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계의 변화 (7)
혹등고래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스텔라 피데스로 돌아왔을 때, 중국에서 온 화물들은 간만에 사람다운 식사를 하고서 말끔히 씻고 자신들끼리 모여 그간 못했던 대화를 나누고 휴식을 취하던 참이었다.
갖은 고문과 오랜 수인 생활에 지쳐있던 이 미국인들은 개방된 갑판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햇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설움에 겨운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이들에겐 아직 하늘을 보거나 기후를 느끼게 해주어선 안 된다. 자신들의 현재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해볼 단서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들이 첩보원으로서 훈련받은 시간감각과 거리감각은 눈이 가려진 채로 여러 경유지들을 거치는 과정에서 마비되었을 터. 이런 악조건에서 한낮의 천문(天文)과 망망대해의 바람만 가지고 유추 가능한 위치정보엔 이렇다 할 의미가 없다.
앞으로 CIA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나갈 요량이므로, 시작부터 약간의 아량을 베푸는 건 허용범위라고 할 수 있었다.
CIA의 하청요원들이 머무는 갑판은 바(Bar)와 연결된 테라스처럼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개수(改修) 이전의 시설을 보존한 개방형 풀장도 하나 있다. 풀장에 채워놓은 맑은 물이 오후의 햇살을 반사하며 부서진 다이아몬드 알갱이들 같은 반사광을 발했다.
내가 부하들을 동반한 채 이 공간에 들어서자 하청요원들은 살짝 긴장하며 내게로 시선을 모았다. 나는 팽팽하게 쳐놓은 하얀 차양 아래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앉아 요원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만나서 반갑소, 미국의 비밀스러운 애국자 여러분. 나는 당신들이 빨갱이들에게 잡히기 전까지 찾고 있었던 「이름 없는 회사」의 최고경영자요. 특정 고객의 의뢰를 받고 당신들을 꺼내온 사람이기도 하지.”
내 자기소개를 들은 요원들은 긴장도가 바짝 올라갔다.
요원들의 수는 일곱이었다. 현장에서 뛰던 인력이 넷. 거점에 머물며 서포트하던 오퍼레이터가 셋. 국안부의 거짓 대자들은 도주에 성공한 지원인력이 두 명이라고 했으므로, 내 조직과 샤히디 그룹을 함께 추적하던 요원들의 숫자는 당초 주정뱅이 임마누일이 파악했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나는 현 러시아의 방첩기관들보다 냉전기에 제복을 입었던 은퇴자들의 역량이 더 우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요원들은 포식자의 냄새를 맡은 야생동물들 같은 움직임으로 각자 의자를 끌어와 자리를 잡았다. 개중에 대표로 입을 연 것은 나이가 지긋한 오퍼레이터였다.
“특정 고객의 의뢰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말해주는 것보다는 당신네 회사 사람과 직접 통화를 해보는 쪽이 빠를 거요.”
내가 눈짓을 하자 경호실 소속 부하가 오퍼레이터에게 다가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받으시오. 내 고객이 당신네 회사로부터 받아 내게 전달해준 단말기요. 당신들의 지문과 음성, 그리고 홍채 정보가 등록되어있다더군.”
CIA 요원들은 자신들의 직장을 회사라는 은어로 곧잘 부르곤 한다. 오퍼레이터는 자신이 받아든 폰을 내려다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사방으로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에서 통신을 시도하면 당연히 전파발신위치를 특정하기 쉽다. 다시 말해, 이런 환경에서 전화를 하게 해준다는 건 발신지 위조를 위한 릴레이 중계 시스템이 갖춰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름 없는 회사」는 결코 범상한 집단이 아니게 된다. 일반적인 밀수조직들은 이런 쪽으로 투자를 하느니 그냥 돈 안 드는 보안수칙을 엄수하는 쪽을 택하는 까닭이다.
이런 종류의 릴레이 중계 시스템은, 신뢰성을 고려하면 필요할 때 즉석에서 구축하기도 곤란하다. 즉석에서 구축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보통이 아닌 능력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폰을 만지작대는 오퍼레이터에게 물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드리는 게 좋겠소?”
오퍼레이터는 나를 유심히 관찰한 끝에 느리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암호들과 보안절차는 유효성을 상실한 지 오래일 테니까요. 조금 생각할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대화에서 새어나갈 기밀이나 기타 단서들은 지금 상황에서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이 배는 나의 배이고, 자리를 비켜준다고 해도 준비만 잘해놨다면 얼마든지 통화를 엿들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제 곧 통화할 상대편도 이런 사정을 헤아리고 있을 터이므로, CIA의 하청요원들 입장에선 굳이 내게 미련한 요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퍼레이터는 단말기의 보안을 해제한 후, 통화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플리케이션들을 몇 개 실행했다가 종료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유일하게 저장되어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통화연결음은 딱 한 번만 울렸다.
「신원을 밝히시오.」
“앤 아버 S&I 유니버설의 극동아시아 지사 시니어 매니저, 리처드 맥팔란드입니다.”
원청 관계자와 하청업체 직원의 대화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아마도 가명이겠지만, 스스로를 리처드 맥팔란드라고 밝힌 오퍼레이터는 랭글리의 원청 관계자가 하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구조를 의뢰한 사람이 알림 샤히디라고요?”
「그래.」
오퍼레이터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간단한 눈짓을 더한 끄덕임을 돌려주었다.
「자네들이 갇혀있는 동안 샤히디 그룹은 중동으로 가서 후티 반군의 세력을 반죽음으로 갈아버렸네. 그 과정에서 우리와의 보다 심층적인 접점이 만들어졌지. 노획한 이란제 탄도미사일의 분석이나 대사관 탈환 등의 일로 협력을 함으로써 말이야.」
CIA 하청요원들을 활용하는 계획엔 해결이 필요한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내 조직과 중국 공산당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가장 삼엄한 수감시설 중 한 곳에서 미국의 첩보원들을 꺼내오는 밀수조직이 있다면, CIA 입장에선 그 조직의 존재 자체가 중국 첩보당국의 위장공작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샤히디를 조종해 내 조직의 신용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는 방식을 택했다. CIA는 그들이 하청업체를 시켜 찾던 「이름 없는 회사」가 예전부터 샤히디 그룹과 거래해왔으며, 베이징 테러에 필요한 인력과 무기와 탄약 일체를 현장으로 배송해주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곤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당장 수화기 너머에서도 그런 내용이 흘러나왔다.
「알림 샤히디는 장차 동 투르키스탄 공화국의 독립에 미국의 도움이 필수불가결하며,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우리 CIA와 협력할 일도 많으리라 여기고 있네. 그래서 평소 거래하던 「이름 없는 회사」에게도 상담을 했던 모양이야. CIA와 우호를 다질 만한 건수가 없겠느냐고. 거기서 이름 없는 회사의 관계자가 자네들의 이야기를 꺼낸 거지.」
“그렇다는 건-”
「그래. 그들은 자네들의 추적을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네.」
“…….”
「마음 같아선 일처리를 대체 얼마나 허술하게 한 거냐고 따지고 싶지만, 샤히디의 말을 믿는다면 상대는 베이징 한복판에서 샤히디 그룹의 활동을 가능케 한 핵심적인 조력자들이야. 「이름 없는 회사」가 아니었다면 천안문 광장 테러…… 아니, 천안문 광장 의거는 불가능했으리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이니, 그 정체불명의 회사가 지닌 역량을 감안하면 자네들의 실책을 꼭 실책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지.」
내가 듣고 있다는 걸 가정한 상태로 하는 말엔 자연스러운 추켜올려주기가 포함되었다. 오퍼레이터 리처드 또한 반쯤은 나를 겨냥한 말을 대화에 끼워 넣었다.
“그럼 중국놈들이 세운 위장기업은 아니겠군요.”
「또 모르지. 자네들을 간단히 꺼내온 걸 보면 현 주석에게 반대하는 파벌과는 모종의 거래관계가 있을는지도. 단순히 부패관료들과의 꽌시에 힘입은 바일 수도 있겠네만.」
이런 대화가 오가는 내내 오퍼레이터 리처드의 눈은 유심히 내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특정한 내용에 반응하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었다. 능력이 어떠한가와는 별개로, 거친 고초를 겪고 나서도 정신에 날이 살아있다는 점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인간이었다.
‘이런 인력을 하청으로 부리는 건 아깝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군.’
내가 구상했던 최초의 계획엔 샤히디의 역할이 없었다. 그러나 계획이란 그게 무엇이든 상황의 변화를 그때그때 반영해야 마땅하다.
내 조직의 존재감을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 또한 당초엔 고려하지 않았던 선택지다. 영국과 원탁이 본토에 찌그러져있기에 성립하는 대담함이었다.
사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굳이 하청직원들을 꺼내오지 않아도 샤히디의 영향력만으로 CIA와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청직원들은 여전히 계획의 진행에 속도와 효율을 더해주는 팻감이었다.
샤히디의 소개를 통해 서로간의 창구가 열린다 하더라도, 이쪽의 신용과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험을 겸하는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준비되어있는 상품으로서의 하청직원들은 유용한 선물이었다. 대마법사의 인시를 따로 잡아먹지도 않고, 이쪽의 역량과 호의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으며, CIA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의뢰할지도 모르는 상태로 마냥 기다리는 대신 이쪽이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도 유익하다.
오퍼레이터 리처드가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 파악한 시점에서, 수화기 너머의 CIA 관리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격식으로 물었다.
「맥팔란드 요원. 그대는 아직 조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상태인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자네는 현시각부로 초국가적 문제 사무소(OTI)의 소장 직할 임무부대에 편입되었네. 「이름 없는 회사」 측과는 중간에 샤히디를 끼고 이야기가 되어있으니, 당분간 그쪽 관계자들과 협조하면서 연락 및 정보수집 책임을 맡아주게나. 그간 겪었을 일들을 감안하면 다른 인원으로 대체해주고 싶지만, 관리자급 인원들 중에선 즉시 투입 가능한 사람이 마땅치 않으니 이해해주길 바라네.」
“팀원들은 어떻게 합니까?”
「잔류를 강요할 순 없겠지. 그래도 최대한 설득해보게. 대체인력을 파견하려면 시간이 걸릴뿐더러, 자네 입장에서도 원래 호흡을 맞추던 팀원들과 함께 일하는 쪽이 낫지 않겠나? 모두에게 전해주게. 거기에 있는 동안에는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될 일이 없으리라고.」
“팀원들도 본사에 다시 편입되는 조건인지요?”
「그렇네. 딱히 매력적이진 않겠네만, 거기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기존에 비해 세 배의 급여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기본급과 인센티브 모두 배수가 적용되는 거지.」
“본사의 씀씀이치고는 예외적으로 후하군요.”
「「이름 없는 회사」와의 채널 관리가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니까. APLAA의 분위기가 지금 어떨 것 같은가?」
“그쪽 인원들이 받을 인센티브가 저희에게 돌아오는 꼴이군요. 그래봐야 모기가 피 빨아가는 수준에 불과하겠습니다만.”
APLAA는 아시아 태평양·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정보 사무국을 의미하는 약어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름 없는 회사」의 등장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겠지. 어디서 갑자기 이딴 괴물 새끼들이 튀어나왔냐고 욕설을 퍼붓는 중일 것이다. 책임자들이 줄줄이 깨지고 있을 것은 안 봐도 뻔하고.
그러나 CIA가 내 조직에 취할 조치의 9할 5푼쯤은 전자적인 감시의 강화에 집중될 터였다. 다른 정부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해에 걸쳐 백악관에서 내려오는 예산절감 요구의 압박을 심하게 받아온 CIA는 지속적으로 인적 첩보자원의 풀을 축소해왔기 때문이다.
그 정도라면 지금의 내 조직이 감당 가능한 보안 리스크다. 오래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구축해온 통신보안 시스템 자체도 만만치 않거니와, 이제는 그 위에 「사막의 사람들」 부족과 위구르족의 언어를 활용한 이중 암호체계가 더해진 상태니까. 정보의 순환에 언어적인 단락이 존재하면 해당 언어를 고려하지 않은 추적 시스템은 무력화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공을 들인 보안망을 인적 침투(휴민트) 없이 뚫으려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CIA라도 최소 수 년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내 조직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사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상하는 중일 테니 가용자원을 내 쪽으로 다 집중하지도 못할 테고.
나는 그 안에 최후의 사냥을 끝내기만 하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를 종료한 오퍼레이터 리처드는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저희의 처우에 관한 논의는 저희를 꺼내오기도 전에 이미 끝난 상태였겠지요?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팀원들의 거취는 저희끼리 논의를 좀 해보고 나서 따로 말씀드리지요.”
나는 리처드의 말을 까딱이는 눈인사로 받으며 말했다.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과해야 할 일이 하나 있소.”
“뭡니까?”
“중국 첩보당국에 당신들을 찌른 게 바로 우리 회사요.”
리처드는 처음으로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반사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리는 그와 함께, 다른 요원들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준비된 변명을 꺼내었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이미 중국 공안의 거미줄을 건드린 상태였소. 시간이 좀 지나면 우리가 찌르지 않아도 발각당할 가능성이 높았지.”
“…….”
“의도가 불투명한 CIA 하청업자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독거미들을 끌어들이며 오고 있으니,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는 일단 잘라내고 보는 편이 맞지 않겠소? 더욱이 그때 우리 회사는 베이징 테러에 물건을 대는 중이었으니 말이오.”
“……그게 사실이라면, 개인적으로 유감이기는 합니다만,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거짓은 없소. 당신들이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점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는 바요. 밝힐 이유가 없는 내막을 밝히는 건 당신들과 진지한 관계를 구축하고픈 내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시오.”
“그러지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리처드는 CIA의 대리인으로서 나와 앞으로 이루어질 협력의 기본적인 틀을 논의했다. 이는 내가 몸소 시간을 투자할 만한 협상이었다.
한편, 지금쯤 CIA 본부는 내가 깔아놓은 통신 중계 릴레이를 역추적한 결과를 놓고 다시금 충격을 받고 있을 것이다.
통화를 추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넘칠 만큼 줬다. 나는 그 추적이 주술의 장막 너머에서 끊어지도록 손을 써두었다. 해당 중계지점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그 이상의 추적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CIA로 하여금 「이름 없는 회사」가 어떤 식으로든 주술사 왕과도 거래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해줄 장치였다.
이젠 아프리카로 가서 밀린 일들을 해치울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