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계의 변화 (8)
그레이스를 만나러 아프리카로 향하기 전, 민다나오 동쪽 바다에서 고래들을 상대한 시간은 다 합쳐서 이틀 하고도 한나절 가량이었다.
이 시간 동안 나는 키요우타마히코 이외에도 인상적으로 많은 수의 혹등고래들이 내게 친밀감을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친밀감이 가장 강한 개체는 물론 키요우타마히코였으되, 나로부터 직접적으로 「아픔 아니다」를 받은 고래들과 그 가족들은 하나같이 애정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친밀감을 드러냈다.
일전에 일본 영해에서 치료를 받았던 개체들도 다른 목적 없이 찾아와서는 오랫동안 내 근처에 머물렀다. 이들에게는 두꺼운 피부 아래에 식별 태그를 심어두었으므로 나를 다시 찾아온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의 비율을 파악하기가 용이했다.
최초의 호출로부터 이틀이 경과한 시점에서, ‘재방문율’은 87%를 넘어섰다. 친밀감을 표하는 개체가 전에 비해 인상적으로 증가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러는 동안 키요우타마히코는 마치 잔치를 열고 대대적으로 손님들을 초대한 집의 안주인처럼 행동했다.
새로 도착하는 고래들을 안내하고, 자기네 말이 미숙한 나를 대신해 치료를 받을 환자들의 차례를 정해주고, 먼바다에서부터 헤엄쳐오는 비각성체 고래들을 원양까지 마중 나가서는 가압가속 터널을 활용해 빠르게 데려오고, 같은 능력으로 다른 고래들이 먹을 물고기들을 끌어오고, 이를 도와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각성체 고래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배분하는 등.
키요우타마히코를 돕는 고래들의 주된 역할은 먹잇감을 몰아오는 것이었다. 수십 마리의 각성체 혹등고래들이 힘을 합쳐 수만 마리의 청어와 고등어들을 몰아오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라 할 만했다.
이곳의 실황과 데이터를 원격으로 받아보던 마츠오는 눈물을 글썽일 만큼 감동했다.
「이건 흡사 혹등고래들의 축제와도 같은 느낌이군요. 이전까지는 관측된 바가 없는 놀라운 수준의 사회성과 집단협동입니다. 살아생전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마츠오는 축제라고 표현했으나, 나는 고래들이 자체적으로 유지하는 보급체계 구성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지금 그곳에서 고래들이 보여주는 고도의 사회성은 어쩌면 선생님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좀 더 엄밀하게 표현을 하자면, 우리의 시대엔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마츠오는 나를 곧잘 선생님(先生)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했다. 고래들의 의사 선생님이라는 의미였다. 처음엔 혼자서 하던 생각이 무심결에 튀어나온 품새였지만, 나나 주변의 내 부하들이 딱히 뭐라고 하지 않으니 계속 그렇게 불러댔다. 회장님이라는 딱딱한 호칭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기에 자신이 처한 현실의 특정한 부분을 외면하고픈 마츠오의 무의식이 반영되어있지 않나 싶었다.
「많은 개체들에게 초능력이 생겼다곤 해도, 고래들의 사회엔 단기간에 작용할 결정적인 변화의 동기가 없었습니다. 문명학적인 단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다름이라면 사정이 다소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일이백 년 안쪽으로는 과거의 생태가 거의 그대로 이어졌어야 정상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걸 선생님의 존재가 바꿔놓은 거죠. 고래들의 사회에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관계망을 형성케 하는 중력의 중심으로서요.」
그럴듯한 가설이었지만, 동시에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폭주할 기미를 보이는 마츠오에게 언어 연구에만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스텔라 피데스」는 고래들에게 내 「가족」들이 타고 있는 배로 소개되었다. 「무리」에 해당하는 어휘를 새로 습득하긴 했으나, 이미 가족이라고 소개한 스텔라 포르투나 선단과 차이를 두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스텔라 포르투나 선단에 대한 소개를 정정하기에는 언어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키요우타마히코는 전에 보여주었던 놀라움을 전보다는 덜한 강도로 드러냈다. 전과 달라진 건 키요우타마히코가 놀라움을 담아 부르는 노래를 대충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너 번식 많이 했다. 아주 많이.」
고래의 것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조금은 불쾌감이 드는 오해였다.
키요우타마히코는 두 번째의 헤어짐을 침착한 아쉬움으로 받아들였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느냐는 물음에 확실한 답변을 주지 않자 그 덩치에 눈에 띄게 풀이 죽기도 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달래는 과정에서 나는 「약속」으로 추정되는 단어를 새롭게 습득했다.
조립식 아기들을 끌고 동아프리카 해역으로 이동하는 데엔 이틀 가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내가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일은 그레이스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쓴 채로 주술사 왕의 사도(師徒)로서 동부 아프리카 지역을 순방하는 것이었다.
“왕의 사도이시며 울루구루의 무지개이자 비구름이신 대주술사 콜레로의 헤그하시여. 그동안 저희가 왕명을 따르며 하사받은 은총의 증표(레헤마 페드하)를 모아 바치나니, 부디 이 땅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비를 내려주시고 오래된 고통을 덜어주십시오.”
내 앞에 무릎 꿇은 케냐의 부족장들과 자치단체장들이 연명으로 요청하는 바는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가뭄의 해결이었다.
대기 중 탄소 농도가 전 지구적으로 감소하고 있기는 하나, 지구온난화의 여파가 하루이틀 사이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탄소 농도 감소를 관측한 주요 산업 국가들이 일제히 탄소와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를 완화하는 추세인 터라, 동아프리카 지역의 강수량 감소는 근시일 내로는 자연적인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았던 지난 2년과 다르게 올해는 약간의 비가 내리긴 했어도, 문자 그대로 약간에 불과하여 기나긴 가뭄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현지인들이 나를 콜레로의 헤그하라 부르는 건 내가 쓰고 있는 가면 때문이었다. 로더필드를 사냥할 때도 썼던 이 가면엔 주술사 왕의 일곱 사도 중 하나, 콜레로의 헤그하를 상징하는 주술적 기호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그레이스가 붙여준 통역으로 하여금 내 말을 옮기도록 했다.
“나는 비를 내리러 온 것이 아니다. 메마른 너희의 땅을 은총으로 적시고자 온 것이다.”
피부 검은 부족장들과 지자체장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이 술렁임은 고스란히 관영방송의 카메라로 송출되었다.
“비를 내리지 않고서 어찌 땅을 적신단 말입니까? 혹시 저희가 모은 은총화폐가 큰 구름을 만들기에 부족한 까닭입니까?”
“그저 보라. 왕께서는 충성스러운 신민들이 흘리는 눈물을 외면치 아니하시니라.”
읊는 입장에서는 한마디 한마디가 다 우스꽝스러운 대사였으나, 부복한 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한없이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속으로 자조 섞인 한숨을 삼키며, 나는 이제껏 억제하고 있었던 대마법사의 마력장을 최대로 전개했다.
“허억-?!”
회로가 열려있는 자들은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느끼곤 일시적인 호흡곤란 증상을 나타냈다. 더러는 반사적으로 뜻 모를 기도문을 읊조리고, 더러는 땅에 머리를 박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전개한 마력장은 땅속 깊은 곳에 있는 거대한 지하수층(대수층帶水層)에서 압력이 가장 높게 작용하는 부분에 넓고 깊게 접촉했다.
이 일대에 잠들어있는 지하수층은 물의 양 자체만 놓고 보면 케냐 전역의 수요를 70년간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풍부했지만, 세계 최대의 알칼리 염호(鹽湖)인 투르카나 호수로부터 충전되어 식수나 농업용수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물의 알칼리성이야 지중으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중화된다. 하나, 오랜 세월 농축이 이루어진 높은 염도는 고도의 담수화 시설을 구축하지 않고선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였다. 게다가 투르카나 호수에서 배어드는 물엔 인체에 유해한 수준의 불소가 함유되어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전율하는 거인의 마법을 구사하는 내게 물에 녹아있는 염분이나 불소 따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나는 넓은 면적에 걸쳐 방대한 양의 청수를 분리해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토인들의 열등함을 부르짖던 놈들은 오늘의 해갈이 많이 아쉽겠군.’
옛 강도국가들의 옹호자들은 일찍부터 이 지역의 오랜 가뭄에 원주민들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해왔다. 그 내용은 매양 이런 식이었다.
「원주민들은 왜 우물 하나도 스스로 파지 못해 도움을 요청하는가?」
「식민지에서 독립을 한 지가 언제이고, 그동안 받아먹은 국제원조가 얼마인데 아직까지도 뭐 하나 스스로 해결하는 일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쯤 되면 저 흑인들의 무능엔 선천적인 특질의 영향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저들에게는 스스로 문명을 일굴 능력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가난한 땅이라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거대 호수를 두 개나 끼고 있음에도 관개와 급수 인프라를 확대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부패와 무능, 그리고 타고난 게으름의 소치라는 게 이 제국주의자들이 곧잘 대는 논거였다.
그러나 그 두 개의 호수 중 하나인 투르카나 호수는 사람을 병들게 하고 땅을 척박하게 만드는 물을 담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인 빅토리아 호수는 케냐가 마음대로 개발해도 좋은 수자원이 아니다. 후자는 지속적인 강수량·유입량 감소로 인해 제2의 아랄 해(海)가 될 우려가 크다는 이유에서 국제연합의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 여기서 대량으로 물을 끌어다 썼다간 그 즉시 여섯 개 국가가 엮인 전쟁위기가 고조된다.
이는 그레이스가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였다. 내게 이 일을 부탁하면서, 그레이스는 조금 면목이 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일이십 년 후에나 본격적으로 시작될 환경재해 따윈 내 알 바 아니야. 그깟 호수가 나중에 소금사막으로 변하든 말든, 당장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전쟁 준비에 속도를 붙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지.」
「하지만 백나일 강 줄기를 따라서 줄줄이 내게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건 곤란해. 당장의 확장에도 방해가 될뿐더러, 그 경로는 나중에 지중해 방면의 조공을 취할 진격로로 써먹어야 하는걸. 결전의 날이 오기 전에 적어도 이집트까지는 확실한 우방으로 만들어놓고 싶어.」
「괜찮다면 자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황금기의 눈을 가진 당신이라면 하루에 수백 개의 관정(管井/둥글게 판 우물)을 뚫는 것쯤은 간단할 거야. 왕의 사도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기적은 국경과 군대의 확장에도 보탬이 되겠지.」
「어때? 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겠어?」
그레이스가 바란 것은 깨끗한 지하수가 있는 곳을 골라 우물을 파주는 정도였다. 나는 기왕에 대마법사의 인시를 쓸 거라면 그 이상을 해주겠노라고 답했다.
「스으으으으-」
발아래와 주변의 모든 방향으로부터 작고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벽돌처럼 말라있던 토양이 물을 흡수하면서 나는 소리였다. 불그스름한 대지 곳곳에 생긴 짙은 얼룩들이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기 시작하자, 엎드려있던 원주민들은 거의 발작을 일으키다시피 반응했다.
“Yaa mchawi hongo!”
“Neema! Neema! Usitawi tuokao kwa mchawi!”
“Mchawi ni mwenye nguvu ya mungu!”
나는 벌벌 떨고 있는 통역에게 물었다.
“저들이 뭐라고 하는 것이냐?”
통역은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로 부들거리며 답했다.
“와, 왕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왕께서 내리시는 은사(恩賜/Neema)를 경배하고, 주술사 왕께서 신의 힘(Nguvu ya mungu)을 지니신 분이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땅이 젖은 얼룩들은 이내 크고 작은 웅덩이들로 변했고, 그 웅덩이들은 곧 서로가 서로를 삼킴으로써 직경 8백 미터 정도의 초현실적인 수원지(水源池)를 형성했다.
평탄한 수원지 전체에서 초당 1센티미터 안팎의 속도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흙빛 물은 복숭아뼈에 겨우 닿을 법한 깊이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거의 사막에 가깝게 가물어있던 땅엔 이토록 얕은 범람으로도 국지적인 홍수를 빚어낼 수 있었다.
수원지를 벗어나 완만한 경사를 타고 흘러내린 물은 밑바닥을 드러낸 강과 만나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물의 흐름엔 점점 더 가속이 붙을 터. 남은 건 낮 시간 동안 이대로 계속 물을 뽑아 흘려보내는 일이었다. 나는 통역에게 지시를 전달하도록 시켰다.
“모두에게 전하라. 이곳에 과도하게 충만한 정령의 기운은 사람에게 해로울 수도 있으니, 저 아래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이제부터는 나의 직접적인 가호를 받은 자들만이 내 가까이에 머무를 것이다. 너 또한 저들과 함께 내려가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라.”
이는 무의미한 시간낭비를 줄이기 위한 지시였다. 피부 검은 원주민들은 지시를 듣자마자 허둥지둥 예를 표하고는 비탈 아래의 강가로 도망치다시피 달려 내려갔다.
원주민들이 점처럼 작아지고 나서는 원격으로 사무를 볼 환경이 마련되었다. 문서를 결재하는 것쯤은 마법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 주변의 물을 둥글게 밀어내 일정 범위에서 맨땅이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대기하던 부하들은 천막을 겸하는 위장막을 치고 내가 쓸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수원지 가장자리엔 공수로 실어온 위성통신 시스템을 전개했고, 지지대를 세운 후 중계용 펨토셀(Femtocell)을 달아 수원지의 중심까지 전파가 닿도록 손썼다.
더는 우스꽝스러운 주술사 흉내를 낼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나는 가면을 벗어 가까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
흑단나무로 만든 가면의 뻥 뚫린 눈구멍은 어딘가 모르게 스승새끼의 유해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었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가벼운 염동력 투사로 가면을 뒤집었다. 안쪽 면을 드러낸 채 달각달각 흔들리는 가면은 더 이상 내 불쾌감을 자극하지 않았다.
물 위를 조용히 걸어 다가온 수연이 다과를 준비해주었다. 뒤따라온 경태 녀석은 넓은 물의 흐름을 보며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마법사의 능력이라는 건 역시 전투보다는 전투 외적인 측면에서 더 굉장하게 느껴진단 말이죠……. 형님께서 한 보름만 더 머무셔도 4백만 인구가 거주하는 대초원의 가뭄이 완벽하게 해소될 텐데 말입니다.”
이 녀석은 전에도 테라포밍이니 뭐니 하며 대마법사의 전투 외적 능력 활용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대마법사들이 가진바 힘을 대국적으로 써주기만 하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겠느냐며.
“형님.”
경태가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예전에 한 번 말씀드렸듯이, 이 김경태에게는 사람들이 형님을 우러러보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김경태라는 인간이 품은 숙원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원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면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우러름을 받는 왕 같은 존재가 되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나?”
“그냥요. 그게 좋으니까요. 저한테도 좋고, 형님께도 좋고, 누님에게도 좋고…….”
“좋다니, 무엇이?”
경태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형님께는 런던 공략 이후의 계획이 아무것도 없으시잖습니까. 한번 재미삼아 해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레이스와 칠각기사단의 존재가 좀 걸리긴 합니다만, 우리 조직이 형님의 영도 아래 세계의 절반쯤을 암중에서 지배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 가서 라일라가 잘 오고 있는지나 확인해봐라.”
나는 가벼운 책망을 담아 경태를 쫓아냈다.
내게 런던 공략 이후의 계획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할 때의 신색으로 미루어, 경태 녀석은 아닌 척하면서도 나에 대해 뭔가 묘한 걱정을 품고 있는 품새였다. 이는 내게 무언가 거슬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형님.”
조용히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눈길을 내리깐 수연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맥락이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형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든, 저희는 언제나 그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