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03화 (503/561)

#50. 세계의 변화 (13)

나와 그레이스가 마주앉은 식탁 위로 다양한 사안들이 차례차례 흘러 지나갔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엔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영국에게서 상임이사국 지위를 박탈하는 투표와 일본에게 상임이사국 지위를 부여하는 투표가 한날에 연속으로 진행되리라는 관측까지 나오는 마당이었다.

일본의 안보리 진출에 암초로 평가받는 두 나라, 중국과 한국은 찬성표를 던지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다.

안보리와 총회 양쪽에서 영국이 패싱당하는 꼴을 본 중국은, 거기서 비롯되는 당장의 이익과는 별개로, 근래 외교적 고립이 심화된 자신들 역시 언젠가 비슷한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러시아가 건재했다면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겠지.’

그러나 지금의 러시아는 재래식 군사력의 파괴적인 소모와 국제사회에서의 평판 악화로 인해 여러모로 의지하기가 불안해진 나라다. 대만에 이어 영국이 안보리로부터 축출당한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러시아가 세 번째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러시아가 보유한 핵무기들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억지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핵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해볼 테면 어디 한번 해봐라.」

카자흐스탄 민주화 시민군의 대변인은 러시아 국방부 대변인 코나셴코프 중장이 공개적으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거론한 것을 두고 패기 넘치게 냉소했다.

「미국과 유럽은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비전투적인 분야로 한정된 도움만을 제공하고 있지만, 그들의 첩보역량과 공중감시능력은 굉장히 훌륭하다. 그들의 감시가 너희의 핵미사일 발사를 놓칠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핵미사일 발사가 확인된다면, 혹은 우리 조국의 어느 한구석에서라도 핵폭발의 버섯구름이 치솟는다면, 대초원에 흩어져있는 20만 각성체 기병대가 그 즉시 모스크바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너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비행질주나 극한의 난지형 극복이 가능한 희귀기병들만 따로 모아도 아홉 개 독립여단 편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수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점한 채, 수시로 고도와 방향을 바꿔가며 지형지물을 가리지 않고 고속으로 진격하는 기병대를 막으려면 대체 몇 발이나 되는 핵폭탄을 사용해야 하겠는가? 언제든 발사 가능한 상태로 준비되어있는 핵무기가 충분하기는 한가?」

「설령 충분하다 한들, 그 많은 수의 핵무기를 자국 영토에 퍼부을 각오는 되어있는가? 우리가 모스크바로 직행하는 대신 대초원보다도 더 광활한 러시아 전역에서 약탈과 파괴 활동을 전개할 경우엔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너희가 우리의 도시를 파괴하고 우리의 가족들을 몰살시킨다면, 우리는 너희들의 도시에서 너희의 역사에 멍에로 남아있는 몽골제국의 방식으로 복수를 해주겠다.」

「누군가는 칭기즈 칸의 수레바퀴가 전근대의 야만스러운 잔혹성이라고 규탄할 테지만, 칭기즈 칸의 몽골은 최소한 수레바퀴 지름보다 키가 작은 아이들만큼은 살해하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과 방사능으로 수백만씩 한꺼번에 죽여 버리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더 인도적인 처사이지 않은가?」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한 시점에서, 우리는 모스크바엔 더 이상 무고한 민간인이 없다고 간주할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을 듣고 있는 양심적인 러시아인들은 지금이라도 모스크바를 떠나라. 아니면 나라를 파탄으로 이끌어 가는 독재자에게 맞서 싸우거나.」

「우리가 모스크바에 이어 다른 도시들까지 불태울 것인가 여부는 오로지 러시아가 그때까지 사용한 핵무기의 숫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민군이 러시아에게 약속하는 새로운 시대의 상호확증파괴(MAD)다. 우리의 기병대가 국경을 넘도록 만들지 마라.」

보복의 방식을 굳이 칭기즈 칸의 수레바퀴에 빗대어 표현한 데엔 몽골 「나이람달 반군」과의 동맹관계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보아야 했다. 만약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막아야 할 곳은 비단 카자흐스탄 국경만이 아닌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시민군 대변인은 짧은 침묵 끝에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

「마지막으로, 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의 독재자에게 경고한다. 우리가 모스크바로 간다면, 내 전우들은 여러 날에 걸쳐 당신의 항문 직경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실험해볼 것이다. 다양한 구경의 총탄과 포탄들을 도구로 써가면서.」

「나는 당신 항문에 80밀리 박격포탄도 들어간다는 데 백만 텡게(Тенге)를 걸었다. 내 친구들 중엔 자기 애마를 걸고 155밀리 곡사포탄을 넣어보겠다고 한 사람도 있지. 누가 이기든 너의 수급은 승자의 기념품이 될 것이다. 핵무기를 쓰고 싶은 충동이 들 때 참고하기 바란다.」

돌아가는 사정이 이러하기에, 중국은 러시아가 안보리에서 축출당할 가능성 외에도 러시아 정권이 민주화 세력에 의해 전복당하는 현실적인 시나리오 또한 우려해야 하는 처지였다. 민주화된 신생 러시아는 개혁개방에 필수인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도 중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 할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중국이 가진 상임이사국 지위도 위태로워진다. 제3세계 국가들은 이번 기회에 UN의 권력구조를 완전히 재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은 상임이사국 내에서 러시아 이외의 우호표를 확보하고 싶어 하고 있었고, 그 대상이 바로 일본이었다.

중국이 느끼는 불안을 예리하게 포착한 일본 총리는 가짜 빨갱이들과 밀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된다면, 홍콩과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상임이사국 지위 유지에 대하여 두 나라에게 불리한 결의안이 제출되었을 때 무조건 침묵하거나 반대표를 던져주겠다.」는 내용의 밀약이었다.

이런 약속을 서면으로 받아낸 중국의 가짜 빨갱이들은, 일본이 제안한 거부권 협의기구 내에서 다른 회원국들보다 더 많은 몫을 챙기겠다고 강짜를 부리지 않았다. 일본의 지위변경에 관한 논의가 기대 이상의 급물살을 타게 된 배경이었다.

“아직 불확실성이 남아있는 변수가 있다면 한국이야.”

식후의 차를 음미하던 그레이스가 찻물에서 올라오는 김을 내 쪽으로 후- 불며 말했다.

“당장은 찬성표를 던질 분위기지만, 대선을 앞두고 혼란이 너무 커서 언제 어떤 변화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지. 당장 일본의 헌법개정을 두고도 이래저래 말이 많다고 하던걸? 커피 클럽의 다른 구성국들이 한국의 이탈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변수라고 할 만하고.”

“그러게 장난을 좀 적당히 치지 그랬나.”

“어머, 알고 있었어?”

“김연화…… 아니, 연화 킴 맥아더의 신자녀들이 그렇게 설쳐대는데 모를 리가 있나.”

“조금은 신기하네. 그 나라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움직임들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일본의 상임이사국화 계획엔 주의와 자원을 할애할 만큼의 가치가 있으니까.”

“흐음-”

그레이스는 마법적인 불투명함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감춘 채 탐색의 눈길을 던져왔다.

김연화의 공능법인 「연화암」은 공능법인이 되기 이전엔 사주와 길흉화복을 점쳐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무당의 점집이었다.

그렇기에, 마법이 돌아오기 전부터 이런 미신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했던 한국의 정치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연화암을 찾아 자신의 운세를 보고 싶어 했다. 내가 파악한 바, 정치인들이 던지는 질문은 한심할 정도로 똑같았다.

「내가 대통령이 될 상인가?」

맥아더 장군선녀로 명성을 얻은 김연화는 그레이스가 세계적인 무대에서 쓰기 좋은 도구였으므로, 김연화 한 명에게 그 모든 정치인들의 코치를 맡기는 건 적절치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선은 어차피 한 사람만이 이길 수 있는 게임이라, 혼자서 여러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면 필연적으로 명성이 깎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하여 그레이스는 연화암에서 배출한 김연화의 신딸과 신아들들을 움직여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기생시켰다.

이런 흐름을 가속화시킨 것이 특정 대선주자가 고명한 무당에게 다른 대선주자를 저주해달라고 의뢰한 사건, 이른바 「박 모 의원 살(煞) 날리기 사건」이었다.

저주 대상이 ‘불운한’ 사고를 겪은 직후 내막이 밝혀지면서 화제가 된 이 사건은, 다른 대선주자들의 미신적인 불안감을 자극했다. 대선주자들은 겉으로는 미신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당당한 태도로 떠들고 다니면서도, 보좌관들에게는 저주를 막아줄 무당 참모를 구해오라는 비밀스러운 지시를 내렸다.

‘한심한 것들 같으니…….’

지금 한국에선 나름 영향력이 있는 대선주자들만 헤아려도 서른셋에 달하는 정치적 혼돈이 한창이었다. 특정 인물을 극복하기만 하면, 혹은 당내 경선에서 이기거나 일정 규모의 세력을 가지기만 하면 “대통령이 될 가망이 보이는 상”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에 헛바람이 든 정치인들이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높은 확률로 흔들린다.

이렇게 숫자가 많아진 대선후보들은 자기만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각종 사회현안들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려 들었다. 그게 자신의 진정한 생각과 다를지라도, 일단 다른 후보들과 구분이 되는 특징이 있어야 유권자들에게 어필을 할 게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이라는 떡밥이 던져졌으니, 이놈이고 저년이고 다 저마다의 소리로 꽥꽥대기 시작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일본은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거듭나야 합니다.」

경태의 말마따나 극한경험을 통해 정신적인 각성을 겪은 것만 같은 일본 총리는, 의회 연설을 통해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금하는 현행 헌법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헌법이 전쟁을 금지하면 전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전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나라인 우리 일본은 결코 다시 전쟁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영국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국제외교에서 힘이 동반되지 않은 권고는 너무나도 무력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 권고를 받아야 할 상대국이 금세기 최악의 범죄국가인 영국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좋은 말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해왔지만, 그들의 대처는 어떠했습니까? 무시와 책임회피, 무책임한 꼬리 자르기가 전부이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바뀌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구잡이로 침략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침략을 받았을 때 정당한 반격과 응징을 가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장차 상임이사국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변화입니다.」

「친애하는 의원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일본국의 총리로서 여러분께 요청 드립니다. 우리의 헌법에 정의로운 선전포고의 권리가 명시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참된 우방들과 함께 이 시대의 악을 무찌르고 진정한 평화를 실현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십시오.」

「개정된 헌법은 영국의 「후나유레」가 도쿄를 공격한 시점까지 소급적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일본과 세계의 정의가 승리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이 연설이 전파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자, 화젯거리에 목말라있던 대선주자들은 때는 이때다 하고 몸을 비틀어댔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간사스럽기 그지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日本之人, 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라고! 감히 이순신 장군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한국인이 있다면 그놈은 곧 매국노입니다! 따라서 제 주장을 반박하는 자들도 곧 매국노입니다! 저는 우리가 일본의 헌법 개정을 절대로 좌시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륙과 일본이 쇠하면 우리 민족이 흥했고, 대륙과 일본이 흥하면 우리 민족이 쇠했습니다! 일본이 전쟁 가능한 국가가 되면 언젠가는 그 창끝이 우리나라를 향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모르시겠습니까?」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 좋습니다. 일본의 영토 확장? 그것도 좋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한다는 인간들이 왜 전쟁을 부르짖습니까?」

「요즘 들어 수상할 정도로 일본을 편드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내가 아는 모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그 사람들 아마 다 일본에 투자했다가 단단히 물린 사람들일 거라고.」

「그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말입니다, 주식시장에서 작전세력에게 물린 사람들을 굉장히 닮아있어요. 회사는 정상이고 주가는 다시 오를 거라고 현실부정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을 등쳐먹는 사기꾼들을 맹신하고 결사적으로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겁니다. 최근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어느 구멍가게 같은 회사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겠다고 나섰을 때 벌어졌던 촌극이 대표적이죠.」

「이게 아니면 한국인들이 고이즈미 총리의 팬클럽까지 만들 이유가 뭐겠습니까? 듣자니 팬클럽의 성비나 연령 분포가 많이 불균형하다던데, 하여간 한탕주의에 빠져있는 이삼십 대 남자들이 항상 문제예요. 코인에 영끌에 이제는 일본 투자까지.」

「이 자리를 빌려 그 철없는 분들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리니까 별 생각이 다 드시지요?」

이런 인간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 고만고만한 지지율을 뺏는 싸움을 벌이자, 각 대선주자들의 평균적인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원래부터 지지율이 낮았던 정말로 이상한 놈들의 존재감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공중부양 된다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저는 초능력에 가까운 지능으로 지금과 같은 시대가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예감이 너무나 뚜렷해서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지 못한 탓에! 아직 세상에 우주의 기운이 충만하기도 전에 진리를 설파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제가 이렇게 지지자분들과 함께 공중부양을 하고 있습니다! 어이차!」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 공허경영의 이름 넉 자를 외우는 사람은 오장육부에 공허의 힘이 깃들어서 불사암이 생기질 않아! 망설이지 말고 롸잇 나우!」

「일찍이 말씀드렸듯이 이 나라엔 도둑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이큐가 430이고 이 세상 모든 영역의 1인자인 제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면, 이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청렴하고 유능한 정부를 가진 나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옥중에 계신 박리을혜 공주님! 지금이라도 이 공허경영과 결혼하여 나라의 정기를 바로잡는 싸움에 동참해주십시오!」

「언제나 공허를 믿으라! 공허포격! 발싸!」

현 시점에서 한국엔 지지율이 20%를 넘는 예비 대선주자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건국 이래 가장 혼미한 대선이 예고된 이 상황은 대선주자들에게 끝없는 희망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연화 킴 맥아더의 신자녀들은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다수의 대권주자들이 내부분열을 일으키도록 유도하여 작금의 혼란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 기여가 다소 지나쳐서, 연정과 후보단일화를 통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도울 유력 대권주자를 탄생시키기가 도리어 까다로워진 측면이 있었다.

물론 이걸 가지고 그레이스가 어수룩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보는 건 지나친 안일함이다.

나는 이 미친 마녀의 과도한 ‘장난’이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으리라 가정했다. 그레이스는 아직 내 근거지가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니까.

“혹시 한국을 조종하는 방안에 대해 따로 제안할 게 있어?”

깍지로 턱을 받친 마녀의 질문이 식탁을 넘어왔다. 나는 조금 숙고하는 시늉을 하다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방안을 입에 담았다.

“내가 예전에 작은 거래를 했던 정치인이 하나 있다. 도지사 강중성이라는 인간인데…… 원래대로라면 대선을 완주하기만 해도 잘 싸웠다고 할 체급이었지만, 다른 후보들의 지지율이 평균적으로 낮아진 덕분에 어부지리로 대선주자로서의 입지가 급등한 놈이지.”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인간의 치명적으로 수치스러운 행적이 알아서 내게 굴러들어온 것 또한 우연의 소치였다.

“그 사람을 확실하게 꼭두각시로 삼을 방법이라도 있나 봐?”

“있다. 어쩌다보니 손에 들어왔지.”

“그게 뭔데? 비밀이 아니라면 듣고 싶은데.”

“뇌물수수의 증거들. 그리고 상대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개의 섹스 비디오.”

“뭐? 섹스 비디오?”

“그래.”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그레이스는 이내 둑이 터지는 것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섹스 비디오? 섹스 비디오? 세상에, 당신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이야!”

그 인간의 힘을 써서 부지를 확보하고 각성능력자들의 노동력으로 빠르게 완공한 골프장은, 그 자체로는 조직의 중장기 위장경영 정상화 계획의 일부에 불과했다.

숨겨진 감시수단들이 많은 그 골프장의 회원권을 도지사에게 선물하면서 바랐던 소득은 정계의 내부 비밀과 어두운 사정들을 엿듣는 정도였다. 대선주자로서는 체급이 모자란 인간이지만, 여당의 중진으로서는 나름의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새끼는 무슨 이상한 페티시라도 있는지 클럽 건물 내에서 자꾸만 오입질을 해댔다. 골프웨어를 착용한 여성에게 특별한 성적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도지사가 찾아오면 너희와 조직에게 크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요청을 들어줄 것」이라는 지시를 받고 도지사가 시설을 이용할 때마다 수상한 요구들을 들어주었던 컨트리 클럽의 조직원들과 준 조직원들은, 자신들이 확보한 정치적 음란물을 정기보고에 첨부하여 올려 보냈다.

「클럽 내부에서의 대화를 단서로 1차적인 조사를 진행한 결과, 도지사와 관계한 여성들은 오래 전부터 스폰서 계약을 맺고 매달 수백만 원의 금품을 받아온 것으로 추정됨. 해당 계약의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다 심화적인 조사가 필요함.」

새옹지마는 새옹지마이되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새옹지마였다. 이를 두고 경태 녀석은 “대선 결과에 따라서는 대통령의 섹스 비디오를 가진 비선실세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몹시 재미있어했다.

현 집권여당은 「무장공비 브이로그」 사태와 그 후속타인 「려도 침투 먹방 사건」의 여파로 극심한 내홍을 겪는 중이었다. 집권 초기에만 해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주요 치적으로 삼았고, 브이로그 사태 이후로도 기존의 대북외교방침을 일신하지 못했던 현 정권과 여당에게, 려도 침투 먹방 사건은 지나치게 가혹한 정치적 재난이었다.

여당이 약해지자 야당의 결속력도 뒤따라 약해졌다. 야심가들 사이에서 ‘이 정도면 내가 나서도 이기겠는데?’라는 생각이 퍼졌던 것. 연화 킴 맥아더의 신딸과 신아들들이 활개를 치기 좋은 무대가 일찌감치 만들어져 있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따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도지사의 섹스 비디오가 대통령의 섹스 비디오로 업그레이드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길게 웃은 끝에 조금 힘들어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정말이지, 당신은 여러모로 나를 즐겁게 해주네.”

나는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웃기는 내용이긴 하지.”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레이스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같은 이야기라도 당신이 아닌 사람에게서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흥겹지는 않았을 거야.”

“…….”

“생각해봐.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인간 군상들의 우스꽝스러운 천박함을 얼마나 숱하게 접해봤겠어? 나는 칠각기사단의 주인이고, 악마숭배자들의 대모인걸. 내가 느끼는 즐거움은 오롯이 당신으로부터 비롯된 거라고.”

“그거 고맙군.”

“건성으로 듣지 말아줘.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그레이스는 테이블 모서리를 짚고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내 대각선 방향으로 다가왔다.

“자기. 내가 문자로 이야기했던 「작은 이벤트」가 뭔지 궁금하지 않아?”

“딱히.”

“에이, 그러지 말고. 궁금하다고 해줘. 응?”

“궁금하지 않다.”

“……나는 아까부터 신호를 보냈는데, 자기는 매정하게 일 이야기만 하려고 하더라.”

그레이스는 느린 손길로 장갑을 벗고 저가 입은 옷의 매듭을 풀었다. 처음엔 항상 하던 희롱과 같은 짓인 줄 알았으나, 마법적으로 불투명한 장갑과 옷 안에는 다른 때엔 없었던 또 한 겹의 불투명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겉옷 아래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불투명함의 정체는,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감싸는 반투명한 재질의 바디스타킹이었다.

“짜잔!”

마치 깜짝 선물을 공개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레이스가 장난스럽게 두 팔을 벌려보였다.

“당신은 그 눈 때문에 벗은 여체를 봐도 그저 흉물스럽게 느껴질 뿐이라고 했지. 그래서 한번 궁리해봤어.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정상적인 여체로서의 내 몸’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고. 이게 바로 그 고민의 결과물이야. 남편의 고충을 해결해주기 위한 아내의 고민.”

그레이스는 제자리에서 우아한 동작으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평범한 시야로 보면 속이 다 비쳐 보이지만, 황금기의 눈이 가진 투시력과 분석력은 차단하는 원단. 그 원단을 써서 전신에 탄력 있게 달라붙도록 만든 바디스타킹. 여기에 면사를 조합하면 완벽할 거라고 생각했어.”

“…….”

“어때? 그 눈을 가지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제대로 된 여자의 몸은? 아름다워? 강제로 박탈당했던 욕망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

“당신이 어떤 색에 얼마의 데니어를 좋아할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준비하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바빴거든. 재생산을 담당하는 딸들을 수태시켜 재료로 쓸 딸들을 새로 생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아무튼 제법 공을 들여 만든 물건이니, 웬만큼 험하게 다루지 않는 한 찢어지는 일은 없을걸?”

“…….”

“뭐라고 말 좀 해봐. 갑작스럽게 절경을 마주해서 할 말을 잃기라도 한 거야?”

나는 속으로 화를 삭이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이깟 바디스타킹을 만들겠답시고 귀중한 대마법사의 인시와 복제체들의 영혼을 소모하다니. 이게 정녕 원탁에 대적하는 마녀의 행동이 맞단 말인가?

그레이스가 천연덕스럽게 과시하는 심각한 기회비용 낭비는 내 심기를 강하게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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