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계의 변화 (9)
내가 만들어낸 수원지에서 샘솟는 물의 양은 단위면적당 용출량으로 보면 미미한 수준이었으되, 수원지의 직경이 8백 미터에 달했으므로 초당 용출량의 합계는 대략 5천 톤 안팎으로 추정되었다. 오늘 하루가 저물기 전까지 작업을 계속한다면 도합 2억 톤 가까운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는 셈이다.
사실 2억 톤이라고 해봐야 한국의 연간 가용 수자원량 대비 380분의 1에 불과한 양이어서, 이것만으로는 한반도 전체보다 배 이상 넓은 케냐 동북부 대초원의 가뭄을 해소하기에 부족한 감이 많았다.
시간당 용출량을 늘리려면 더 늘릴 수는 있었다. 지형과 지층의 구조상 지하 대수층에 원래부터 작용하던 압력의 도움을 받고 있는 터라, 내게 걸리는 부하가 예상보다 많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량을 무턱대고 증가시켰다간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지역 근방에서 전대미문의 수해가 발생할 것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경외감을 심어주기엔 충분하지.’
앞으로 사나흘. 혹은 그보다 얼마쯤 더 길게. 말라붙었던 강줄기에 일시적으로나마 다시 물이 흐르는 기적을 목도한 원주민들은, 더욱 많은 왕의 은총을 모으면 대초원의 젖줄기를 완전히 되살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목을 매게 될 것이다.
실질적인 물 부족은 그레이스가 원래 요청했던 대로 다수의 우물을 뚫어 해결해줄 요량이었다. 강을 되살린 기적에 비하면 손색이 있긴 하나, 마실 물이 솟을 자리를 점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위대한 예언자의 권능으로 통했다.
우물을 뚫기만 하면 거의 무조건 맑은 물이 나오는 땅에서 사는 한국인들의 감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대수층의 자연적인 오염이 흔한 이곳에서는 식수원으로 쓸 수 있으면서 화석수(化石水)가 아닌 우물을 확보하기가 제법 까다로웠다.
하지만 나는 저공비행으로 슥 훑어보며 지나가다가 수맥이 있는 자리를 레이저 좌표측정으로 쏴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때마다 해당 지역의 각성능력자들이 몰려와 땅을 파는 식이면, 하룻밤에 수백 개의 맑은 우물을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수맥을 찾는 작업은 또한 지하자원을 찾는 작업을 겸했다. 황금기의 눈은 그 어떠한 과학적 수단이라도 초라하게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성능의 탐사도구였다.
땅속 깊은 곳을 들여다볼수록 그 사이에 끼는 정보량의 폭증으로 해상도가 떨어지는 게 문제지만, 3~4킬로미터 이내의 깊이에서 채산성이 우수한 광맥을 찾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광맥에 비해 동질성 및 밀도가 높은 수맥의 경우 설령 10킬로미터 아래에 있다 한들 존재 자체는 인지할 수 있었다. 이는 조건이 수맥과 유사한 유전이나 가스전에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수연을 도와 주술사 왕 동군연합의 자원무역 실무에 관여하는 여의도 김씨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솔직히 그동안 회장님께서 좀 과하게 신중하신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은 있었지요. 그, 뭐냐, 황금기의 눈? 그걸 가지고 가장 크게 축재를 할 방법이 지하자원 탐사니까, 원탁도 분명 그쪽을 주시하고 있으리라는 말씀이 맞긴 했는데…… 지켜보는 입장에선 버려지는 기회비용들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지라……」
「아무튼 이제라도 회장님의 능력이 새롭게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섬기는 분의 돈을 불리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아랫사람으로서는 기쁜 마음이 들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거, 우리 조직에게 너무 유리한 계약 아닙니까? 자원무역의 순익배분이 이미 50대 50인데, 탐사의 대가로 주어지는 지분은 또 수익분배와는 별개라니. 물론 원칙을 따지면 이게 맞는 거긴 한데, 그 원칙이라는 것도 이익의 규모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리를 하는 거니까요. 나중에 마찰이 빚어지진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이건 어지간한 부부 사이에서도 돈 문제로 이혼소송이 벌어질 것 같은 계약-」
「예? 헛소리 하지 말라고요? 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레이스는 원탁을 부수고 서구세계를 불태울 전쟁을 할 수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미친년이며, 내가 걸어두는 계약들은 힘의 균형을 맞춰 배신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일 뿐. 이에 대한 그레이스의 태도가 다분히 허용적이기도 하니, 김재환이의 걱정은 그레이스 측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았다.
“웨-인!”
해가 중천을 지날 즈음, 긴 비행을 마친 라일라가 춘식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라일라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외부관측에 대비해 체형과 안면이 드러나지 않게끔 장구류를 착용했고, 춘식이는 군견용 하네스에 여러 액세서리들을 달고 있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복제체 마법사와 개의 경주는 마법사의 승리로 끝났다. 속도를 줄인 라일라는 자리에서 일어선 나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
나는 내 품에 안겨 작게 훌쩍이는 라일라의 정수리를 의아함 반 불편함 반으로 내려다보았다.
의도적으로 심화시킨 의존성과는 별개로, 이렇게까지 서슴없는 거리감을 허락한 적은 없었는데. 떨어져있는 동안 혼자서 멋대로 마음의 거리를 달리한 모양이다.
햇빛을 가리는 위장막 아래에서 방탄모와 전술 스카프를 벗은 라일라는 눈시울을 붉힌 채로 웃으며 내 가슴팍에 이마를 비벼댔다.
“웨인, 웨인…….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
라일라의 신경계에선 기쁨과 함께 긴장의 색채가 엿보였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떨림의 근원은 필시 어머니인 그레이스에게 있을 터. 내 조직으로 적을 옮긴 이래, 라일라는 지금처럼 어머니와 물리적으로 다시 가까워졌던 적이 없다.
희소가치가 높은 도구는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뜸을 들이던 나는 라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밥은 먹었나?”
“아니. 아직. 웨인은?”
“다 같이 먹도록 하지.”
개 짖는 소리가 나를 도와주었다. 문자 그대로 물 위를 날듯이 달려온 춘식이는 꼬리를 흔들며 정신 사나운 3차원 기동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맴도는 와중에 자꾸만 라일라를 밀어내려 시도하는 건 덤이었다.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개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잇, 춘식아. 잠깐만 있어 봐.”
“월월! 월월월!”
춘식이의 입체기동이 더욱 빠르고 정신 사납게 바뀌었다. 끙끙대는 신음이 매순간마다 방향을 바꿔가며 전방위적으로 들려온다. 나는 일부러 춘식이에게 얌전히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질투에 빠진 개의 등살을 못이긴 라일라는 포옥 한숨을 내쉬며 내게서 떨어졌다.
“춘식이 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 달래두…….”
검은 개는 자신을 찌르는 토라진 말들을 무시하며 내게 달라붙어 꼬리를 흔들어댔다. 흔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 선풍기를 틀어놓은 것 같은 바람이 일 지경이었다. 나는 라일라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춘식이의 머리도 쓰다듬었다.
“김춘식이. 그동안 착하게 지냈나?”
“월월!”
“그래. 잘했다.”
어째서인지, 이 광경을 지켜보던 경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어,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경태는 놀란 표정을 거두고 미소와 함께 엄지를 척 세워 보였다.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며 혼자서 즐거워하는 모양새였다.
식사를 마친 후엔 내게서 도통 떨어지려 들지 않는 춘식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업무를 보았다. 당장은 할 일이 없는 라일라는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수렵용 의자와 발받침을 가져다놓고 앉아 내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안정감이 든다고.
이곳에서 원격으로 처리하는 업무엔 CIA와의 연락 및 심화적인 협조체계 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청에서 원청 직원으로의 신분상승을 이룬 오퍼레이터 겸 팀 매니저 리처드 맥팔란드는 화상으로 마주한 내 모습을 보고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모습이 많이 달라지셨군요.」
“뭐 이런 걸 보고 놀라시오? 당신들에게도 이 정도 노하우는 있을 텐데.”
「평범한 밀수조직에서 쓸 법한 노하우는 아니니까요.」
“철지난 이야기이고, 안일한 마음가짐이오.”
「이럴 수도 있으리라 예상은 했습니다. 다만 확률이 낮다고 봤을 따름이지요. 일단은 전에 뵈었던 분과 같은 분이라고 가정하고 대화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굳이 화상통화를 연결한 것은 1차적으로는 CIA 측에서 위변조 여부나 통신지연시간(레이턴시)을 분석하기 용이하도록 해주기 위함이었다.
추적방지용 통신 중계 릴레이를 쓰고 있을 때, 전자적으로 추적 가능한 마지막 중계지점에서부터의 레이턴시는 상대의 잠재적 위치를 산출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물론 여기에도 위장이 낄 수 있으나, 이 위장은 반드시 레이턴시를 더 길게 하는 방향으로만 작용한다.
바꿔 말해, 추적 가능한 마지막 중계지점에서부터의 레이턴시가 짧다면 단서로서의 유효성이 크게 증가한다.
내가 CIA에게 던져준 짧은 레이턴시는 앞서 처음 접촉했을 때 던져주었던 또 다른 단서와 정확하게 맞물리는 조각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주술사 왕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십니까?」
“과연 CIA요. 깨닫는 게 빠르구려.”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중국에서는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단서를 주시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진 않습니다.」
“처리지연은 통신보다 행정절차에 더 많이 끼는 법이고, 능력이 있는 것과 그 능력을 실제로 발휘하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의 이야기지. 당신네가 내 회사에 대해 오랫동안 감도 못 잡고 있었던 게 과연 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하시오?”
「…….」
엄밀히 말하면 능력의 문제가 맞다. 그러나 나는 CIA를 띄워주고 내 조직을 깎아내렸다. 저들의 교만은 곧 나의 이익이므로.
“리처드 당신의 말은 예전과 다르게 랭글리(CIA 본부 소재지)에서 그만큼 제대로 된 업무지원을 해주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소. 합격점을 드리리다.”
「거래상대로서의 합격점입니까?」
“기본적인 소양 검증이라고 해둡시다. 최근에 어떤 나라가 내 상식을 많이 박살내놓았기도 해서, 그냥 상식적인 차원의 시험을 해봤을 뿐이오.”
「우리는 러시아와 다릅니다.」
“그러나 CIA지. 당신들이 하는 짓을 보면 옛 독일의 군부 같을 때가 많거든.”
「옛 독일의 군부? 무슨 말씀이신지?」
“미시적인 역량은 압도적인데 거시적인 계획이 처참하여 일을 말아먹는 경우가 자주 있었잖소? 그 꼴이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압도적인데 전략적으로는 머저리 짓을 많이 했던 옛 독일 군부를 떠올리게 한단 말이오.”
리처드는 짧게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우려는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만…….」
“알림 샤히디와 같소. 그녀는 내 중요한 고객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
나는 그레이스를 의도적으로 그녀라는 인칭대명사로 불렀다. 주술사 왕의 성별은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바라, CIA에게는 이 또한 수집해놓을 만한 하나의 단서였다. 나중에 다른 단서를 추가로 얻는다면 함께 참고할 가치 정도는 있는 그런 단서.
「샤히디의 의뢰로 저희들을 구해주신 것은, 그에게 얼마를 받았든 간에, 당신 같은 분이 몸소 주의를 기울일 만큼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었을 겁니다.」
리처드가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에도 저희를 꺼내어 직접 대면하시고, 또 이렇게 단서를 주시는 건 당신의 사업을 위한 별도의 제안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그 제안이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이해가 빨라서 좋은 인간이었다. 나는 깍지를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네 대통령은 일찍부터 주술사 왕과의 관계개선을 주장해왔지. 만약 그 관계개선을 당신네 CIA의 업적으로 만들어준다면, 당신들은 내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시겠소?”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인지부터 말씀해주십시오. 상품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가격을 책정하지 않겠습니까?」
“우선은 전함 미주리의 포로 송환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싶소만.”
「가능합니까?」
“나는 신용을 중시하는 상인이오. 준비되지 않은 상품은 카탈로그에 올리지 않소.”
「주술사 왕의 의지가 먼저 있었겠군요.」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오.”
「무방하다, 라…….」
잠시 내 말을 곱씹은 리처드는 확인하듯 물었다.
「‘그녀’에게 우리와의 관계개선 의지가 있는 게 확실하다면, 후루 신성왕국연합은 왜 공식적인 외교 채널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지 않는 겁니까?」
“거꾸로 묻겠소. 그러는 당신들은 왜 똑같이 미국의 국체와 이익을 수호하면서도 다른 유관부처들과 갈등을 빚거나 경쟁을 하거나 하오? 이 사안을 당신네 CIA의 업적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에 혹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의외의 구석에서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는군요.」
이쪽 바닥의 사정에 맞춰 그럴듯하게 꾸민 구실을 던져주자 리처드는 알아서 납득했다. 머리가 잘 굴러가면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확신이 깊은 전문가들을 현혹하는 요령이었다.
「하기야, 국가체제가 확고하게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선 이런 쪽으로도 외부 용역을 쓰는 게 더 현명할 수 있겠지요. 다수의 국가들이 갑작스럽게 주술사 왕의 깃발 아래 묶였으니 혼란과 갈등, 그리고 다소의 비효율이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당신을 보니 주술사 왕이 용역업체를 아주 잘 고른 것 같군요.」
“칭찬 고맙소. 그 외에도, 정식 외교채널을 열면 당신네들의 전통적인 우방들이 지랄병이 날 게 아니오? 백악관이나 국무부가 이 사안을 주도한다면 협상에 임할 때 유럽 국가들이 가하는 압력을 무시하지 못할 거요. 일회성의 대가는 내어주더라도 국가승인과 완전한 관계정상화 같은 건 불가능하겠지.”
아프리카 대륙에서 기득권을 지닌 유럽 국가들은 주술사 왕의 확장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규탄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백악관 미치광이가 제아무리 독불장군 같아도 이들의 압력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불가능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경제적 이익에 옛 강도국가들이 같이 죽을 기세로 칼을 들이대는 까닭이다.
「그러니 음지에서의 협력 체제를 우선적으로 구축하자…… 라는 겁니까?」
“당신들에겐 몹시 매력적인 제안일 거라고 생각하오. 양국간 외교의 실무가 CIA의 관할로 떨어지는 셈이잖소.”
「그러는 회장님께서는 우리와의 협력을 통해 후루 신성연합왕국의 대외첩보영역에서 견고한 입지를 구축하실 테지요.」
“그건 기본이고, 당신들도 내 회사와 별도의 용역계약을 체결하셔야지. 나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오. 하나의 일로 하나의 이익만을 거두는 건 내 취향이 아니오.”
「이건 좀 무서워지는군요.」
“내가 아까 물었잖소. 당신들은 내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겠느냐고.”
「바라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위쪽으로 전달해드리도록 하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장사는 매양 미국을 상대로 하는 장사이고, 나 같은 사업가들은 1회성의 대가를 챙기기보다 장기적이고 고정적인 현금 흐름을 만드는 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오. 겸사겸사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사업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그 말씀은 즉……?」
“나는 내 회사가 CIA의 외부용역계약을 수주하길 바라오. 첫해엔 소소하게 10억 달러부터 시작합시다.”
내 말을 들은 리처드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10억 달러의 어디가 소소합니까? 그 정도 계약을 맺은 방위계약자(Defense contractor)는 CIA가 아니라 미국의 모든 정보 부처들을 다 통틀어도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제가 비록 결정권자는 아닙니다만, 필수적인 보안검증은커녕 대략적인 정체조차 모르는 「이름 없는 회사」와 대뜸 그렇게 큰 계약을 맺긴 어려울 겁니다.」
“엄살 피우지 마시오. 이것도 당신들이 다년간 예산절감 압력을 받아왔음을 고려해서 사정을 봐준 가격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정 곤란하다면 10%의 계약금을 거는 조건으로 내년 1/4분기까지 한시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줄 의사는 있소. 계약금 지급 시점은 포로송환 합의가 이루어진 후, 실제 송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로 하지.”
「만약 본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적어도 리처드 당신과 당신의 팀원들은 다시는 조국 땅을 밟을 일이 없겠지. 랭글리 또한 나름의 대가를 치를 거요.”
「…….」
“걱정 마시오. 내 회사가 제공하는 용역을 한 번 받아보고 나면 본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게 될 테니.”
「그러길 바라야겠군요.」
10억 달러는 사실 없어도 그만인 돈이다. 그러나 CIA에게서 뜯어내는 돈은 CIA의 예산운용을 빠듯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달리 쓸 예산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내 회사의 외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테니까.
CIA도 결국은 정부기관이고, 거기서 일하는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다 공무원들이다. 보신주의와 성과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국가의 이익과 부처의 이익을 수시로 저울질해야만 하는 거대한 관료제의 살아있는 부품들.
현장요원들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시절이었으면 모를까, 저비용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특화된 사무직 관리자들이 현장직들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오늘날의 CIA는 내가 꾸준히 먹여주는 사탕의 잠재적 위험성에 눈감을 가능성이 높다. 예산적인 측면에선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급자에게 전하시오. 과거의 전례들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나는 못을 박듯이 이야기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당신들은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하오. 나는 당신들이 적응해야 하는 변화 그 자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