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02화 (502/561)

#50. 세계의 변화 (12)

필요할 때마다 내가 주술사 왕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사해주는 대가로, 그레이스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약속했다.

「레페를 발행하는 왕립중앙은행의 지분 25%를 줄게. 오직 당신만이 연출 가능한 유형의 기적들이 있으니까 말이지. 앞으로는 레페를 찍어낼 때마다 발행 총액의 25%가 무조건 당신의 몫으로 떨어지는 거야.」

「물론, 이익은 당신의 것이라도 시장에 공급하는 시기와 방식은 내 정부의 정책에 따라주길 바라. 대신 지분 비율과는 별개로, 당신에겐 의사결정 및 발행과정을 감독하고 추가발행을 거부할 권리를 줄게.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조건이지?」

「중앙은행의 이사로 파견할 부하들을 몇 명 골라두도록 해. 전자시스템 감시가 가능한 기술인력도 포함시키도록 하고.」

「후후. 이렇게 부부끼리 세계 경제를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네. 당신에게도 내 내조가 만족스러웠으면 좋겠어.」

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에서 달러를 찍어낼 때마다 연준의 지분을 가진 은행들이 일정 비율의 발행이익을 가져가는 구조와 흡사했다.

지속적인 레페 공급은 세계경제에 예상을 상회하는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일본과 영국에서 촉발된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 세계적인 자금경색과 대공황이 오지 않은 건 거의 전적으로 나와 그레이스의 공로였다. 거대한 악의 연합이 본의 아니게 자살자들과 아사자들의 대량발생을 막은 꼴이었다.

이에 관한 유엔 보고서는 세계경제위기가 아주 완만한 연착륙으로 수습됨에 따라, 올 한 해에만 4천만 명 이상의 인구가 아사의 위기로부터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핵심은 인플레이션이 없는 유동성 공급과 전 지구적인 소비 활성화였다.

일반적으로는 통화량 증가가 곧 유동성 공급으로 통하기에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지만, 유동성 공급의 본질은 자산의 현금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시장에 돈이 흐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통화량 증가와 유동성 공급은 동의어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대대적인 레페 공급과 회수, 그리고 그에 기초한 광범위한 소비 증대는 죽어가던 세계경제에 있어서 산소호흡기 이상의 역할을 해내었다.

여의도 김씨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개미들도 나름 유동성 공급자 취급을 받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기들은 돈을 못 벌지만, 여하간 사고팔고 사고팔고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돈이 흐르게 만들어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수익을 못 내면서 매수매도의 쳇바퀴만 굴리는 꼴이 꼭 바위 굴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들 스스로 만든 무간지옥에 갇혀있는 거죠.」

「그들은 대체 왜 투자를 하는 것일까요? 차라리 복권이나 긁을 것이지. 덕분에 쏠쏠하게 재미를 보는 입장이긴 합니다만, 기본적인 공부도 없이 영차영차만 외치는 다수의 개미들을 보고 있자면 가끔은 짠해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일본에 대한 염가의 천연자원 공급은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상승을 상당 부분 억제해주었다. 도쿄 참사와 영국 시장의 연쇄적인 붕괴만 아니었던들, 세계경제는 아프리카 경제권의 부상으로 전대미문의 대호황을 맞이했으리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이를 두고 경태는 다시 한 번 대마법사의 권능에 대한 가벼운 아쉬움을 입에 담았다. 단 두 명의 대마법사가 세상을 이렇게나 크게 바꿔놓고 있지 않느냐면서.

나는 사자바위 언덕의 성소에서 밤을 맞이했다.

도도마는 「왕의 도시(음지니 크와 음팔메)」가 들어설 유력한 후보지들 가운데 하나였다. 주술사 왕의 왕도는 지질학적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데, 현 주술사 왕 동군연합의 강역에서 지진이나 화산의 영향을 받지 않을 대도시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만약 왕의 도시에서 정령의 분노로 해석 가능한 자연재해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곧 왕의 신성한 권위가 실추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곳 사자바위 성소는 그레이스가 왕국의 기반을 다진 이래 줄곧 주 거처로 활용해온 곳이었다. 신전과 궁정이 들어서기 전에도 총리관저가 있었으니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고, 지형의 특성상 성지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좋았으며, 지저가 다 암반이라 견고한 방공호와 갱도진지를 구축하기에도 유리했다.

고로 그레이스가 내게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와는 별개로 왕국 곳곳을 순방하며 신민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여전히 곳곳에 공백이 존재하는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왕정의 관료들로부터 국정현안에 관한 보고를 받고, 무엇보다 중요한 군비확장을 직접 점검하는 등 바쁜 하루를 보낸 그레이스는, 땅거미가 질 즈음에야 미소를 머금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우리 자기. 드디어 다시 얼굴을 보는구나. 오래 기다렸지?”

마녀가 거리낌 없이 팔을 벌리며 다가오기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 마라.”

“왜. 이 정도는 괜찮잖아.”

“싫다.”

“이런. 우리 사이가 전보다 많이 좋아지고 또 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난 여전히 짝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슬퍼지는걸…….”

포옹을 저지당한 그레이스는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알맹이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교태였다. 불투명한 옷을 입고 불투명한 장갑을 끼고 불투명한 베일을 쓴 마녀는, 황금기의 눈이 보여주는 세계에서 언제나처럼 도드라지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보는 입장에선 절로 신경이 당겨지는 위험한 짐승의 존재감이었다.

“밥이나 먹지. 끼니가 늦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늦은 시간의 초대엔 당연히 식사가 포함되어있었다. 단둘이 마주 보고 하는 식사는 꽤나 거북한 것이었으나, 그래도 이 정도는 허용범위였다. 아프리카까지 와서 얼굴도 안 보고 떠난다면 그때야말로 그레이스의 심기가 상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심리적인 거부감과는 별개로, 그레이스가 고용한 요리사들의 실력은 굉장히 우수한 편이었다. 본인은 이렇게 호사스러운 식사를 즐기면서 딸들의 식생활엔 무관심하다는 게 내 감각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도구이고 소모품이라지만, 한낱 날붙이조차 잘 갈고 기름을 발라가면서 써야 하는 것인데.’

얼마나 철저하게 소모품으로만 보기에 이토록 무감각할 수 있는 것인지. 덕분에 여러모로 이득을 보게 된 입장이긴 해도, 납득이 가는가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경태는 이를 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이건 순전히 이 김경태의 감인데요, 그 마녀가 복제체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무관심엔 형님께서 스스로 긋곤 하시는 선이랑 조금 비슷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말입니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시면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요. 하하.」

문득 떠오른 지난 기억을 지우고 있으려니,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그레이스가 통상시야로만 보이는 면사 안쪽의 낯짝을 샐쭉히 하고서 물었다.

“혹시 지금 다른 여자 생각하고 있지 않아?”

“……헛다리를 짚는군. 부하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을 뿐이다.”

“무슨 말? 혹시 나하고도 관계가 있어?”

“없다. 개인적인 일이다.”

“사랑하는 남편의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면 더 알고 싶어지는데.”

“공통의 일 이야기나 하지.”

“갑자기?”

나는 그레이스의 반문을 무시했다.

“우선, 미군 포로송환은 전함 미주리의 정식 임대계약 외엔 다른 대가를 받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소말리아 해적 수괴나 미승인국가의 명의로 계약을 체결할 순 없다는 게 저쪽의 입장이니, 동군연합 구성국 중 하나를 꼭두각시로 내세워야 할 거다.”

“흐음-”

“대여료는 각종 기술지원 비용을 포함하여 미국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자랑을 해도 좋을 정도로 높게 잡을 예정이지만, 돈 따위는 이제 와서 얼마를 쓰든 문제가 되지 않겠지. 혹시 요구사항이 있다면 말해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다시 식기를 쥔 그레이스는 잘 구워진 채끝살을 썰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자기가 CIA와의 협력관계 구축이 영국 공략에 보탬이 되리라 장담했으니, 아내는 그저 남편의 능력을 믿을 따름이야.”

“미주리가 임대 처리가 되면 포로들을 굳이 고기방패로 삼지 않아도 기본적인 항해의 안전이 보장될 거다. 최소한 해상과 공중에서만큼은 대놓고 공격을 가하지 못하겠지.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자산이고, 공식적으로 해적함대의 소속도 아니게 되니까.”

전함 미주리는 기동이 가능한 사적지 취급을 받는 역사적인 함선이다. 주술사 왕의 적들은 이 배를 공격하기 전에 미국인들의 국민감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제국의 항복조인을 기념하는 동판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있었다.

정식으로 미국의 기술협력이 개시된다면 이 전함의 전략적 가치는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기술실증은 이루어졌으되 양산은 하지 않았던, 즉 이미 설계도가 존재하는 신형 포탄들만 받아와도 사거리가 1.6배까지 늘어나는 까닭이다.

‘그 사거리면 사우스엔드 앞바다에서 켄싱턴 궁전까지 때릴 수 있겠지.’

당초엔 상륙지원 이후로도 이 전함의 화력을 써먹으려면 상당한 깊이까지 템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사거리 연장탄을 사용하면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더 발전된 기술이 적용된 포탄이 새로 개발될 경우엔 영국해협과 북해를 오가며 영국 본토 전역을 두들겨주는 일도 가능하다.

물론 신형포탄의 공급이 이루어진다 한들 그 양이 충분할 리는 없다. 미국의 제조업 역량은 박살난 지 오래이고, 자국민들의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과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있는 백악관 미치광이가 자국의 무기를 다른 나라에서 생산하는 걸 달가워할 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내가 빼돌린 포탄과 그 복제품들을 주로 사용하면서, 내륙 깊은 곳에 있는 전략목표를 타격해야 할 때에만 신형포탄을 투사하는 식으로 전함을 운용해야 할 것이다.

나는 소고기와 페어링을 이루는 샴페인을 반 모금쯤 삼키고서 물었다.

“미주리 승조원들의 전향율은 어떻지?”

“전향율이라니?”

“그동안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진 않았을 거 아닌가. 분명 네 신앙에 귀의시킨 자들이 있을 텐데, 그 비율이 너무 높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확인하는 거다. 분명 주술사 왕이 포로들을 세뇌했다는 식으로 악의적인 선전이 이루어지겠지.”

이 일로 CIA에게 사전협조를 구하는 건 의미가 없는 짓이다. 겉으로만 알겠다고 해놓고 속으로는 좋은 선전소재가 생겼다고 여길 테니까.

“자기. 나는 바보가 아니야.”

그레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내버려두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힘을 주지도 않았어. 이미 신원이 다 노출된 상태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고, 돌아가서도 상당기간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을 게 뻔한 인간들을 적극적으로 홀려서 뭐하겠어? 차라리 주술사 왕으로서의 이미지 관리를 하는 편이 낫지. 세상이 주술사 왕의 온건함을 알아야 보다 광범위한 선교에 더 도움이 될 거 아냐?”

“현명한 판단이었군. 요즘 교세확장은 잘되어 가나? 미국에선 네가 사실은 사람으로 변신한 파충류 외계인(렙틸리언)이니 뭐니 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던데.”

렙틸리언은 미국에 마법이 돌아오기 전부터 퍼져있었던 음모론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주술사 왕과 엮여 괴상한 방향으로 확장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이 음모론을 믿는 자들은 이런 주장들을 펼쳤다.

「주술사 왕은 지구대공동 안에 전진기지를 건설한 파충류 외계인들이 지상을 정복하기 위해 내보낸 군대의 사령관이다!」

「그가 보여주는 치유의 기적들은 모두 거짓이다! 그의 진정한 능력은 사람을 렙틸리언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며, 그에게서 질병을 치료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사람의 모습을 훔쳐 변신한(Shape Shifting) 파충류 외계인들이다! 주술사 왕은 이런 식으로 세계 곳곳에 자신의 동족들을 침투시키고 있다!」

「한 번 대머리는 영원한 대머리다! 주변에 한낱 머리카락 따위를 위해 아프리카로 가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뜯어말려야만 한다! 아프리카로 가면 외계인에게 기억과 모습을 빼앗기고 살해당하는 운명이 기다릴 뿐이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이미 늦었다! 그들의 가죽을 벗겨보면 숨겨두었던 비늘이 드러날 것이다! 인류문명은 아프리카와의 교류를 즉각 중단하고, 곧 다가올 인류문명 최후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걸 믿는 사람들의 숫자는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많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늘어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국가와 지역에 따라서는 주술사 왕이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식의 변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는 여러 국가기관들의 정보공작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후나유레」 같은 초현실적인 공포의 현현도 분명히 얼마간의 영향을 미쳤겠으나,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의 교육수준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음모론은 미국의 음모론자 집단(큐아넌/QAnon)이 믿는 세계관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 세계관의 나머지 부분 중엔 대마법사로서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듣자니 그치들은 대각성 지도(Great Awakening Map)라는 것도 함께 믿는 모양이더군. 2만 5천 9백 년의 주기로 인류의 각성이 이루어지고 황금종족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니 어쩌니 하던데, 2만 5천 9백 년을 천만 년 이상으로 고치기만 하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 않은가?”

나는 이것이 원탁의 하수인들이 관여한 바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칠각기사단의 확장을 막기 위해 원탁이 무언가 수를 쓴 게 아닐까 하고.

“아아, 그거.”

그레이스는 폭소를 터트렸다. 배를 잡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도록 웃은 마녀는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어. 그건 내가 추종자들을 시켜서 퍼트렸던 음모론이야.”

“네가 퍼트렸다고?”

“응. 나에 대한 원탁의 추적을 기만하기 위해서였지. 그렇게 ‘신경 쓰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돌면 원탁의 추적역량이 낭비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설마 당신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네. 하하, 하하하하!”

“…….”

“실은 렙틸리언이니 딥 스테이트(그림자 정부)니 하는 소리들도 다 내 추종자들이 퍼트린 소문이 심하게 뒤틀린 결과물이야. 최초의 표적은 물론 런던의 원탁이었고. 따지고 보면 원탁을 중심으로 한 동반승천의 카르텔이야말로 그림자 정부의 전형에 가깝지 않아?”

“……어이가 없군.”

“동감이야. 그렇게 퍼트렸던 소문이 이런 식으로 돌아와서 내게 방해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 뭐, 딱히 대단한 방해는 아니긴 하지만.”

그레이스가 다시 미소 지었다.

“세상 돌아가는 게 알 수 없으면서도 참 재미있지? 지금 당신이 나와 이렇게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게 된 걸 포함해서 말이야.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내게 당신과 나의 관계를 설명해야 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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