 체계가 완성되어있을 따름이지.」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잡아먹히면서 살고 있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남보다 더 많이 잡아먹고 남보다 더 적게 잡아먹히는 자들은 있을지언정, 문명화된 식인의 연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고하고 결백하다고 믿는 식인종들의 세상이다. 이 무고함과 결백함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완성한 최고의 상품일 것이다.」
「삶과 식인의 동질성을 인지하는 것은, 하찮은 도덕 따위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기본적인 역량이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자의 식인능력은 인지한 자의 식인능력을 능가하기 어렵다.」
「그래서 식인능력은 생존능력과 같다. 최대의 식인능력을 가진 자가 곧 최대의 생존능력을 가진 자다.」
「절대적인 불가침 속의 평온을 바라는가? 그렇다면 너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다 잡아먹을 수 있는 식인능력을 손에 넣어야 한다.」
「모두 가져야 한다. 네가 승리의 날 이후 필연적으로 나아가게 될 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말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건 끝이 아니다. 너와 나의 영원이지.」
나는 찐득한 불쾌감 속에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겨우 세 시간 남짓 눈을 붙였을 뿐이었지만,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개골 안쪽을 가득 채웠던 찐득거림은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야 겨우 사라졌다. 요 몇 달간 꾸었던 악몽들 중에선 가장 불쾌감이 강했던 꿈이었다.
회의실로 이동하자 갓 나온 대선결과 보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강중성이가 대통령이 되었나.”
최종 개표결과를 보니 고작 0.19% 차이로 이긴 신승(辛勝)이었다. 1위인 강중성이 21.51%, 2위인 이두승이 21.32%의 표를 얻었다. 그 아래로는 공허경영 7.77%를 위시하여 잡다한 후보들의 득표율이 주르륵 이어졌다.
중앙아시아에서도 긍정적인 보고들이 올라왔다. 현지 위구르 디아스포라들이 속속 조직화되어 위구르 통합 망명정부의 하위조직으로 편입되는 중이었으며, 중앙아시아 각국은 디아스포라 그룹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보호해주었다.
내가 디아스포라 그룹들에게 공급하는 풍부한 활동·사업자금은 각국 정부가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게끔 촉진하는 유인요소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구심점으로 삼은 건 키르기스스탄의 자생적 디아스포라 조직인 「이티파크(Иттипак)」였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이티파크의 의용군 결성 및 군수물자 밀수마저도 눈감아주기로 결정했다.
군수물자는 카자흐스탄을 거쳐 위구르 자치구 내 반군 거점인 알타이 산맥까지 흘러갔다. 카자흐스탄 민주정부 진영과 위구르 자치구 반군에게 동시에 물자를 대어주는 선이었다.
알림 샤히디의 위명을 듣고 궐기한 이래 이제야 처음으로 직접적인 지원을 받게 된 위구르 자치구 알타이 반군은 감격에 겨워 다시금 충성을 맹세했다.
「성지의 수호자이시며 신자들의 총사령관이신 위구르 민족의 초인 알림 샤히디시여. 저희는 당신의 영도 아래 온 위구르 땅이 광복을 맞이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당신의 위업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나, 당신의 가엾은 동포들이 이 추운 험산에서 당신에 대한 충성으로 하나 되어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기억해주십시오.」
알타이 위구르 반군과 동맹을 맺은 몽골 나이람달 반군 또한 이쪽으로 호의적인 메시지를 전해왔다. 나이람달 반군의 배후에 몽골정부의 의지가 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몽골정부가 비공식적인 친선의 뜻을 전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침식사를 하기 전 수연에게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수연은 희미하게나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벌써 완성하셨습니까?”
“완성인지 아닌지는 테스트를 해봐야 알 일이지. 착용해봐라.”
지시를 받은 수연이 차분한 움직임으로 목걸이를 착용했다. 나는 수연의 마력을 받은 목걸이의 좌표 유도기능이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한 후 해당 좌표로 극소 웜홀을 개방했다. 거리가 극히 가까웠으므로 회로에 걸리는 부하는 몹시 가벼운 수준이었다.
이윽고 나는 최초의 사념(思念)을 전송했다.
「들리나? 들린다면 일단은 육성으로 대답해라.」
“들립니다.”
「감명도(感明度)는?」
“감명도…….”
수연은 시선을 살짝 기울이며 답했다.
“이걸 일반 무전에 비교하는 게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무전을 기준으로는 감도와 명도 모두 우수합니다. 최적의 통신 환경에서 인이어 리시버로 받는 무전만큼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군요.”
「그런가. 신호가 너무 강해서 괴롭지는 않고?」
“괜찮습니다.”
신경신호 변환 및 전달 과정에서 수연이 가지고 있는 신경계와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신호 누락이나 노이즈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최소한 수신시에는 추가적인 조율을 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하긴. 내가 이 녀석의 신경계를 관찰해온 세월이 몇 년인데.’
그 긴 관찰에도 불구하고 속내를 읽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이 한심스럽지만, 그래도 오감의 전달·처리경로와 발화(發話)에 앞서 뇌신경이 활성화되는 지점 등은 내 눈에 인이 박여있다시피 하다. 나는 이 녀석을 읽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수연이 이 정도라면 경태 몫의 아티팩트 제작도 크게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경험을 축적한 다음에는 다른 인원들에게 맞추기도 수월해지겠지.
처음엔 전말을 몰라 어리둥절 지켜보던 경태 녀석은, 오래지 않아 상황을 이해하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거 혹시 텔레파시나 뭐 그런 겁니까?”
“비슷하다. 극소 웜홀을 통한 마법적 통신장비지.”
“오오! 천리전음 혜광심어(千里傳音 慧光心語)! 이것이야말로 하루하루 절대지경을 향해 나아가는 진(眞) 천마의 고금제일 전음술!”
경태가 괴이한 소리를 하며 짜자자작 물개박수를 치자, 사람보다 먼저 밥을 먹고 있던 춘식이도 눈치를 보다가 덩달아 두 발로 서서 박수를 쳤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대는 춘식이의 입에선 씹어 삼키다 만 한우 등심이 덜렁거렸다.
경태는 간식을 기다리는 춘식이처럼 안면 가득 기대감을 띄웠다.
“형님. 혹시 제 것도 만들어주실 겁니까?”
“당연하지.”
“오오! 다른 간부들이나 마녀 여왕님의 몫도요?”
“시간이 나는 대로, 우선순위에 따라서.”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게 떠올랐습니다.”
“뭐지?”
“메리옘 양에게 주실 아티팩트는 꼭 개목걸이 형태로 제작하셔야 한다는 거죠.”
“…….”
나는 떨떠름한 감정을 담아 경태를 응시했다. 시선을 받은 경태는 목에 차지 않을 땐 팔뚝에 차고 있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특정 상황에서는 피아식별띠를 대신하는 표지로서도 가치가 있으리라고.
수연이 내게 처음으로 사념을 전송하기까지는 10분 남짓한 시간이 추가로 소요되었다. 나는 수연이 목걸이를 착용한 상태에서 한 손을 목걸이 위에 두고, 다른 한 손은 수연의 뒷목을 감싼 채로 목걸이와 신경계의 동기화를 조율했다.
마력 운용법을 습득한 수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능숙하게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연의 신경계엔 보기 드물게 순수한 기쁨의 색채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꾸준히 회로를 개선해준 결과, 수연과 경태를 위시한 최측근들의 마력운용능력은 거의 마법사에 준하는 수준까지 향상되어 있었다.
비록 「태내성형」을 구사하는 그레이스 수준의 정밀가공까진 불가능할지언정, 조립식 아기들과 마도서 봉쇄수도원을 활용한 「세례」는 과거에 비해 현격히 향상된 마력회로 추가가공을 가능케 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는 중국 국방과기공업국이 국가항천국의 이름으로 축적해온 우주 감시 데이터의 분석 보고서를 열람했다.
수연은 조직 내에 메드크럭스 추적만을 전담하는 부서를 새로이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 해당 부서에서 올라온 중간보고서는 새로운 추적방침을 적용하여 작성된 첫 번째 보고서였다.
새로운 추적방침이란, 우주 쓰레기들의 움직임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을 의미했다.
나는 보고서를 읽는 내내 답답함을 느꼈다. 이는 내가 느끼는 답답함은 실무자들이 부대끼는 막막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과기공업국에 내가 뭘 찾는지 알려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중국 빨갱이들을 상대로 알파 크루시스 아크에 대한 정보를 작은 단서라도 공유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찾는지 알려줄 수가 없으니, 남는 선택지는 날 것 그대로의 데이터를 받아서 직접 분석해보는 것뿐이다.
마스터 메드크럭스가 우주에서 무언가 일을 꾸민다 치면, 무언가를 만들 땐 우주쓰레기를 가져다 재료로 쓰는 수밖에 없다. 메드크럭스에게 제공되었을 영국 우주국(UKSA)과 우주사령부(UKSC)의 기술지원 및 자문은 우주쓰레기들을 굉장히 유용하고 가치 있는 자원들로 바꿔놓았을 터였다.
고로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발사된 우주발사체를 추적하는 방식으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지금, 우주쓰레기를 추적하여 간접적으로 메드크럭스를 찾아내는 건 사실상 내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우주쓰레기에 대한 추적도 쉬운 게 아니라는 점.
일단 숫자가 많아도 지나치게 많다.
그리고 몰니야 궤도나 툰드라 궤도를 도는 옛 소련의 폐기 위성 및 무인 우주선들은, 궤도의 장축(長軸)이 지나치게 길어 정상적인 추적이 불가능했다. 가장 근접하는 지점조차 지구로부터 2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있으니, 이를 역추적으로 더듬어나가는 건 중국 국가항천국이 아니라 미국 우주감시네트워크의 데이터를 가져와도 어려울 일이었다.
몰니야 궤도와 툰드라 궤도엔 소련이 우주전쟁을 위해 발사했던 군사위성들이 다수 존재한다. 개중엔 「파괴위성(이스트레비텔 스푸트니크)」 계획에 따라 원자로와 무기를 탑재한 위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위성들은, 전문가들의 기술자문을 받는 대마법사에게 이보다 더 유용할 수가 없는 자원들이다.
조용한 가운데 조금 전의 춘식이처럼 눈알을 굴리던 경태가 손을 들었다.
“혹시 저를 빼고 누님과 대화 중이신 건 아니죠?”
나는 보고서에 시선을 그대로 두고서 답했다.
“아니. 메드크럭스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어 소련의 유산에 관한 우려를 입에 담자, 경태는 어깨를 으쓱이며 과장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빨갱이들은 도움이 안 됩니다. 죽은 빨갱이조차도 좋은 빨갱이가 아니에요.”
식사를 마친 후엔 나와 수연 사이의 극소 웜홀 통신이 어느 정도의 통달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확인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검은 항공재킷 안쪽으로 목걸이를 넣은 수연은, 자신의 제트 바이크에 올라 호위 팀을 동반하여 푸른 바다 위로 날아올랐다. 내가 한계를 느낄 때까지 직선으로 비행하다가 돌아오는 간단한 실험 방식이었다.
예상대로, 수연과의 통신을 유지하는 건 페르 아스페라의 경우보다 부담이 훨씬 심한 일이었다. 3천 7백 킬로미터 지점에서도 내 회로 처리능력의 3~4푼 가량을 잡아먹는 게 고작이었던 페르 아스페라의 경우와 달리, 수연과의 연결은 겨우 백이십 킬로미터를 넘어서는 시점에서 비슷한 처리능력을 잡아먹었다.
극소 웜홀을 유지하는 것과 통신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 별개의 영역이기는 했다. 통신을 단념하고 웜홀 연결의 유지만을 생각한다면, 웜홀의 크기를 미시적인 규모까지 축소함으로써 리소스 소모를 극단적으로 절약할 수 있었다.
‘어쨌든…… 앞으로는 어디로 출장을 가더라도 일하기가 편해지겠어.’
회로에 가해지는 부하의 증가 추세를 실시간으로 관찰해본 결과, 내가 대마법사로서 최대의 힘을 발휘할 때의 웜홀 통신 한계거리는 대략 4천 킬로미터 안팎이 될 것 같았다.
거리에 비례하여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나, 전파 방수(傍受) 우려가 전무한 장거리 통신 능력은 내게 단순한 편의를 넘어선 전략적 유연성을 제공해줄 힘이었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중앙아시아 출장은 이 힘을 실용적으로 사용해볼 첫 번째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