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전쟁의 기반 (7)
맥팔란드는 중국의 인신매매와 「순화수술」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들을 수집해주겠다는 내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나는 이번에도 추가금을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애초에 고민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이어지는 대화는 그레이스와 관련이 있었다.
내가 처음에 거래를 제안할 때 장담했던 것처럼, 지금의 CIA는 그간의 성과를 토대로 주술사 왕과 신성왕국연합에 대한 비공식적 외교 실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다른 부처들이 나누어 맡아야 할 업무들마저 CIA가 독점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공무원들에게 있어서 자리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갑작스럽게 폭증한 고위직 TO는 승진적체에 시달리던 CIA의 공무원들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을 터. 그만큼 예산과 기능을 빼앗기게 된 다른 부처들의 사정 따윈 CIA가 알 바 아니다.
CIA는 이런 측면에서도 나를 포기할 수가 없다.
‘아예 시작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꿀단지를 제대로 맛본 지금이라면야.’
미국은 공무원의 해고 역시 탄력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다. 연방공무원의 해고가 비교적 까다롭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미국 내의 다른 직종들에 비해서 까다롭다는 이야기.
물론 CIA 요원들에겐 퇴직 후 협력업체로 자리를 옮긴다는 선택지가 있긴 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하청이라도 원청에 남아있는 것만큼 좋을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와서 기껏 확보한 고위직 TO들을 도로 뱉어낸다는 건 공무원들이 여간해선 감수하려 들지 않을 희생이다. 오히려 그러한 TO를 더 늘리려고 한다면 모를까.
따라서 맥팔란드가 주술사 왕이 얽힌 외교문제를 내게 문의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주술사 왕은 독일과 벨기에에 대해 어떤 방침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압박의 수위가 심상치 않은데, 혹시 뭔가 들은 게 있다면 말씀을 해주시지요.」
여기에 대해선 그레이스와 미리 오간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CIA, 나아가 미국이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을 선별하여 입에 담았다.
“그건 독일과 벨기에를 구분해서 이야기해야 하오. 독일의 경우, 그녀의 동기는 당신들이 짐작하는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요. 벌써 다 알고 있지 않소? 독일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녀가 무엇을 얻고 있고, 앞으로 또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을지.”
「그럼 벨기에는 다르다는 뜻입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벨기에 스스로가 다르게 만들고 있는 중이지.”
「흠…….」
“당신이나 나나 어차피 비공식적인 창구이긴 마찬가지이니, 솔직하게 말씀해보시오. 당신이 보기에도 벨기에가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도의적인 차원에서 지금보다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지요.」
그레이스가 일본에서의 중재 의식을 프로파간다의 장으로 삼은 데 대하여, 일본 정부는 짧게 유감을 표명한 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는 별개로 주술사 왕 진영의 사람들이 침묵할 이유는 없었고,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주술사 왕 진영에서 흘러나오는 과거사를 빠짐없이 전 세계로 송출했다.
이에 따른 후속보도들은 신성왕국연합과 독일, 그리고 벨기에 사이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외교적 갈등을 상세하게 담아냈다. 신성왕국연합의 재상이자 르완다의 대통령인 고독의 완전체는 다양한 국적의 기자들 앞에서 신성왕국연합의 입장을 설명했다.
「주술사 왕 폐하께서는 과거사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바라십니다. 독일과 벨기에 양국이 반환해야 할 유해를 반환하고, 관련하여 범죄혐의가 명백한 자들의 재판이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법에 따라 열릴 수 있도록 하며,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기만 한다면, 이 사태는 추가적인 갈등의 심화 없이 해결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까?」
세계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달라질 일이긴 하지만, 지금 듣기로는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닌 듯하다고.
이러한 여론의 형성엔 새롭게 조명을 받은 두 나라의 과거 행적이 큰 영향을 미쳤다. 누가 보더라도 독일과 벨기에가 명백히 나쁜 놈들이었던 것이다. 중재의식의 성공적인 마무리는 프로파간다의 효과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언뜻 보면 독일과 벨기에가 동일한 요구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나라의 처지가 서로 달랐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범죄혐의가 명백한 자들의 재판이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법에 따라 열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신성왕국연합의 요구였다.
이는 즉 범죄인 신병 인도와 재판권을 요구한 것인데, 독일은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모두 수명이 다해 죽은 지 오래이나, 벨기에는 그렇지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파트리스 루뭄바의 시신을 황산에 처박고 금니를 뽑아낸 헌병장교 제라르 소에테는, 21년 전 천수를 누리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를 받았던 헌병대원들 중엔 여전히 숨이 붙어있는 늙은이들이 있었으며, 파트리스 암살 작전에 관여한 외교부와 정보부의 관계자들 중에도 많은 생존자들이 남아있었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현역 시절엔 특급 기밀로 분류되었던 작전에 관여할 만큼 중요한 보직에서 근무했던 자들이지 않은가.
이들이 처벌을 받을 거였다면 의회조사로 진실이 밝혀졌을 때 이미 받았을 것이다.
이 늙은이들에겐 저마다 현역 시절에 쌓아둔 인맥과 영향력이 남아있었고, 옛 벨기에 식민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극우 세력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기도 했다.
이처럼 충실한 기반을 갖추고서 법을 무기로 스스로를 방어하니, 여론이 어떻든 간에 벨기에가 이들을 쉬이 내어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우리 벨기에와 주술사 왕의 동군연합 사이엔 상호주의에 입각한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어있지 않다. 조약을 통해 특별히 규정된 바가 없는 경우, 벨기에의 법률은 자국민 범죄 용의자의 타국 인도를 허가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부당하게 제기된 범죄혐의들에 대하여 벨기에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주장한다. 이 권리는 헌법에 규정된 벨기에 국민의 권리로서 벨기에의 주권이 보장하는 바이다.」
「애당초 주술사 왕 동군연합에 우리를 공정하게 심판할 법률과 사법체제가 있기는 한가? 민주주의 국가인 벨기에가 아프리카의 독재국가에게 자국민의 신병을 인도한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들에 대한 다수 여론은 벨기에 내에서도 좋지 않았다. 주술사 왕과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벨기에가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적 어려움은, 평소 식민제국의 역사에 은근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던 자들마저 생계형 반제국주의자로 바꿔놓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가장 강경한 비판자들조차도 늙은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이 법리적으로는 타당하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늙은이들의 주장대로 벨기에에서 벨기에의 법률에 의거한 재판을 실시할 경우,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조항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적 제국주의의 황혼기를 젊은 날의 영광스러운 추억으로 간직한 채 늙어가던 노인들은, 자신들을 규탄하는 시민들 앞에서 대놓고 비뚤어진 경멸감과 승리감을 드러냈다.
「우리를 대체 무슨 죄로 심판할 것인가? 살인? 시체훼손? 어느 쪽이든 공소시효는 만료된 지 오래다. 우리는 우리가 수호해온 벨기에의 법률 아래 자유롭다.」
이렇게 도발적인 언사를 늘어놓는 게 결코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생존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겉으로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터.
그러나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배신감에서 기인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평소 건강관리를 잘해온 듯한 늙은 제국주의자 하나는, 카메라가 비추는 앞에서 자신에게 침을 뱉은 젊은 시민의 멱살을 붙잡고 노호했다.
「우리는 애국자였다! 너희는 우리가 조국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기나 하나?! 우리들이 야만과 질병의 위협으로 가득한 열대의 밀림에서 젊음을 희생했기에 비로소 오늘날의 벨기에가 존재하는 거란 말이다!」
「대체 이 나라의 누가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의 희생으로 일군 토대 위에서 누릴 걸 다 누리며 살아온 젊은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성토하느냔 말이야! 우리가 죄인이라면 이 나라엔 단 한 사람도 무고한 자가 없다!」
이 장면이 나가고서 벨기에의 극우정당과 극우단체들은 연명으로 신병인도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애국자들을 팔아넘기지 말라! 문명화와 근대화의 은혜를 모르는 불한당들의 위협에 굴하지 말라! 조국을 위한 헌신은 반드시 보답받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애국자들이 흘린 피를 딛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저분들에게 비난이 아니라 존경을 표해야 한다! 저분들의 말씀처럼, 벨기에의 모든 국민들은 저분들에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칭 피해자라는 콩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벨기에에게 문명화의 빚을 지고 있다! 우리에게 다소의 과오가 있을지언정, 저들은 우리로 인해 잃은 것보다 우리를 통해 얻은 것이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문명국의 짐을 지지 않았다면 콩고는 계속해서 미개한 부족들의 땅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며, 결국엔 누군가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했을 것이다!」
극우진영은 루뭄바에 대한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냉전질서 하에서 빨갱이의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거나, 그의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바였다거나 하는 식으로.
벨기에 정부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늙은 제국주의자들을 보호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법이고,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의무이기에.
그간 벨기에는 이 일을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프로파간다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됨에 따라 협상력이 더욱 약화된 처지에 놓였다.
전쟁에서 명분이 왜 중요하게 여겨지던가. 국제여론이란 강제력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는 점에서는 한없이 강력한 것이기도 하다.
이 무기가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기가 아니라 무기를 쥔 자의 능력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
당초 벨기에가 제시한 타협안은 이러했다.
「루뭄바 총리의 이빨은 무슨 수를 써서든 돌려드리겠습니다. 또한 사건의 당사자들을 대신하여 국왕과 국무총리의 명의로 사죄담화를 발표하고, 양국의 협의를 통해 합당한 범위 내에서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과거사를 반성하는 저희의 진심을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루뭄바의 이빨을 ‘무슨 수를 써서든’ 돌려주겠다는 말이 나온 이유는, 이빨의 소유권을 두고 소송전이 벌어지고 있는 탓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두 개의 금니 중 하나는 일단은 벨기에 정부의 관리 하에 있었다. 6년 전, 헌병장교 제라르 소에테의 딸에게서 강제로 압류해놓은 덕분이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유산을 빼앗긴 딸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죽은 콩고 총리의 이빨이 문화재에 해당하며, 약탈로 습득한 문화재의 점유 및 소유권은 벨기에 민법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약탈로 습득한 문화재의 점유 및 소유권은 비단 벨기에만이 아니라 과거 식민지를 경영했던 모든 강도국가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제다.
옛 강도국가들의 법률은 이 문제에 대해 현재 소유자의 점유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있다. 그 소유자가 국가가 아닌 개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재작년, 벨기에 법원은 정부의 압류조치가 정당하며, 루뭄바의 이빨은 콩고로 돌아가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헌병장교의 딸은 이에 항소했고, 해당 소송은 초능력자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과 사법체계의 과부하로 말미암아 아직까지도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벨기에가 제시한 타협안을 무시해왔다.
「국왕과 총리가 대신 사죄하겠다고? 그럼 그들이 대신 목을 내놓겠다는 말인가? 그 정도로 진심어린 사죄라면 대속(代贖)을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다.」
벨기에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그레이스는 그 거부의 대가로 일본에서의 프로파간다를 터트려준 것이다.
그레이스는 내게 자신의 바람을 털어놓았다.
「생각지도 않게 굴러들어온 기회이긴 하지만……. 잘만 하면 말이지, 영국 코앞에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대군을 거느리고 영국을 침공하려면, 영국 본토와 가까운 곳에 거점을 마련해두는 편이 유익하다. 그레이스와 내가 각자 준비하는 군세의 규모가 좀이나 거대한가?
그레이스는 거점을 마련할 방안으로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할 요량이었다.
하나는 일본이 대영전쟁(對英戰爭)을 개시할 때 동맹으로 참전하여 대가를 받아내는 것. 군사동맹을 맺은 국가들이 서로에게, 혹은 일방에게 자국영토 내 군사기지 운영권한을 허락하는 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예컨대 채널 제도(Channel Islands) 즈음에 거점을 확보한다면 영국 본토침공의 발판으로 훌륭하게 기능할 터.
다른 하나의 방안은 이대로 벨기에를 계속해서 궁지로 몰아넣은 끝에 군항 이용권을 보상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 방안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제브뤼헤(Zeebrugge) 항만이었다.
그레이스는 말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프랑스의 협력을 받는 것이겠지만, 걔들이 영국을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칼레나 됭케르크 항만을 이용하게 해줄 리가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만약 그레이스가 주술사 왕의 이름으로 「영국을 정벌하려 하니 프랑스는 길을 빌려 달라」고 한다면, 프랑스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답할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지금의 상황을 토대로 예상하기로는.
고로 현실적인 최선은 일본과 벨기에 양쪽에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고, 차선은 어느 한쪽이라도 성공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방안에만 목을 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레이스가 예비계획을 마련한 건 현명한 일이었다.
‘일본령 채널 제도라……. 조금 안 어울리는 느낌이긴 하군.’
나는 일전에 경태가 말했던 기분을 조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상대로 주술사 왕의 입장을 탐색하던 맥팔란드는 최종적으로 다짐을 받듯이 물었다.
「즉, 주술사 왕은 현재로선 군사적 옵션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로군요? 벨기에가 진심어린 사죄와 보상을 행하고, 루뭄바 암살 사건의 책임자들을 인도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렇소. 하지만 벨기에가 과연 주술사 왕의 요구를 승낙할까 싶기는 하군. 오늘날까지도 「레오폴드 2세 기사단」 따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말이오.”
내 말을 들은 맥팔란드가 떨떠름한 느낌으로 되물었다.
「……레오폴드 2세 기사단이라고요? 그런 게 있습니까?」
“있소.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현 벨기에 국왕이지 않소?”
현재까지 잔존해있는 유럽의 기사단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린다. 하나는 전통적인 기사작위체계가 국가의 정식 수훈체계를 겸하여 존속하고 있는 경우.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성 모리스와 라자러스의 기사단」처럼 옛 왕실의 혈통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
내가 언급한 레오폴드 2세 기사단은 전자에 속했다. 수장은 벨기에의 국왕이며, 벨기에의 장기근속 군인들과 특별한 공로를 세운 군인들은 모두 이 기사단의 작위를 수여받는 명예를 누린다.
손목절단기 레오폴드 2세의 학정과 착취를 반성하고 있노라 말은 하지만, 그 시절의 벨기에가 누렸던 식민제국의 영광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게 벨기에인들의 속내였다.
맥팔란드가 짧은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
「그딴 게 왜 있습니까?」
“난들 아오? 아무튼 주술사 왕이 옛 식민지 시절의 원한을 명분삼아 유럽 방면으로 확장전쟁을 이어갈 구실을 찾는다는 걱정은 안 해도 좋소. 설령 군사적 마찰이 일어나더라도 그게 본격적인 전쟁으로 비화되긴 어렵지. 벨기에가 나토에 속해있는 한에는.”
「그건 그렇지요…….」
수긍하는 맥팔란드의 어조가 미묘한 것은, 아마도 나토에 대한 백악관 미치광이의 입장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든든한 미치광이가 당당하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토? 그거 왜 유지해야 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소련과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를 견제하는 장치로서 의미가 있는 집단안보체제다. 이 체제를 이용해 이기적인 유럽 국가들이 안보 무임승차를 해왔다며 불만을 표해온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가 카자흐스탄에서 알아서 병신이 된 지금 나토를 굳이 유지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나토는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중국을 견제하는 장치로서도 의미가 크다. 또한 러시아가 병신이 되었다고는 해도, 우수한 군사기술과 막대한 천연자원을 지닌 세계 1위의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유능한 독재자가 집권하기만 한다면 단기간에 강력한 군사력을 재건할 잠재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자들과 실무자들은 이번에도 사력을 다해 미치광이 대통령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었다.
외교·첩보 분야의 실무자들이 괜히 주술사 왕의 대유럽 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게 아닌 것이다.
나와 그레이스의 입장에서 나토는 영국 침공을 방해하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한 것이지, 나토를 탈퇴한 게 아니니까.
나토의 규약엔 회원국의 자격정지 및 방출에 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 스스로 탈퇴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다른 회원국들은 영국을 내보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토 내부에선 영국의 회원자격 일시 정지에 관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동맹 조약에 관한 비엔나 합의 제60조에 의거, “평화와 안보를 지속시키고 집단적 방어를 위한 각국의 노력을 통합하려는 동맹국들의 결의를 중대하게 저해하는 경우”, 조약기구의 나머지 회원국들은 만장일치를 통해 해당 국가의 회원자격을 정지시키거나 조약의 이행을 부분적·전체적으로 중단할 수 있다.」
사실 이건 나토의 정식 규정이 아니라 동맹국들의 추가 합의에 따른 유권해석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렇게 민감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에 굳이 벨기에까지 군사적으로 건드려서 일을 망칠 이유는 없다.
적어도 벨기에가 지금보다 더한 무덤을 스스로 파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