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96화 (496/561)

#50. 세계의 변화 (6)

인도네시아를 떠나기 전, 나는 3개소로 분산 확장된 잠수정 제조시설을 시찰하고 근무인력들을 만나 그동안의 성과를 치하해주었다. 시설을 운영·관리하던 조직원들은 회로 개선과 더불어 두툼한 금일봉을 받고 기뻐했다.

최근에 이곳에 배치된 러시아인들도 덩달아 금일봉을 받아들고 얼떨떨해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기술실증용 잠수함 「사르간」의 선체설계 감수에 참여했던 자들, 그리고 과거 소련 시절 특수작전용 잠수정 「피라냐」의 비자성(非磁性) 합금 특성 및 종합적인 피탐지 최소화(Signature Management) 연구를 보조했던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러시아인들은 짧은 시간 동안에도 신형 잠수정 설계에 많은 지식을 보태주었다.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얻을 수 있을 법한 실천적인 지식들이었다.

아직 가설계(假設計) 단계라지만 이전까지 생산한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형 잠수정의 도면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러시아 대통령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인도네시아를 떠난 후에는 야음을 틈타 조립식 아기들을 끌고 필리핀 남쪽 민다나오 섬의 동쪽 바다로 이동했다.

이곳에선 조직 소유의 새로운 배, 「스텔라 피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스텔라 포르투나와 대등한 능력을 보유한 이동식 거점이었다. 정비 순환주기를 고려하면 동급의 함선을 적어도 세 척은 보유해야 유사시 작전능력 공백을 피할 수 있다.

스텔라 포르투나는 기존의 임무, 즉 사라진 키요우타마히코와 아비터-트라운서 융합체를 추적하는 임무에 계속 묶여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임무가 해제된다 하더라도 곧바로 입거검사(Dry docking inspection)를 받아야 해서 다른 활동에 투입할 수가 없었다. 도쿄 사태 이후 주기적으로 선내 방사능 측정을 실시하고는 있으나, 국제적인 활동 자격을 갱신하려면 그 외에도 해야 할 안전검사들이 쌓여있었다. 그 검사들을 받기 전까진 일본을 제외한 주요 국가들의 영해나 중요성이 높은 해협으로 진입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공해상에서의 항해라도 자유로운 것은 키요우타마히코와 아비터-트라운서 융합체를 추적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데 전 세계가 뜻을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표면적으로 드러난 바는 그러했다.

‘참 핑계들은 좋지.’

사실 선체의 방사능 오염이 국제기준치 이하이기만 하다면 도쿄 앞바다의 해전에 참가했던 배들의 항해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스텔라 포르투나의 안전성은 내 눈으로도 확인한 바다.

그럼에도 국제무대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국가들-특히 유럽 국가들-이 온갖 구실을 대어 국제해사기구의 이름으로 갖은 종류의 안전검사를 요구하고 있는 건, 고래와 조립식 아기들을 수색하고 해양각성체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국제연합 해양안전 임무부대」 창설을 두고 또 한 번 주도권 싸움이 진행 중인 까닭이었다.

쉽게 말해, 엄격한 안전검사 요구는 기존에 주도권을 잡고 있던 국가들의 해양투사능력을 일시적으로나마 제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해군 함선들은 물론이고, 해당 국가들의 가장 대표적인 수렵기업들의 주력 함선들까지 모조리 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국 수렵기업들의 해양생태계 및 해운 관련 수주활동을 지원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타국의 경쟁기업들을 주요 시장들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수주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일본에서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주 유엔 일본대사는 몇 번째인지 모를 후나유레-키요우타마히코 대책회의에 참석한 후 공개적인 자리에서 깊은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이것이 범지구적 재난에 대처하는 인류의 자세입니까? 세계는 도쿄를 휩쓸었던 그 거대한 재난의 충격을 벌써 잊어가는 중입니까? 여러분은 지금도 깊은 바다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을 키요우타마히코와 후나유레(아비터-트라운서 융합체에 붙은 별명)가 두렵지도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인류는 여전히 이권 다툼을 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최근 인류의 가장 큰 악몽이 고래도 아니고 후나유레도 아닌 어리석은 인류 그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이 발언이 나왔을 때, 미국의 진보 언론에 속한 한 기자는 냉소를 물고 빠른 어조로 쏘아붙였다. 반문의 탈을 쓴 힐난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가장 어리석은 건 역시 일본이 아닙니까? 누가 그렇게 고래들을 마구 잡아 죽이라고 협박이라도 했습니까? 포경이 아니라 연구라는 구실을 내세워놓고는, 한다는 짓이라곤 배를 갈라 고래가 뭐 먹었나 들여다보는 것밖에 없었으면서 누구를 원망하십니까? 현명한 사람들이 포경을 중단하라고 할 때는 죽어라고 안 들어먹다가, 이제 와서 남들보고 어리석다고 하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지는 않으신지?」

추후 나온 보도에 따르면, 이 기자는 환경미치광이들의 함대 씨 셰퍼드를 예전부터 지지해온 사람이었다. 그렇잖아도 스트레스가 누적되어있던 일본 대사는 곧바로 눈이 돌아가 기자의 멱살을 잡았다.

「당장 사과하시오! 우리 일본과 일본의 국민들에게!」

「제가요? 사과를요? 왜요? 일본의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의 정부입니다. 철지난 포경산업을 국가지원까지 해주며 유지시킨 건 구태의연한 세습정치 카르텔의 힘이었잖습니까? 일본의 ‘결함 있는 민주주의’가 낳은 비극이지요.」

「이, 이……!」

「아, 혹시 당신도 그 카르텔의 일원이신지? 그렇다면 실례했습니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도 몰라뵈었군요. 수은함량이 높은 고래 고기를 즐겨 드셔서 정신도 온전치 못하실 텐데-」

「코노야로!」

사정이 이러하니, 일본에서 세태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확산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는 야스쿠니 선녀에겐 우호적인 선교환경이자, 총리의 상임이사국 구상에 힘을 실어주는 환경이기도 했다. 구 식민지 국가들의 지지를 얻고 상임이사국이 되어 보다 강력한 외교적 영향력을 손에 넣어야 뭐가 되어도 될 것이라는 기대. 이러한 기대 속에서 총리는 재난 이전보다 더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나는 스텔라 피데스에서 중국으로부터 올 살아있는 화물들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고래를 불러들여 친밀도를 관리하고, 그간 진척된 고래언어 연구의 결과를 확인하고자 했다.

이때까지도 스텔라 포르투나 선단에 먹이를 퍼주고 있었던 키요우타마히코는, 탁 트인 해역에서 발산된 내 호출신호를 듣고는 먼 거리를 부리나케 헤엄쳐왔다. 지금 가는 중이니 다른 데 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듯 자기 몫의 호출신호를 주기적으로 노래하면서.

「휘오오오- 휘우↗ 휘우↗ 우우우우-」

소파 채널에 잡힌 노래의 진동수 변화(도플러 효과)와 거리별로 다르게 도달하는 파장별 특성을 분석한 결과, 고래는 대략 3,300킬로미터 바깥에서 내 신호를 듣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 일정과 이동시간을 감안해 미리 녹음해놓은 호출신호를 사용했으므로, 내가 고래를 기다린 시간은 고래가 움직인 거리에 비하면 소소한 수준에 불과했다.

시간낭비를 아예 없앨 수는 없었다. 너무 일찍 신호를 보냈다간 나보다 먼저 도착한 고래를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으니까. 스텔라 피데스는 고래에게 아직 내 「가족」으로 인식되어있지 않아 더더욱 그러했다.

다만 고래가 스텔라 포르투나 선단에 마지막으로 먹이를 가져다준 시간과 주요 어장들의 위치를 고려하여 시차를 최소화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고래가 먹이를 가져다준 시간과 내 출발시간이 일치하지 않아 그만큼 시차도 벌어졌다는 게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타겟, 현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약 5분 남았습니다.”

나는 음파탐지기 콘솔 앞에 앉아있던 보고를 듣고 고래를 마중 나갈 채비를 했다. 이런 내게 경태가 수상한 표정을 짓고 물어왔다.

“술타나와의 만남은 어떠셨습니까?”

“마력회로를 손봐주었으니 쉽게 암살을 당할 일은 없을 거다. 염동장막이 권총탄을 막을 수준까지는 강해질 테니까.”

몸에 덧씌우는 기본적인 염동방어에 강화된 근골이 더해지면, 방탄복을 피해 머리통을 날려버리지 않는 한 어지간한 구경의 총탄으로는 술타나를 저격해서 죽이기가 어렵다. 인도네시아 사업장의 가장 큰 불안요소가 술타나의 죽음인 만큼 신경 써야 할 문제였다.

조립식 아기들을 손에 넣은 후로는 「전율하는 거인」의 원소 구속력 술식을 활용하기가 많이 편해졌다. 형편없이 낮은 효율을 확장회로의 출력으로 만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비롯된 생산력을 온전히 다이아몬드 합성에만 집중시킨다면, 반년 이내로 전 세계의 다이아몬드 업체들을 모조리 파산위기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 향상된 생산력을 부하들의 생존성 강화에 투자했다. 조립식 아기들을 끌고 움직일 때마다 틈틈이 탄소합성소재 장비들을 제작한 것이다.

술타나에게도 세 세트의 수제 방탄 플레이트를 전해주었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원시적인 형태의 탄소나노튜브 혼입(混入) 방탄 플레이트에 비해 월등한 방어력을 보유한 물건이었다. 술타나에게는 보통의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이라고만 귀띔해두었다.

“그걸 여쭤봤던 게 아닌데…….”

“다녀오마.”

나는 꿍얼거리는 경태 녀석을 두고 난간을 넘어 뛰어내렸다.

매번 그랬듯이, 무게가 30톤이 넘고 몸길이는 20미터에 달하는 거대 생명체의 고속기동은 나 같은 대마법사에게도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아래에 심연이 깔린 수중에서 시속 백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접근해오는 고래의 모습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생존본능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충돌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절로 몸을 피하고 싶어지는 압도감이었다.

「흐우우우우- 휘이- 휘이-」

나를 발견한 키요우타마히코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압가속 터널의 흐름을 역전시켜 빠르게 감속한 혹등고래는 내 주변을 빙빙 돌며 온몸으로 기쁨을 드러냈다. 잠시 멈춰서 인사하듯 지느러미를 흔들기도 하고, 춤을 추듯 몸을 뒤집기도 하고, 꼬리를 저어 내게 가벼운 물살을 보내기도 하는 등.

단락 없이 이어지는 들뜬 노래에선 「기쁨」에 해당하는 단어를 식별해낼 수 있었다. 마츠오가 고래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낸 어휘들 중 하나였다.

언어연구엔 특정 고비를 넘기면 지수함수적인 가속이 붙는 구간이 존재했다. 외국인과 소통을 할 때 “이건 무엇이라 부르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지면, 그때부턴 새로운 어휘를 습득하는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래언어 습득의 가장 어려운 난관은 이미 내가 극복해놓았다. 마츠오가 벌써 이백 개 가까운 어휘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슬슬 발화(發話)가 까다로워져서 문제이긴 하지만.’

그동안 나는 고래의 언어를 각각의 단어, 문장마다 별개의 코드로 짜서 습득하는 방식으로 구사해왔다. 내가 가장 먼저 익혔던 고래의 언어, 죽은 자식을 그리는 복수의 노래는 노래 전체가 통째로 하나의 술식 코드였던 것이고. 다채로운 음향으로 이루어진 언어를 있는 그대로 외워서 구사하는 데엔 시간적인 한계가 너무 컸던 까닭이다.

황금기의 눈을 달고 오랫동안 살아온 대마법사에게, 눈에 보이는 음향 패턴을 즉석에서 술식 코드로 저장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고래의 노래에 포함된 ‘아는 단어’를 식별하는 방식도 동일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패턴을 코드로 변환한 후 기존에 만들어놓은 코드와 겹치는 게 있는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편법도 구사해야 할 단어와 문장의 숫자가 늘어나니 써먹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중이었다. 특정 어휘가 격 변화를 보일 경우 각각의 격을 독립적인 음원으로 저장하는 식이니 갈수록 버거워지는 게 당연했다.

결국 내가 고래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고래에게 있어 나는 언제까지고 말이 좀 어눌한 친구로 남게 될 테지.

「끼우웅-」

원을 그리며 맴돌기를 그친 고래가 느릿하게 움직여 커다란 제 주둥이를 내 가까이로 비스듬하게 들이댔다. 사람으로 치면 부서지기 쉬운 것을 조심스럽게 만져보려는 태도와 비슷했다.

두꺼운 피부 너머로 느껴지기나 할까 싶었지만, 나는 손을 내밀어 고래의 입가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고래의 신경계는 이제까지보다 더 선명한 기쁨의 색채로 물들었다.

크기가 좀 많이 크다는 점을 제외하면 하는 짓이 사람을 잘 따르는 애완동물과도 같아, 그 너머에 인간에 버금가는-혹은 필적하거나 능가하는-지성이 있음을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상기해야만 했다.

고래와의 소통엔 마츠오가 만든 기초적인 번역 프로그램이 보탬이 되었다. 프로그램은 수중 마이크를 통해 고래의 노래를 수집하고, 이를 기존에 수집된 데이터와 대조하여 화면에 의미를 띄워주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최소한 청해(聽解)에 한해서는 어휘의 증가에 따른 번거로움을 많이 덜어주는 도구였다.

고래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투명한 내압용기 속 태블릿의 화면에 단어들이 떠올랐다. 개중엔 이런 내용이 반복적으로 포함되었다.

「너」 「만남」 「나」 「행복」

뚝뚝 끊어지는 단어들로 표시되는 건 고래의 노래가 이상한 게 아니라 번역기의 한계였다. 나는 대략 20분 가량 고래와 놀아주다가 이렇게 제안했다.

「나」 「너」 「아픔」 「가족」 「무리」 「아픔 아니다」 「가능하다」 「너」 「아픔」 「가족」 「무리」 「여기」 「부름」 「온다」

같은 노래를 반복하자 “아픈 네 동족들을 치료해줄 테니 이곳으로 데리고 와라.”라는 의도를 이해한 고래는, 새로운 기쁨과 감사함, 그리고 익숙한 부채감을 드러내면서도, 언제나 그러했듯 내가 틀린 문법부터 먼저 교정해준 다음 동족들을 호출하는 노래를 불렀다.

「휘유우우우- 위잇↗ 위이잇↘ 위이이이익-」

이 노래는 첨예한 원뿔형으로 확산되는 지향성 음파로 발산되었다. 전 방위로 퍼트리면 필리핀 동쪽 바다에서 미주 연안까지도 닿을 터이나, 키요우타마히코는 그런 식의 호출이 많은 인간들에게 반복적으로 탐지되면 좋을 게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는 마츠오가 꾸준한 소통과 관찰, 그리고 전 세계의 여러 해양생태연구기관들이 유료로 제공하는 관측 데이터들을 분석함으로써 내린 결론이었다.

후자의 데이터에 대한 접근권한은 단순히 돈만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는데, 개마와 GHSS 컨소시엄은 한국과 일본 2개국 정부가 자격요건을 부여해주었으므로 보통의 수렵기업들은 접근할 수 없는 심층적인 데이터까지도 구매와 열람이 가능했다.

내게 올라온 보고서엔 이런 내용도 적혀있었다.

「키요우타마히코가 지향성 음파로 발산한 정보가 다른 각성체 혹등고래들의 지향성 노래를 통해 릴레이 체인을 이루며 확산되는 정황을 확인하였음. 혹등고래들의 사회에 나름의 보안의식이 형성된 것으로 사료됨.」

나는 키요우타마히코가 부르는 노래를 코드로 복제해두었다. 이 코드가 있으면 다음에는 나 스스로도 고래 환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요우타마히코의 노래가 퍼져나가자, 채 3분도 지나기 전에 가까운 해역에 머물던 각성체 혹등고래들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혹등고래들은 대부분 아픈 곳이 없는데도 나를 보러 온 구경꾼들이었다. 가족이나 같은 무리의 고래들 중에 내게서 치료를 받은 개체가 있겠지 싶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도우미들이기도 하여, 일본 근해에서 그러했듯 주변의 위협을 경계하며 언제든 집단적인 교란행동을 개시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교란행동은 얼마든지 공격행동으로 바뀔 수 있었다.

태평양 일대에 서식하는 혹등고래들은 내가 행하는 치료를 종족 전체의 중요한 행사로 간주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내게 호기심과 호감을 표하는 고래들에게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달라는 뜻을 전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뜻이 전해지자, 고래들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일단 내 뜻대로 움직여주었다. 대충 ‘뭐지? 「아픔 아니다」에 필요한 건가?’라고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고래들의 움직임을 보며 만족했다.

‘쇼를 벌이는 데엔 문제가 없겠군.’

조만간 일본 총리는 주술사 왕을 초청하여 「인간과 고래의 평화를 위한 중재 제의(祭儀)」를 부탁할 예정이었다.

바다 위에서 거행될 그 원시적 제의의 현장에 수백 마리 이상의 각성체 혹등고래들이 몰려들어 분위기를 고조시켜준다면, 그레이스가 일본과 세계에 투사하는 종교적·외교적 영향력은 엄청난 수준으로 강화될 것이었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에 대한 주술사 왕의 지지선언에도 전과는 다른 무게가 실리게 될 테고.

나는 통신 부이(Bouy)와 연결된 선을 타고 중국발 화물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내려온 후로도 두어 시간 가량 더 고래들을 상대해주었다. 이미 수령한 화물들이 어디로 도망가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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