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전쟁의 기반 (13)
타지키스탄 동부 고산지대, 고르노-바다흐샨 자치주는 사실 그 자체로는 매력적인 포섭 대상이 못되었다.
일단 인구가 적다. 한국의 60%쯤 되는 면적에 고작 23만 언저리가 살고 있을 뿐이니까. 적은 인구는 곧 낮은 각성능력자 동원능력을 의미한다.
경제력도 몹시 하찮은 수준이다. 타지키스탄은 부유함과 거리가 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유독 더 가난한 국가이고, 동부 고산지대는 그 타지키스탄 내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1인당 연 소득은 고작 7백 달러 선에 머무른다.
고로 이 자치주는 알림 샤히디의 세력권으로 편입해봐야 실질적인 힘이 되지는 않는 곳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타지크 연합 야당이 샤히디의 종속 권유를 받고 감격을 금치 못한 이유의 큰 지분을 차지했다. 현지 세력들 역시 자신들의 비루함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메리옘이 무슬림들의 관계망을 통해 수집한 고르노-바다흐샨 현지의 분위기는 기쁨과 얼떨떨함이 절반씩 섞인 느낌에 가까웠다.
「성지의 수호자 알림 샤히디가? 우리를 선택했다고? 대체 왜? 좋기는 한데, 진짜로 왜? 우리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그러나 수연은 내게 이 지역을 중앙아시아 장악의 첫 번째 주춧돌로 삼으라 조언했다.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앞서 프로파간다용 모범사례를 만들어 놓고자 하면, 적은 인구와 빈약한 경제력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다.
예컨대 23만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1년 벌이를 일시불로 뿌려주는 무식한 방법을 취한다 쳐도, 들어가는 예산은 겨우 1억 6천만 달러 남짓에 불과하다. 살포하는 자금의 규모가 제한적이고, 또 거의 모든 종류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관계로, 돈지랄에 따르는 경제적 부작용은 크지 않을 것이었다.
그에 반해 주민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실로 천지가 개벽을 맞이한 수준일 터.
한마디로 어떻게 돈을 쓰든 가성비가 극히 우수하게 나올 만한 곳이다.
수연은 말했다.
“고르노-바다흐샨은 연쇄작용을 일으킬 첫 번째 블록으로서 가치가 높습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인접 국가들과의 지리적·혈통적 연결이 강하지요. 형님께서 알림 샤히디의 이름으로 이 지역에 후의를 베푸신다면, 선전효과는 국경을 넘어 빠르게 확산될 겁니다.”
타지크인들의 거주지역은 비단 타지키스탄 한 나라에만 국한되어있지 않다. 이웃한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도 각기 천만 이상의 인구가 분포한다.
“해당 지역의 프로파간다를 성공적으로 이행하고 나면,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의 민심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23만의 환희를 마중물로 삼아, 민족정체성을 공유하는 국경 너머의 천백만 인구가 형님의…… 아니, 알림 샤히디의 질서를 갈망하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그다음은 천백만의 갈망을 새로운 마중물로 이용할 차례다. 천백만의 갈망을 지렛대로 써서 아프가니스탄에 할거한 주요 세력들 가운데 하나,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NRF)」의 충성서약을 받아내는 것이다.
「북부동맹」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NRF는 최고사령관 아흐마드 마수드와 대통령 대행 암룰라 살레가 타지크인이라는 점, 그리고 탈레반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다는 점에서 포섭이 용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내가 꾀하는 바는 어디까지나 이슬람 전통의 봉건적인 종속관계일 뿐 직접적인 지배가 아니므로, 북부동맹 입장에선 내가 내미는 손길을 거부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타지키스탄 중앙 정부도 이 결정을 반길 것이다. 세속주의를 내세우는 타지키스탄의 독재자는 예전부터 일관성 있게 탈레반을 적대해왔으니까. 아프가니스탄 내 타지크족 공동체에 대한 영향력 확대까지 보장해주면 더더욱 갈등의 여지가 없겠지.
수연은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타지키스탄 대통령의 역할을 만들어주자고 제안했다.
“자리를 만들기는 쉽습니다. 북부동맹의 외교창구가 두샨베(타지키스탄의 수도)에 있잖습니까. 어디까지나 아프가니스탄 관련 문제로 만나는 것이니, 연합 야당 측도 반발할 명분이 마땅치 않겠지요. 그 자리에서 물밑 협상을 통해 타지키스탄 양대 진영의 타협점을 도출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 물밑 협상에서 독재자는 야당 연합의 민주화 및 종교자유화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자유화란 이슬람 원리주의 진영에 대한 탄압 중지를 의미했다.
목줄이 풀릴 이슬람 원리주의 진영의 광기는 샤히디의 위명으로 통제가 가능하다.
나는 생각했다.
‘통제를 넘어 부분적인 치료까지도 가능할지 모르지.’
새로운 무기를 손에 넣었으면 성능을 확인해봐야 한다. 종교적으로 민감한 논쟁이 벌어지는 여러 사회 현안들에 대하여 알림 샤히디의 이름으로 성명을 내고 반응을 살펴본 바, 가장 완고한 법학자들과 꼴통 집단들조차도 알림 샤히디의 성명이 나올 때마다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하거나 수정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의 교육권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메리옘으로 하여금 내 의지를 담화로 빚어내도록 지시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높으신 알라의 은총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의 현상과 섭리에 대한 탐구는 곧 알라의 뜻에 대한 탐구와도 같다.」
「우리 이슬람 세계가 인류 문명의 과학사적 발전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영광스러운 시대들을 떠올려보라. 온 세상이 우리 무슬림들에게서 지혜를 구해갔던 빛나는 시간들을. 그것은 모두 조물주의 뜻을 궁구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뒤따른 영광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리 무슬림들에겐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장 앞장서서 이끌어야 할 신성한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부끄러워해야만 한다.」
「같은 맥락에서, 알라의 뜻을 배우고 익히는 데엔 결코 남녀의 차이가 있어선 안 된다.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교육기회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여성들을 알라의 뜻으로부터 밀어내는 죄악일지라. 설마하니, 예언자께서 믿는 여성들이 이교도와 불신자와 무신론자들보다도 진리를 모르는 세상을 바라셨겠는가?」
「남성들과 같이, 여성들에게도 먼저 경전을 가르친 후 경전 바깥의 만물을 탐구하게 하자. 알라의 거룩하신 뜻이 오로지 경전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을 인간의 잣대로 한정짓는 신성모독이다. 나 알림 샤히디가 사슬의 돔의 재판관으로서 신앙의 형제들에게 권하노니, 부디 이러한 죄악을 저지르지 말라.」
「신께서 정하신 진리의 아름다움은 수학에도 있고 물리학에도 있으며 화학과 공학과 생물학에도 마찬가지로 내재되어 있다. 까마득한 시간의 시원(始原)으로부터 저 먼 우주의 끝까지 펼쳐져있는 것이 전능하신 알라의 은총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들이 모두 평등하게 알라의 뜻을 배울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해야 한다.」
예루살렘 바위의 돔에 붙어있는 사슬의 돔은 알림 샤히디가 재판관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었으며, 이슬람 세계의 재판관은 법학자의 이음동의어와도 같다. 이는 일찍이 메리옘이 내게 귀띔해주었던 바였다.
명분은 누가 휘두르느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는 무기다. 알라의 검 알림 샤히디에게 주어진 사슬의 돔은 어떤 법학자도 감히 정면에서는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만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내가 샤히디의 이름으로 내보낸 성명은 엄청난 규모의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이슬람 세계 각지에서 즉각적인 여성교육권 개혁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반대하는 자들은 많은 수의 이슬람 국가에서 거의 배교자에 준하는 취급을 받았다.
「여성 교육에 반대하다니! 신성모독이다! 저놈을 돌로 쳐 죽여라!」
「우리는 알라의 검의 뜻을 따른다! 무슬리마들이여, 함께 세상을 탐구하자! 널리 배우고 깊게 익힘으로써 믿는 자들의 문명적 사명을 쟁취하자!」
샤히디의 무슬림 팬보이(Fanboy)들이 보여주는 광적인 모습은 문화대혁명 당시의 홍위병들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숫자가 수억에 달한다는 점에서도 유사성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걸 태우고 부술 뿐이었던 문화대혁명과는 방향성이 완전히 반대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는 샤히디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와 푸념 사이의 어딘가에 해당하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내가 수년에 걸쳐 애쓴 것보다 그대가 내놓는 선언 한 번이 더 큰 효과를 보이는구려.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바요. 이로써 우리 왕실의 기반은 한층 더 굳건해질 것이오.」
사우디 왕세자는 자신의 권력을 쥔 이래 자국의 여성 인권 진흥을 위해 힘써왔다. 왕세자 자신이 평등과 개혁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속주의적 정책들이 이슬람 극단주의 진영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기 때문이었다.
종교적 극단주의는 독재자에겐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극단주의가 심화될수록 독재자가 여론을 통제하기 힘들어지고, 종교지도자들이 정치지도자의 권력을 넘보게 되는 까닭이다. 이란처럼 아예 제정일치의 독재가 이루어지거나, 독재자가 처음부터 종교계를 확실하게 장악한 경우 정도가 예외일 따름.
타지키스탄의 독재자는 예외에 해당하지 않았다.
고로 내가 그간 샤히디를 조종해 취해온 세속주의적 개혁 포지션들은 타지키스탄 대통령이 종교탄압 완화에 동의하기 쉽게 만들어줄 요소들이었다. 극단주의 진영을 샤히디가 제어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을 테니까.
한편으로 이는 탈레반 세력의 두려움이기도 했다.
앞서 예멘에서 내가 샤히디의 이름으로 창설했던 「감독의회」는, 그 명칭만으로도 탈레반에 대적하는 북부동맹에 대한 친애와 존중의 표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감독의회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북부동맹의 아버지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으니까. 그의 아들이 바로 현 북부동맹의 총사령관인 아흐마드 마수드였다.
게다가 탈레반은 세속주의의 반대항이라고 해도 좋을 꼴통 집단이다.
이들의 보수성은 교리에 합치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자기방어가 불가능했다. 이란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온 이슬람 세계가 공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성지의 수호자를 상대로는, 외교적·종교적으로 명분 싸움을 거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라는 의미였다.
단 한 번도 통일된 세력이었던 적이 없었던 탈레반은 벌써부터 분열의 기미를 보이는 중이었다. 성지의 수호자에 대한 경의와 알라의 검을 상대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탈레반 연합을 구성하는 부족들의 집단 이반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추가로, 내 수중엔 탈레반의 분열을 가속화시킬 또 하나의 카드가 존재했다.
나는 다라-아담-켈의 비공식적인 지배자들 가운데 하나, ‘아름다움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넣었다.
“오랜만입니다, 아부 알 까심.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교활한 파슈툰족 늙은이는 기쁜 웃음을 섞어 인사를 받았다.
「오, 친애하는 벗 오마르 알 바시르. 그대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었지.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소이다.」
이 늙은이는 알 까심의 수장인 동시에 파슈툰의 원로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영향력은 일찍이 파슈툰족의 대회합 로야 지르가(لويه جرګه) 소집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증명된 바였다.
파슈툰족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탈레반의 핵심 세력이나, 파슈툰족 역시도 수많은 부족들의 연합체이기는 마찬가지다.
모함메드자이, 야히야-켈, 파옌다-켈, 샤가시, 포팔리자이, 알리자이, 누르자이, 타라키자이, 셰라니, 로하니, 우트만자이, 오라크자이, 유수프자이, 카탁과 만수드, 아프리드 등등.
지역과 혈통에 따라 쪼개지고 또 쪼개지는 수많은 파슈툰 부족들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를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이익집단들이었다. 당장 지금도 파슈툰 내에서 기득권을 차지한 부족들과 그렇지 못한 부족들이 나뉘어 있고, 각각의 성향에도 적잖은 차이가 존재하는 마당이다.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파슈툰 인구를 합치면 5천만이 넘어가는데, 그 거대한 지방분권적 집단의 이해관계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을 리가 있나.
고로 아부 알 까심에게 내 의뢰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것이었다. 전 파슈툰족을 통틀어 손에 꼽는 권력자로 떠오를 기회가.
“내 용건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요.”
「물론이오. 우리 파슈툰족의 내부에서 알라의 검을 따르는 부족들을 조직화해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거 아니오? 대세가 굳어진 다음엔 로야 지르가를 소집해서 전 파슈툰 족의 충성서약을 주도하면 되겠지. 필요할 때마다 정보도 유출시켜 주고.」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이 일에 대한 별도의 대가는 불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미 얻은 것이 많은 데다, 이번 일로 새롭게 얻을 것도 많으니까요.”
「그렇기는 하지.」
아부 알 까심은 껄껄대며 웃었다.
「그대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거야 처음부터 알아봤소만, 설마하니 성지의 수호자가 될 사람에게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일 줄은 생각도 못 하였소. 그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알림 샤히디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그대의 선구안과 사업가로서의 역량에 경의를 표하는 바요. 당신은 비록 불신자이지만, 그럼에도 당신에겐 알라의 인도가 있었던 게 틀림없소.」
“약속의 이행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이슬람 성전연합의 사자가 그쪽으로 갈 겁니다. 연락 책임자들도 함께 갈 테니 잘 대우해주십시오.”
「하하. 신께서 직조하시는 운명의 오묘함이란. 이제는 과거와 입장이 반대가 되었구려?」
성전연합의 사자란 당연히 마무르를 의미했다. 그리고 연락 책임자들엔 메리옘 그룹과 「사막의 사람들」 부족 구성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 희귀언어 사용자들을 활용한 이중 암호체계는 자동화된 데이터 수집 감시를 회피하는 데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다. 이는 실체가 없는 미국 내 테러 모의 정보를 통신망에 흘려보는 방식으로 여러 차례 검증해본 바였다.
특히 메리옘이 지속적으로 보강하고 있는 위구르어 활용 암호체계의 경우, 위구르 지역에서 쓰던 고전 아랍어 방언과 왜곡된 이슬람 신비주의 전통의 상징들까지 임의로 섞어놓은 통에 부외자의 해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부 알 까심은 흔쾌히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알겠소. 내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다.」
마무르는 성전연합의 본부로 돌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마무르에게 붙여놓은 메리옘의 동생들은 자신들이 염탐한 성전연합 본부의 분위기를 보고서에 담아 보냈다.
보고서의 내용 중에선 우연히 엿들었다는 어느 지하디스트의 탄식이 인상적이었다.
「마무르가 본부에 입성했어! 저 유능한 미친놈이 알라의 검을 등에 업고 복귀했다고! 기존의 지도부는 저 괴물을 더 이상 제어하지 못할 거야……. 이제 우리 연합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난 도저히 상상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