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전쟁의 기반 (18)
나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스워졌다.
‘이게 뭐라고 시간을 들였는지.’
내가 쳐놓은 동그라미 속의 이름은 망명자 그레이스-1441이 내게 요구한 것이었다.
「라일라는 당신이 만든 조직을 보면 당신이라는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 말대로 했고, 깨달았죠. 라일라가 내게 말해주었던 것처럼, 당신에게 의탁하면 우리도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하게 마음을 정했어요. 나는 앞으로도 줄곧 당신의 편에 설 거예요. 다른 자매들을 설득하는 일 역시 최선을 다해 돕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라일라가 그러했듯, 내게도 당신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세요. 부탁드려요.」
나는 스스로 정할 것을 권했으나, 1441은 완고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 이름이나 대충 불러주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었다.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주는 걸 피하고자 나는 약간의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했고, 1441은 기대감으로 심박이 상승한 상태에서 밝게 웃으며 기꺼이 기다리겠노라 답했다.
동그라미 안엔 델리시아(Delysia)라는 이름이 들어있었다. 라틴어로 기쁨을 뜻하는 단어가 어원이다. 내 조직에서 무엇을 경험하든 항상 기뻐하는 모습이었기에 이런 이름을 골랐다. 성은 라일라와 동일하게 쓰겠다고 했으니 따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제 적당한 시간이 흘렀으니 이름을 전해도 무방할 것이다.
화상통화를 연결하여 이름과 의미를 말해주자, 1441은 기분 좋게 새 이름을 되뇌었다.
「델리시아 마르, 델리시아 마르……. 고마워요! 1441보다 훨씬 더 나은 느낌이에요! 당신에게 받은 이름처럼, 내 미래에 기쁨의 바다가 열려있기를 바라요!」
그러고서 짐짓 소리를 낮춰 하는 말이 이러했다.
「이름을 받은 기념이라기엔 좀 그렇긴 한데, 어쨌든 비밀을 한 가지 알려드릴게요! 이게 당신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비밀?”
「예. 비밀!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숨겨왔던 동반승천 카르텔과 영국 정부의 동향이죠. 어머니께선 이 정보를 당신에게 공유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어요.」
“그게 뭐지?”
내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묻자, 델리시아의 눈이 부드러운 느낌의 호선을 그렸다.
「동반승천 카르텔과 영국 정부는 도쿄 사태 이후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마스터 크로우허스트를, 즉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당신이 아비터를 강탈한 후 사용한 특별한 마법들, 그중에서도 특히 공간왜곡 마법이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을 거예요. ‘저것은 황금기의 눈을 가진 대마법사의 소행이다.’라는 확신을.」
공간을 굴절시키는 이적을 가장 처음 선보인 존재는 전율하는 거인이다. 그리고 황금기의 눈을 가진 대마법사는 자연각성체로부터 술식의 원천을 습득하는 일이 가능하다.
영국정부와 동반승천 카르텔, 그리고 원탁의 대마법사들은 내가 인류사 최초의 워프 항해를 강행하는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한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내 손에 죽은 마스터 콜리어가 그러했듯이.
“당연히 찾고 있었겠지.”
나는 가볍게 끄덕였다.
“그 두 세력이 완전히 이반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서로에게 최소한의 협조조차 하지 않는다고?”
「에이. 서두르지 말아요.」
델리시아가 입술을 구부린 채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뻔한 거면 굳이 비밀로 할 이유가 없잖아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동반승천 카르텔의 세력조차 원탁과 완전히 별개로 움직인다는 점이에요. 심지어 원탁의 사냥개들을 의도적으로 속이고 따돌리기까지 하면서요. 원래부터 원탁을 견제해왔던 영국 정부야 그렇다 쳐도, 동반승천 카르텔까지 그러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 말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였다. 나 역시 한 번쯤 상상은 해보았던 시나리오이기도 하고.
화상 속의 델리시아가 긴 검지를 세워 보였다.
「자, 문제예요! 영국 정부와 동반승천 카르텔이 보기에, 현재의 원탁과 마스터 크로우허스트 중에서 진정으로 영국인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는 쪽은 어느 쪽일까요? 어느 쪽이 더 대영제국의 귀족이자 ‘진정한 인류’에 가까운 위엄을 보여주고 있죠?」
마스터 크로우허스트는 영국의 귀족이다.
여러모로 곤경에 처해있는 영국정부의 입장에선, 할 수만 있다면 크로우허스트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원탁과의 균형을 재조정하고 싶을 것이다.
크로우허스트가 동료를 살해하고 황금기의 눈을 훔쳐 달아난 일은 그냥 원탁의 내부갈등으로 간주해버리면 그만이다. 영국정부나 동반승천 카르텔의 관점에선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지금까지는 원탁에 잔류한 대마법사들의 정통성을 인정해줬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래야만 한다는 법 같은 건 없다.
영국정부의 가치판단 기준은 단 하나. 「무엇이 영국의 국익과 미래를 위한 최선이냐?」는 것이니까.
현실적인 최선은 원탁과 크로우허스트가 영국정부의 중재 하에 양측이 적대적 공존에 들어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양측의 완전한 화해는 영국정부에겐 오히려 해로운 일이다.
차선은 크로우허스트와의 협력을 통해 원탁에 대한 협상력을 강화하여, 원탁의 늙은이들로부터 새로운 양보를 받아내는 것이다.
최선과 차선을 이루지 못해도 좋다. 나와의 협상창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국정부에게 많은 선택지를 열어줄 열쇠이므로.
‘하지만 실제 접촉은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크지.’
원탁의 본부 소재지와 대마법사들의 잠재력을 고려하면, 영국정부는 그레이터 런던 전역을 인질로 잡힌 신세라고 봐도 무방하다.
원탁의 대마법사들은 마법이 돌아온 직후부터 정부 측의 결정적인 이반을 방지할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테고.
이는 내가 원탁의 본부 이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부가 가하는 압력을 버티며 그런 대책을 마련하려면 본부를 런던에 두어야 이롭다.
만약 원탁의 본부가 런던 바깥에 있는 상황에서 원탁과 정부의 관계가 돌이키지 못할 만큼 악화된다고 치자. 원탁의 위협이 심대하며 즉각적인 배제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정부는 다소의 희생을 각오한 채 원탁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고려들과는 별개로, 원탁의 완고한 늙은이들에겐 제국의 심장부에 자신들의 자리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고집이 있기도 하다.
동반승천 카르텔은 이런 부분에서 영국정부보다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나와 대화하던 델리시아는 그 자유로움을 간명한 말에 담아냈다.
「그 인간들은 동반승천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영국이 어찌 되든 알 바 아닌 자들이잖아요? 승천의 계단을 제공하는 게 반드시 원탁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걸요.」
물론 그렇다.
그러나 원탁이 아무리 열세에 몰려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카르텔의 입장에서 크로우허스트가 무조건 더 나은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기본적인 신용의 문제가 있다.
내 스승새끼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동료를 살해한 자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차별화된 정체성과 우월감을 공유하며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함께해온 오랜 동료를.
그렇게나 냉혹한 인간이 동반승천의 약속이라고 제대로 지킨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하다못해 원탁은 여러 명의 마스터들이 대등하게 힘을 나눠 가진 채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기라도 하다. 그러나 원탁이 몰락하고 크로우허스트가 세계 유일의 대마법사로 남게 되면, 크로우허스트에게 집중되는 결정권은 누구도 견제가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할 터.
사실상 크로우허스트- 즉 내가 카르텔의 운명을 좌우하는 주인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나는 현재 그레이스와 손을 잡고 있잖은가.
저들이 나를 크로우허스트라 믿는다면 이 동맹이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다고 보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맹이 반드시 파탄이 나리라 기대할 만큼 멍청하고 낙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저들은 또한 원탁의 저력을 잘 알고 있기도 하다.
비록 지금 나와 그레이스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른 조건들을 다 배제하고서 마법적인 역량의 총합만을 놓고 보면 원탁은 여전히 나와 그레이스의 연합을 능가한다. 마법은 다른 모든 유불리를 무시하는 변수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힘이었다.
결론적으로, 나에 대한 동반승천 카르텔의 탐색과 접촉시도는 그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둔다는 정도로만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상황이 정말로 안 좋게 돌아갈 경우,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배를 갈아탈 방편을 마련해놔야겠다는 마음가짐이겠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인가.’
솔직히 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에 공감이 갔다. 어떻게든 일신의 안위와 생활을 보장받을 길만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원탁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테니까. 그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공상이었을 뿐.
“델리시아. 혹시 접촉할 방법도 알고 있나?”
질문을 받은 델리시아는 약간의 어색함을 담아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이름을 불리는 게 아직은 좀 낯서네요. 기분은 좋은데. 귀가 간질간질해요. 앞으로는 이게 진짜 내 이름이다, 라고 생각을 하니까 가명을 쓸 때하고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곧 적응될 거다. 라일라도 그랬으니까.”
「그렇겠죠. 아무튼 질문에 답하자면…… 내가 아는 건 욱스브릿지 백작이 영국 밖으로 나왔다는 것 정도예요.」
욱스브릿지 백작이라면 원탁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국정부 측의 인사다. 일전에 임마누일이 영국 노예상들과의 기이한 거래를 회상하며 입에 담았던 이름이기도 하고.
임마누일의 진술을 토대로 상황을 유추해보면, 당시 욱스브릿지 백작은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원탁의 하수인들에게 정부를 대표하여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지원을 끊어버리겠노라고.
그럼에도 결국 HMS 아비터와 HMS 트라운서가 완성된 걸 보면 당시의 갈등은 어찌어찌 봉합되었던 모양이다.
이해는 간다. 완료된 노예거래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대영제국의 기수를 자칭하던 로더필드의 전사는 영국정부에게도 심대한 위기감을 선사했을 테니.
로더필드는 그럴 만한 강적이었다. 나는 산 채로 구워지며 살을 쥐어뜯기던 고통과 살기 위해 씹어 삼켰던 대마법사 고기의 맛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동반승천 카르텔 측의 접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고?”
「미안해요.」
“미안할 것까지야. 지금까지 알려준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정보였다.”
「앞으로 더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더 많은 자매들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세요.」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금 늦었지만, 확실하게 내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의 사람…… 후후.」
“오늘은 이만 끊지. 쉬어라.”
「네! 웨인도 잘 쉬어요!」
통화를 종료한 나는 방금 들은 내용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적진의 극심한 내부분열이 내게 좋은 예감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정부와 동반승천 카르텔의 수작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믿을 놈들이 하나도 없다’는 분노와 극한의 위기감에 사로잡힌 원탁의 대마법사들이 정말 상상을 초월한 미친 짓을 벌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아는 대마법사들의 사고방식이라면, 놈들이 미칠 것 같은 분노 속에서 도달할 결론은 하나다.
최후의 순간, 대마법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가진 바 진리의 힘이 전부라고.
사실 그게 하나의 해법이기는 하다. 어디까지나 능력이 뒷받침될 때의 이야기이지만. 압도적인 힘은 모든 역경을 분쇄할 수 있다.
황금기의 정수를 부분적으로 되살리겠다는 정신 나간 계획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또 얼마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외장형 술식 연산장치로 거듭난 황금기의 정수가 과연 어떤 성능을 발휘할지에 대해서도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무지는 언제나 근심의 근원이었다.
우주에 있다는 메드크럭스에게도, 런던에서 황금기의 정수를 주물럭댄다는 3인의 마스터들에게도 무지의 베일이 드리워있기는 매한가지.
위안이 되는 건 저쪽 또한 무지의 늪 속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대고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분열 속에서 서로에 대한 원망을 키워나간 끝에 자멸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사람은 힘들 때 본성이 드러난다고들 하지 않나. 나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역경을 맞이한 원탁이 알아서 좀 망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내가 품고서도 참으로 부질없게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의 나약함을 자각하는 순간들이 싫었다.
머리에서 비생산적인 생각들을 몰아내려 애쓰며, 나는 인터폰으로 수연을 호출했다. 개인정비 시간임에도 근무시의 복장으로 나타난 수연은, 윤혜원의 영육을 갈아 만든 목걸이를 달라는 말을 듣고는 제 가슴께를 내려다보며 다이아몬드를 감싸 쥐었다.
“이걸…… 말씀이십니까?”
“그래.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보려고 한다. 가능하다면 본래의 기능도 강화하고.”
“새로운 기능이라 하심은……?”
“극소 웜홀의 좌표설정 및 개방된 웜홀의 고정, 그리고 소유자에 대한 신경신호 전달…… 쉽게 말해, 장거리 통신 기능을 부여해보려는 거다. 조직의 두 번째 사령탑인 너는 내가 가장 먼저 연결을 확보해야 할 사람이지. 내 구상대로 물건이 완성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만.”
“……그렇군요.”
수연은 조금 느린 동작으로 목걸이를 풀어 내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다이아몬드의 무게감이 사라진 자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새 기능이 성공적으로 부여되면, 언제 어디서나 형님과 대화가 가능한 것입니까?”
“그럴 리가. 지금으로선 너와 나 사이의 연결을 항시 통신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가 부담스럽다.”
나는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내 회로의 처리능력은 한정되어있고, 사람이 아닌 대상까지 포함하면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연결대상은 페르 아스페라니까. 통달거리에도 적잖은 제약이 있다고 봐야지.”
“그렇습니까.”
“생각해둔 극복 방안이 있긴 한데,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먼저 통신기능 부여부터 숙달하고 나서 고민할 일이야.”
페르 아스페라와의 연결은 대부분의 부담을 조립식 아기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
그러나 수연과의 연결은 그렇지가 않다. 수연이 목걸이와 주고받을 것은 마법적으로 변환된 신경신호가 전부이며, 극소 웜홀의 유지에 따르는 부하(負荷)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몫이다.
이 부하마저 영적 연결을 통해 페르 아스페라에게 떠넘기기란 불가능했다. 술식의 원리상 공간적으로 웜홀이 열려있는 지점에서 부하를 받아줘야 하는 까닭이다. 즉, 페르 아스페라에게 떠넘길 수 있는 부하는 페르 아스페라와 연결된 웜홀의 부하뿐이다.
비록 영적 연결이 되어있다 한들, 조립식 아기들의 회로가 물리적으로 까마득히 먼 바다의 물결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극소 웜홀을 통한 접속이 이런 물리적 한계까지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다면, 나는 영적 연결을 통해 확장회로의 힘을 자유자재로 끌어다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마도서 「버금가는 고결함의 봉쇄수도원」에 대하여 페르 아스페라와 동일한 방식으로 연결을 설정해놓으면 우회적인 보완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수연이 말했다.
“다른 지시사항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봐라.”
수연은 묵례를 올리고서 선실을 나갔다.
목걸이를 가공하는 동안에는 집중이 필요했으므로, 심해에서 정속 항해 중이던 페르 아스페라는 휴면 상태로 전환했다.
공중전함이 해구로 내려가 정지하자, 이제껏 함께 헤엄치던 혹등고래들이 주변을 맴돌며 이런저런 말들을 걸어왔다. 내가 침묵으로 일관하니 고래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번역 프로그램이 뱉어내는 거친 문장들을 매끄럽게 다듬으면 이런 내용이었다.
「얘 자나 봐. 전에도 이러는 거 봤어.」
「그럼 우리는 얘 위쪽에서 자자. 위험한 것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목걸이에 웜홀 연결 기능을 추가하는 작업은 이른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후 기존에 있던 염동방어 기능을 강화하고, 웜홀이 연결되어있을 때에 한하여 착용자의 바이탈 사인들을 원격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기능까지 부여하고 나니 묵직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목걸이를 탁자 서랍에 넣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날의 자각몽은 아흐레 만에 꾸는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