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01화 (501/561)

#50. 세계의 변화 (11)

나와 대면한 그레이스 복제체들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도중 번식욕구를 자극받은 인간 여성의 후각적 징후, 즉 휘발성 페로몬의 일종인 코퓰린(Copulin)을 발산할 때가 많았다. 이 휘발성 지방산 조성물의 냄새는 복제체들이 보여주는 우호적인 태도가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서의 하나였다.

“하하.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형님은 복제체들에게 있어서 궁극의 아이돌이나 슈퍼스타 같은 존재라고 봐야죠.”

경태는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물고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까지의 행적만 놓고 봐도 위험과 적의만으로 가득하던 세상을 갈라버린 한 줄기 빛인데, 그 사람이 얼굴마저 개연성인 이성이다? 이걸 어떻게 참습니까? 유전적으로 타고난 동성애자가 아닌 이상에야. 크- 형님 뽕에 취한다.”

“얼굴마저 개연성이라니?”

“몹시 잘생겼다는 뜻입니다. 잘난 외모는 그 자체로 연애감정을 성립시키는 개연성이다. 뭐 이런 의미의 유행어이자 관용구라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은 그런 개연성을 좀 심하게 못 가진 슬픈 사람들이 한탄하듯이 부러움을 표현하는 상황에서 많이 쓰이지요.”

“…….”

“라일라 양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레이스는 후천적으로 미친 인간일 뿐 엄마 뱃속에서부터 유전자 레벨로 망가져서 태어난 내추럴 본 사이코는 아니란 말이죠.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복제체들이 저런 감수성을 보여주는 게 저는 이해가 잘 갑니다. 느슨해진 우리 춘식이에게는 긴장감을 주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진 첩보자산 수집은 라일라가 마지막으로 칠각기사단에 몸담고 있었던 시절과 현재 사이에 끼어있는 무지의 간극을 메우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라일라가 원래 알고 있던 칠각기사단의 내부사정, 조직문화, 보안절차 등을 최신화하는 것은 심층적인 침투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었다.

케냐 동부와 동북부의 대초원엔 하룻밤 사이 3백 개가 넘는 대형 우물이 만들어졌다. 개중엔 애써 퍼 올리지 않아도 스스로 물이 솟구치는 자분정(自噴井/Artesian well)들이 소수 포함되어 있었다. 저 미국의 다코타 부족이 자분정 「끓어오르는 샘」을 성소(聖所)로 여기듯, 현지 원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길 만한 또 다른 장소들이었다.

주술의 장막 바깥의 세상은 이틀간 이어진 해갈의 기적을 목격하고 시끄럽게 달아올랐다. 주술사 왕을 공전절후의 사기꾼이라고 매도하던 비판적인 언론들조차, 오랜 가뭄에 고통받던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적 이외의 단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외면하진 못했다.

반쯤 종교화되어있던 환경미치광이들은 왕의 사도가 선보인 권능에 환호했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 주술사 왕이 인류의 죄로 무고하게 죽어가던 수많은 야생동물들을 살려냈다! 그는 진실로 인간과 자연의 중재자이며,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구원자이자, 인류 문명이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춰주는 새 시대의 선지자다!」

일각에선 경태가 농담처럼 주워섬겼던 노벨평화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주술사 왕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엔 그 땅에 일찍이 없었던 평화와 번영이 찾아오고 있다. 보라. 내전과 학살, 끝 모를 기아와 부족간 갈등으로 가득하던 나라들이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제 겸허히 그의 업적과 지도력을 인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프랑스를 위시한 구 강도국가들은 이런 목소리들에 대하여 강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프랑스 극우당에 속한 모 상원의원은 기자들 앞에서 사납게 포효했다.

「세계는 주술사 왕이 보여주는 위선과 신기루에 속아선 안 됩니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어떠하든 간에, 그는 국제사회로부터 주권을 인정받은 독립국가들을 무력으로 전복시키거나 침공한 테러조직의 수괴입니다! 그의 전쟁범죄 혐의는 너무나도 명백하며, 그의 사도들 또한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를 공모한 A급 전범들로 취급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강도국가들의 정부수반들은 공식적인 논평을 자제했다. 현 세계경제의 생명줄이 주술사 왕에게 달려있는 이상, 그 심기를 함부로 거스르기는 곤란한 면이 있었던 탓이다. 현실적으로 주술사 왕의 세력을 단기간에 무너뜨릴 방법이 없기도 했고.

일본에 공급하는 막대한 양의 원자재는, 그 낮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땅에서 돈을 파내는 수준의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생산원가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이는 노동자들의 급여가 대부분 기적태환권 레페로 지급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의 농장과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겐 왕의 전사들처럼 급여의 일부 또는 전부를 레페로 수령할 권리가 주어졌는데, 외환시장에서 레페의 가치와 신용도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짐에 따라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급여 전액을 레페로 수령하기를 희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발행량 조절을 위해 그 요망을 다 들어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열풍은 지난날 한국을 휩쓸었던 암호화폐 투자의 광풍보다 훨씬 더 뜨겁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동군연합의 국민들 모두가 레페 벌이에 미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페라는 화폐 자체가 주술사 왕이 약속한 은총의 증표이다 보니,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사후에 누리는 복락이 커진다는 믿음마저 성행했다.

다른 신용화폐들과 달리, 레페는 그 자체로 기적태환의 가치가 내재된 상품인지라 발행량 증가에 따른 통화가치 하락이 미미했다.

내가 읽는 경제지에선 이 같은 논평을 내놓았다.

「오늘 아침, 국제외환시장에서 레페의 가치가 마치 급등주와도 같은 갭(Gap) 상승을 보여주었다. 그 상승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중이다.」

「주술사 왕의 사도 콜레로의 헤그하가 케냐의 대초원에서 연달아 선보인 기적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선 광범위한 지역에 풀려있던 레페를 일거에 회수해버리는 권능을 전 세계에 대고 시연해보인 것과 같다.」

「이건 금융시장에선 문자 그대로의 권능(權能)이다. 그 어떤 국가의 중앙은행도 이렇게나 강력한 통화조절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주술사 왕의 기적이 진짜이든, 아니면 회의적인 사람들의 의심처럼 각성능력자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연출한 사기극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환경재난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만큼의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이 레페의 위상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오늘 이후, 전 세계의 경제학자들은 주술사 왕이야말로 미국 연방준비제도보다 더 강력한 범지구적 통화정책 결정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화에 기민하게 적응해야만 한다. 우리 외환당국은 후루 신성왕국연합이 미승인국가라는 이유로 레페를 공식적인 외환거래 시스템에 포함조차 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과연 이게 현명한 처세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거래를 해야 하는 투자자들을 보호하고 국익을 증진하기 위해서라도 제도마련이 시급하다.」

오랜만에 찾은 구(舊) 탄자니아의 수도 도도마에선 공항 근처에서부터 레페의 위상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수많은 외국인 환전상들이 현지인들로부터 레페를 매입하고, 수수료를 붙여 다른 외국인들에게 되파는 혼잡함은 이 땅의 경제적 융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광경이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환율과 계속해서 레페의 가격이 오를 거라는 믿음이 혼잡함의 강도를 더했다. 프리미엄을 얼마를 더해 거래할 것인가를 두고 흥정이 벌어지는 것이다.

머리가 벗겨진 어떤 관광객은 왕의 군대에 속한 공항 무장경비를 상대로 직거래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어보기라도 한 것인지, 공항을 순찰하던 왕의 전사는 짧고 투박한 발음의 영어로 무뚝뚝하게 대응했다.

“선제시 바람니다.”

“아 글쎄, 대략적으로 얼마라는 기준은 있어야죠. 내가 비행기를 타기 전에 본 환율은 너무 많이 바뀌어서 무용지물이라고 하고, 뭐가 문제인지 지금 인터넷도 먹통인데…….”

“아무튼 제시요.”

순찰 도중 이런 흥정에 임하는 건 기율의 측면에서 좋게 평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왕의 군대가 교육수준이 매우 낮은 인적자원 풀을 기반으로 급격한 규모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타 저개발 국가들의 부패한 군경들처럼 외국인을 상대로 뇌물을 요구하거나 범죄혐의를 뒤집어씌우거나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했다.

왕의 군대엔 부패가 없다. 이는 외국인 기자들과 다양한 국제 구호단체 관계자들, 그리고 UN 평화유지군의 일부 관계자들-즉 주술사 왕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국가에서 파견한 인력들-이 공통적으로 놀라움을 담아 증언하는 바였다.

평화유지군의 경우 원래부터 주둔하고 있던 지역이 하루아침에 주술사 왕의 영토로 편입됨에 따라 예기치 못한 긴장상황을 겪은 부대들이 많았다.

「왕의 군대 「우타웨 나 브옘베」는 우리가 보아온 그 어떤 아프리카의 군대보다도 기강이 엄정하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물자를 갈취하지도 않고, 부족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적인 대우를 하지도 않으며, 구호단체들에게 보호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주술사 왕의 명령으로 특정 외국기업들의 자산을 국유화할 때에도 압류자산을 빼돌리거나 불필요한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없다. 그들은 우리가 외국인들의 신병을 안전하게 인도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다. 외국기업들에 대한 자산압류 조치가 정당한가와는 별개로, 그들의 태도는 매우 신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이 땅에 도래한 이후, 우리는 하루아침에 다른 세상으로 와버린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주술사 왕의 통치는 적어도 현지인들에게 있어선 축복 그 자체다.」

왕국연합 재상을 겸하는 르완다 대통령은 해당 지역들에 부대들을 계속 주둔시키며 ‘평화를 위한 감시활동’을 수행하게 해달라는 UN 평화유지군 사령부의 요청을 조건부로 승낙했다. 그 조건이란, 기존에 주둔하던 평화유지군 부대들이 왕의 전사들에게 기본적인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평화유지군 부대들은 왕의 전사들에게 영어와 사칙연산과 기본적인 상식 등을 가르쳤고, 평화유지군의 군의관들은 왕의 전사들에게 안경을 맞춰주거나 충치를 뽑아주거나 했다.

그리하여 르완다 대통령은 「주술사 왕의 조지 마셜」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왕의 군대는 마치 거대한 교육기관처럼 작동하여 전사들의 평균적인 지적 수준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렸다. 성적이 우수한 전사들에겐 진급시험 가산점과 함께 소정의 레페가 지급되었으므로, 교육의 열기는 그들의 광신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왕의 군대의 군기는 이런 배경에 광신이 더해진 결과로서 성립하는 것이었다.

「나는 활이요 너희는 화살이라.」

그레이스의 말을 상징처럼 수놓은 왕의 군대의 깃발은 지나가는 모든 현지인들로부터 경의가 깃든 시선을 받았다.

공항 밖의 시가지엔 지난날 모래폭풍 속에서 보았던 살풍경함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왕국 재상으로서의 르완다 대통령은, 마치 균류가 제멋대로 번식하는 것만 같았던 이 땅의 혼란스러운 발전에 통합된 질서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실로 놀라운 수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헌신의 대가로 르완다는 기존에 약속받았던 부룬디와의 통일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국민투표는 이미 완료되었고, 부룬디 정부는 르완다 정부에 흡수되는 형태로 사라질 예정이었다.

르완다 정권이 투치족의 정권이고 부룬디 정권이 후투족의 정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통합은 르완다 대학살 이래 꾸준히 남아있던 갈등의 불씨가 결정적으로 사그라드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 모든 변화들은 인류애를 삶의 지표로 삼고 있던 자들의 이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레이스를 찬양하는 사회운동가들이 날로 늘어나기만 하는 이유였다. 당장 내 눈에도 그런 어수룩한 몽상가들의 무리가 몇몇 눈에 들어오는 상황이다.

‘이게 다 나와 미친 마녀의 전쟁준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 저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어째서인지, 나는 한순간 저 몽상가들을 눈 뜨고 꾸는 꿈으로부터 강제로 깨워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곱씹어도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충동이자 언짢음이었다. 내 꿈속에 유해로만 남아있는 스승새끼의 새까만 눈구멍이 떠오르기도 했다.

몰라보게 확장된 공항으로부터 나온 후엔 도도마에서 가장 높은 땅인 「사자바위 언덕」으로 향했다. 본디 탄자니아 연방의 총리 관저가 차지하고 있었던 이 언덕엔, 이제 주술사 왕과 그 사도들을 위한 성역이 대신 들어선 상태였다.

나는 이 성역에서 또다시 레페의 신용과 가치를 절상시키기 위한 기적 행사에 착수했다. 상시 다수의 복제체들이 머무는 것으로 파악된 이곳은 또한 정보의 집적도도 높아, 기본적인 준비를 다 갖춘 라일라가 심층적인 침투활동을 개시하기에도 유리한 장소였다.

도도마에서 기적을 기다리던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돈 많은 외국인들이었다. 일찌감치 레페를 지불하고 대기 순번에 이름을 올려놓았던 이들은, 오늘의 기적 행사를 닷새 전에야 예고받고 급하게 날아온 참이었다. 여행경고를 무시하고 환승을 거듭하며 오기에 닷새는 꽤나 빠듯한 시일이다.

개중엔 큰 액수의 레페를 납입하고서도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급한 마음은 마음이고 이성적인 의심은 의심인 것이다.

“왕의 사도라고 하셨지요? 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신청서에 적은 사유는 거짓입니다.”

“심장이 본인의 것이 아니로군. 면역억제제를 먹기가 지겨워서 왔나? 아니면 암세포가 자랄까 봐 두려워서?”

“……둘 모두입니다. 해결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불경한 의심을 흉중에 두고 거짓으로 왕의 사도를 시험했으니, 마땅히 두 배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두 배?! 이미 납부한 레페가 4천만 달러어치인데, 갑자기 두 배를 달라고요?!”

“싫다면 떠나라. 붙잡지 않겠다.”

“이미 납부한 돈은 어쩌고요!”

“지금의 환율로 쳐서 돌려주지. 그러나 너는 다시는 왕의 은총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

“이것은 마지막 기회다. 더 이상 내 시간을 허비하게 하지 마라.”

“……젠장. 추가금에 대해서는 1년의 기한을 주십시오. 계약서를 작성하고 가겠습니다.”

“좋다.”

“그럼 이제- 억?!”

건방지게 간을 보던 미국인이 제 심장 어림을 움켜쥐고 앞으로 쓰러졌다. 시간을 더 버리기 싫었던 내가 곧바로 「침식」과 「생명」을 침투시켜 부호의 심장을 재합성하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원래 있던 심장은 그냥 양분으로 환원해버리고, 본인의 피와 살점과 유전자를 씨앗 삼아 키운 새 심장으로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식사를 든든히 하고서 소화가 끝날 때쯤 오라고 했으므로, 추가적인 양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세포 단위로 이루어지는 실시간 치환이었다.

「라일라. 그 방의 비밀번호는 6348이다. 다른 복제체가 접근하면 바로 알려주도록 하마.」

기적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입을 움직이지 않는 발성과 흡음결계, 그리고 숨겨진 송수신기를 통해 라일라에게 황금기의 눈으로 확인한 정보들을 전달해주었다.

“끝났다.”

이마가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미국인 부호는 경황없는 낯짝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까딱이는 고갯짓을 곁들여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네 심장은 온전히 너의 것이다. 나가라. 다음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잠깐, 계약서에 조직검사 결과에 따라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어, 어어-”

조금 전 고통 속에서 거의 실신을 해놓고서도, 또 신비로운 현상을 경험하고서도 바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결코 범상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런 인간이 주술사 왕의 기적을 증언한다면 그 효과가 제법 좋을 것이었다.

내 염동력에 떠밀려 일어선 부호는 왕의 전사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로 끌려 나갔다.

이후 나는 다섯 시간에 걸쳐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사해주었다. 화상을 비롯한 흉터를 지우거나, 피부탄력을 개선하거나, 죽은 신경을 되살리거나, 없던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해주는 등 치료가 비교적 간편한 자들은 넓은 기도실에 모아놓고 한꺼번에 수십 명씩 묶음으로 처리해버렸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도중에 경태는 속삭이듯 우려를 표했다.

“형님이랑 누님이 이미 다 검토를 한 사안이고,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막상 이렇게 현장을 직접 보고 있으려니 ‘역시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지 않은가?’ 싶은 걱정이 듭니다.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라고 본다. 적어도 런던을 떨어뜨리기까지는 문제가 없을 거야. 그 이후엔 얼마든지 판을 뒤엎을 수 있지.”

“그러면 다행이겠는데 말이죠…….”

경태가 우려하는 것은 주술사 왕 신앙의 지나친 강세와 그에 따른 균형 붕괴였다. 기적을 직접 겪은 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주술의 장막 바깥에서 광신이 퍼지는 속도에도 가속이 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엔 장애물이 존재했다. 주요 국가들은 일찍부터 주술사 왕 신앙을 중대한 안보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들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았으되, 내부적으로는 비밀스러운 정보공작을 포함하여 다양한 대응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경각심은 한 문장으로 압축 가능했다.

「일찍부터 예방조치를 취해두지 않으면 나중엔 나라가 안에서부터 파먹혀버릴 가능성이 있다.」

막강한 경제적 영향력에 더해 종교적인 지배력까지 더해질 경우, 민주주의 제도의 취약점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통째로 신정국가로 바뀌어버리는 수가 있다는 게 주요 국가 보안당국자들의 생각이었다.

당장 아프리카 대륙에서 주술사 왕의 비군사적 영토 확장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신앙을 먼저 퍼트려 놓고, 정부를 기생충에 조종당하는 숙주처럼 만들어 ‘평화적인’ 통합을 이끌어내는 식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주술사 왕에 대해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정보들과 음모론들을 퍼트리는 한편, 주술사 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과학자·회의주의자·종교인들에게 은밀하게 힘을 실어주고, 치안·전쟁·질병감염·마약을 이용한 전도활동 등의 위험을 크게 과장하여 주술사 왕 동군연합에 속한 모든 국가들에 대해 최고 수준의 여행경보를 유지했다.

그동안 선보인 숱한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주술사 왕은 사기꾼이라는 믿음이 세계적으로 아직 상당한 세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였다. 심지어 주술사 왕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는 일본조차 알게 모르게 대응을 취하고 있는 정황들이 포착된 마당이다.

당연히 CIA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비공식적인 협력은 협력이고, 국가안보를 위한 조치는 조치이니까.

‘어쨌든 정식수교는 불가능하지.’

완전한 관계정상화와 정식수교가 이루어진다면 여행경보를 유지하기도 곤란하고, 정보공작을 이어가는 데에도 큰 지장이 생긴다.

게다가, 정식수교는 그렇잖아도 위기를 겪는 중인 미국의 달러 패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것이 뻔하다.

국제통화시장에서 레페의 지위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후루 신성왕국연합이 미승인국으로 남아있는 편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벌이가 최고인 백악관 미치광이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관계정상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미친 대통령과 달리 상식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백악관 참모들은 결사의 각오로 그들의 상급자를 뜯어말리는 중이었다. 미국 상하원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통해 대통령을 견제하고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선 성난 유럽 강도국가들의 지랄을 못이기는 척 조금씩 받아주며 중간자로서 실리를 챙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방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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