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19화 (519/561)

#52. 전쟁의 기반 (1)

내가 이스라엘 성전을 마무리 짓고 중앙아시아 성전을 준비하는 중에도,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 계획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영국의 결사적인 반대와 저항으로 일정이 조금 지체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영국의 상임이사국 지위 상실과 새로운 상임이사국 탄생을 거의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영국의 발악은 무의미하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한 시간끌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과 밀약을 체결한 시점에서, 일본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경계해야만 하는 요소는 하나. 대선을 코앞에 둔 한국의 여론 변화와 그에 따른 정치권의 입장 변화였다. 한국이 이제라도 커피 클럽의 우의를 지키기로 해버리면 지금껏 해온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여기서도 정면 돌파를 택한 일본 총리는 숨 가쁠 정도의 방한 행보를 이어갔다.

한국에서는 총리의 행보가 연일 화제가 되었고, 신년 들어서는 어느 방송을 보아도 관련 보도가 나오지 않는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온라인상의 인기 검색어들을 통해 알아보는 한 주간의 관심사, 위클리 키워드 시간입니다. 오늘 알아볼 첫 번째 키워드는…… 「펀쿨섹 도게자」로군요. 선생님. 펀쿨섹은 뭐고 도게자는 또 뭔가요?」

「네. 펀쿨섹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져 이젠 일본에서도 쓰이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의 별명입니다. 즐겁다를 의미하는 영단어 Fun, 시원하다 내지는 멋지다는 뜻의 Cool, 도발적이다 혹은 요염하다는 뜻의 Sexy를 합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것 참 특이하네요. 총리가 그만큼 성격이 좋고 잘생겼다는 맥락의 별명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래는 다소 안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었던 발언으로부터 유래한 밈(Meme)이었는데, 총리가 이걸 도리어 이미지 메이킹에 이용한 겁니다.」

「이용을 했다구요?」

「예. 정치인에게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이미 희화적으로 쓰이고 있는 밈을 당사자가 유쾌하게 이용하는 건 이미지 메이킹에 긍정적인 선택이었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도게자는 뭘까요?」

「도게자(土下座)란 사죄를 위해 엎드려 절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절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문화적인 배경이 있어요. 옛 일본의 무가사회(武家社会), 그러니까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도게자를 한다 함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면 이 자리에서 내 목을 치십시오.”라는 뜻이었거든요.」

「아하.」

「물론 요즘은 단순한 사죄행동으로 통하지만, 그래도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일본 사람들이 느끼는 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

「꼭 그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한 나라의 정부수반이 강제동원 피해자들 앞에서 오체투지로 엎드려 사죄를 구한 건 정말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일이었죠. 향후 전개에 따라서는 양국간 역사의 기념비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일단, 화제가 되었던 장면들을 함께 보실까요?」

한국을 찾은 일본 총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찾아 연일 머리를 박고 사죄를 구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일본 극우진영에선 일국의 수반이 국가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머리를 숙이고 다닌다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야스쿠니 선녀 하세가와 아키코(長谷川 明子)가 자신했던 대로 극우진영이 크게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그 볼멘 목소리들이 단일한 정치적 힘으로 발현되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갈라진 극우진영의 대체적인 중론은 “수치를 감수하고서라도 나라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라는 것이었다. 불만을 표하는 자들도 국정운영의 다른 현안들을 놓고서는 서로 편을 갈라 싸우기에 바빠 유의미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일본 총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배상 문제를 한국정부의 협조를 얻어 해결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시겠지만, 지금 일본은 경제가 너무 어려워 배상금을 드릴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상에 필요한 자금을 일단 한국 정부가 마련해주기를 희망합니다.」

「대신 일본은 그 재원만큼의 국채를 발행하여 한국정부에 이양하고, 도쿄 국립박물관의 오구라 컬렉션 및 정창원(正倉院)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을 힘이 닿는 데까지 반환하거나 영구임대 형식으로 한국에 두어 배상금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식민통치 시기 가루베 지온(軽部慈恩)이 저지른 대규모 도굴행위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와 협력하여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고, 찾아낸 유물들을 가능한 한 많이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도쿄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구라 컬렉션은 일제강점기에 반출된 조선 유물과 문화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이 전시를 극히 꺼리는 까닭에,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컬렉션 전체에 접근이 가능했다.

그리고 정창원은 이제껏 거의 개방된 적이 없다시피 한 일본 황실의 유물창고다.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의 학자들조차 그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라는 곳.

마지막으로, 일제시대의 가장 악명 높은 도굴꾼이었던 가루베 지온은 1천여에 달하는 백제 고분을 파헤치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유물을 긁어간 비범한 인간이다.

고로 총리가 반환 의사를 밝힌 유물들은 하나하나가 돈으로는 환산하기 어려운 역사적 가치를 품고 있었다.

총리는 가는 곳마다 아낌없이 머리를 박아댔다.

「아무쪼록 한국의 모든 분들이 우리 일본의 처지를 헤아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어조와 태도는 한없이 공손했으나, 행간을 해석해보면 “우리 국채를 보유해라. 그럼 역사적으로 귀중한 유물들을 덤으로 넘겨주겠다.”라는 제안이었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국익 창출의 기회로 교묘하게 바꿔놓는 교활한 유능함이었다.

즉, 협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정부로부터 이익을 뜯어낼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한 셈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결과적으로 일본에 흘러들어갈 자금이 없어 보이는데 국익 창출은 무슨 놈의 국익 창출인가?’ 싶을 터였다. 그렇기에 한국 국민들은 총리가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다고만 생각할 것이고.

그러나 발행하는 국채의 만기와 이율 설정, 그리고 국채 양도시의 특약설정을 어찌하는가에 따라 일본중앙은행의 공개시장조작 및 신용도 관리에 우회적으로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또한 국채 자체의 특약이 아니더라도, 국가 간의 협정으로 자금의 용처에 관한 별도의 조항을 추가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여의도 김씨는 말했다.

「보나 마나, 해당 재원으로 추진하는 양국간 협력 사업에 관한 내용이 반드시 협정에 포함될 겁니다. 그 왜 옛날 한일기본조약 때랑 비슷하게, 자기네 제품과 자기네 기업들의 쿼터 내지는 우선공급권을 보장해달라고 하겠지요. 대신 그때처럼 바가지를 씌우거나 하진 않겠다고. 양심껏 싸게 모시겠노라고. 벌써부터 증권가에 도는 찌라시들이 있습니다.」

이러면 일본은 결국 다소 변칙적이면서 비효율적인 형태의 경기부양책을 쓰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남의 돈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셈이니 얼마간의 비효율쯤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

방식이 방식인 만큼, 모든 돈의 종착지가 일본이 되기를 바라기는 무리다. 그러나 누수되는 자금은 한국인들을 매수하는 비용이라고 쳐도 무방했다.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이후의 영토확장 전쟁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 한국을 매수하는 실질적인 비용이라 치면, 일본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 한들 다소의 지출을 아까워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빚으로 달아놓고 나중에 갚으면 된다.

남는 문제는 자금의 용처에 걸린 제한인데, 여의도 김씨는 이것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당장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인공지능 기술인력 육성이니 관광산업 기반 구축이니 하는 데 쓰는 돈을 다 저출산 대책 예산으로 분류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설명이 가능한 인과관계가 있기는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배의 후유증이라는 명분은 어디에나 갖다 붙일 수 있는 만능의 명분이죠. 피해자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와 경제의 전 분야에 걸쳐서 말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번 일은 결코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한국이 똥 맛 나는 된장이라면 일본은 된장 맛 나는 똥입니다. 회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한국이랑 일본은 이런 쪽으로는 죽이 아주 잘 맞는 형제의 나라니까, 두 나라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서로의 배때기를 부둥부둥해주면서 해먹으면 명목상의 용처 제한 따윈 아무 의미도 없을 겁니다.」

이 같은 일본 정부의 속내는 고이즈미 총리의 후속 발언들과 거침없이 지르는 액수를 통해 분명하게 구체화되었다.

「이번 협정은 비단 강제동원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이어선 안 됩니다. 일본제국의 기나긴 통치는 식민지 조선에 깊은 상처를 새겼고, 그 흔적은 지금도 한국 사회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예컨대, 저는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 역시 식민지배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단지 특정 사안에 대한 일회성의 해결을 꾀하여 추후에 다시 잡음이 일 가능성을 남겨두기보다, 지속적이고 전방위적인 과거사 문제 관리 및 대응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고 양국 간의 협의 아래 관리하는 편이 보다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향후 5년간 집행할 자금으로 한화 약 50조 원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될 당시의 기본조약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게 제공했던 자금도 배상금이 아니라 그저 좋은 조건으로 빌려준 차관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그나마도 돈이 아니라 상품으로 대신한 경우가 많고, 상품 가격을 산정할 때에도 일방적이고도 불공정한 평가 기준이 적용되었지요.」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꿰었으니 양국 관계가 이제까지 삐걱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이번에 아예 이 문제까지 해결해버리고 싶습니다.」

한국 정계는 5년간 50조 원이라는 말에 기겁을 했다. 일본만큼은 아닐지언정 한국 역시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은데, 그 엄청난 금액을 무슨 재간으로 마련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일본이 부담하는 돈이고, 한국이 볼 이익은 분명하다. 식민피해를 추가 배상하겠다고 나서는데 대놓고 반대하기도 곤란한 노릇이었다. 일본 총리가 피해자들 앞에서 보여주는 숱한 열연들은 한국 정부를 한층 더 난감하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찾아뵙게 되어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머리를 박고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흐느끼는 총리의 모습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조차 동정을 받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오죽하면 위안부 생존자가 총리를 보듬어주었을 정도로.

「일어나세요. 인정과 사죄가 중요한 것이지, 보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니 이 늙은이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건 우리 정부의 임기 내에 처리하면 안 된다. 무조건 다음 정권으로 넘기자.」 라는 모 여당 정치인의 문자 메시지가 언론에 노출되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어쨌든, 한국 입장에서 협상을 아예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쳤다간 일본 국립박물관 수장고와 정창원이 다시 열릴 날이 언제이겠는가?

그리고, 협상을 할 거라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어깃장을 놓기는 더 어렵게 된다.

나는 일본 총리의 교활함에 좋은 점수를 주었다. 총리가 떠넘기는 국채는 한일 양국이 서로에게 채우는 목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총리의 방한 행보 가운데 가장 파격적이었던 것은 일반 시민들과의 자유로운 만남과 소통이었다.

외국 정상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타국의 시민들과 대면소통을 시도하는 건 외교사에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해당 정상이 국빈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비공식 활동을 하겠다고 나설 경우, 그 활동을 막을 수 있는 명문화된 규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내용을 서면으로 확약함으로써, 총리는 거북해하는 한국정부로부터 내키지 않는 양해를 받아냈다.

총리는 이전부터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한국 팬들과 밀접한 교류를 해온 바 있었다.

그 팬들 중엔 이상할 정도로 광적인 부류들이 많았다. 그들의 정체는, 일찍이 빚까지 내어 일본증시에 투자했다가 도쿄 공습으로 인생이 망할 위기에 놓인 개인투자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일본의 부흥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다.

일본 총리는 이 미친 주식개미들과 의기투합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일본을 믿습니까?! 이 고이즈미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믿습니다!」」

연단에 선 총리는 언제 공부했는지 모를 한국어로 열정적인 언변을 구사하여 미친 개미들을 휘어잡았다. 구름처럼 운집한 팬들 사이엔 미리 역할을 받은 바람잡이들도 있는 것 같았다. 경태는 그들을 ‘완장과 지우개들’이라고 불렀는데, 팬클럽 관리자들을 지칭하는 경태 세대의 표현인 모양이었다.

「일본은! 그리고 저 고이즈미는 여러분의 기대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일본 경제는 다시 살아날 것이고! 여러분은 믿음의 대가로 부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약속이니까!」

「「와아아아아아아!」」

「다 함께 외칩시다! 아 쎄이 영! 유 쎄이 차! 여어어엉!」

「「차아아아-!」」

「여어어엉!」

「「차아아아-!」」

평소부터 온라인에서 교류를 해온 덕분인지, 일본 총리와 한국 개미들은 오프라인에서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미친 개미들 사이에선 전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도 했다.

주식시장의 개미들이 영차영차를 외치는 것은 증시 차트와 호가창을 보며 힘내서 올라가라고 응원하는 주술적 행위라 들었다.

한일 양국의 언론들은 이 뜨거운 광기의 현장을 전파에 실어 송출했다.

졸지에 일본 총리보다도 관심을 덜 받게 된 한국 대선후보들 사이에선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거 내정간섭 아닙니까? 저렇게까지 자기 지지자들을 과시해놓으면, 어? 선거를 앞두고 표를 신경 써야 하는 우리가 대일 외교정책에 대해 소신발언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 말이에요! 일본 총리가 저러고 다니는 데엔 분명 한국 대선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당연히 그런 의도로 한 행동이다.

그러나 일본 총리는 그저 일본시장에 물려있는 투자자들을 만나 위로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해명했고, 의도치 않게 오해를 살 행동을 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뜻을 밝혔다.

요즘 들어 계산된 행보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드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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