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전쟁의 기반 (12)
협박장 전달 이후의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협박장의 내용에 따라 연락을 취한 끝에 내 부하들을 마주하게 된 강중성은, 간과 쓸개를 다 내어줄 기세로 내 부하들을 설득하려 들었다. 이러지 말고,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어떠하냐고.
「선생님들. 선생님들께서 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시는지는 내 모르겠습니다만, 이 강중성이를 대선가도에서 떨어트려서 이득을 볼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은 분명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뢰인…… 아니면 고용주? 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아무튼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대가를 받기로 했을 겁니다. 맞습니까?」
내 부하들은 어디 한번 말이나 해보라는 느낌으로 조용히 사냥감을 응시했다. 강중성은 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약속했든, 나 강중성이는 여러분에게 그 이상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바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후광과 권력을 이용해 이익을 얻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대통령의 자리에 누가 오르는가보다는, 대통령이 될 사람이 어디까지 내어줄 각오가 되어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내 부하들은 계속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고, 애가 닳은 강중성이는 근 한 시간에 걸쳐 호응 없는 열변을 이어갔다. 유세현장에서 유권자들을 상대로 공약과 비전을 떠들어댈 때보다 훨씬 더 뜨겁고 절박한 필사의 구애행위였다.
현장을 모니터링하던 경태는 와- 하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혼자서 잘도 저렇게까지 떠들어대는군요. 꼴에 정치인이라고 뭔가 다르긴 다릅니다.”
나는 오디오로 들어오는 대화만 대강 걸러 들으며 내 할 일을 하다가, 강중성이가 더는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 현장의 부하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선생님들……. 제 말씀을 듣고 계시긴 한 겁니까?」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땀에 젖은 강중성이 갈라진 목소리로 하는 질문에, 현장 책임자를 맡은 부하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다른 부하들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윗사람에게 보고를 하러 가는 듯한 장면 연출이었다.
그렇게 초조한 기다림과 갈증 속에서 방치되어있던 강중성은, 내 부하들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자 한숨을 토하며 자세를 허물어뜨렸다.
노예계약이 체결된 건 같은 날 늦은 밤의 일이었다. 자던 중에 호출을 받아 허겁지겁 튀어나온 강중성이는 내 부하들이 지장을 찍으라고 내민 문서들을 보고 순간적으로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나중에라도 공개가 되면 대통령이고 뭐고 정치생명이 끝장날 내용들을 담고 있는 문서들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알겠습니다. 하지요!」
안주머니에 넣어둔 부적을 매만지며 눈을 감고 호흡을 다스린 끝에, 사냥감은 내가 펼쳐놓은 그물 속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졌다. 문서에 지장을 찍고 서명을 하는 손길엔 더 이상 떨림이 남아있지 않았다. 주술적 미신이 선사한 운명적 확신이었다.
현장 책임자는 서명을 끝낸 호구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이건……?」
「받으십시오. 저희가 모시는 회장님이십니다.」
강중성은 마른침을 삼킨 후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하는 긴장된 음성이 전파를 타고 내가 든 수화기로 넘어왔다. 나는 쉽게 잡은 사냥감에게 적당한 인사를 건네었다.
“반갑소, 강중성 후보. 내가 설마 당신과 한배를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상일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그, 반갑습니다.」
강중성이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어왔다.
「……실례지만,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지?」
“일단은 권 회장이라고 부르시오.”
「아, 예.」
“다른 말을 하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용단에 찬사를 보내고 싶구려. 참 대단하시오. 방금 지장을 찍으신 그 문서, 차라리 대선후보를 자진사퇴하는 편이 더 나을 내용이었는데 말이오.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지.”
「……칭찬 감사합니다.」
“꼬아서 듣지는 마시구려.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그리고 말씀은 좀 더 편하게 하셔도 좋소. 조만간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실 분께서 그렇게 저자세를 취하시면 안 되지. 나는 당신의 열정이 마음에 들었소.”
사실 이 상황은 다분히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리 노예계약에 서명했다지만, 협박자들이 단 하루 만에 배를 갈아타기로 결정하다니.
그러나 무당이 손가락을 잘라 천기를 뒤틀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결과일 터였다.
강중성이는 내가 하는 말을 작은 부분도 흘려듣지 않았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방법이 있습니까?」
“말씀 편히 하시라니까. 그리고, 물론이오. 우선은 다른 후보들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다른 후보들의 약점?」
“그렇소. 내가 치명적인 정보들을 수집해온 대상은 당신 하나만이 아니니까. 다만 한 번에 다 날려버리면 누가 보더라도 수상해 보일 터라,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서 우리 강중성 후보님이 불행한 첫 번째가 되었을 따름이지.”
강중성이를 청와대로 밀어 올리는 방안을 처음 검토할 당시만 해도, 나는 그레이스의 조력을 배제한 채로 가능성을 점쳤었다. 굳이 드러내거나 공유할 이유가 없는 꼭두각시라 여겼던 까닭이다.
그러나 계획을 진지하게 추진해보고자 마음먹은 시점에선 이 얼간이가 이미 김연화의 신딸에게 정신적인 기생을 당한 상태였으므로, 공유를 하느냐 마느냐는 더 이상 선택이 가능한 사항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김연화의 다른 신딸과 신아들들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레이스는 김연화 본인에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도록 지시해놓았다. ‘맥아더 선녀’의 명성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수준. 미국의 대선이라면 모를까, 한국의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건 김연화라는 꼭두각시의 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대선주자들의 현실적인 초빙 1순위는 김연화가 아니라 김연화의 신자녀들이었고, 그렇게 침투한 신자녀들은 숙주의 의사결정에 관여하거나 선거캠프의 내부정보를 유출시키는 훌륭한 스파이로 기능할 수 있었다.
고로 다른 후보들의 치명적인 정보를 쥐고 있다는 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후 채 보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한국의 대선판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격변을 맞이하게 되었다.
「저 박무상은 오늘부로 후보직에서 사퇴하고 강중성 후보의 당선을 위해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깊게 숙고한 끝에 내린 대승적인 결단이니, 지금까지 저를 믿고 지지해주신 국민 여러분들께서는 우리 강중성 후보에게 힘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제게 거셨던 기대는 제가 강중성 후보의 정부에서 실현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런 전조도 보이지 않았던 후보직 사퇴와 단일화 선언이 줄을 이으면서, 강중성은 고만고만하던 대선주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속도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작 2.4% 언저리에 머무르던 지지율이 10%를 돌파하는 데 걸린 시일은 겨우 엿새에 불과했다.
사퇴와 단일화를 거부하는 후보들은 강중성의 비위 폭로에 직격탄을 맞아 주저앉았다. 혹은 내부로부터의 폭로로 인해 몰락하거나.
광신자들의 내부폭로는 증거의 유무 따위에 구애받지 않았다. 증거가 있든 없든 일단 폭로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어차피 대선 기간은 진실을 밝혀내기엔 너무 짧고, 강중성이 대통령이 되고 나면 재판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으니까.
처음 70인에 달했던 대선주자들이 3분의 2 이하로 압축된 시점에서, 최고의 수혜자인 강중성은 수혜자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정계와 유권자들의 주목을 새롭게 받았다.
강중성은 분에 넘치는 행운에 황홀해했다.
「이건 정말이지…… 마법 같은 일이로군요.」
마법이라면 마법이다. 대마법사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연출해내는 사회적인 층위의 마법. 나는 새로운 꼭두각시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을 위한 마법은 이제 갓 막을 올렸을 뿐이라고.
내 조언에 따라 강중성이는 통합을 꾀하는 중재자로서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번 대선은 국가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경쟁의 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많아도 지나치게 많은 대선주자들이 저마다 극단적인 정책 포지셔닝을 취한 채 국론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지요. 국민의 이익보다 자신의 승리를 우선시하는 근시안적인 행태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경쟁구도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결국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정상적인 국정운영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기반 위에서 출범한 정부에게 무슨 동력이 있어 국가의 하나 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 강중성이는 이제부터 통합과 중재를 통한 승리를 추구하려 합니다. 서로 상이한 의견들을 가지고 있으나 우국(憂國)의 마음만큼은 하나인 다른 대선주자분들과 대승적인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그분들의 의견을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수렴함으로써 통합된 국정운영의 기반을 마련할 것입니다…….」
대선주자들의 극단적인 자기PR에 피로감을 느끼던 유권자들은 강중성의 선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세계적으로 주술한류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는 하나, 그걸 가지고 자부심을 우려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상식적인 사고가 가능한 유권자들은 관심을 받는 데 목숨을 건 듯한 정치인들의 광대놀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부터 주술한류를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던 인구도 절대수를 따지면 결코 작지 않았다.
경태가 알려주기로, 요즘 세대는 이걸 ‘뇌절’이라고 부른다는 모양이었다.
“아, 우리 형님 뇌절 모르시는구나! 1절 2절로 끝내면 좋을 거를 갖다가 지겹도록 되풀이하면서 지 혼자 유쾌한 줄 아는 꼴을 요즘 말로 뇌절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말한 경태는 어깨를 으쓱이며 사설을 덧붙였다.
“평소엔 젊은 세대를 한심해하는 눈으로 보면서 혀를 차던 꼰대들이, 그저 피상적인 이해만 가지고 「요즘 애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면서? 나도 하면 젊은 친구들한테 친근해 보이겠지?」 이러면 그건 백 퍼센트 유행이 지난 뇌절이 되는 법이죠.”
요즘 세대의 표현 치고는 이해하기가 퍽 쉬웠다.
연일 증가하는 강중성의 정치적인 질량엔 그에 비례하는 무형의 중력이 작용했다. 강중성이 속한 당에서 이제라도 후보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이다.
비록 당 주류와 갈등을 빚긴 했을지라도, 강중성이는 일단은 여당에 속한 대선후보였다. 설령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들, 논의가 진행되는 것만으로도 콘크리트 지지층을 끌어들이는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기존의 판세에 진절머리를 내던 당 지지자들은 신선한 이미지를 선보인 강중성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어있으니.
내 계산으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대로 받으면서 형식적으로는 단일화에 실패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좋았다. 여당을 완전히 대표하게 되어버리면 기껏 만들어놓은 신선한 이미지에 여당의 낡은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마니까.
강중성이는 주한 일본 대사를 만나 무기 수출에 관한 내용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 역시 내가 깔아준 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는 일본 대사와 무기 수출에 관한 건설적인 논의를 나눴습니다. 아, 여기서 말하는 무기 수출은 물론 한국 무기를 일본으로 수출하는 걸 뜻합니다.」
「저 강중성이는 국방의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건대, 일본엔 공격용 전차가 없단 말이죠. 없어요, 정말로.」
「이건 절대로 일본의 전차를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10식과 90식 모두 훌륭한 전차들입니다. 다만 최신형인 10식은 일본의 환경에 최적화된 방어용 전차이고, 90식은 10식에 밀려 오랫동안 성능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해외원정에 투입하기는 적절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단 말이에요.」
「더욱 큰 문제는 유지보수를 포함한 군수지원능력의 결핍입니다. 길고 극심한 경제위기는 이런 쪽으로도 일본에 상처를 입혔거든요. 전차에 대한 군수지원은 보존의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분야였지요. 유지보수와 보급의 핵심 고리가 되어 주어야 할 기업들이 부도가 나거나 너덜너덜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이겁니다.」
「예전이었다면 일본의 경제력으로 생산라인의 빠른 전환과 확충이 가능했겠습니다만, 지금의 일본은 그렇게 돈을 쓰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러니 일본이 영국과의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빠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적합한 공격용 전차를 수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이 새로운 전차를 개발하거나 개량사업을 시작하는 건 경제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는 선택이고, 군수지원을 일정 부분 외주화할 필요도 있으니까요.」
「저는 이런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말씀을 드렸고, 대사님은 확실히 긍정적으로 검토할 가치가 있다는 답변을 주셨지요.」
이 내용을 일본 총리가 확인해주자 강중성의 주가는 또다시 고점을 갱신했다. 어디까지나 검토 단계에 불과할지언정, 대선후보가 유세단계에서 실적으로 정무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경우는 전례가 드물었던 까닭이다.
경쟁 후보들 중 일부는 강중성의 급격한 부상에 맞서 극단적인 PR을 강화했다.
「국방은 저 역시 전문가입니다! 국방의 근간이 무엇입니까? 바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입니다! 물질 이전에 정신이 중요하다 이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국방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풍요 속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MZ세대 청년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어리광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년들의 안보정신과 애국심을 집중적으로 함양하여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그럼으로써 대한민국의 자랑인 K-병역을 한층 더 강화하겠습니다!」
이렇게 병역 문제로 세대를 갈라 치는 후보가 있는가 하면, 젊은 세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젠더 이슈를 이용하는 후보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남녀간 소득격차가 위험수위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원인은 하나! 남자들이 거의 다 해먹다시피 하고 있는 고위험 수렵업계의 가파른 성장세입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여성 각성능력자들이 몸이 힘들고 사망 위험이 있는 위험직군에 도통 지원하질 않는다며 여성들 탓을 하고 있지만! 이는 업계 전반에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는 비겁한 변명입니다! 여성들이 없으면 여성들이 올 만한 자리를 먼저 만들 생각을 해야지요! 추가적인 혜택을 줘서라도 여성들을 업계에 참여시켜야 할 것 아닙니까!」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은 계속해서 시대를 역행할 뿐입니다! 진정한 평등을 원하시는 분들께서는 저에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자극하는 PR들이 난무했으나, 이들의 시도는 거시적인 흐름엔 영향을 주지 못하는 지엽적인 노력에 불과했다.
이러는 동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또 다른 전쟁의 기반이 착실하게 갖춰져 나가고 있었다.
타지키스탄에서는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타지크 연합 야당(Оппозицияи муттаҳидаи тоҷик)」과 「타지키스탄 이슬람 부흥당(Ҳизби Наҳзати Исломии Тоҷикистон)」이 새로이 알림 샤히디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타지키스탄은 90년대 말까지 진행된 내전의 여파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나라다. 비록 UN의 중재로 중앙정부와 연합 야당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긴 했으나, 협정체결 이후에도 폭력시위와 전쟁 직전의 무력충돌이 빈발하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어왔다.
나는 샤히디를 이용하여 이 피에 젖은 땅의 해묵은 갈등을 단숨에 매듭지어버렸다.
「신성한 바위의 돔의 수호자이자 신자들의 총사령관인 알림 샤히디가 고르노-바다흐샨의 모든 지하드 전사들에게 고한다. 바라노니, 나와 같은 깃발 아래에서 같은 초승달을 바라보며, 어깨를 나란히 하여 보다 가치 있는 성전을 치러보지 않겠는가? 동포를 상대로 피를 흘리는 것보다 더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말이다. 그대들이 나의 휘하에 들어온다면, 나는 그대들의 권익을 위하여 적극적인 중재를 행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짧은 전언은, 내 딴에는 본격적인 협상에 앞서 가볍게 의사를 타진해보려는 의도로 보낸 것이었다. 세부적인 조건들은 협상으로 조율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타지키스탄 동부(고르노-바다흐샨)의 이슬람 세력은 협상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는 기세로 즉각 엎드렸다. 위대한 알림 샤히디가 자신들을 특별히 지목하여 영입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영광으로 여기는 느낌이었다.
「오, 사령관! 우리의 사령관이시여! 우리는 당신의 명령을 기뻐하며 따르겠습니다! 타지크의 아들들을 천국의 문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경태는 이들의 반응을 “제발 날 가져요.”라고 요약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전 세계의 주요 지하디스트 단체들을 9.11 테러 한 방으로 알 카에다의 깃발 아래 집결시켰던 걸 생각해보면, 이들의 반응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알림 샤히디의 위상은 한낱 빈 라덴 따위가 넘볼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에 도달해 있으니까.
내가 공들여 만든 꼭두각시의 영향력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건 만족감이 각별한 일이었다.
물론 타지크 연합 야당의 전격적인 충성맹세가 현실적인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서쪽의 중앙정부와 동쪽의 연합 야당으로 갈려있는 타지키스탄의 세력균형은, 힘의 저울이 중앙정부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있는 상태였다. 실효 지배하는 영역의 인구 격차가 자그마치 30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연합 야당의 양대 구심점 중 하나인 타지키스탄 이슬람 부흥당은 마법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테러단체로 지정되어 정당 자격을 상실했다. 마법의 시대로 접어든 이후로는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 게릴라전과 테러의 위협을 담보 삼아 위태롭게 영향력을 유지해온 자들이다.
즉 이들에게 알림 샤히디의 보호와 중재는 굉장히 절실한 것이었다. 위대한 알림 샤히디의 중재를 따른다는 구실이면, 원한과 명분의 관성에 끌려다니는 꼴을 면하기도 쉽다.
연합 야당의 또 다른 구심점인 민주화 연합세력 역시 샤히디에 대한 충성맹세로 생존과 국면전환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슬람 부흥당 계열과는 주요 구성원들과 지지층의 성향이 다르다고는 하나, 어쨌든 이들도 태반이 무슬림들이어서 샤히디를 경애하고 지지하는 마음은 하나이기도 했다.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
마지막으로, 고르노-바다흐샨에 분포하는 위구르 디아스포라의 열광적인 헌신이 있었다. 이들은 절대적인 인구는 적을지언정, 샤히디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자금지원을 받아 동부 자치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연합 야당이 샤히디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서쪽의 중앙정부는 동부의 위험지역에 배치해놓은 모든 부대들에게 황급히 교전중지 명령을 하달했다.
하루아침에 고르노-바다흐샨 전역에서 총성이 사라지자, 국제사회는 다시 한 번 알림 샤히디에게 찬사를 보내었다.
「가는 곳마다 전란을 끝내고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었던 알라의 검! 하루하루 전면적인 내전과 학살에 가까워지던 타지키스탄의 위기를 말 한마디로 가라앉히다! 빛으로 가득한 그의 향기로운 행보는 과연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갑작스러운 개입에 놀라긴 했겠으나, 중앙정부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중국이 뭔가 수를 쓰기 전에 중앙정부의 독재자를 현찰박치기로 매수할 작정이었고, 중앙정부를 상대로 무력을 과시하거나 굴욕적인 협상을 강요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내 꼭두각시의 이미지에 괜한 피를 뿌리겠는가?
한편으로는 중앙정부와 연합 야당을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로 묶을 만한 구실도 있었다. 바로 중국이 강압적으로 빼앗아간 동부 접경지대의 영토였다.
지난 2011년, 중국은 타지키스탄으로부터 약 1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뜯어냈다.
중국은 이것을 자신들의 양보라고 표현했다.
「중국의 역사적인 강역을 회복하려면 이보다 스물여덟 배 더 많은 땅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국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이므로, 관대한 양보와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 갈등을 마무리 지은 것입니다. 이로써 양국 관계가 화호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야당 연합의 영역인 고르노-바다흐샨 자치주는 위구르 땅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곳이다. 타지키스탄이 빼앗긴 땅은 자치주와 위구르 사이에 좁은 띠처럼 끼어있었다.
고로 야당 연합이 샤히디에게 맹세한 충성엔 영토 회복에 대한 희망도 반영되어있을 것이었다.
타지키스탄 야당 연합의 충성서약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그렇잖아도 근심이 가득했던 공산 짱깨들 사이에선 또다시 난리가 났다.
「기어이 목전까지 닥쳐온 회회천마의 검은 야욕! 14억 인민들이 충당애국의 정신으로 하나 되어 마교의 중원침공에 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