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04화 (504/561)

#50. 세계의 변화 (14)

머리 한구석이 단단히 망가져있는 인간이 언제나 상식적인 판단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건 비현실적인 일이다. 명목상 ‘나를 위해’ 했다는 행동을 강하게 성토했다간 마녀의 흉중에 부조리한 앙금이 생길지도 모르는 노릇.

그래서 나는 최대한 빠르게 화를 삭인 후에 느리고 침착한 어조로 그레이스의 낭비를 지적했다. 비록 원탁의 세력이 쇠했다고는 하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심해서는 안 될 싸움을 하는 와중에 이런 식의 헛된 자원소모가 가당키나 한 것이냐고. 네 눈엔 내가 이 싸움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느냐고.

내 지적을 들은 그레이스는, 비어있는 내 찻잔을 한쪽으로 밀어내고는 그 자리에 제 엉덩이를 깔았다. 간격이 더욱 가까워짐에 따라 위험한 식인괴물의 향기가 짙어졌다. 인간의 체향이라기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래서 더 내 생존본능과 경계심을 자극하는 꽃내음이었다.

테이블 모서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레이스의 그늘진 입가엔 묘하게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여보. 정말로 낭비라서 화를 내는 거 맞아?”

“그게 아니면 내가 너에게 달리 화를 낼 이유가 있나?”

“있어. 당신에 대한 내 짐작이 맞다면 말이지만.”

“무슨 짐작?”

그레이스는 가만히 도리질을 쳤다.

“말하지 않을래. 어차피 말해줘도 당신의 화만 더 돋울 테고, 당신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당신의 일면을 나 혼자만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 낭만적이지 않은가 싶거든.”

“그 짐작이라는 것에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가벼운 빈정거림을 담아 한 말이었으나, 그레이스는 사뭇 진지하게 끄덕여 보였다.

“물론. 내가 황금기의 눈은 없을지라도, 사람 보는 안목까지 없는 건 아니라서. 당신과 만남을 거듭할 때마다 점점 더 확신을 얻고 있지.”

“……하.”

“아내로서 준비한 비장의 이벤트가 반응이 나쁜 건 아쉽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도리어 당신에 대한 호감이 더 깊어지는걸? 한편으로는 내가 결국 당신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낮지 않은 것 같아 조금은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이런 식의 자원낭비가 내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나?”

“들지 않아.”

그레이스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왜냐면 이건 내게 있어서 절대로 자원낭비가 아니니까. 지금부터 노력하지 않으면 영영 얻을 수 없을지 모르는 것을 얻기 위한 투자지.”

“투자?”

“그래.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한 투자. 나는 최근 들어 원탁을 무너뜨린 이후의 내 삶을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그려볼 때가 많아졌거든. 그 그림엔 반드시 당신이 함께 그려지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려.”

마치 눈을 뜨고 꿈이라도 꾸는 듯한 어조였다. 그레이스는 발끝을 까딱거리며 무구한 소녀와도 같은 태도를 가장하여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예전과 달라진 나를 느껴. 그 변화의 원인은 물론 당신이지.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은 내 삶에 예고도 없이 들어와 모든 것을…… 그래,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단숨에 바꿔놓은 사람이야.”

바디스타킹에 감싸인 까끌까끌한 손가락이 내 턱 끝에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적의로 가득한 세상, 어디를 봐도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을 모조리 부수고 불태워버리기 위한 투쟁. 예전의 내 삶을 압축한다면 이 한 문장으로 정의가 가능할 거라고 봐. 그러나 당신이 난입해버린 세상은 더는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게 되어버렸어.”

“…….”

“세상이 달라지면 그 세상을 사는 사람의 모습도 달라지지. 사람의 삶이란 결국 자기가 놓여있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인걸. 내가 원래 살던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우는 데서 얻는 만족감으로만 가득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원탁과 영국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만큼은 변함이 없어도, 전처럼 나머지 세상까지 불태우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들진 않아.”

“그런가.”

“응. 그 욕망의 빈자리를 채운 게 바로 당신이야.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가면 갈수록 즐거워지고 있거든. 내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유형의 즐거움이지. 이런 즐거움이라면, 다 죽이고 불태우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레이스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별 염병을 다 떠는군.’

신경계에 흐르는 전기신호와 화학적 변화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 마녀의 속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내 동물적인 욕망이 내 정신에 내재되어있는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나긴 세월 시각적인 성적 자극을 받지 못했다 함은, 그러한 자극에 면역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지 않은가.

그렇게 면역이 전무한 인간이 갑작스럽게 정상적인 자극에 노출되면 정신과 육체 양면에서 동요가 클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대마법사라도, 인간의 선천적인 본능과 태생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롭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므로.

아름다움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이다. 때로는 마법 이상으로 마법처럼 작용하는 힘.

갓 태어난 아기조차 아름다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본능으로 구분한다.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되는 굴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거의 평생에 걸쳐 현란한 색채의 근육과 혈관과 신경과 내장을 들여다보며 살아온 나라고 예외일 리가 있나.

오히려 이런 나이기에, 정상적인 눈으로 보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에 목말라있던 나이기에, 눈앞에 있는 여체가 그레이스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법한 다른 여자의 것이었어도 특별하고 아름답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그레이스는 지금 눈깔병신의 약점을 공략해서 정신적인 지배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합리적이다.

나를 제 아름다움의 노예로 만들어 보고자.

그레이스의 시선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자기. 내가 영 의심스러운가보네.”

“아니다. 진지하게 듣고 있다.”

“아니기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은 그레이스는, 두 손으로 자신의 면사를 잡고 차분하게 들어 올렸다.

“적어도 이 밤이 다 지나기까지는 오로지 내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남편이 워낙에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이라 다른 방법이 없네.”

“…….”

“자, 자기.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도록 해.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황금기의 눈을 무력화하는 베일이 걷히자 교활한 마녀의 뇌가 내 눈에 들어왔다. 마녀가 의도적으로 노출시킨 신경계엔 기만이나 거짓, 적대의 색채가 존재하지 않았다. 짐짓 깊게 심호흡을 한 마녀가 내 눈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다시 한 번 고백할게. 난 당신이 나와 런던 이후의 나날을 함께해주었으면 좋겠어. 동지로서, 그리고 연인으로서. 내가 당신을 남편이라고 부르는 게 더는 농담이 아니게 되었으면 해. 당신과의 미래를 그린다는 내 말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

모두 진실이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거짓은 매양 진실을 도구로 삼는 기만이며, 악마는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사람을 속이는 법이었다.

“함께할 미래를 그린다.”는 말 자체는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미래에서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종속된 상태여야 이상적이겠지. 말 잘 듣는 애완동물에 대한 애정 역시 나름 진심어린 애정이지 않나. 반려자를 애완동물처럼 취급하는 비뚤어진 사랑은 이 세상에 얼마나 흔한가.

악마숭배교단의 교주이자 자식을 소모품처럼 갈아버리기 일쑤인 광인에게 상식적인 범주의 사랑이 가능하다?

그 무슨 터무니없는 농담을.

그레이스의 진의는 런던 이후의 잠재적 위협을 미리 해소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리적이다. 원탁의 세가 약해지자, 이 정도면 미래의 위험을 통제하는 데 자원을 투자하기 시작해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겠지.

그레이스가 물었다.

“어때? 내가 한 말 중에 거짓이 있어?”

“아니. 없다.”

“그렇지?”

확답을 받은 그레이스는 가벼운 만족감을 드러내며 면사를 다시 아래로 내렸다. 목 위로 부서지듯이 불완전해졌던 아름다움이 다시금 완전함을 되찾았다.

‘엘름스테드가 잡아먹힌 게 조금은 이해가 갈 것도 같은데.’

솔직하게 말해, 처음으로 직시하게 된 그레이스의 아름다움은 ‘이건 과연 위험하다.’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평생 시달려온 시각적·본능적 결핍이 일시적으로나마 해소된 이때, 나는 나 스스로도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내가 평소 날을 갈아온 생존본능의 발현이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그 외엔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이유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이젠 적당한 구실을 대어 마녀의 시도를 무마할 차례였다. 과도하게 날을 세우지 않고, 마녀의 경계심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나 역시 진심을 도구로 삼아야 효율적일 것이다. 그레이스가 했던 것처럼, 그럴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언어들을 활용해서. 진심을 받았으니 진심을 담아 답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어쩐지 콜레로의 뱀이었던 라일라를 설득할 때가 떠올라 기분이 나빠진다.

“세상이 달라지면 그 세상을 사는 사람의 모습도 달라진다고 했지.”

“그런데?”

“내가 마주하는 세상은 원탁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설령 달라진 것들이 있다 한들, 원탁을 완전히 초토화해버리기 전에는 어떤 변화도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그렇게 확신하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어째서?”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과거에 박제되어있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레이스는 말없는 시선으로 다음을 요구했다.

“반쯤은 친구, 반쯤은 가족처럼 여겼던 어린 것들의 피로 완성된 영생의 별. 그 더러운 별 속에서 스승새끼에게 쫓기다가 깨어났을 때…… 그저 보고 있기만 해도 광증이 생길 것만 같은 시각적 혼돈의 한가운데에 갑작스럽게 던져진 나는,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취약하고 무력한 인간이었다.”

깨어나고 나서 최초의 물 한 모금을 마실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던가. 또 그 시간동안 내가 느꼈던 공포는 얼마나 크고 깊은 응달이었던가.

“그랬던 내가, 연고도 없는 눈깔병신 고아새끼가 생존을 위한 지침을 구할 방법이라곤 내 정신에 남은 스승새끼의 유해를 파헤치는 것뿐이었지. 최소한의 준비도, 각오도 할 여유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마법사의 지식과 기억을 닥치는 대로 흡수해야 했단 말이야. 그것도 아직 다 여물지도 않은 미성숙한 인격과 정신을 가지고서.”

나는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말해봐라. 너는 어땠는지. 너는 나와는 다르게 여물 만큼 여문 인격과 정신으로, 만전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엘름스테드를 잡아먹었을 게 아닌가. 그 영적인 차원의 포식(捕食)이 네게는 쉬운 일이었나?”

“아니. 전혀.”

그레이스가 표정을 지운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지극히 역겹고 또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어. 때로는 내 정체성이 오염되는 듯한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고……. 당신은 당연히 나보다 더 끔찍했겠지. 알아.”

“알아주니 고맙군.”

나는 담담한 어조로 도구적인 진술을 이어갔다.

“내 경우는 위기감을 넘어선 공포였다. 원탁의 대마법사가 평생에 걸쳐 쌓아온 기억들은 미숙한 정신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한 홍수였으니. 가장 좋은 건 처음부터 그 물살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 스승새끼의 유해를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었겠지만…… 이미 말했듯 나는 살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휩쓸려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익사하듯이 빠져서 삼키고 또 삼키는 고통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단 말이야.”

사실 처음엔 휩쓸리지 않을 능력조차 없었다. 유해에 담긴 지식과 기억을 통제하는 요령을 유해에 담긴 지식과 기억으로부터 얻었던 까닭이다. 요령을 얻기 전까지는 수시로 발작처럼, 플래시백처럼 떠오르는 유산 아닌 유산들을 꾸역꾸역 받아 삼키며 버텼다.

어쩌면 버텨낸 게 아닐지도 모르고.

나는 보육원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하나의 연속성을 이루는 동일한 인격체라고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한다.

내 소년기와 청년기는 실존적인 공포로 가득했다.

이렇게나 오염된 나를 과연 ‘나’라고 해도 좋은가.

이 강박적인 의문은 내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조직을 만들고 나서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조직의 성립과 내 정신적 불안장애 증상의 완화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거할 은신처이자 나를 보호할 수단으로서 조직이 주는 안정감이 유의미한 기여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를 잡아먹으려는 대마법사에게 쫓기는 악몽을 평생에 걸쳐 꾸어왔다. 잡아먹히기 싫은 자의 안정감은 힘에서 비롯된다.

“나는 내 정신이 불안정했던 시기 내내 이미 죽은 대마법사가 선사하는 고통에 짓눌려있었고, 그 죽은 대마법사와 내 눈을 찾고 싶어 할 살아있는 대마법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끝도 없이 몸서리를 쳤다.”

“…….”

“내게 있어 원탁은 궁극적인 생존을 위해 배제해야 할 위험요소이기 이전에,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불변하는 고통의 표상이다. 나는 원탁을 파괴해야만 비로소 스승새끼가 찍어놓은 과거의 압인(押印)을 지우고 온전히 현재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나?”

“이해해.”

그레이스가 아쉬움 반 장난기 반인 미소를 꾸몄다.

“깊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해본 입장인걸. 쉽게 말해, 원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말이잖아. 그 트라우마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어야 다른 데 눈 돌릴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 같다고.”

“그래.”

“어쩔 수 없네. 그래도 진지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 평소의 당신을 생각하면 그냥 「싫다」 한 마디로 끝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내 청혼에 대한 답은 보류라고 알고 있을게. 그리고-”

“그리고?”

“아쉬운 대로, 지금 입맞춤 한 번 정도는 괜찮을까?”

내가 거부감 속에서 어떻게 만류할지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 찰나에 그레이스는 틈을 주지 않고 상체를 기울여왔다. 간격이 거의 사라지고 나서야 베일을 부분적으로 거두어, 내 눈에 보이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깨어지지 않도록 한 입맞춤이었다.

나는 비늘 없는 독사 한 마리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맹독을 지닌 독사에게 인간의 체온이 있다는 것은 제법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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