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전쟁의 기반 (3)
내가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과 별개로 일본 총리의 지지율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이 인간이 장차 전시내각의 총리로서 흔들림 없는 지도력과 우직한 추진력을 발휘해줘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 총리의 됨됨이엔 약간의 불안요소가 존재했다.
비록 경태의 입에서 “고난을 겪으며 각성했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과거와 달라진 인물이지만, 그 같은 변화가 반드시 깨끗한 사생활과 청렴한 정치활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추문은 도리어 과거보다 더 빈번해졌다. 극한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역경을 이겨내며 자아가 비대해진 탓인지, 여러 여성들을 상대로 한 불륜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기되었고, 공금을 유용했다거나 인사 청탁을 받았다거나 하는 의혹들도 굵직한 건수들이 미해결 상태로 쌓여있었다.
그러나 총리는 모든 의혹들을 상쾌한 미소로 받아넘겼다.
「총리! 지난 토요일 제국호텔에서 카츠라 마사코 양과 함께 있었던 이유가 뭔가요?!」
「그걸 제가 지금 설명하는 건 별로 펀(fun)하지가 않군요. 저는 순수한 사람이고, 남녀 간에도 순수한 우정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로만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총리! 일본공산당 측에서 자민당의 정치자금이 총리 개인의 계좌로 흘러가고 있다는 강력한 정황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한 해명을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그걸 굳이 해명하는 건 별로 쿨하지가 않네요. 변명이란 실제로 뒤가 구린 사람들이나 애써 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한결같은 자세로 정무에 임할 따름입니다. 그러다 보면 제 결백함은 자연히 드러나겠지요.」
「총리! 국가공안위원장을 인사청탁으로 임명했다는 의혹이 사실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제 내각의 인사는 단 한 점의 오탁(汚濁)도 없이 섹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제가 그러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 약속이 증거입니다. 음!」
이렇게 건성으로 대응함에도 불구하고 총리에 대한 일본인들의 지지는 굳건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거 사람이 나라를 살리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에 가까웠다.
원래 정권에 대한 평가는 9할 이상이 경제의 향방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가장 극성스러운 불만분자들조차, 일단 배를 불려주기만 하면 대개는 엉덩이가 무거워져 입으로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법.
사회적 약자들이 순수하게 배가 고파서 사람을 잡아먹는 수준의 경제적 지옥을 경험해본 일본인들은, 운이든 실력이든 결과적으로 임사상태였던 경제를 살린 총리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극성스러운 소수가 다수를 능가하는 목소리로 총리를 성토해봐야, 여론조사는 언제나 대중들의 한결같은 너그러움을 보여주었다.
그 너그러움에 못을 박은 건 총리가 강행한 예금봉쇄(예금압류) 실행조항 폐기.
한때 일본의 경제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던 원인 중 하나는 예금봉쇄에 대한 대중의 공포였다. 이대로 가면 2차 대전 때처럼 개인의 예금을 압류해서 나라살림에 더할지도 모른다는 광범위한 두려움이 크고 작은 뱅크런 사태들을 촉발했던 것이다.
일시적인 인출 중단 조치는 국민들의 두려움을 더욱 자극하는 악수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예금봉쇄 실행조항을 무작정 폐기해버리자니, 비관과 절망이 정말 극에 달했던 시기의 일본은 해당 조항의 존치가 주는 국가신용도 상의 이익을 무시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러나 경제 지표들이 반등을 이어나가면서, 총리는 2차 대전 이래 줄곧 존속해왔던 예금봉쇄 실행조항을 전격적으로 폐지해버렸다.
「이제 국민 여러분께서는 더 이상 내 예금을 하루아침에 다 빼앗겨 버릴까봐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사유재산의 보호는 국가와 국민의 약속이고, 예금의 보호는 은행과 고객의 약속이며,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총리인 저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니까!」
경제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기가 지나갔다고 백 번을 떠들어대는 것보다, 이 한 번의 조치가 국민들에게는 더 강한 신뢰감과 안정감을 선사했다.
이 같은 전적들이 견고한 기반으로 깔려있었기에, 자신감에 찬 총리가 주변국들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야스쿠니 신사의 지위를 재규정하는 초강수를 둘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총리의 정치기반은 지금보다 더한 반석 위에 오를 터.
「휘이이이이- 위잇- 위우우웃-」
보소반도의 남쪽 바다에 각성체 혹등고래들의 노랫소리가 메아리쳤다. 내 호출신호를 듣고 모여드는 고래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아졌다.
파도 위에선 주술사 왕의 제의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파도 아래에 머물며 그레이스가 하는 짓을 멀찍이 지켜보았다.
‘저 미친년도 이런 쪽으로는 고생이군.’
나도 종종 거북스러운 역할극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긴 하지만, 주술사 왕 행세를 하는 그레이스는 빈도와 강도 양면에서 나보다 더 고생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예의 그 바디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어 생체신호를 읽지는 못하나, 그레이스가 지금과 같은 광대 노릇을 즐거워할 것 같진 않았다.
그레이스가 주술사 왕으로서 보여주는 일거수일투족은, 그저 외관상으로만 그럴싸할 뿐 마법적인 실효성은 전무한 문자 그대로의 연극이었다. 같은 대마법사가 주시하는 가운데 행한다면 나라도 몹시 마뜩잖은 마음이 들 법한 일.
여느 때처럼 행사를 치르는 집의 안주인 같은 역할을 하던 키요우타마히코가 내게로 다가와 물었다. 나는 번역기에 뜨는 초벌번역과, 스텔라 포르투나와의 유선연결을 통해 받는 실시간 피드백을 참고하여 고래의 말을 이해했다.
「이렇게 계속 돌기만 하면 돼? 빙글빙글?」
내가 그렇다고 답해주자, 키요우타마히코는 몸을 한 번 기우뚱 하고는 제 동족들에게 내 의지를 전달했다.
키요우타마히코가 몸을 기우뚱 하는 동작은 마츠오를 포함한 고래 언어 연구팀과 소통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습득한 것이었다. 이는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 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우리가 고래들을 연구하려는 의지만큼이나 우리를 학습하려는 고래들의 의지도 높았다.
주술사 왕과 일본 총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해상에서 이루어졌다. 일본 총리는 먼저 뭍에서 의전을 갖춰 맞이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레이스는 총리의 제안을 거부했다.
「평화가 먼저이고 예우는 그다음이다. 주술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으니 그들의 시름을 한시라도 빨리 덜어주는 것이 옳다.」
그레이스의 입발림 말은 주술사 왕을 기다리던 일본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수중엔 나 혼자만 머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주술사 왕의 사도를 가장한 그레이스 복제체들, 그리고 주술사 왕을 섬기는 잡다한 주술사들이 가면을 쓰고 다종양한 전통 의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고래들 사이를 어지러이 누비고 다녔다. 나라는 나무를 숨길 숲을 준비한 것이다.
이렇게 해놓으면 다른 외부인들을 물 아래 들이기도 가능해진다.
고래를 치료하는 내 존재감은 다른 각성체 고래들에게 가려질 테고, 나와 내 부하들 외에는 혹등고래들의 언어를 해석해낼 집단이 없다.
그래서 파도 아래엔 카메라를 든 다이버들 역시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막대한 중계권료를 지불하고 제례현장을 중계할 권리를 획득한 전 세계 주요 방송사들의 촬영인력들이었다.
그레이스는 이것 또한 이익의 극대화에 이용했다.
「짐은 위대한 정령들이 임하는 신성한 의식이 천박한 관심과 하찮은 물욕 따위로 더럽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중재제의의 취지를 고려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동시에 주리고 헐벗은 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신성한 중재의 의식을 전파에 실어 중계하고자 하는 자들은 저마다 최대한의 의연금을 내어 일본인들을 돕도록 하라. 선별은 짐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행할 것이다.」
「다만 예외는 있다. 선별과 별개로 통제는 짐이 행한다. 또한 영국·독일·벨기에 세 나라는 어떠한 경우에도 의식의 현장에 접근해선 안 된다. 일본인들은 경계할지라. 세 나라에 속한 자들이 중재의 현장을 범하면 의식은 반드시 부정을 탈 것이다. 이 금기는 정부와 무관한 개인들에게도 적용된다.」
일본인들은 주술사 왕의 배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전 열도에서 주술사 왕에게 감사를 표하는 수십 개의 집회가 열렸을 만큼.
그러나 일본 정부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주술사 왕이 독일과 벨기에에 반감을 표한 것이 자국의 상임이사국 자격 획득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던 까닭이다.
주술사 왕의 중재 제의는 전 세계 초유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행사를 프로파간다의 장으로 이용하는 건 당연한 일.
다만 그레이스의 목적은 세계인들에게 “주술사 왕이 왜 저런 말을 했지?”라는 의문을 갖게 한 시점에서 달성된 것이었으므로, 쩔쩔매며 양해를 구하는 일본 정부에겐 다시 한 번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짐의 입장과 귀국의 입장이 별개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해도 좋다. 그러니 그대들은 어쩔 수 없이 짐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 말하라. 짐은 그대들이 유감을 표하더라도 이해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비공식적으로 깊은 감사를 표한 후 그레이스의 권고를 따랐다.
그레이스가 독일과 벨기에를 특별히 골라 엿을 먹인 건, 주술사 왕 동군연합 내에서 현재 두 나라가 관련된 선전선동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구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무장항쟁을 주도했던 독립군 지도자이자, 탄자니아 민족주의 운동의 아버지 격이 되는 「주술사 술탄 음크와와」의 두개골 반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대기근으로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짓밟은 후, 죽은 주술사 술탄의 두개골을 적출하여 기념품으로 가져갔다. 사냥한 짐승의 뼈를 트로피로 삼는 건 사냥꾼의 당연한 권리였으니까.
술탄의 두개골은 독일제국의 영광과 사냥꾼들의 위업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한동안 베를린의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이 두개골은 1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 제2제국이 해체될 때 베르사유 조약에 반환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패전국인 독일도, 조약에 해당 조항을 집어넣은 영국도 실제 반환엔 별 관심이 없었다. 정확하게 그 해골을 명시하여 적은 조항이 아니라 포괄적인 약탈품 반환에 관한 조항이었으므로.
그래서 실제 반환은 2차 대전이 끝나고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독립한 식민지인들이 탄원에 탄원을 거듭한 끝에야 간신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주술사 왕의 신성한 권위로 독일이 반환한 해골이 가짜라고 선언했다.
「옛 주술사 술탄의 영광과 비탄을 기억하는 자들이여. 짐에게 충실한 와헤헤(Wahehe/헤헤족)의 백성들이여. 짐이 해골에 깃든 망자의 영혼과 소통을 해본 바, 유감스럽게도 이 해골은 그대들이 경애하는 주술사 술탄 음크와와의 것이 아니다.」
그레이스가-혹은 프로파간다를 담당하는 복제체들 내지 칠각기사단의 참모들이-주목한 것은 해골의 반환이 이루어진 방식이었다.
이게 가짜라고 주장해도 독일은 할 말이 없다.
왜냐면 본인들도 진짜를 주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반환이 이루어질 당시, 이 일을 담당했던 독일인들의 고압적인 태도를 요약하면 딱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니들이 알아서 찾아가라.」
반항적인 식민지 짐승들의 두개골을 수집하는 건 독일제국의 장교들에겐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취미였다. 그리고 서로 명성의 높고 낮음을 겨루는 사냥꾼들이 특별한 두개골들을 골라 본국으로 보내는 것 역시 그러한 취미의 일부였다.
시간이 흘러, 1953년의 브레멘에서, 독일인들은 그렇게 모인 2천 개의 해골 컬렉션 앞에 옛 식민지 출신 깜둥이들을 데려다 놓고 무성의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찾는 해골은 아마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우리는 모르겠으니, 느낌이 이거다 싶은 것을 말씀하십시오. 가져가게 해드리겠습니다.」
2천 개의 해골 컬렉션 중 동아프리카 컬렉션에 속하는 해골은 84개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이 분류는 정확하지 않았다. 박물관에 기증된 해골 컬렉션은 주로 우생학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용도로 쓰였는데, 우생학의 유행이 지난 시점에서 해골들의 쓸모도 다하여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심지어 2차 대전의 혼란 속에서 유실된 해골들마저 있었다.
결국 독립한 식민지인들은, 그 부정확한 분류의 84개 해골들 가운데 하나를 감으로 골라 되찾아왔을 따름이다.
술탄은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었다 전해지므로, 총알구멍이 남아있는 게 술탄의 해골이겠지 하고 고르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레이스는 주술사 왕으로서 재차 선언했다.
「술탄 음크와와는 와헤헤의 운명을 한 몸에 짊어진 강력한 주술사였다. 그러한 주술사가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 죽음 이후마저 끔찍하게 모독당한 것은, 우헤헤(헤헤족의 땅)의 정기를 아주 크게 일그러뜨려놓았다. 그 이후 와헤헤 사람들이 짐의 통치를 받기 전까지 겪었던 숱한 불행들은 모두 그 일그러짐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노라.」
「한마디로, 독일인들은 죽은 술탄의 유해를 검고 추악한 악의로 물들임으로써 그가 다스리던 땅 전체에 강력한 저주를 걸었던 것이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은 자가 있다면 가해자는 마땅히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왕의 정의이다.」
이렇게 선언한 그레이스는, 나와의 통화에서는 유쾌한 감정을 담아 웃었다.
「명분이 너무 좋지 않아? 유럽연합의 수장 격인 국가를 아무런 부담 없이 외교적으로 찍어 누를 구실이 생긴 거란 말이지. 이 문제에 대해선 내가 아무리 패고 또 패도 독일은 찍소리 못하고 맞는 수밖에 없어. 큭큭.」
주술사 왕의 주술적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 한, 독일이 그레이스의 외교적 공격을 방어할 방법 따윈 없다.
그런데, 주술사 왕의 주술적 권위를 부정하는 건 “독일은 공식적으로 기적태환권 레페의 가치를 부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레이스가 독일 기업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금융기관들을 레페 거래망에서 배제해버려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니, 굳이 그레이스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다른 국가들이 알아서 거리를 벌릴 터. 독일이 그런 짓을 해버렸다간 유럽연합의 경제도 유탄을 맞게 된다.
그레이스는 이 강력한 명분을 유럽연합의 갈라치기에 이용하고 있었다. 유럽연합이 주술사 왕 동군연합에 대하여 통일된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주술사 왕 동군연합의 성장엔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실제로 독일이 그레이스에게 두들겨 맞는 동안, 유럽연합은 이렇다 할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다 거기서 거기인 놈들인데 중재는 무슨 중재인가.
나는 다른 유럽국가들의 침묵을 이해했다.
‘괜히 나섰다가 자기들에게도 불똥이 튈 위험을 감수하느니, 독일이 처맞는 동안 조용히 자기들 앞마당을 정리해놓는 게 낫지.’
그게 과연 정리가 될까 싶기는 해도, 힘닿는 데까지는 최대한 노력을 해보는 게 맞다. 적어도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로 두들겨 맞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레이스는 이런 옛 강도국가들을 상대로 디바이드 앤 룰을 실천했다. 다른 국가들이 조심스럽게 과거사 정리 관련 사안들을 가지고 물밑접촉을 시도해오자, 그런 시도들을 독일과는 다른 온도로 받아준 것이다.
「그대들은 짐의 이름인 무크와비응이카의 기원을 아는가? 「많은 땅의 정복자 무크와비응이카」는 본디 주술사 술탄 음크와와의 진명(眞名)이었음이라.」
「고로 주술사 술탄의 신원(伸冤)은 짐에겐 왕작(王爵)의 정통성이 달려있는 중요한 문제로다. 그대들이 이렇게 스스로 나아와 고하는 죄들은, 정성을 참작하여 그보다 온건하게 다루어줌이 마땅하리라.」
나는 이러한 전말을 조잘대며 “잘했지? 잘했지?” 이 지랄을 떨어대는 그레이스에게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꼈다. 그레이스의 천진난만한 소녀 흉내엔 라일라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어 징그러움이 더했다.
벨기에는 그레이스가 말한 ‘온건함’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레이스가 술탄 음크와와의 유해로 인해 헤헤족의 땅이 저주받았노라 이야기하자, 이웃한 콩고의 부족들 다수가 덩달아 충격을 받은 까닭이었다.
그들은 왕에게 눈물로 탄원했다.
「위대한 왕이시여! 저희들의 저주도 함께 풀어주십시오! 저희도 일찍이 위대한 루뭄바의 유해를 도둑맞았으니, 후손들의 앞날에 액(厄)이 끼지 않으려면 유해의 작은 조각이라도 찾아와 폐하의 땅에서 안식을 찾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루뭄바의 이빨이 더는 도둑놈들의 수중에서 욕을 보지 않게 해주소서!」
위대한 루뭄바란 콩고의 독립운동가로서 독립 이후 총리까지 역임했던 파트리스 에머리 루뭄바(Patrice Émery Lumumba), 본명 엘리아스 오킷-아솜보(Élias Okit'Asombo)를 말했다.
공교롭게도 오킷-아솜보라는 이름은 「단명하는 저주를 받은 자의 후예」라는 뜻이다.
과거보다 더 강화된 주술신앙의 영향 아래에서, 콩고인들은 한때 나라 전체의 운명을 짊어졌던 독립영웅의 유해가 모독을 당하고 있기에 자신들의 수명이 줄어든다고 믿었다.
아프리카의 보편적인 주술적 믿음에 따르면, 망자의 유해를 가지고 거는 저주는 굉장히 강력한 것이다. 이 저주는 주술사가 아닌 일반인들도 행할 수 있으며, 의지가 없더라도 행위만으로 완성될 수 있다.
그레이스는 백성들의 청원에 응해주었다.
「이미 유럽 국가들에게 해놓은 말이 있긴 해도…… 청원이 들어왔고, 시기가 겹치니까 말이지. 주술사 왕이 자신의 주술적 해석을 번복할 순 없잖아? 각각의 부족들에게 이중 잣대를 적용한다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고 말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쪽으로도 선전선동과 외교공작을 해봐야지. 일이 잘 풀리면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영국 본토 진공에 직접적인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독립 콩고의 초대 총리였던 루뭄바는 옛 식민모국인 벨기에의 손에 암살당했고, 유해는 암살자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인물이다.
내가 알기로, 루뭄바와 벨기에의 갈등이 시작된 계기는 벨기에 국왕 보두앵의 콩고 방문이었다. 독립할 식민지를 찾은 20대의 젊은 벨기에 국왕은, 증조부 레오폴드 2세가 손목을 자른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나라에서 증조부의 통치를 미화하는 놀라운 짓을 저질렀다.
그 내용을 압축해놓으면 이러했다.
「레오폴드 2세께서는 영민한 지도자셨고, 오늘날 여러분이 맞이한 문명국 콩고의 독립은 레오폴드 2세께서 처음 짊어지신 「벨기에에게 주어진 문명국의 짐(Civilizing mission/Mission civilisatrice)」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뒤를 이어 이 땅을 계속해서 문명화해왔으며, 이렇게 그 결실을 보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콩고에 만들어놓은 모든 것들을 여러분에게 양보합니다. 바라건대, 지나치게 성급한 개혁으로 우리가 만들어 넘겨드린 국가구조를 파괴하진 마십시오. 적어도 여러분이 우리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의 곁에 남아 여러분에게 현명한 조언을 드릴 것입니다.」
‘콩고의 손목절단기’ 레오폴드 2세의 통치에 대한 미화로 시작해서, 독립 이후에도 벨기에가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말로 끝을 맺은 세기의 명연설이었다.
이 연설을 듣고 피가 거꾸로 솟은 루뭄바는 예정에 없던 기습연설을 통해 벨기에와 서구세계의 식민통치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오늘 콩고의 독립이 벨기에와의 우호적인 협정을 통해 선포되고 있습니다만, 그 어떤 콩고인도 이 독립이 벨기에의 양보 따위가 아니라 콩고인들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바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궁핍과 고통에 굴하지 않고, 힘도 피도 아끼지 않는 투쟁을 통해서 말입니다.」
「콩고 독립 만세! 아프리카 통합 만세! 독립적이며 주권을 가진 콩고 민주공화국 만세!」
충격을 받은 벨기에는 이때부터 루뭄바의 ‘킬각’을 재기 시작했다. 이 건방진 깜둥이가 살아있으면 옛 식민지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남겨두기가 불가능하겠구나, 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성난 식민지인의 비난에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루뭄바가 벨기에의 양보를 부정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때의 유럽인들은 문명국들의 ‘도덕적이면서 관대한 양보’를 통해 식민지들을 평화롭게 놓아준다는 나르시시즘적 자기최면에 빠져있었던 까닭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식민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으니까.
무엇보다, 식민지인들의 마인드가 다 이런 식이면 유럽 국가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는 어렵게 된다.
기득권 유지가 무언가.
‘훗날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모든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복수를 경계해야 하는 법.
서구의 보수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루뭄바를 “우리가 양보를 해주는데도 고마운 줄 모르고 폭력적인 비난이나 일삼는 우악스러운 야만인” 쯤으로 묘사했다.
이 일로 서방진영의 눈 밖에 난 루뭄바는, 시간이 흐르고 점점 더 갈등과 고립이 심화됨에 따라 결국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의 묵인 아래 벨기에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군이 정권을 탈취했으며, 새로 수립된 군사정권은 독립운동가로서 최고의 명망을 지닌 초대 총리를 죽여 없애고 싶어 했다.
워낙에 명성이 높은 인물이라 그냥 죽여 버릴 수는 없었기에, 군사정권은 후원자인 벨기에와 협력하여 항공납치 및 암살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여기서 뜬금없이 영국 놈들이 끼어든다. “그거 우리도 같이 합시다”라고. 루뭄바의 정책들이 영국 소유의 광산들에서 나오는 이익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루뭄바를 처리함으로써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재집권의 가능성을 완전히 일소하기를 바랐다.
벨기에, 콩고 군사정권, 영국 정보부 MI6가 힘을 합쳐 납치 및 암살계획을 짰는데, 도피 생활을 하는 실각한 총리 따위가 무슨 수로 살아남나.
루뭄바는 4인의 벨기에 장교들이 입회한 자리에서 총살을 당해 죽었고, 그 시체는 한 번 땅에 묻혔다가 벨기에 헌병대에 의해 다시 파내어져 황산 세례를 받았으며, 이 일을 담당했던 헌병장교는 녹이고 남은 유해에서 금니만 뽑아 기념품으로 챙긴 후 나머지 유해를 잘게 갈아 흩어버렸다.
그 금니가 바로 콩고의 여러 부족들이 되찾아달라고 청원한 「루뭄바의 이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