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94화 (494/561)

#50. 세계의 변화 (4)

이 영상은 내가 보고를 통해 축약된 버전으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한국의 방송인 헌터 집단이 야음을 틈타 수중침투를 감행한 장소는 원산 앞바다에 위치한 려도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이 섬엔 수십 호 정도의 작은 마을과 함께 어뢰정 3척을 운용하는 소규모 해군기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방송인들은 이 해군기지를 기습적으로 점령하여 ‘컨텐츠’를 만들어 온 것이다.

기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진 않았다. 전력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모조리 산 채로 제압당했다.

북한군 측에도 각성능력자들이 조금 있긴 했으나 후방에 있는 독립기지이다 보니 수준들이 시원치 않았고, 보유한 장비들도 허술하기 그지없었으며, 경계가 썩 삼엄한 것도 아니었다. 값비싼 장비를 둘렀으며 능력과 숫자 양면에서 우월한 침입자들은 어둠 속의 주둔지를 아주 간단하게 점령해버렸다. 침투와 점령의 전과정이 영상으로 공개되었음은 물론이다.

고립된 섬의 통신수단을 다 파괴한 침입자들이 가장 먼저 한 짓은 북한군의 식량창고를 털어먹은 것이었다.

「잘 봐라, 이 빨갱이 새끼들아! 네놈들 배식은 망했어! 여긴 이제 자유와 자본주의 질서가 지배한다!」

지난 「무장공비 브이로그」 사태 당시 북한 공비들이 이른바 ‘먹방’이라는 것을 찍어 뿌렸으니, 자신들도 같은 먹방을 찍어 되갚아주겠다는 발상이었다. 기왕 하는 김에, 가뜩이나 부족한 북한군의 보급을 축내는 방식으로.

「자, 지금부터 북한 방식으로 옥수수밥…… 아니지, 이쪽 말로 짝강냉이밥이라는 걸 지어먹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리 방법은 새터민 유튜버 분들의 영상을 참고했습니다. 그분들의 영상을 보고 싶으시다면 하단의 링크를 눌러주세요. 그리고 이 영상이 마음에 드신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람 설정까지 부탁드립니다.」

「아잇 시팔! 옥수수 상태가 왜 이래? 딱 봐도 썩었잖아!」

「구웨에엑. 이딴 걸 사람이 어떻게 먹냐? 버려. 다 쏟아버려. 이건 우리 집 뽀삐한테도 못 줄 쓰레기다.」

「에이.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조금 삼켰는데 장염 걸리거나 하진 않겠지?」

「잠깐만. 쟤 저거 표정 좀 봐라. 우리가 버리는 이 쓰레기가 되게 아깝나 봐. 아 존나 웃기네 씨발.」

「야, 우냐? 울어?」

포박당한 북한군들은 처음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기도 하고, 울면서 엄마를 찾기도 하고, 간절한 태도로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러나 유튜버들이 낄낄대는 와중에도 죽이지는 않는다고 거듭 확언하고, 약을 올리거나 조롱을 해댈 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는 않았으므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묶인 북한군들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안정을 되찾았다기보다는 반쯤 탈진한 것에 더 가깝긴 했다. 평소 제대로 먹지 못해 기력이 없던 차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악을 쓰고 발버둥을 쳐댔으니 그야 기진맥진해질 수밖에.

이들의 앞에서 방송인들은 수중 추진기(Diver Propulsion Device)에 매달아온 재료들을 써서 다시 식사를 준비했다. 발버둥을 치느라 허기가 더욱 강렬해진 북한군 포로들은 낯선 음식들의 냄새를 맡으려 꼴깍꼴깍 침을 삼켜댔다. 이는 몇 안 되는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보고 방송인들인 다시금 낄낄거렸다.

「먹고 싶지? 좀 줄까?」

「……되었소.」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면 아주 배 터지게 먹여줄 수도 있어. 어때?」

「거기에 화학처리가 되어있지 말란 법이 없잖소.」

「화학처리? 독을 말하는 건가? 우리가 먹을 음식에 독을 왜 타, 병신아. 빨갱이 사상이 머리에 박혀서 지능이 떨어졌냐?」

「…….」

「그냥 먹고 싶다고 말해, 씨발아. 일단 배를 채워야 기회가 왔을 때 뭘 해볼 수 있을 거 아니냐.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 도망을 친다든가. 응?」

방송인들은 굶주린 북한군들 앞에서 후룩후룩 라면을 먹고 삼겹살을 구웠으며 라면 국물에 즉석밥을 말아먹었다.

「야, 안 되겠다. 저 새끼들 입에 초코파이 하나씩 쑤셔 박아.」

한 방송인의 말에 따라 북한군은 저마다 초코파이를 하나씩 물게 되었다. 처음엔 강제였으되, 일단 혀에 단맛이 닿자 하나같이 저항의지가 사라지는 표정들이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물고만 있던 보위부원마저, 결국 주르륵 흘러나오는 침에 목덜미까지 붉어지며 찡그린 얼굴로 열심히 초코파이를 씹어 삼켰다.

「빨갱이 새끼들 귀여운 거 보소. 카와이이-」

「거 빨갱이 양반들, 기왕 먹은 거 하나씩 더 먹지 그래? 한 개 먹으나 두 개 먹으나 큰 차이 없잖아?」

결국 북한군들은 인내심이 바닥났다. 또한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보일 때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기도 하여,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적개심은 다 쏟아져 되담지 못할 물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북한군 포로들은 한두 사람씩 순번을 정해 손의 결박을 풀고 라면이나 삼겹살 등 다른 먹거리들까지 받아먹기에 이르렀다. 영상 속의 이 과정은 일시적인 빠른 재생으로 편집되었다.

이어서 화면은 방송인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북한군 중위를 클로즈업했다.

「동무들은 대체 뭘 하러 여기에 온 거요? 아무리 봐도 파괴공작을 하러 온 사람들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뭘 하긴. 너네가 우리한테 한 거랑 똑같은 걸 하러 왔지.」

「우리가 뭘 했다는 말이오?」

「모르냐? 너네 인민군 특작조들이 우리 쪽으로 침투해서 밥 먹고 영상 찍어 갔잖아. 아니, 말로 하기보다는 그냥 보여주는 쪽이 빠르겠구나. 직접 봐라.」

방송인들이 스마트폰에 저장되어있던 무장공비들의 브이로그 영상들을 보여주자, 사로잡힌 북한군들은 어이가 없는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숨들을 내쉬었다. 그러나 개중에 판단이 빠른 몇몇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한 것이다. 침입자 방송인들은 그런 모습들을 보고 다시 한 번 낄낄거렸다.

「그래. 우리가 돌아가서 여기서 찍은 영상을 공개하면 느그들은 전부 처벌받고 가족들은 다 동요계층 되는 거야. 어쩌면 아오지로 갈지도 모르지.」

이제 창백함은 북한군 포로들 모두의 것이 되었다. 이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깊은 밤의 침입자들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 어쩌라고. 애초에 니들이 먼저 넘어오지를 말았어야지. 따지고 싶으면 느그 경애하는 장군님한테 가서 따져.」

흐느끼는 포로들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던 방송인들은 이내 태도를 바꾸었다.

「얘들아, 봐봐. 이 형들이 그렇게 막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그런 사람들이 아니거든? 우리랑 같이 밥을 먹었던 애들이 아오지로 끌려가고 그러면 기분이 몹시 안 좋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제안하는 건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가 영상을 공개하기 전에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오는 건 어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말이 왜 안 돼? 이거를 너네한테 주고 갈 건데.」

방송인들이 꺼내어 흔든 건 빳빳한 달러 뭉치들이었다. 달러는 북한 장마당에서 가장 신용도가 높은 화폐다. 눈앞에서 달러 뭉치가 오락가락하자 포로들은 울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합쳐서 10만 달러야.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만 너네가 가족들을 설득하기엔 충분할걸? 그렇다고 또 이거 갈라먹겠다고 서로 싸우진 말고. 그러면 너네 다 죽는 거야.」

「어차피 자유대한의 품으로 귀순하면 한 사람당 4만에서 5만 달러 정도 정착지원금을 주니까 이깟 10만 달러에 너무 욕심 내지 말라구, 인민군 동무들. 그리고 특수공인능력 보유자…… 아, 여기서는 중국식으로 이능보유자라고 하던가? 아무튼 특별한 힘이 있는 사람은 능력에 비례해서 추가 정착지원금이 나오고, 또 여기 어뢰정 있는 거 끌고 가면 그것도 따로 보상해주고 그래. 하다못해 소총 하나만 들고 와도 거의 1만 달러를 더 준다니까? 남조선이 돈이 아주 많은 나라예요.」

「우리는 30일 후에 영상을 공개할 거야. 너희들한테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지.」

「솔직히 너네도 느그 공화국보다 남조선이 더 잘 산다는 거 알잖아? 중국 유학 갔다 온 사람들도 이야기해줄 거고, 보따리 장사 하는 사람들도 보고 듣는 게 있을 거고, 사람들이 몰래몰래 우리 남한 방송 보기도 한다면서?」

북한이 남한과의 군사적 대치국면을 강화하는 데엔 각성능력자들의 등장에 따라 사회 전반의 통제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탓도 있었다. 밀무역 종사자들의 숫자와 활동범위가 폭발적으로 늘고, 암시장에 유통되는 불온 영상물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하다 보니 인민들의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도 그만큼 통제 불능으로 늘어나버린 것이다.

인민들의 불온한 움직임과 탈북자가 급증한 건 덤이었다. 국경경비를 아무리 강화해도 초인 브로커들의 활동을 막을 방법 따윈 없었다.

결국 정권 유지를 위해 북한은 외부의 위협을 키워놓고 봐야 했다.

「대포쟁이들 같으니. 그거 다 거짓 선전이잖소. 우리 공화국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인민들의 생활이 가장 우수한 나라요.」

북한군 부대라면 어디에나 있는 정치지도원의 힘없는 반박이었다. 침입자 헌터들은 그 앞에서 미친놈들처럼 깐족거렸다. 평소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몸에 익혀온 태도들인 것 같았다.

「응 아니야- 너네 엄마한테 가서 물어봐- 남조선이 더 잘살아- 너네 공화국은 거지 나라야-」

「느그 장군님 허접- 지는 매일매일 진수성찬 처먹으면서 인민들한테는 그 흔한 이팝도 못 먹여주는 허접-」

정치지도원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남반부 사람들은 다 동무들처럼 49호 환자들 같소?」

49호 환자는 정신병자라는 뜻이었다.

침입자 헌터들은 동이 트기 전에 섬에서 철수했다.

「자. 약속했던 달러는 여기 두고 간다. 무전기도 같이 두고 갈 테니까, 30일 안으로 꼭 귀순하라고. 남쪽으로 내려올 필요도 없어. 동쪽 공해상으로 쭉 나오기만 하면 이 형님들이 일하는 회사의 배랑 접선할 수 있을 거야.」

「너네 무기는 저 남쪽 곶에 있는 경계초소 근처에 숨겨놨거든? 우리가 가고 나면 좀 이따 나와서 회수하라고.」

「미안하지만 손발은 다시 묶는다. 딱 한 사람만 손을 앞으로 묶고 매듭을 느슨하게 해놓고서 갈게. 그래야 피차 불미스러운 사고가 안 나지 않겠어?」

「귀순한 다음엔 꼭 한 번 부산으로 와라! 오는 놈들은 내가 풀코스로 대접해준다!」

이 사건은 결국 려도 주둔 북한군 부대의 집단 귀순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최초 사건 발생 후 27일째의 일이었다. 침입자 방송인들이 촬영한 영상 역시 예정보다 사흘 앞당겨 공개되었으며, 그 결과 한반도의 남북은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물론 뒤집어진 정도는 북한이 더 심했다.

격오지에 배치된 2선급 이하의 인력들이라고는 하나, 한 부대가 보유 장비를 다 들고서 단체로 귀순해버린 사상 초유의 사태는 북한 정부에게 굉장한 충격을 선사했다.

그 충격의 정도를 짐작게 해주는 것이 바로 군사도발의 빈도와 강도였다.

그날 이후 북한은 하루도 빠짐없이 군사도발을 이어오고 있었다. 조선중앙TV가 “서울불바다”와 “주체의 핵탄”, “십만 이능전사들의 총폭탄 돌격”을 언급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에 대한 포격은 이젠 일상이 되었다고 봐도 좋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하루에도 아침저녁으로 다른 도발이 이루어지는 경우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남한 정부를 더욱 골치 아프게 만드는 건 포격 도발에 앞서 행해지는 비무장지대 내 연날리기 도발이었다.

분계선 이북 비무장지대에서 레이더 교란수단을 달고 날아오르는 연들은 남한측 대(對)포병레이더의 감시를 방해했다.

이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를 비롯한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먼저 사용하여 효용을 입증한 방법이었다.

과거의 이스라엘은, 가성비야 어쨌든, 가자지구로부터 날아드는 수제 설탕연료 로켓(까삼 로켓)들을 90% 이상 요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루미늄 박막 조각들과 반사판을 단 연들이 레이더 관측을 방해함에 따라, 요격률은 70% 선까지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하마스는 시간이 갈수록 더 효과적인 교란 노하우를 습득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 노하우가 고스란히 북한으로 유입되고 있는 지금, 남한은 예전과 같은 원점타격능력을 자랑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실시간으로 급변을 거듭하는 안보환경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여론을 많이 바꿔놓았다. 좋으나 싫으나 일본을 살려놓고, 일본을 밀어주고,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 수밖에 없는 조건인 것이다.

‘이게 정말로 성공하나?’

그레이스에게 처음 말을 꺼낼 때만 하더라도 되면 좋고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다 정도로 생각했던 구상인데, 이대로 가면 정말로 영국을 증오하는 상임이사국이 조만간 수중에 들어올 것 같았다.

그와 별개로, 한반도에서 급변사태가 터질 확률이 올라간 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북한 지도부가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전쟁을 결심하진 않겠으나, 그것만 믿고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조직 본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원탁의 공격에 대비한 기능분산 및 기능이전 절차가 완비되어 있었다.

다만 남한 전역이 위험지대가 되는 경우 조직원들의 가족들과 준 조직원 대우의 직원들의 관리계획엔 보완할 구석이 있었다. 조직의 활동영역이 확장되고 자금흐름도 큰 폭으로 향상된 만큼, 그에 비례하는 수준의 새 계획을 갖춰두는 편이 유익할 터였다.

나는 뉴스를 보거나 마법사로서의 명상과 술식 궁구를 하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실신한 후 줄곧 죽은 듯이 뻗어있던 술타나는 새벽 세 시 반을 조금 넘겨서 정신을 차렸다. 스스로 깬 것은 아니고,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그녀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린 탓이었다.

부스스 일어나 알람을 끈 술타나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멍한 눈으로 보다가, 문틈 아래로 들어오는 거실의 불빛을 확인하더니, 자신이 벗어두었던 주바 루마(나이트가운)를 걸치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한 후 내가 있는 거실로 나왔다.

술타나가 걸친 옷 자체는 유럽에서 들어온 복식을 따랐으되, 이 지역의 전통 원단을 사용했기에 서구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날개를 펼친 두 마리 거위의 문양들이 TV의 불빛을 반사하며 자잘한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알람이 일찍 울리는군요.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나십니까?”

“……그러하다. 새벽기도를 올리기 전에 의식까지 맑게 해둬야 하니까. 그러는 그대야말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있는가? 그대는 무슬림도 아니면서.”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런가.”

TV 앞으로 걸어온 술타나는 나와의 사이에 한 자리를 비워두고 소파에 착석했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5분이 지나도록 미동도 않고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만 있는 술타나에게 물었다.

“기도를 하려면 슬슬 몸을 정결하게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성행위를 한 다음이니 평범한 재계(齋戒/우두. 기도를 위한 씻기)로는 부족할 텐데요.”

“그래야지.”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으신지?”

“고민……이라기보다는 의문이 있다.”

“무엇입니까?”

“음…… 그것이……”

뜸을 들이던 술타나가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여. 남녀 간의 교합이라는 게 원래 그러한 느낌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원래 그렇게…… 뭐라고 할까…… 정신이 없는……? 것이냐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교합을 하신 게 언제입니까?”

“열두 살 때였지.”

“그렇다면 잘 모르실 만도 하군요. 원래 좋은 의미로 정신이 없는 게 정상입니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상대와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그런가?”

“예. 물론 당신의 주변엔 예외적인 경우들이 흔하겠지요.”

“흠, 그렇단 말이지…….”

술타나는 손끝으로 턱을 지분거리다가 납득했다는 듯이 끄덕였다.

“알았다. 주변으로부터 많이 듣고, 또 이미 경험해봐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건 여의 교만이었던 모양이구나. 각오했던 것과 지나치게 달라 혹시 여에게 문제가 있는가 싶었는데, 그게 정상이라니 더 신경 쓸 이유는 없겠군.”

각오라는 단어를 말할 때의 술타나에게서는 잠깐이나마 칙칙한 감정의 색채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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