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전쟁의 기반 (5)
이번 중재의식은 주술사 왕의 권위를 수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일찍이 경태는 주술사 왕 신앙의 전 세계적 확산을 경계했지만, 나는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고래들을 이용해 끌어올린 권위는 고래들을 이용해 박살낼 수 있으니까.
예컨대, 고래들이 주술사 왕 동군연합(후루 신성왕국연합)의 선박들을 공격하고, 연안의 마을과 도시들에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필시 주술사 왕이 정령들의 분노를 샀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내가 고래를 가장하여 공격을 가해도 동일한 효과가 발생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해봐야 소용없다.
나를 죽이거나 설득하지 못하는 한 공격은 끝없이 계속될 테니, 희생양을 만드는 건 일시적인 시간벌이에 지나지 않는다.
희생양을 번제에 바쳤음에도 다시 공격이 이루어진다면 그때는 주술사 왕의 권위가 더 강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 승냥이들이 한가득이니 더더욱 그렇지.’
주술사 왕 신앙에 나라가 통째로 넘어갈 것을 우려하던 각국 정부와 정보기관들은, 때는 이때다 하고 합심하여 주술사 왕을 물어뜯을 터였다.
요컨대 내 도움을 통해 이루어진 중재의식은 그레이스에게 보여주는 내 무력시위이자, 그레이스가 이익을 얻는 만큼 나 역시 그레이스의 약점을 쥐게 되는 균형 잡힌 거래이기도 했다.
일단 런던을 무너뜨리고 원탁을 불태우기만 하면 된다.
그런 다음엔 대마법사로서 지금보다 더 폭넓은 운신의 자유를 누리며 주술사 왕의 권위를 해체할 수 있다. 내가 몸소 나선다면 주술사 왕의 대항마를 키우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이겠는가. 각국의 위정자들은 주술계의 2극 체제가 단극체제보다 훨씬 낫다고 판단하겠지.
지금은 굳이 그럴 생각까진 없으나, 상황 변화에 따라선 아예 내 존재를 드러낸 후 각국 정부와 정식으로 거래를 트는 방안도 검토 가능할 것이다.
중재 제의를 마무리 지은 그레이스는 비로소 뭍에 올라 일본이 준비한 국빈 의전을 받았다.
일본은 본디 그레이스를 교토에서 맞이하려 했었다. 공습을 겪은 도쿄엔 주술사 왕 정도의 국빈을 수용할 영빈관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 내 레이저 공격을 받은 아카사카 이궁(赤坂離宮)은 아직 복구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흉물스러운 폐허로 남아있었다.
도쿄 대공습 이래 천황 또한 교토어소(京都御所)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의전을 갖추기엔 도쿄보다 교토가 여러모로 나았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도쿄 방문을 고집했다.
「짐은 호사를 누리러 온 것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화합을 중개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러 온 것이다. 이런 짐이 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있는 땅을 지척에 두고서 멀리 편하고 아름다운 곳을 찾아가는 건 아귀가 맞지 않는 일이 아니겠는가? 일본의 정성은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발언이 전파를 타면서 일본인들은 다시금 감동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일본이 도쿄에 준비해놓은 의전은 국가원수의 격에 맞춘 것이었다. 이는 일본이 주술사 왕 동군연합을 정식 국가로 인정한다는 제스처로 해석 가능했다. 장차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이 확실시되는 나라의 국가인정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큰 의미가 있다.
본디 교토어소에 있던 천황도 오늘의 의전을 위해 도쿄로 와서 그레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황이 직접 국빈을 마중하는 건 중요한 우방국의 국가원수가 방문했을 때나 하는 일이었다.
「일본에 잘 오셨습니다. 당신께서 해주신 모든 일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우리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덕분에 이 나라는 힘겹게나마 망국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천황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환영사를 받은 그레이스는 천황과 악수를 나누며 짧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짐은 앞으로도 일본이 바른 길을 따라 걸으며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써 돕겠습니다.」
운집한 관중들은 그레이스의 변조된 음성을 듣고 뜨거운 환호를 보내었다.
과거였다면 이 장면을 본 일본인들 중 격앙되는 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엔 미국의 대통령이 오더라도 천황을 상대로는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는 미치광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무례하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올랐었다. 지금의 백악관 미치광이는 허리를 숙이기는커녕 악수를 하고서 천황의 팔을 툭툭 치는 행동을 보여주었으니까.
이후 그레이스는 도쿄 한복판에서 개방된 차량에 탑승한 채 카퍼레이드(Motorcade)를 진행했다. 교황이 외국을 순방할 때 종종 하는 것처럼 일반인들과의 거리를 매우 가깝게 유지하며 치른 행사였다.
주술사 왕을 보겠다고 몰려든 환영인파의 규모는 일본측 추산으로 물경 4백만 이상에 달했다. 긴 이동경로 전체에 걸쳐 대로 좌우가 사람으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주술사 왕! 주술사 왕! 주술사 왕!」
그레이스는 주술사 왕의 가면을 쓰고 장식이 많은 복장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러나 나를 의식해 착용한 바디스타킹만 아니었어도 맨살을 드러내는 데엔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생명」으로 멜라닌 색소를 조절하는 정도는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나만 하더라도, 「생명」을 다루는 기량이 늘어난 지금은 피부색을 완전히 바꾸는 데 3초가 걸리지 않는다. 여기에 화상이나 노화를 추가하고 근육량을 조절하며 머리카락까지 손을 대면 완벽한 변장이 된다. 다만 골격은 되돌리기가 비교적 번거로워 잘 손을 대지 않는 편이었다.
그레이스의 숙소는 현임 총리의 염문설 중 하나의 배경이기도 한 도쿄 제국호텔이었다. 저녁엔 이 유서 깊은 호텔의 연회장에서 정재계 인사들이 총출동하는 환영만찬이 예정되어 있다.
내게는 이 만찬이 중요했다.
주술사 왕의 중재 의식을 지를 날짜가 확정되었을 때, 주술사 왕 동군연합의 중심지인 도도마에서 암약하던 라일라는 내게 이렇게 알려왔다.
「어머니의 이번 일본행에 동행할 자매들 중엔 나하고 자리를 바꿀 1441번 자매가 포함되어 있을 거야.」
자리를 바꾼다 함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라일라는 지금처럼 은밀한 행동을 이어가는 대신 아예 그레이스-1441의 자리를 대체할 계획을 짜놓은 상태였다.
이를 위해 그레이스-1441을 제거, 또는 포획한 후 어딘가에 감금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1441은 라일라가 최초로 ‘설득’하는 데 성공한 자매였으니까.
처음 라일라가 설득 의지를 드러냈을 때 나는 그 위험성을 고려하여 불허한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그러나 라일라는 도도마 현지에서 자신을 돕는 내 부하들에게까지 비밀로 한 채, 독단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그리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그, 말을 듣지 않아서 미안.」
당시 조심스럽게 자신의 성공을 알리던 라일라의 태도는, 잘못을 저지른 후 혼날까 봐 겁을 먹은 춘식이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 그도 그럴 게, 자매들과 나는 유전자가 동일하고, 살아온 삶마저 거의 판박이인걸. 그냥 나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그게 곧 상대에 대한 이해야. 내가 상대에게서 결핍을 느꼈다면 그 결핍은 정말로 존재하는 거지. 특히나, 그 상대가 하나의 언니(Elder)로부터 기억을 물려받은 자매라면 말이야.」
라일라는 이야기했다. 지금의 복제체 자매들 사이에선 주어진 삶에 대한 회의와 어머니에 대한 소극적인 불만이 고개를 들고 있노라고.
「어머니와 우리가 처한 상황은 과거와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크게 달라졌지. 하지만 우리에 대한 어머니의 취급은 과거와 달라진 게 사실상 없다시피 해.」
「자매들이 조금은 우울한 의문을…… 차마 드러내지는 못하는 소극적인 불만을 품는 지점이 바로 여기야. 다들 어느 정도는 이런 서운함들이 있는 거지. ‘어머니는 왜 여전히 우리를 소모품처럼 다루실까. 그게 가장 효율적인 생존전략이었던 시절엔 당연한 일이었어도, 이제는 그렇지가 않은 것 같은데.’」
듣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과거에도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효율적인 생존전략이기는 개뿔이.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인적자원 관리다.
그러나 내 생각이야 어쨌든, 그간 받아온 세뇌가 있는 복제체들은 그런 식으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고, 또 웨인의 아래에서 안정을 찾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것인데…… 우리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엔 다소 강박적인 구석이 있지 않나 싶어.」
「결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 웨인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선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해둘게.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요. 부디 용서해주세요.”」
용서를 구하는 공손한 말은 조직의 주 언어인 한국어로 한 것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나는 질책할 마음을 거두었다. 이미 잘못을 알고 또 뉘우치고 있다면, 거기에 대고 화를 내는 건 역효과를 보기 쉬운 일이다.
다만 내게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던 라일라가 내 화를 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독단적으로 일을 벌인 동기엔 조금 의문이 있었다.
라일라는 내 의문에 이렇게 답했다.
「할 수 있다……를 넘어서서 하고 싶다, 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거든. 처음엔 참으려고 해봤는데, 이 충동이 가면 갈수록 강해지기만 하더라. 괴로울 정도였어.」
나는 그 굳이 그 충동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듣지 않고 넘기는 편이 이로울 것 같아서였다.
그레이스-1441은 라일라가 684이던 시절에 몇 차례 행동을 함께한 적이 있고, 라일라가 「콜레로의 뱀」이 되고 나서도 임무상 마주칠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레이스 복제체들은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선 각자가 수행한 임무의 내용을 공유하지 않는다. 때문에 1441은 라일라가 말하는 과거의 기억들을 통해 라일라의 정체가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684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1441번 자매는 처음엔 내 존재 자체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 어머니의 통제를 벗어난 곳에서 살아가는 자매가 있다는 게 너무나도 놀라웠던 거야. 나는 1441번 자매의 표정을 보자마자 감이 왔지. 아, 이 자매가 한 번쯤은 과거의 나와 같은 상상을 해보았구나, 라고.」
과거의 나와 같은 상상이란, 684로서 ‘도망자’ 596의 자유로운 삶을 상상했던 걸 의미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전율하는 거인의 영지에서 596과 조우했을 때 어떻게든 그녀의 목숨을 붙여놓을 수만 있었다면, 지금쯤 아주 큰 복리효과를 누리고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을.
「설득은 어렵지 않았어. 당연히 경계심을 보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호기심이 폭발하는 바람에 거기에 하나하나 대답해주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웠다고나 할까.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596번 자매가 남긴 기록에 관한 이야기였을 거야. 1441번 자매는 내가 그 일기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거의 비슷하게 느꼈으리라고 봐.」
라일라가 보았다는 596의 일기는 내가 지금 회상해도 조금은 혐오감이 드는 내용이었다. 자식의 자궁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식의 육체를 강탈하고, 자신을 품은 자식의 배를 부풀려 터트리며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어머니라니.
피와 양수에 젖은 채로 걸어 나오는 그레이스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가치가 높은 인적자원을 그런 식으로 소모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라일라는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농담 같겠지만, 웨인이 자매들에게 먹여주고 다닌 시폰 케이크도 도움이 되었어. 1441번 자매는 그걸 먹어보고 ‘다섯 대마법사의 살해자를 섬기는 자들은 대체 어떤 생활을 하는 걸까? 평소에도 이렇게 맛있는 걸 일상적으로 먹는 걸까? 우리 칠각기사단하고는 여러모로 다른 것 같은데.’ 하는 궁금증들이 끊이질 않았다고 했거든.」
이 말을 들은 경태는 “그레이스 복제체들에게 있어서 초콜릿 시폰 케이크라는 건 대체 뭘까…….”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2차 대전 당시 롬멜의 일화를 떠올렸다. 그가 북아프리카 전선에 있을 적에, 미군에게서 노획한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마음이 꺾였다는 야사를. 때로는 단지 케이크 하나가 특정 조직의 보급과 구성원들에 대한 처우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체감하는 격차는 이성적인 헤아림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강력한 법이다.
그밖에도 라일라는 유전자가 같아서 그런지 놀라는 부분도 비슷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라일라가 경험한 내 조직에서의 생활을 듣고 1441이 처음에 보인 반응들이 자신과 너무나 닮아있어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441은 라일라와 자리를 바꾸는 데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라일라가 경험한 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렇게 확인을 한 다음에야 마음을 확실하게 정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1441번 자매가 완전히 넘어오면 그때부터는 새로운 설득에 가속이 붙을 거야.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나아. 그러니 웨인. 우리의 계획을 허락해주었으면 해.」
위험부담을 고려하여 처음부터 아예 시작을 않았다면 모를까,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라일라의 계획을 거부할 이유 따윈 없었다.
나는 계획을 승인했다.
1441의 ‘망명’은 제국호텔에서 만찬이 이루어질 때 실행하기로 했다. 내가 황금기의 눈으로 망명의사의 진위를 직접 판별하고, 진심임이 확실하다면 대형 행사를 치르는 호텔의 번잡함을 틈타 망명자를 빼돌리기로 한 것이다.
위장신분으로 국빈만찬에 참석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방일일정에 관한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일 무렵, 그레이스는 선전선동에 관한 내 권고를 수용하여 일본정부에게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만찬에 참석할 권리를 재난복구 및 이재민 구호를 위한 자선경매에 부치는 게 어떠한가? 이 세상엔 짐이나 짐의 사도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천금도 아까워하지 않을 자들이 많을 터이다. 정치인, 기업가와 투자자, 그리고 저명한 주술사들에 이르기까지. 짐은 그들의 돈이 좋은 곳에 쓰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제안을 받은 시점에서 일본은 이미 「인간과 고래의 평화를 위한 중재 제의(祭儀)」의 중계권 판매를 통해 70억 달러 안팎의 수익을 올린 상태였다. 일본정부와 일본국민들은 끝없이 계속되는 주술사 왕의 호의에 당혹스러운 기쁨과 감격과 감사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선경매는 주술사 왕 주관과 일본 주관으로 양쪽에서 병행되었다. 어느 쪽이든 조달된 자금은 백 퍼센트 재난복구와 이재민 구호를 위해 쓰기로 합의했고, 신원확인의 책임은 각각의 시행주체에게 있었다.
이 모든 과정들을 거쳐, 2월 1일 저녁의 도쿄에서, 그레이스-1441의 일시적인 망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