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500화 (500/561)

#50. 세계의 변화 (10)

나는 일몰을 기하여 수원지를 유지하던 거인의 마법을 거두었다. 지하수의 용출이 중단되자,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던 얕고 넓은 호수는 순식간에 뭍으로 변해갔다. 남은 거라곤 여기저기 흩어진 웅덩이들이 전부였다. 하루이틀만 지나도 모두 말라 없어질 흔적들이었다.

기적이 행해진 자리에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 것은 조금 아까운 일이다. 순례자들을 끌어들일 무언가가 있으면 그레이스의 사이비 교주 노릇에 보탬이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이곳에 성스러운 우물을 하나 남기기로 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성 패트릭의 우물(Pozzo di San Patrizio)을 참고하여 이중나선 구조의 통로를 지닌 원통형 우물을 만든 것이다. 전체적인 형상은 지하로 파고드는 탑과 같았다.

자연암반을 최대한 활용하고 압착 테라코타(구운 진흙)로 마감한 초대형 우물은 들어가는 입구와 나오는 입구가 달라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에 적합한 구조였다. 또 수원과 음수대를 분리하여 지하 대수층 전체가 이질이나 콜레라 따위에 오염되는 일이 없게끔 했다.

우물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분 정도에 불과했다. 파낸 흙은 주변에 바람막이 벽을 두르고 비석을 하나 구워 세우는 용도로 활용했다. 내가 지형을 바꾸고 우물을 빚는 동안 부하들은 이동할 채비를 마쳤다.

나는 경태의 부하에게 고갯짓했다.

“가서 통역을 불러와라.”

불려온 통역은 바들바들 떨면서 내가 구술하는 말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비석에 글귀를 새겼다.

「울루구루의 무지개이자 비구름인 콜레로의 헤그하가 높으신 주술사 왕 폐하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하루 동안 강을 되살리다. 이 우물은 그 은총의 기념비이며, 왕의 치세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마르지 않을 것이다.」

수맥과 지하자원 탐사를 위한 야간 저공비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사도 헤그하의 가면을 착용하고서 대초원의 부족장들 및 지자체장들과 다시 대면했다.

“너희는 기적을 보았는가?”

오체투지한 원주민들은 입을 모아 그렇다고 대답했다. 울음을 터트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아침에도 그러했듯, 이 모든 광경은 카메라에 담겨 송출될 예정이었다. 방송 스태프들은 카메라 렌즈 너머로도 감히 왕의 사도를 직시하기 어려워하여 촬영에 애를 먹었다.

“오늘의 기적은 너희를 가엾게 여겨 너희가 모은 은총의 증표들 이상으로 은총을 베풀었음이라. 그럼에도 강과 대지를 완전히 되살리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나니, 너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를 강에 실망하지 말고 왕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다질지어다.”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모든 사이비들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지만, 이미 선보인 기적이 있는 만큼 대초원의 원주민들은 더 많은 은총을 구하는 데 혈안이 될 터였다.

은총화폐 레페의 대외신인도 향상은 당연한 덤이었으며, 그 외에도 가뭄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오늘의 기적에 비상한 관심을 보일 게 분명했다. 향후 주술사 왕 동군연합의 경제와 외교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요소들이다.

부하들과 함께 날아오른 하늘에선 사바나 대평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태양은 지평선을 넘어갔어도 하늘의 가장자리엔 아직 불그스름한 석양의 기운이 남아있어, 내가 되살린 강줄기는 희미한 빛을 받은 금사처럼 반짝였다.

강줄기 주변엔 물 냄새를 맡은 동물들이 몰려들어 마른 목을 축이고 있었다. 망을 보던 각성체들은 낮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우리를 경계했다. 그동안 하늘에서 쫓아오는 밀렵꾼들을 많이 경험해보았을 것이었다.

탐색용 항공기엔 위성 인터넷 단말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레이스에게 항공사진을 첨부한 진행상황을 공유해주었다. 답신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빠르게 돌아왔다.

「고생 많았어, 여보. 남은 일들도 잘 부탁할게. 불미스러운 방해가 끼지만 않는다면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쯤엔 당신과 재회할 수 있겠지? 그 시간이 너무나 기다려지네. 개인적으로 준비한 작은 이벤트가 있으니 당신도 기대해줬으면 해.」

답신을 슬쩍 훔쳐본 경태가 말했다.

“우리의 진짜 계획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 같죠?”

나는 가볍게 긍정했다.

“그렇겠지. 라일라의 존재를 모르니까.”

수맥 및 지하자원 탐색은 내가 그레이스의 의심을 받지 않으며 넓은 영역에 걸쳐 칠각기사단의 거점들과 그레이스 복제체들의 배치를 확인할 기회로서도 가치가 높았다.

일단 그것들을 확인하기만 하면, 라일라를 침투시키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라일라 그 자신이 대부분의 보안절차를 무력화하는 마스터키와도 같으니까.

내게 라일라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레이스는 내가 이번 부탁을 들어준 것을 두고 전적으로 동맹으로서의 신용에 기초한 호의적인 거래로 해석했을 터였다.

“저기 칠각기사단이 움직이는군.”

칠각기사단이 운용하는 기동타격대는 능력의 균일함과 장비, 전술적인 움직임의 측면에서 원주민으로 구성된 왕의 군대(우타웨 나 브옘베/활과 화살)와 확실하게 구별되었다.

그동안 왕의 군대가 보유한 장비들이 대대적으로 향상되긴 했어도, 칠각기사단이 보유한 장비와는 질적인 차이가 여전했다.

나는 칠각기사단과 그레이스 복제체들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고자 원탁의 침투공작을 경계해야 한다는 구실을 대었다.

비록 영국과 원탁이 크게 위축되어 있다고는 하나,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특작조를 침투시키는 정도는 가능했다. 주술사 왕 동군연합의 강역은 너무나도 광활하고, 감시체제는 강역의 광활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열악한 까닭이다. 어쩌면 일찌감치 침투한 상태로 비활성화되어있는 점조직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따라서 내가 발휘하는 기적이 공중파를 타고 중계되면 원탁의 칼이 찌르고 들어올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오늘밤, 나는 수맥을 찾아다니며 지속적으로 동선을 흘릴 예정이었다.

이 구실을 납득한 그레이스는, 내가 기대했던 대로 각지에 배치되어있던 제 딸들에게 경계 및 순찰 강화와 적극적인 업무협조를 명령해두겠노라 약속했다.

나는 표면적인 역할수행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내가 수맥의 좌표를 따서 송신할 때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각성능력자들이 몰려와 건조한 땅을 파헤쳤다. 능력자 개개인이 중장비에 준하거나 가끔은 능가하는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능력자들은 가뭄에 고통받던 부족들 출신이었으므로, 사막화가 진행되어가던 대초원엔 어림잡아 2~3분에 하나 꼴로 새로운 우물이 탄생했다.

이 과정을 중계하는 방송들은 곧 내가 실시간으로 남기고 떠나는 공개적인 발자취들이었다.

원탁의 하수인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건 그냥 적당히 둘러댄 구실에 불과하나, 정말로 걸려드는 참수부대가 나온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나는 틈틈이 휴식을 취할 때마다 업무협조의 명목으로 칠각기사단 및 왕의 군대를 감독하는 그레이스 복제체들과 접촉했다. 친선과 격려의 의미라며 부식을 공유한 건 덤이었다.

“……야식을 먹고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조금 갑작스럽군요. 예? 사람은 밥을 잘 먹어야 한다고요?”

나를 대하는 복제체들의 태도엔 조심스러운 경계와 호의가 공존했다. 개인별로 얼마간의 차이는 있었으되, 대체로 호의의 색채가 더 강하게 엿보이는 편이었다.

성격과 성향은 유전자에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 겉으로 내보이는 훈련된 자세들이 어떠하든, 그 안의 알맹이는 라일라와 닮아있으리라 가정하고 대하니 첫 대면의 어색함은 빠르게 누그러졌다. 내 도구적인 호의를 완고하게 거절하는 복제체는 없었다.

벽이 점차 허물어짐에 따라 일부 복제체들은 이런 부탁들을 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당신이 말로만 듣던 그 웨인이구나……. 저기, 악수 한 번 해봐도 될까? 다섯 대마법사의 살해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야. 어머니와 우리 자매들 모두가 당신에게 큰 빚을 졌어.”

“존경하는 마스터 웨인. 우리 뭔가 소지품 교환이라도 하지 않을래요? 다, 당신처럼 강대한 대마법사의 눈에 찰 만큼 특별한 걸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난 걸 기념하는 의미로……. 여기 이건 제가 처음으로 사냥한 원탁 기사의 심장을 뽑아 수축시켜서 만든 마도구(탤리스만) 장식이에요. 저한테는 의미가 깊은 물건이죠. 그때 어머니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잘했다.”라고 해주셨거든요.”

“어머니께선 당신의 신선한 정액을 받아오면 상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경험은 없지만 손이든 입이든 써서 최대한 만족스럽게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제 몸을 써주신다면 더 좋습니다. 담아서 가져가기 편하니까요.”

이들의 벽을 허무는 데엔 주의 깊게 준비한 초콜릿 시폰 케이크가 제법 유의미한 역할을 해주었다. 부드러운 케이크를 맛본 복제체들은 하나같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강렬한 반응들을 보여주었다.

“와. 세상에. 이거 뭐야? 이거 진짜 뭐야?”

부식들 사이에 포함된 케이크는 철저하게 라일라의 입맛에 맞춰 준비한 것이었다.

침투훈련이 이루어지는 기간 동안, 라일라에겐 전 세계 유명 제과점들과 파티시에들의 작품들이 제공되었다. 고속비행이 특기인 헌터들이 각국 부호들의 사치스러운 수요에 대응하여 구축한 초고가 초고속의 신선배송 시스템을 아낌없이 이용한 결과였다.

특정 헌터를 지명하여 배송을 의뢰할 수도 있는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뉴욕 유명 제과점의 케이크를 한국으로 공수해오는 데 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케이크 하나 주문하는 비용이 한화로 곧잘 1억을 넘기기는 했어도, 한낱 먹거리 운반 따위에 조직의 정예 인력을 할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VVIP들을 상대하는 배송업자들이라 주문내역의 보안도 철저한 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라일라의 기호를 가장 정확하게 저격하는 케이크를 찾아낸 것이니, 라일라와 유전자부터 동일한 복제체들의 입맛에도 그만큼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굉장해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어요……!”

“맛있습니다. 정말 너무-” 꿀꺽- “너무 맛있습니다. 이거 얼마나 더 남아있습니까?”

“초콜릿 시폰 케이크…… 이게 이런 맛이었군요. 기억해두겠습니다.”

놀랍게도, 복제체들 중에는 초콜릿 시폰 케이크를 처음 먹어보는 개체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이는 해당 복제체들에게 성숙한 기억과 인격을 제공한 「언니(엘더)」조차도 기억 복제가 이루어진 시점에선 초콜릿 시폰 케이크를 입에 대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라일라는 이런 면에선 그나마 처지가 좀 나은 복제체였던 셈.

나는 다시 한 번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무슨 조직 관리를 이런 식으로 하나.’

아랫것들에게 밥을 먹이는 건 조직을 이끄는 자의 기본적인 권리이자 책임이다. 그레이스는 그 기본을 소홀히 한 탓에 찔리지 않아도 될 허를 찔리는 것이다.

“끄응- 끄으응-”

춘식이는 복수의 그레이스 복제체가 한자리에 모일 때마다 꼬리를 내린 채로 내 옆에 딱 달라붙어 끙끙대는 신음을 흘렸다. 마음의 벽이 낮아진 복제체들은 내가 데리고 있는 개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잠시 만져 봐도 되나요?”

“이상하다. 얘는 왜 이렇게 우리를 무서워하지?”

“우리 생김새랑 냄새가 다 똑같아서 그런가 봐.”

복제체들이 맞춘 건 절반의 정답이었다. 사람의 체취엔 변하지 않는 부분과 변하는 부분이 공존하며, 같은 복제체들이라도 그 미묘한 차이를 통해 개개인을 구분하는 게 가능하다. 춘식이에겐 라일라 아닌 라일라가 여럿 나타난 이 상황이 몹시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러는 사이 침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시작은 칠각기사단의 소규모 분견대와 각성체 기린 무리 사이의 우발적인 충돌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충돌은 내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었다. 기린들은 연막을 위해 준비한 시체인형들이었고, 실제로 전투를 수행한 것은 매복하고 있던 내 부하들이었다. 지원요청을 받고 달려간 또 다른 칠각기사단 분견대는 다양한 원시마법들이 대대적으로 투사된 격전의 흔적과 온전치 못한 육편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시체조차 온전치 못한 마당에 의복과 장비가 온전하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칠각기사단 분견대는 주변을 짧게 둘러본 후 부서진 장비들과 찢어진 시체들을 모아 소각했다. 그 과정에서 복장과 장비의 수가 맞는지에 대한 정확한 확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이동에 보조를 맞추는 게 더 우선이었으니까.

이로써 칠각기사단의 현용 의복과 장비를 획득한 라일라는, 내가 칠각기사단의 주력 기동대들과 그 지휘관 격인 복제체들을 붙잡아둘 때마다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 훗날 더 깊은 침투의 밑천으로 삼을 만한 재료들을 확보했다.

다만 라일라의 만족감은 거둬들인 성과의 풍부함과는 또 별개였다. 대초원 방면 칠각기사단과의 다섯 번째 접촉이 마무리되었을 때, 라일라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이렇게 하소연했다.

“나랑 똑같이 생긴 자매들이 웨인이랑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뭔가 굉장히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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