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20화 (520/561)

#52. 전쟁의 기반 (2)

일본 총리가 주술사 왕에게 요청한 의식, 이른바 「인간과 고래의 평화를 위한 중재 제의(祭儀)」는 2월 첫째 날에 행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레이스와 내가 서로의 일정을 조율한 끝에 도출한 길일(吉日)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그날은 공교롭게도 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초하루였다. 덕분에 그레이스가 굳이 이러이러하여 길한 날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온갖 사이비 주술사들이 알아서 해몽을 떠들어대는 편리함이 있었다.

중재제의까지 스무날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일본 총리는 전소(全燒)해버린 야스쿠니 신사의 터를 전과는 다르게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 일본의 수호신사이기에 특별한 지위를 인정해왔던 것이며, 언젠가는 신사의 땅과 재산을 모두 국가에 반환한다는 약속 위에서 그 지위를 유지해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 오래된 약속에 근거하여, 저는 지금이야말로 야스쿠니 신사의 지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만약 야스쿠니 신사를 지난날과 같은 형태로 재건한다면, 과연 전 일본의 수호신사로서 주어진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불가사의한 변화들이 도래하기 이전의 과거에는 야스쿠니 신사가 수호신사의 이명에 부끄럽지 않은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민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며, 저는 그 시절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진심으로 존숭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맞이한 새로운 시대엔 보다 실제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수호신사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살아 숨쉬는 거대 신령들이 바다를 헤엄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기존에 모시던 신위들과 호국영령들의 가호만으론 전 일본의 수호신사에게 주어진 거대한 소명을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우리가 경험한 미증유의 재난이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처럼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현실을 바꾸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야스쿠니 신사의 부지는 전 일본의 중심부와 가까워 실로 일본을 수호하는 신사가 자리할 만한 땅입니다. 저는 이 땅에 이제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일본의 국운을 가호하는 신관과 제주(祭主)들이 함께 자리 잡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야스쿠니 신사는 여전히 일본의 수호신사를 자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더는 유일한 수호신사가 아니게 될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신사의 소장품들이나 과도하게 넓은 부지의 일부를 경매에 부쳐 이재민 구호기금과 재난복구자금에 보태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국민 여러분들 가운데 남다른 애국심과 경제적인 여유를 겸비한 분들께서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적인 소장품들을 최대한 높은 가격에 매입하여 주시고, 도쿄의 심장부에 위치한 금싸라기 같은 땅을 환매조건부로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한다면, 당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분명 여기에 화가 나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수십만의 이재민들과 수백만의 어린이들, 수천만의 사회적 약자들이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는 일본의 현실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총리의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극우진영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반발은 이번에도 유의미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구심점 역할을 할 조직들의 기능적 와해였다.

이럴 때 가장 앞장서서 정치적 반대 움직임을 주도해야 할 두 단체, 「야스쿠니 신사 숭경봉찬회(靖国神社崇敬奉賛会)」와 「영령에게 보답하는 모임(英霊にこたえる会)」의 중앙 관리기능은 야스쿠니 신사가 모두 불타버리면서 함께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핵심간부들 중 일부는 도쿄 공습의 혼란 속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다시 일부는 페스트에 걸려 생사를 달리했다.

살아남은 간부들은 성난 극우들 앞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입장을 밝혔다.

「우리도 당장 조직을 정상화하고 싶습니다만…… 관계자들의 빈자리도 빈자리이고, 무엇보다 서류가 전부 소실되어 빠른 정상화가 불가능합니다.」

보수적인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특출나게 더 보수적인 중늙은이들이 간부로 앉아있었으니, 조직의 전반적인 운영이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건 자연스러운 귀결.

고로 디지털화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중요 문서들이 모조리 잿가루로 변한 것은, 이들에게는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다. 참으로 일본다운 심각함이라 하겠다.

야스쿠니 신사의 부지를 나누어 쓸 정도로 영향력이 큰 보수단체들의 주요 요직들은 권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직운영을 뒷받침할 서류들이 다 날아간 상황에서, 공석이 된 자리들을 두고 벌이는 권력다툼이 하루이틀 사이에 끝날 리가 있나.

두 번째 이유는 야스쿠니 신사 자체의 자금 부족이었다.

신사의 2인자인 권궁사(権宮司)는 씁쓸한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서서 자금난 때문에라도 총리의 방침을 따라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우리 신사는 그렇잖아도 경영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연간 수억 엔 안팎의 비과세 기부금이 들어와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만, 나라가 어려워지고 나서는 기부금이 10분의 1 이하로 줄고 방문객 수도 현저하게 감소했지요.」

「단립신사(単立神社)인 우리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지 않습니다. 예외적으로 특별지원금이 편성된다 한들, 신사를 재건하기 위한 비용엔 턱없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신사 재건은 고사하고, 그간 받아온 대출이라도 갚을 수 있으면 숨통이 트이련만…….」

이런 입장을 신사의 2인자가 밝힌 것은, 최고책임자인 궁사(宮司)가 도쿄 공습 당시 신사 본전(本殿)에 있다가 내 레이저 공격에 직격당해 죽어버린 탓이었다.

급속도로 탄화되는 동시에 체액이 기화하여 몸통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궁사는, 결국 유해조차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권궁사가 언급한 특별지원금 편성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범들을 합사한 신사는 정부와는 무관한 독립법인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자신을 방어할 명분이 생기는 까닭이다.

그런데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이 진행 중인 지금, 이제껏 한 번도 준 적이 없었던 지원금을 준다? 그건 일본 정부가 주변국에 쏟아부어온 노력들을 한순간에 무위로 돌려버리는 엄청난 외교참사로 비화할 터였다.

계획이 완전히 엎어지는 건 어떻게든 면하더라도, 주변국을 달래기 위해 어마어마한 추가지출을 감수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우익들이 대규모 행동에 나서지 못한 세 번째 이유는, 총리를 지지하는 다수 여론과 극우진영 내부의 분열이었다.

도조 히데키를 몸신으로 모셨다고 주장하는 하세가와 아키코의 분열책동도 책동이었으되, 그 이상으로 와다츠미(海神)에게 봉헌된 신사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고, 극우진영 내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자들이 많았다.

「일본은 섬나라이며, 일본의 흥망은 역사적으로 바다를 얻고 잃는 데에 따라 좌우되어 왔다. 보라.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 또한 본질적으로는 바다를 잃어버렸기에 생긴 것이다. 그러니 이 나라의 심장부엔 마땅히 바다의 신에게 바쳐진 신사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야스쿠니 신사의 터에 고래신사를 짓자는 소리다.

이러한 여론이 비등한 배경엔 혹등고래들이 보여준 또 한 번의 집단행동이 존재하고 있었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나, 이 집단행동의 원인제공자는 이번에도 나였다.

혹등고래의 언어에 대한 연구가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에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인데, 키요우타마히코와 내게 신세를 진 혹등고래들, 그리고 그 고래들이 속한 무리들은 일찍부터 스텔라 포르투나 선단에게 경고를 전하고 있었다.

거친 해석에 윤문을 하고 나면 이런 문장들이 완성되었다.

「얘들아. 너희들 거기서 오래 머물면 위험해.」

「거기는 물이 좋지 않아.」

「그 물에서 어서 나와야 해.」

요컨대, 고래들은 일본이 오염물질을 방류한 바다의 유해성을 경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고가 이루어질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할 만큼의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답답해진 고래들은 선단에 속한 배들을 몸으로 밀어보거나, 물의 흐름을 조종하여 뱃머리를 돌려보려고 애를 쓰거나 했다. 하지만 당시의 마츠오와 내 부하들은 고래들의 그 같은 행동을 단순한 친밀감의 표현 내지 장난이라고만 받아들였다.

이에 고래들은 행동방침을 바꾸었다. 고래들의 의지를 말로 옮기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너희가 좋은 물로 가지 않겠다면 좋은 물이 너희에게 오도록 해줄게.」

집단행동에 나선 각성체 혹등고래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이전까지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순환해류를 만들어냈다.

꼭 키요우타마히코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이 아니더라도, 각성체 혹등고래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반경 수 킬로미터의 마력장을 능히 형성할 역량이 있다. 체급이 체급이어서 복수의 능력을 구사하는 다중각성체의 비율도 높은 편이고.

이런 각성체들이 틈날 때마다 미상의 규모로 집결하여 서로 마력장의 경계를 맞대고 릴레이 수송을 시도한 결과, 일본 근해로부터 남반구 한복판까지 이어지는 왕복 1만 4천 킬로미터의 순환해류가 탄생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 것이다.

고래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세계가 이렇게나 거대한 움직임을 놓칠 리가 없다.

세계는 장대한 순환해류의 반대쪽 반환점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해저식물 클론 콜로니(Clonal Colony)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어지간한 대도시만큼이나 광활한 서식지 전체가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있는 이 클론 콜로니는, 기본적으로 「전율하는 거인」과 같은 방식으로 영토를 확장한 단일생명체였다.

비록 살아온 시간이 거인에 비할 바 아니어서 영혼의 격이 떨어지고, 격에 걸맞은 팽창을 거듭해온 거인과 비교할 때 생체질량도 아래이긴 하나, 단순히 수평적인 분포면적만을 놓고 보면 거인은 물론이고 「레이디 아밀라리아」마저 압도하는 거대 각성체가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이 해저 각성체에겐 「넵투누스 4500」이라는 임시명칭이 부여되었다. 넵투누스는 해당 종이 통상적으로 불리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4500은 과학자들이 추정한 해당 각성체의 나이를 의미했다.

고래들은 이 거대한 단일생명체 해저초원을 편리한 수질정화기쯤으로 이용했다. 넵투누스 4500이 오염된 물을 정화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넵투누스 4500은 계속해서 흘러드는 오염수에 스트레스 반응을 보였다. 인근 국가들은 해저초원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저강도의 규칙적인 지진을 감지했으며, 과학자들은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해저초원이 조금씩 조금씩 남쪽으로 ‘달아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세계는 조용한 불안감 속에서 고래들과 해저초원의 상호작용을 예의주시했다. 식물의 인지구조가 인간과는 근본부터 다르다고는 하나, 혹시라도 초원이 ‘화를 내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있었던 탓이다.

균사체인 레이디 아밀라리아만 해도 비행기로 제초제를 뿌린 멍청이들에게 강력한 번개폭풍으로 보복을 가한 사례가 있잖은가. 보복을 가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스트레스 반응이 보복처럼 보인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이럴 땐 최악을 가정해야 올바른 자세다.

이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타당한 우려였다. 나이는 아밀라리아보다 어릴지라도 질량은 거인에 버금가는 해저초원이 격노할 경우, 주변국들은 날벼락 같은 대재난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내 부하들은 과학자들이 녹취한 고래들의 대화를 어렵지 않게 입수할 수 있었다.

걱정이 많은 인간들과 달리, 고래들은 굉장히 태평했다. 모든 대화를 해석하는 건 당연히 무리였으되, 일부를 해석한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저게 왜 움직이지?」

「몰라. 쫓아가자.」

해저초원이 도망가면 도망가는 대로 쫓아가서 일본 직송의 바닷물을 부어주는 고래들로 인해, 과학자들과 주변국들의 불안은 하루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정부가 죽여 놓은 바다를 근심하던 일본인들은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다.

「바다가 되살아나고 있다!」

충격. 환희. 그리고 경외의 물결이 열도를 휩쓸었다.

이러한 물결은 도쿄 광역권을 시발점으로 한 혼슈 동북부와 홋카이도 동부의 임해지대에서 특히 더 강하게 일어났다. 이들 지역은 해류의 흐름상 오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역들이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여파조차 수습이 아직인 마당에, 이젠 작정하고 쏟아낸 오염물질들마저 감당해야 한다니.

죽여야 할 키요우타마히코는 못 죽이고 애꿎은 바다만 죽여 놓았다며 정부를 원망하던 임해지대의 주민들은, 부패의 악취와 화학물질의 냄새만 가득하던 바다에 생명과 청량함이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초유의 경이감에 사로잡혔다.

「풍랑을 일으키고, 인간의 죄를 징벌하며, 죽은 바다를 보살펴 다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게 바다의 신이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자연히, 임해지대의 주민들 사이에선 고래신령신앙이 더욱 강한 세력을 얻었다. 주민들은 고래들의 집단행동이 와다츠미 키요우타마히코(海神凶玉彦)가 주재한 바라고 믿었다.

마법의 시대에 적응한 신토(神道)의 논리에 따르면, 키요우타마히코의 생사 확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키요우타마히코는 어차피 천진신 와다츠미가 현현한 화신체일 뿐이고, 화신체의 살고 죽음은 신령의 생사와는 무관한 까닭이다. 여기엔 확산세가 강한 주술사 왕 신앙의 교리 역시 강한 영향을 미쳤다. 양자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접점들도 많았다.

고래를 에비스의 화신으로 보던 과거의 관점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키요우타마히코를 복을 가져오는 신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으므로.

고래신령신앙을 직접적으로 믿지 않는 일본인들이라도, 키요우타마히코를 신토의 신령으로 간주하는 데엔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키요우타마히코에 대한 감정의 좋고 나쁨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신토라는 게 원래 그런 종교니까.

종교적 믿음이 없는 일본인들 역시 고래들의 집단행동에 경외감을 느낀 건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인간과 고래의 평화를 위한 중재 제의(祭儀)」에 대한 기대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주술사 왕을 초청하기로 한 일본 총리가 더욱 강한 지지를 받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고래들의 해양 정화는 일본의 외교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일본의 오염물질 방류는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었고,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해서는 피해보상에 관한 많은 약속들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세를 탄 일본 총리는 자신의 성과를 포장하며 국민들의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중재 제의는 우리 일본이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함께 나아갑시다! 우리를 기다리는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일본을 다시 위대하게! 메이크 재팬 그레이트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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