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27화 (527/561)

#52. 전쟁의 기반 (9)

지금의 영국 총리에게 원탁과 힘의 균형을 유지할 방법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있다.”였다.

경태와 수연은 힘의 균형을 이룰 수단으로서 서로 다른 방식의 벼랑 끝 전술을 입에 담았다.

경태는 먼저 영국의 핵무기에 주목했다.

“그러고 보면 칠각기사단이 공유해준 첩보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총리가 다우닝가 10번지를 떠난 후, 하루의 시차를 두고 관저로부터 작은 금고 네 개가 노솔트(Northolt) 공군기지로 극비리에 이송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극비리에 이루어진 이송 작전이 칠각기사단의 더듬이에 걸린 건, 해당 작전에 악마숭배자 하나가 끼어들어간 덕분이었다.

이 행운은 단순한 우연의 소치가 아니었다.

다우닝가 10번지를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인 총리에게 있어서, 최우선 과제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여 정부의 연속성(Continuity of government)을 보존할 장치들을 강화하고, 원탁이나 동반승천 카르텔의 끈이 닿지 않은 세력을 확보하는 것.

경황이 없고 다급한 와중에 오로지 원탁과 동반승천 카르텔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만을 우선시하다 보니, 잠복기의 질병처럼 정체를 숨기고 있던 악마숭배자들 일부가 필터링을 통과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레이스가 점조직으로 박아놓은 악마숭배자들은, 겉보기만으로는 애먼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근면한 공직자들이었다. 저마다 흉악스러운 취미생활과 사이한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긴 해도, 그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니까.

“같은 날, 영국 왕세자가 여왕 전용기(The Queen's Flight)를 타고 글래스고로 향했죠. 스코틀랜드의 여론을 진정시키겠다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글래스고 서쪽에 뭐가 있지요?”

“……클라이드 해군기지를 말하는 거냐?”

“예.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금고들이 처음 이송된 노솔트 공군기지는 국왕과 왕실 주요 인사들의 항공수송을 전담하는 제32왕립비행대가 주둔하는 곳이다. 왕세자가 탑승한 퀸즈 플라이트는 당연히 이 기지의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그리고 클라이드 해군기지는 영국의 전략 원자력잠수함들(뱅가드급)이 정박하는 곳이다. 영국 총리가 핵미사일을 탑재한 원자력잠수함에 보낼 만한 금고는 하나밖에 없다.

“최후의 수단 편지를 임기 중에 갱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로군.”

최후의 수단 편지(Letters of last resort)는, 어떤 이유에서든 정상적인 명령체계가 무력화되고 정부의 연속성이 파괴되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작성해놓는 최후의 명령서다.

반드시 친필로 작성하는 이 명령서는 평시엔 새로운 총리가 임기를 시작할 때 교체하는 것이 관행이다. 바꿔 말해, 총리는 새로운 명령서를 기습적으로 작성함으로써 원탁이나 동반승천 카르텔의 허를 찌르는 일이 가능했다.

같은 맥락에서, 명령서가 들어있는 금고의 개방조건에도 별도의 옵션을 추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 정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가를 판단하기 위한 추가적인 기준을.

경태는 추측했다.

“제가 총리라면 새로운 편지에다가 원탁과 동반승천 카르텔에 대한 부분적인 진실들을 적어놓았을 겁니다. 그간 영국이 저질러온 악행에서 정부의 지분은 은폐하고 원탁과 카르텔의 지분은 과장하는 식으로요. 그 뒤엔 아마 망명하라는 명령이 붙어있을걸요? 「미국으로 망명해서 이 모든 진실을 폭로하고, 세계를 불태울 무기들이 사악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일을 막아라!」 라고 말입니다.”

“흠…….”

“만약 영국 여왕이 총리를 지지한다면, 금고에다가 여왕의 친필서신도 함께 넣었겠죠. 잠수함 승조원들이 비장한 애국심과 사명감 뽕에 취하도록 만드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보리스 게이…… 아니, 보리스 총리는 이미지 메이킹과 극적인 연출을 아주 잘 활용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럴듯한 이야기로구나.”

영국 여왕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의 통제에 관해 어떠한 권한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영국 헌법에 따르면 여왕은 왕국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며, 총리가 사령탑으로서 지니는 모든 권위는 여왕에게서 나온다. 총리는 어디까지나 최고 사령관의 권한을 합법적으로 대행하는 자일 뿐.

영국의 한 전직 참모총장은 「총리가 핵무기 통제권을 남용하는 상황에 대한 최고의 안전장치가 바로 여왕 폐하의 권위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따라서 여왕의 친필편지를 동봉하는 것엔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일단 바다로 나가버린 원자력잠수함은 대마법사라도 찾아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 황금기의 눈을 가진 나조차도 오대양을 다 수색하려면 보통 긴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총리가 들어놓을 보험으로서는 지극히 적합하다는 뜻.

비록 고래들을 위시한 거대 해양각성체들의 위협이 전술적인 차원에서 잠수함의 존재가치를 말소해버렸다고는 해도, 은밀한 핵미사일 발사 플랫폼으로서의 전략적인 가치는 여전히 잔존해있다. 고출력 음파를 방사하는 능동 소나(Active Sonar) 사용만 금지하면 일단 수중항해 자체는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전략원잠들이 항구에 묶여있는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해양 원자력 사고를 우려한 탓이다. 능동 소나 사용을 엄금한다 한들 교통사고 수준의 위험은 남아있다고 봐야 합당하니까.

이는 불가피한 상황에선 무시할 수 있는 위협이다.

“여기서 핵심은 원탁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죠. 설령 너희가 최후의 일선을 넘더라도, 결코 이 나라를 온전히 손에 넣을 순 없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요.”

이렇게 말하며 경태는 어깨를 으쓱였다.

“즉 명령서가 성공적으로 갱신된 시점에서, 원탁과 그 친구들은 나라를 완전히 엎어버리려면 영국이 보유한 전략핵무기 전량을 단념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입니다. 지금보다 더 심화될 외교적 고립과 원탁의 노출은 덤이고요.”

고래사냥을 위해 새로운 전술핵무기들을 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략원잠에서 발사하는 대륙간탄도탄은 영국이 보유한 유일한 핵투발 수단이었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새로 제작한 전술핵무기들은 상당수가 도쿄 앞바다에서 소모되었고, 남은 전술핵무기들 또한 대부분 본토의 통제를 벗어나버린 까닭이다. 고래사냥이 끝난 후 망명을 택한 왕립해군 전투함은 HMS 다이아몬드 한 척만이 아니었다.

고로 전략원잠 네 척이 망명을 감행하면 영국은 즉시 핵전력 공백 상태에 빠진다.

‘전술핵무기쯤은 근시일 내에 추가로 만들어 배치할 수 있겠지.’

그러나 전략핵무기를 새로이 전력화하는 데엔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전략핵무기는 탄두와 발사체가 함께 갖춰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 그러나 지금의 영국엔 탄도탄 제조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엔 동맹인 미국으로부터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사다가 썼기 때문이다.

비록 영미 동맹이 사실상 형해화된 상태라고는 하나, 미국이 영국 잠수함들의 망명을 안 받아줄 이유는 없다. 백악관 미치광이는 오히려 반가워할 것이다.

수연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벼랑 끝 전술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총리는 자동화된 경제적 파괴절차를 마련해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원탁의 세력이 정권 전복을 감행할 경우, 단시간에 영국의 경제력을 파괴할 수 있는 장치를 말입니다.”

기본적인 맥락은 경태의 논리와 동일했다. 다만 방법론의 차이가 있을 따름.

“영국의 경제는 그렇잖아도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총리가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면, 영국의 금융자산 태반을 하루아침에 갈아버리는 건 쉬운 일이지요. 현재 상황에서 극도로 부적절한 조치를 발표하기만 해도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가할 수 있을 겁니다.”

이어 수연은 여의도 김씨에게 시켜 작성한 시나리오를 들려주었다. 해당 시나리오에 따르면, 영국 총리는 정말 말 한마디만으로 자국 경제의 대들보인 주요 연기금들이 줄줄이 마진 콜을 맞도록 해줄 수 있었다.

총리가 이처럼 미치광이 이론(Madman Theory)의 완성형에 가까운 전략으로 내부의 적들에게 균형을 강요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원탁과 동반승천 카르텔은 최후의 일선을 넘어봐야 상처뿐인 영광만을 얻을 따름이다. 강대한 외부의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미치지 않고서야 고르기 어려운 선택지.

총리의 정부도 선을 넘지 못하고, 원탁의 세력도 선을 넘지 못하는 위태로운 균형이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가는 미지수다.

그러나 원탁에 황금기의 눈이 없는 이상, 대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실력행사에 나선다 한들, 총리가 최후의 안전장치를 작동시키기도 전에 총리 세력의 물리적인 방어를 무력화할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

‘부분적으로 의식을 되살려냈다는 황금기의 정수가 변수이긴 한데…….’

그 오래된 뇌의 잠재적인 위협은 나로선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파악이 안 되는 건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우주로 나갔다는 마스터 메드크럭스의 행방.

전향자들에게 진술을 확보한 이후, 나는 그레이스와 함께 줄곧 메드크럭스의 행방을 추적해왔다. 나 같은 경우는 거짓 대자들의 명의를 빌려 중국 국가항천국(国家航天局/CNSA)의 본체인 국방과기공업국의 우주감시 데이터베이스마저 열람했다.

이 세상에 마법이 돌아온 날을 기점으로, 그간 영국은 물론이고 영연방 소속 국가들과 영국의 주요 우방국들이 발사한 모든 우주발사체 기록을 샅샅이 뒤져 메드크럭스가 탑승했을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명목상 영국이 발사한 것으로 되어있는 인공위성의 태반은 위성 인터넷 기업 원 웹(One Web)의 소유였다. 이 회사는 본사가 영국에 있고 대주주 중 하나가 영국 정부이긴 하나, 영국 정부의 지분은 채 20%에 미치지 않으며, 머리를 제외한 몸통 대부분이 미국에 있어 사실상 미국 기업이라고 봐야 하는 곳이었다. 허구한 날 화성에 가겠다고 떠들어대는 모 기업가와는 서로 경쟁을 벌이는 관계다.

이러한 민간기업의 특성상 우주발사체 발사 내역은 매우 투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영국이 발사한 인공위성의 수는,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것들까지 합쳐도 일곱 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비공개라고 해봐야 타국의 감시와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의 눈을 피하기란 불가능한 일. 고로 비공개는 그냥 대중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정도의 의미일 뿐이다.

개중에서 인간의 장기 체류가 가능한 물건은 없었다.

또한 지난 2년간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준 위성들의 기록도 꼼꼼하게 살펴보았음은 물론이다.

오죽하면 그레이스가 회의감을 표했을 정도다.

「그 「알파 크루시스 아크(Alpha Crucis Ark)」라는 거…… 정말로 존재하긴 하는 거야? 전향한 기사들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메드크럭스가 탑승했다는 알파 크루시스 아크 외에도 다수의 신벌 위성들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 위성들이 이렇게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있나?」

요컨대, 그레이스는 마스터 메드크럭스의 우주 진출이 적을 속이기 위해 아군마저 속이는 위장정보가 아니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다시금 심문을 받은 전향자들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여. 뒤늦게 회개한 당신의 종들을 의심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위대하신 분께 만족을 드릴 만큼의 정보를 알고 있지는 못하오나, 마스터 메드크럭스가 우주로 나간 것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나이다.”

나는 메드크럭스가 대마법사의 권능을 발휘해 자력으로 우주에 나갔을 가능성 또한 고려해보았다.

하나, 그 시나리오 또한 현실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염동력이든 뭐든, 자신이 생활할 모듈 전체를 마법으로 궤도에 올리는 것까지는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거창한 모듈을 올리는 과정 자체가 무슨 수를 써도 외부세력의 관측을 피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 외부세력이 우주 경쟁에 진심인 중국 빨갱이 새끼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 탐욕스러운 공산제국주의자들은 타국이 우주로 보내는 전파까지도 당연하다는 듯이 감청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만.

개량된 환시장막 전개가 가능한 나조차, 쟁쟁한 국가들의 궤도감시를 피해가며 1인용 우주정거장을 올려놓을 자신은 없다.

나는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고민 끝에 메드크럭스에 대한 근심을 가슴 한쪽으로 잠시 치워놓기로 했다. 당장의 대응을 요구하는 사안들이 많은 상황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무한정으로 시간과 자원을 할애하기란 곤란한 노릇이었기에.

지난 연말에 치렀던 예루살렘 지하드의 사후처리는 1월을 지나 2월로 접어들면서 점점 더 원만하게 풀리는 중이었다.

당연하게도 잡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강성 시온주의자들은 총리의 항복 선언과 그 뒤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평화협상을 있을 수 없는 굴욕이자 비극이자 공포로 받아들였다.

「유대인을 증오하는 세계에게, 우리 유대인들이 수천 년에 걸친 학살에 대한 보답으로 돌려줄 것은 오직 핵겨울밖에 없다!」

골수 시온주의자들이 품고 있는 역사적 피해의식은 범인들이 상상도 못 할 수준으로 크고 깊은 광기다. 이들은 이번 패배가 앞으로 시작될 장구한 몰락과 핍박의 첫걸음에 불과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들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은 2천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차별과 학살만을 당해온 절대적인 피해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행사하는 모든 폭력은 정당하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이 살아온 모든 세계에 대하여 그간의 박해를 되갚아줄 권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들은 공황발작을 일으킨 환자들 비슷한 꼴로 부르짖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나라는 곧 나치가 지배하는 나라다! 가나안 땅 안에 나치가 창궐하는 꼴을 보느니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는 게 낫다!」

골수 시온주의자들이 정의하는 나치즘의 핵심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반유대주의다. 이에 따르면 유대인을 적대하는 자들은 모두가 잠재적인 나치가 된다.

따라서 이들이 보기엔 팔레스타인인들 역시 나치였다. 유대인들의 죽음을 보며 박수를 치는 자들이 나치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게 이들의 입장. 그 증오를 유대인들이 쌓아주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유대민족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니까.

그리고 그 팔레스타인인들을 ‘편들어서’ 평화협상을 강요하는 국제연합과 그 구성국들 역시 나치이긴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나치들을 모조리 핵으로 박멸하고 가나안 땅을 지켜내자! 어떤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결국 승리하는 건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 될지니!」

그러나 골수 시온주의자들의 목소리는 같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조차 공감을 받지 못했다. 극단주의자들이 신성한 가나안 땅에마저 핵을 쓰자고 부르짖지는 않았으되, 주변국에 핵탄두를 뿌려대면 가나안 땅이라고 무사할 리가 있겠는가.

그때야말로 유대인들은 전 인류 공동의 적으로 등극할 것이다.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알림 샤히디의 이름으로 제시한 평화협상의 조건들이 지극히 합리적이기도 했다. UN 안보리 결의를 이행하라는 강력한 명분에 더해 구체적인 조건들마저 온건하니, 샤히디 그룹의 상상을 초월하는 공세에 충격과 공포를 느낀 유대인들의 입장에선 차라리 이걸 받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선 것.

「이 협상에 응할 경우, 나 알림 샤히디는 알라의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만약 협정으로 정한 가나안의 평화를 부당하게 저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이 설령 알라를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알라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는 내가 성지의 수호자로서 맹세하는 바이다.」

그동안 내가 구축해온 알림 샤히디의 이미지와 신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도 효과를 발휘했다.

알림 샤히디가 가진 독실한 이슬람 성전지도자로서의 이미지는 알라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의 신용을 극한까지 끌어올려놓았다.

예루살렘 성전은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끝나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가나안 땅에 평화를 줄 요량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내가 약속한 대가들을 빠짐없이 수령했다.

덕분에 미국은 이번 사태의 중재자로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주변 아랍국가들의 경제제재가 미국 대통령의 순방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을 본 세계는 백악관 미치광이의 강력한 외교 리더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과 알림 샤히디는 스위스 제네바에 마련된 평화협상장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미국 대통령은 샤히디에게 강렬한 친밀감을 드러냈다.

「오, 내 가장 소중한 인터넷 친구. 드디어 당신을 현실에서 만나는군요. 웃어요! 사진 한 장 찍읍시다!」

미국 대통령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만나 악수를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는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으나, 세계는 이제 이 정도로는 놀라움을 느끼지 않았다. 알림 샤히디의 이미지가 워낙에 긍정적이었고, 미국 대통령의 광기는 이젠 일상과도 같았으므로.

이후의 협상에서 미국은 예루살렘 신탁통치위원회의 미국 지분을 이스라엘 측에 위탁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달래주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내내, 미국 대통령은 굉장히 신이 난 언행을 보여주었다.

「나, 이 정도면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다음 시상식 때 기대해 봐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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