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전쟁의 기반 (10)
스위스 제네바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알림 샤히디는 내 지시에 따라 미국 대통령에게 중앙아시아 성전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실무자들끼리 말을 다 맞춰놔 봐야 대통령이 깽판을 놓으면 답이 없고, 반대로 실무자들이 난색을 표하는 부분이 있어도 대통령이 광기로 밀어붙이면 해결이 한층 수월해질 테니까.
만남은 양측의 합의에 따라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합의가 파기되기 전까지는 상호 비공개가 원칙이었다.
나는 때로는 실시간으로 영상을 보며, 때로는 시차를 두고 보고내용을 확인하며 협상의 진행에 관여했다. 대통령과의 비밀회담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정해지는 경향이 있어, 내가 직접 스위스로 가자니 시간낭비가 심할 것 같아서였다.
샤히디를 조종하여 미국에 제시한 청사진들은 대통령과 실무자들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먼저 CIA와 사전협의를 거친 내용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본인을 직접 만나서 재확인을 받는 데엔 큰 의미가 있다.
이제야 비로소 CIA를 거치지 않고 샤히디와 접촉하게 된 국무부의 관료들은 자기들 밥그릇을 위해서라도 직통 채널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샤히디는 새로운 연락 채널을 만드는 것 자체엔 이의가 없어도, 실질적인 협의는 계속해서 기존의 채널에 의지하겠다는 태도를 고수하여 그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CIA는 이를 약속을 존중하는 태도이자 내가 행사하는 영향력의 한 단면으로 이해했다.
내가 샤히디를 통해 제시한 청사진의 핵심은 셋이었다.
첫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을 철저하게 거세해주겠다는 것.
둘째는 통일 이슬람 칼리파국 따위를 만들지 않고, 중앙아시아 각국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하며 집단안보체제를 발족시켜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선에서 만족하겠다는 것.
셋째는 중앙아시아 각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세계와 면밀하게 협력하겠다는 것. 이는 곧 서구세계가 중앙아시아와 교류를 할 땐 미국의 리더십에 의지해야 하게끔 판을 짜주겠다는 뜻이었다.
둘째 항목에 대해서는 알라의 이름으로 이 약속을 지키겠다는 친필 서약서까지 작성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미국은 이 문서와 함께 문서가 작성되는 현장의 영상을 공개할 테고, 그러면 샤히디는 독실한 성전지도자로서의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었다.
서약서를 받아든 대통령은 아직 뭔가 부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의 현명한 친구! 세 번째 약속은 즉, 경제적인 교류에서도 미국의 기업들에게 우선적인 기회가 주어지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그러니까, 남들이 알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기회들이 말입니다.”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내게 미리 받아둔 언질이 있는 샤히디는, 내가 붙여놓은 참모 겸 감시자들에게 의견을 구할 것도 없이 곧바로 긍정했다.
“물론입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저는 장차 독립할 제 조국과 중앙아시아 일대의 경제적 발전에 미국과의 협력이 큰 힘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보고 배워야 할 다른 나라를 꼽으라 하면, 당연히 세계에서 제일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인 미국을 첫 번째로 꼽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공의 압제자들이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나라를 말입니다.”
“훌륭합니다! 아주 훌륭해요!”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대통령은, 자신이 받아든 친필 서약서를 보며 말했다.
“당신과 나 사이니까 하는 말인데, 난 요즘 알라가 좋아지려고 하고 있어요.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낸 걸 보면 당신이 믿는 신은 생각보다 괜찮은 분인 것 같습니다. 예전엔 그냥 테러리스트들의 신 같았는데 말이죠.”
무슬림을 상대로는 망언을 넘어 선전포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례한 막말이었으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대통령의 광기에 익숙하고, 신앙보다는 자신의 영광이 더 중요해진 샤히디는 정색하거나 격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이슬람은 원래 평화의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이슬람을 무서워하고 또 경계하게 된 것은 알라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한 우리 믿는 자들의 책임이겠지요. 믿는 자들의 과오는 믿는 자들의 손으로 청산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 역시 제게 주어진 소임이라고 믿습니다. 아무쪼록 대통령님께서도 많은 도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원더풀!”
대통령은 커다란 손으로 요란한 박수를 쳐댔다. 대통령의 망언을 듣고 안절부절 못하던 참모들과 관료들은 어깨를 이완시키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샤히디는 슬쩍 영국에 관한 화제를 꺼내었다. 나중을 위한 포석이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이슬람 세계는 영국에서 잇따르는 무슬림 실종사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품고 있습니다. 주로 무력한 아이들이 피해자가 되는데…… 하늘을 나는 전투함의 재료가 어린아이들이라는 소문이 있어 우려가 더욱 깊어집니다. 영국의 경찰들은 무슬림 공동체의 신고에 무성의한 대응만을 보여주고 있고요.”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은 대번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미국은 전투함의 재료가 인간이라는 소문이 오롯한 진실임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일 터였다.
숙련된 배우인 샤히디는 대통령의 반응을 살피며 말했다.
“세상은 무슬림들이 폭력적이라고 합니다만, 가끔은 그 폭력성에 편견으로 말미암아 가려진 당위성이 존재할 때도 있습니다. 미국은 영국의 전통적인 우방이니, 아무쪼록 영국의 무슬림 사회에서 더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압력을 좀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영국을 상대로 지하드를 선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위구르 민족의 자주독립을 하루라도 앞당기고 싶은 저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요.”
그레이스와 칠각기사단은 내가 맡긴 일을 기대 이상으로 완벽하게 진행해주고 있었다. 칠각기사단이 만들어낸 실체 없는 무슬림 아이 연속실종사건은 영국의 무슬림 사회를 폭발 직전까지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영국엔 한국과 같은 주민등록제도가 없었으므로, 영국 치안당국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루머들을 하나하나 반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요즘 그 똥 쪼가리(Piece of shit) 같은 나라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모릅니다.”
깍지를 낀 채 인상을 쓰고 듣던 백악관 미치광이는 샤히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험한 말들을 내뱉었다.
“혐오스러운 해적국가 같으니. 내 전임자들은 뭐 그딴 나라를 핵심 우방이랍시고 두었던 건지 이해가 안 가요. 미국의 우방이라는 것들은 다 우리 미국의 노력에 무임승차를 하려는 도둑놈들밖에 없는데, 그중 제일이 바로 영국입니다. 양심도 없고 염치도 없어요! 나는 그 사악한 섬나라가 너무, 너무, 너무 싫습니다.”
혐오스러운 해적국가는 요즘 영국을 말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었다. 영국이 당장의 경제적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악명을 쌓고 있는 탓이었다.
하나의 예로서, 영국은 하루가 다르게 러시아와의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천연자원 수출 허브 역할과 러시아를 위한 금융창구 노릇을 해주면서 이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카자흐스탄 침공으로 인해 내려진 국제적 금수조치들과 각종 경제제재들을 모조리 무시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세계는 영국에 대하여 이익 이상의 손실을 줄 제재를 단행하지 못했다. 영국 증시는 여전히 세계 경제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까닭이다.
즉 영국은 처음 경제위기가 촉발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세계 경제를 인질로 잡고 협박을 하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다. “우리를 죽이면 너희들도 같이 죽는다. 처신 잘해라.”라는 스탠스를 줄기차게 유지하니, 그야 전 세계의 공분을 살 수밖에 없다.
미국 대통령은 주요 국가의 정상들 가운데 가장 격노하는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 지긋지긋한 섬나라 강도들이 미국의 이익을 훔쳐갔습니다! 저들은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본래대로라면 러시아에게 걸린 여러 금수조치들은 미국의 이익으로 돌아왔어야 정상이다. 고로 백악관 미치광이의 관점에서, 영국이 구사하는 경제적 미치광이 전략은 정의를 따지기 이전에 미국의 이익을 가로채는 만행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엔 영란은행에 예치된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의 금괴 인출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영란은행은 세계 제일의 자리를 다투는 금 저장소들 가운데 한 곳이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자국이 보유한 금의 일부 내지 전체를 영란은행의 지하금고에 예치해두는 게 보통이었다. 경제위기를 맞이하기 전의 시티 오브 런던은 전 세계 금 거래량의 약 3분의 1을 소화하는 시장이었으며, 운반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금의 특성상 거래가 활발한 곳에 실물을 예치해두는 편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매번 거래를 할 때마다 일일이 금을 실어 날라야 한다면, 분초를 다투며 긴급히 현금화를 해야 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없고, 운반에 따르는 비용과 위험 또한 감수해야 한다.
하여 실물은 영란은행에 예치해두고, 실제 거래는 문서상으로만 해치우는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치안이 날로 악화되고, 외교적 입지와 국가신용도가 가파른 하락을 거듭하자, 영란은행에 금을 예치해두었던 여러 나라들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딴 나라에 계속해서 금 보유고를 두어도 되는가 하는 불안감을. 예전에 영란은행이 일부 금괴를 도난당했던 사건도 불안감을 살찌우는 데 기여했다.
이에 돈 냄새를 맡은 미국 대통령은 때는 이때다 하고 판촉에 나섰다.
「여러분! 우리 미국의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튼튼하며, 우리 미국의 금고는 다른 어느 나라의 금고보다도 더 안전합니다! 이제 고양이 앞의 생선가게인 런던 금속거래소 따위는 버리고 코멕스(뉴욕 상품거래소)를 이용하여 주십시오!」
런던 금속거래소의 일일 금 거래량은 거의 6천 톤에 달한다. 이 거래량을 뉴욕 상품거래소로 끌어오면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액수의 연간 수수료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각국의 금 보유고를 미국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세계 금융시장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지도적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굳히는 효과는 덤이다.
자국의 금을 미국에 둔 나라들은 외교적인 면에서도 미국에 적대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기가 어렵게 된다.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미국 대통령이 환장을 할 만한 사안.
세계 최대의 금 거래소는 상하이 선물 거래소이지만, 중국의 가짜 빨갱이들에게 자국의 금 보유고를 맡겨놓고서 안심할 나라가 몇이나 되겠는가. 금을 실제로 실어 나르기에도 상하이보다는 뉴욕이 더 나으니, 대통령의 욕심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실현될 것 같았던 미국 대통령의 황금빛 꿈은 영란은행의 금 인출 보류조치로 물거품이 되었다.
「현재 우리 영국은 국정과 사회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금 인출시의 비밀유지 및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에 인신보호영장의 효력이 재개될 때까지 한시적인 인출 보류조치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아무쪼록 예치국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인신보호영장의 효력 재개는 곧 계엄령의 종료를 의미한다. 영국의 계엄체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마당이므로, 인출을 요구했던 국가들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니면 영국이 하루빨리 질서와 안정을 되찾도록 도움을 제공하거나.
영국이 잘못되면 너희들의 금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협박과도 같은 도움 요청이다.
물론, 영국정부와 원탁 세력의 첨예한 힘겨루기를 짐작하는 입장에서는 이 일이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건 십중팔구 원탁과 동반승천 카르텔을 겨냥한 협박이기도 하겠지. 너희가 선을 넘으면 정말로 영국 경제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협박.’
말로만 하는 협박은 무시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국가신용도를 송두리째 담보로 건 금 인출 보류조치는 영국정부의 결의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사안과 관련하여 연단에 선 백악관 미치광이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포효했다.
「영국 이 씨발놈들아(Motherfuckers)!」
영란은행의 인출 보류조치로 유탄을 맞은 국가들 중엔 한·중·일 3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한국은 금 보유고 전량을 영란은행에 두고 있었기에 그만큼 더 강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 언론들은 국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전문가가 말하다 : 대한민국의 금 보유고, 자칫하다간 하루아침에 제로가 될 수도 있다?」
「섬나라 해적 영국. 신용으로 돌아가던 국제금융의 근간을 위협하다.」
「정부는 왜 진즉에 금을 빼두지 못했나? 경제는 항상 뒷전으로 놓고 고상한 명분놀음에만 열중해온 진보정권의 안일함이 사태의 심각성을 키워.」
「이대로 가면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을 도와 영국을 상대로 개전(開戰)해야 할지도.」
외교·경제 분야의 전문가들은 영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 속에서 국제사회에게 도움을 강요하려는 수단으로 이번 조치를 단행했으리라 분석했다. 인출 보류 조치가 무단 압류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것.
그러나 국민들은 냉정한 분석보다는 자극적인 보도에 더욱 크게 반응했다. 그리고 다수의 언론들은 다수의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기를 즐겨했다.
중국은 한국보다는 충격이 훨씬 가벼웠으나, 민간의 반영(反英) 여론은 충격의 강도와는 무관하게 들끓어 올랐다. 액수의 크고 작음을 떠나, 역사적으로 악연이 깊은 영국이 중국의 금을 떼어먹을지도 모르는 상황 자체가 대중의 분노를 자아낸 것이다.
중국인들은 영국 대사관 앞에서 영국 국기를 불태우고 짓밟으며 소리쳤다.
「부일멸영(扶日滅英)! 일본을 도와 영국을 멸하자!」
조금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이 구호의 배후엔 중국 공산당의 의지가 있을 것이었다. 다른 나라, 대표적으로 미국이 뭐라고 하든, 일본이 대영(對英) 전선을 열었을 때 끼어들 명분을 쌓아두고 싶다는 의지가.
일본인들 역시 치를 떨며 분개했다.
「귀축영국은 우리에게 얼마나 더 피해를 줄 셈이냐!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하냐는 말이다!」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일찍부터 자국의 금보유고를 지속적으로 현금화해왔다. 현금화의 우선순위는 물론 거래비용이 최소화되는 해외 거래소의 금보유고가 더 높았다.
덕분에 이번 인출보류 조치로 인한 일본의 피해는, 중국이 그러하듯 한국에 비하면 실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객관적인 액수만 놓고 보면 결코 가벼이 여길 수만은 없는 손실이었으며, 그렇잖아도 영국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던 국민감정은 피해의 경중에 좌우되는 바가 아니었다.
전문가들의 회의적인 견해와는 달리, 꼭지가 돌아간 일본인들은 영국의 인출보류가 일시적인 조치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을 거의 확정된 미래처럼 받아들였다.
책임공방의 불꽃이 정치권으로 튀자, 총리는 재빠르게 해명했다.
「도쿄 대공습 이후 정부 내에서도 금을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양이 많고 적음을 떠나, 장차 전쟁을 치를지도 모를 잠재적 적성국에 계속해서 국가의 중요자산을 맡겨두는 건 분명 어리석은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우리의 경제상황과 군사적 여건으로는 금 실물을 이송하는 데 따르는 비용과 위험부담을 감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라가 멀쩡한 한국도 쉽게 시도하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현실적인 최선은 런던 금속시장에서의 현금화에 박차를 가하고,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뉴욕과 같은 대안시장에서 금을 구입하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실제로 그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있는 자료들이 증거입니다.」
「다만 이 방안으로 속도를 내는 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속도를 올리게 되면 개별 거래시장 사이의 금 가격에 격차가 발생하여 또 다른 손실로 돌아오게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영국이 우리의 금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통일된 의견이었습니다. 그것은 국가신용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저들이 지금 인출보류라는 비상식적인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만, 저들이 국가적인 차원의 자살을 결심한 게 아닌 이상에야 국민 여러분들께서 걱정하시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저 파렴치한 나라가 기어이 유럽의 북조선이 되기로 결심한다 한들, 우리는 철과 불, 그리고 피로 우리의 것을 되찾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돌아가는 사정이 이러하니, 백악관 미치광이가 영국에 대해 치를 떠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치를 떠는 건 떠는 것이고, 부탁에 대한 대가는 대가였다. 이 미치광이를 움직이려면 뭔가 대가를 주긴 주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조사를 촉구한 사실은 훗날 내가 샤히디의 이름으로 휘두를 전쟁 명분을 강화해줄 터.
그래서 나는 제법 괜찮은 대가를 준비해두었다. 샤히디는 그 대가를 입에 담았다.
“최근 카자흐스탄 전쟁 건으로 러시아를 제재하는 데 터키가 다소……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지요. 그 일로 고민이 많으실 듯한데, 제가 터키를 설득해드리겠습니다. 터키는 투라니아 벨트 구상에 욕심이 많으니 제 요청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터키는 샤히디의 중앙아시아 성전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나라였다. 터키의 독재자가 범 튀르크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범 튀르크주의는 터키를 중심으로 한 투란주의(Turanism)로서,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터키와 같은 민족이라는 사상이었다. 최근 터키의 독재자가 국명을 튀르키예로 바꾸니 어쩌니 하는 것도 이러한 주장과 관련이 깊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범 튀르크주의는 투라니아 벨트(Turania Belt)의 완성을 꿈꾼다. 동쪽으로는 몽골에서 서쪽으로는 터키에 이르는 거대한 물류 벨트를 형성하여 터키의 경제적 위상을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이 구상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의 고립이 냉전의 부활로 고착화된다는 전제하에, 터키는 투라니아 벨트의 하나뿐인 유럽 방면 출구가 된다. 이로부터 파생될 이익은 현재 8천억 달러 수준에 불과한 터키의 GDP를 세계 10위권 안에 안착시키고도 남을 만큼 막대하다.
터키의 입장에서, 알림 샤히디의 중앙아시아 성전은 투라니아 벨트를 완성할 절호의 기회다.
현시점에서 중앙아시아 성전 계획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샤히디의 궁극적인 목적이 위구르 민족의 자주독립인 관계로, 샤히디의 다음 성전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개시되리라는 예상은 세간의 예측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내 꼭두각시에겐 터키의 독재자를 쥐고 흔들 힘이 있는 셈이다.
“……?”
샤히디의 말을 들은 미국 대통령은 입술을 구부린 채 미간을 모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뭐? 돈이 되나?’ 하는 표정이었다.
보다 못한 참모가 다가와 대통령에게 조용히 말했다.
“각하. 저 제안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아주 큰 돈을 아낄 수 있습니다.”
“진짜로?”
“예. 우리가 터키를 설득하기 위해 고려하던 경제·외교적 옵션들은 하나하나가 만만찮은 비용을 소모하는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래? 무슨 옵션이 있었는데?”
참모는 뭔가를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옵션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샤히디는 비교대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의 각성능력자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귓속말 따윈 무의미하다고 보는 듯했다. 샤히디가 듣고, 또 기록으로 남아도 무방한 내용들만 말하는 게 최선이다.
대통령을 납득시키기엔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참모는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상급자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고 다시 한 번 외교적 리더십을 과시하실 기회입니다. 그토록 고개가 뻣뻣하던 터키 대통령을 하루아침에 굽실거리게 만든 미국 대통령. 카자흐스탄의 정의를 위해 힘쓰는 세계질서의 수호자……. 우리의 시민들은 각하께 갈채와 찬사를 바칠 테고,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의 의원들마저도 각하의 위업을 부정하지 못하겠지요.”
미국 대통령은 비로소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샤히디의 어깨를 두드렸다.
“친구여! 당신과의 거래는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하는군요! 당신은 거래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당신이 정말로 좋습니다!”
그러고서는 이렇게 호언했다.
“무슬림 실종자들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 나쁜 영국 놈들에게 강력한 우려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슬림들을 위해 공정한 수사가 시작될 수 있도록! 섬나라 해적놈들은 미국의 대통령이 가하는 압력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이 기회에 그 인간 말종들이 또 뭔 흉악한 걸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봅시다!”
이런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서는 내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하나의 일이 시작되었다. 바로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선거운동의 시작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기 무섭게, 그동안 저마다의 홍보 전략을 담금질해온 한국의 대선후보들은 미국 대통령과는 다른 종류의 광기를 폭발시켰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도오오오(道)를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